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의 길
함민복
길 위에 길이 가득 고여 있다
지나간 사람들이
놓고 간 길들
그 길에 젖어 또 한 사람 지나간다
길도 길을 간다
제자리걸음으로
제 몸길을 통해
더 넓고 탄탄한 길로
길이 아니었던 시절로
가다가
문득
터널 귓바퀴 세우고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의 소리 듣는다
- <말랑말랑한 힘> / 문학