"츠나구"가 나쁘지 않았어서 이 작가의 작품을 더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선택했는데, 응, 이제 다른 거 안 읽어봐도 괜찮을 듯.
일본 전래동요와 사건의 기묘한 결합, 캐릭터들의 묘사가 좋았다. 다만, 사건 초반에 이미- 범인도, 상황도 눈치채버렸다는 건 너무 단순한 구성이었다는 거겠지. 그럼에도, 읽는 내내 재미있었으니 상관 없다.
아마, 작가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좋아해서 울리고 싶지 않은 존재가 필요하대. 네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을 함부로 내던지지 않고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이, 이 세상 어딘가에 있는 거야. 그러니까 불행해지지 마."
많은 상징과 사유가 담겼지만 구성과 인물은 명쾌하게 읽힌다.
'과학적 사유를 시적 상상력으로 그려내는 독창적인 재능'이란 설명에 전적으로 동의.
다른 작품도 읽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이런 방식이라면 SF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
다만, 모든 것이 파괴된 후에야 새로운 세계가 창조된다는 세계관은 역시 좀, 불편하다.
"고독한 시월의 밤"만 읽었을 때는 이 작가 SF 작가라는 거, 안 믿었는데 확실히 SF 작가 맞는 듯.
하지만, 인용구는 죄다 그리스 신화.
문명, 고향, 읽어버린 것, 지켜야할 것,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다.
간만에 읽은 장르문학 수작!
내가 읽은 시마다 소지의 세 번째 작품.
"점성술 살인사건"은 김전일에서 이미 본 트릭이라 반쯤 심드렁한 기분으로 읽었더랬고, "기발한 발상 하늘을 움직이다"는 추리소설과 사회소설 어중간한 위치에 놓여진 작품이라 별로 즐겁지 않았다.
헌데, 이 작품은 확실히 '추리소설의 정석'을 읽은 기분이어서 독서 후 만족감 면에서는 가장 좋았다고 해야할까.
원작이 쓰여진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요즘 나오는 추리물이나 형사물처럼 자극적인 문장 배치라던가, 날아갈듯한 가독력을 자랑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탄탄한 구성과 문장, 공들인 캐릭터가 읽는 재미를 더한다.
덧붙이자면, 2년 전 다녀온 훗카이도를 떠올리게 하는 묘사들도 즐거웠고.
큰 인형도 있고 작은 인형도 있지만, 한결같이 때를 타 젊은 얼굴인 채로 나이를 먹어 지금은 이미 빈사 상태로 보인다, 얼굴이 더러워지고 도료가 벗겨진 인형은, 어딘가 광기를 숨기고 있는 듯이 느껴진다. 서거나 혹은 각각의 의자에 앉아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다. 이상하게 평온해서 마치 악몽에 나오는 정신과 병동 대합실 같다.
오랜 시간 동안 군살이 빠져, 그들 내면의 광기를 지금은 이미 확실하게 노출시키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 광기가 무엇보다 좀먹고 있는 것은 연지가 지워진 입술에 뜬 미소와 비슷한 것이다. 지금 그것은 이미 미소 따위가 아니라, 인형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본질 혹은 생래의 업이 배어 나온 증거로 변했다. 미소의 본질이란 이런것인가 하고 보는 자를 일순 꼼짝 못하게 한다. 부식腐食, 그렇다, 그것은 실로 그렇게 부르는 것이 합당하다, 그들 애완용의 존재가 띄우는 미소의 변질만큼 그런 단어가 어울리는 것은 없다.
구원하기 어려운 원념으로 충만해 있다. 그들은 인간의 변덕으로 태어나 천 년이 지나도 죽음이 허락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분명 우리의 입술도 저런 광기를 띨 것이 틀림없다. 언제나 복수의 때를 노리는 원념이 깊어진 광기를. - 252-253쪽
이로써 '말로센 말로센'을 제외한 말로센 시리즈 완독.
"기병총 요정"이 말로센 시리즈의 최고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구성과 캐릭터를 비교했을 때, 이쪽이 좀 더 취향이다. 아마도 '노화'보다는 '정체성'에 좀 더 공감이 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페낙이 뱅자맹의 입을 빌어 풀어내는 입담은 여전히 유쾌하다. 번역은 나중에 나오는 작품일 수록 질이 높아지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고(심지어 주석다는 것들까지 마음에 들다니!) 덕분에 가독성이 좋았다.
사람 많은 곳에서 읽다 어찌나 웃어댔는지 민망할 지경.
서로가 서로를 대신하게 되는 결과를 보며, 다시 한 번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만드는, 정말, 사랑할 수밖에 없는 작가이다.
마이너한 책은 퀄리티에 큰 기대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국내에 드물게 번역된 세르비아 작가라는 것, 나쁘지 않은 출판사 작품이라는 것,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싫어할 수 없는 소재에 동유럽권에서 이미 작품성을 인정 받은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너무 기대치가 높았던 모양이다.
다만, 간과하고 있었던 거다. 세르비아 어를 직접 번역해줄 리 없다는 것과 메이저 번역가가 붙을리 없다는 것을.
뭐, 번역은 논외로 치고-(취향의 문제도 있을테니.) 작품만 놓고 보자면, 동유럽 감성이 묻어나는 환상문학 단편집인 건 확실하다. 하지만 이 작품집 만으로 보르헤스 계승자,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다.
작품 전반에 흐르는 상징과 은유는 무겁지 않고 유쾌하다. 총 일곱 종류의 도서관이 나오는데, 마지막 장에서 앞의 여섯 장을 묶으려는 의도는 너무 눈에 보여서 아쉬웠다. 스스로 선택한 도서관은 마지막 하나라는 의미심장함까지 가려질 정도로. 책을 먹는 것 역시, 유명한 동화마저 있으니 새롭지 않은 소화 방식이다.
표지와 함께 중간중간 삽입된 일러스트는 꽤 작품과 잘 어울리고 있으며, 흥미로웠다. 일러스트는 국내 작가던데- 북폴리오에서 꽤나 공들인 건 맞는 모양이다.
머리 좋고 말발 좋은 작가가 쓴 소설, 표제작을 읽자마자 든 생각이다.
재미있다. 유쾌하다. 이 작가의 비틀기나, 고전에서 가져다 쓴 소재들은 잘 버무려져 있다.
편편이 모두 짜임새가 있고, 인물에 생동감이 있다. 전개에 흡입력도 있다.
뭐, 머리로 읽는 소설과 가슴으로 읽는 소설이 있다고 친다면, 이 책은 전자겠지. 그래도 일단, 재미 있고 완성도 높으니 된 거다.
작가의 장편을 읽어야 겠다.
인간들의 배신은 큰 충격이었다. 충격도 충격이지만 왜 그들이 현세의 삶을 죄악시 하며 천국 아파트 분양권 한 장에 목을 매는지 신들은 납득하기 어려웠다. 모델하우스도 본 적 없으면서(이 부분에서 디오니소스는 인간들은 전부 마조히스트가 틀림없다며 자신이 사디즘과 마조히즘 경험담을 장시간에 걸쳐 들려줬으나, 논점에서 벗어나는 관계로 생략한다). - 176쪽
인간들이 사냥한 것은 마녀가 아니라 '마녀라는 환상'이었다는 메데이아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사태를 냉정히 파악할 혜안이 있었다면 이미 신들의 구조 조정 사태에서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는 결과였다. 디오니소스의 말처럼 타고난 마조히즘적 성향 때문인지, 인간들은 작은 일에도 신경과민에 가까운 죄책감을 느꼈고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책감을 대신 짊어질, 마조히즘의 억압을 극단의 사디즘으로 해소시켜줄 희생양이 필요했다. 어느 모로 보나 자신들이 울타리 밖으로 몰아낸 마녀라는 존재가 제격이었다. - 183쪽
이름은 정체성의 표식인 동시에 타인과의 경계선이다. 익명의 존재, 경계선이 불투명한 존재는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 호기심과 함께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그것에 다가가 만져보고 냄새 맡고 귀를 기울여보는 게 싫다면, 이름을 붙여 창고에 던져버리면 그만이다. - 242-243쪽
지인에게 책을 넘기면서 읽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후다닥 읽어내린 책. 역시, 받은 책은 자꾸 잊고 지내게 된다.
베를린을 배경으로 한 단편집.
순간순간, 찌르고 들어오는 문장들에 호흡을 멈추며 읽어내렸다.
울지 마. 사는 거? 그건 견디는 거야...... 언젠가 그 여자가 울고 있을 때 깊은 밤, 가게문을 닫고 포장마차에 앉아 섬 언니는 말했었다. 견디는 거라구, 그냥 오늘을 사는 거야. 그렇게 오늘을 살고 그렇게 내일이 오면, 오늘이 된 내일을 살고...... - 100쪽
아마 그도 서울 어디선가 그를 만나면 그녀를 떠올려야 예의라고 믿고 있는 친구들에게 진땀을 흘리며 혹은 아주 귀찮은 어투로 이 별리를 설명하고 있으리라. 이별보다 이별 후의 이 긴 예식이 더 힘든 법이었다. 그러니 이제 그녀를 봐도 아무도 그의 이름을 꺼내지 않게 되면 그때 긴 이별은 완성되어질 것이었다.
(...)
기억은 있는데 감정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기억만 남고 박제된 채 기억만 남고, 끝내는 그 기억도 사라지면 그땐 다른 이들에게 자기의 생의 시원을 물어보러 이렇게 먼 길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생은 자신의 것일까? -170쪽
한국 엄마들의 전형, 먹을 것을 먹임으로써 사랑을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랜 시간 결핍이 그들의 슬픔이었던 민족의 유전자에 새겨진 사랑법이리라. -224쪽
초여름부터 붙잡고 있던 소설을 가을이 끝날 무렵에야 다 읽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페이지가 쉬이 넘어가질 않았다.
오스트레일리아판 '앵무새 죽이기'라고 해야할까. 곳곳에 작가의 오마주가 보인다.
근친 강간으로 정점을 찍는 유색 인종에 대한 배타의식. 배경은 1960년대지만 현대라고 뭐가 다를까.
작가가 하고 싶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이 아니었을까.
어쩌면 용기가 있고 없고는 중요한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 우리가 걷는 걸음걸이에 얼마큼의 무게가 실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이제야 이해가 간다. 용기란 그런 것이다. 브루스 웨인도 여전히 두려워하지만 문제를 해결한다. 왜냐하면 그는 밀어먹을 배트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란 결국 정직함이다. 그것만이 비결이다. -452쪽
'금이 간 거울'에서 느꼈던 신선함은 없다. 단편이 아닌 장편인 것도 이유겠지만 판타지로 넘어가는 부분이 매끄럽지 않아 힘을 잃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단편이 갖고 있는 쫀쫀한 힘을 잃은 건 아쉽지만, 확실히 작품 분위기는 동화보다는 청소년 소설에 잘 어울리는 듯 하다.
다만, 2등이 사라진다는 것, 더 미워하는 쪽이 실패하는 것에 담긴 상징을 읽어내는 것에 작가는 그다지 친절하지 않으며 논리적이지 않다. 그래서 조금, 김빠지는 장편이 되었다.
인물을 꽤 섬세하게 그려냈으나, 가끔 뜬금없는 인상을 줄 때가 있다.
뭐, 그래도 이만하면 나쁘지 않다, 정도인가.
중반까지 꽤나 흥미진진했던 이야기. 절반 가까이 되는 분량을 앨리스가 현재 처한 상황을 어떻게 느끼는지, 어떻게 꼬아가는지 꽤 섬세하게 풀어내고 있다. 아주 엉망이지도, 절망적이지도 않지만 삶이 꽤나 퍽퍽한 10대 여자아이의 심리를 잘 그려냈다.
갈등이 고조된 상황에서 앨리스가 7년 전 과거로 가게 되는데, 일곱살의 몸으로 고군분투하고 제대로된 현실과 마주하게 만드는 것까지도 좋았으나,
다시 현실로 돌아왔을 때, 현실이 이전과는 다른 현실이 되었다는 것, 이전 현실이 아예 근본적인 문제를 안고 있었다는 것, 결국은 '착하게 군 앨리스' 여야지만 좀 더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는 교훈적인 결말에 힘이 빠졌다.
물론, 가족을 반드시 끌어안아야 한다는 결말이 아니라는 점은 좋았으나, 결말에서 작가가 역량 부족을 그대로 드러낸 게 아닌가 싶다.
읽은 청소년 소설 중, 가장 입말이 자연스러웠던 작품, 그러면서도 작가의 어휘는 요즘스럽지 않지만 어색하지도 않다. 인물, 구성, 문장이 고르게 힘이 있다.
다만, 이야기의 마무리가 급히 달린 듯해 아쉽다. 계속 궁금증을 일으키는 전개에는 박수를.
좀 더 찬찬히, 깊이 들어가도 좋을 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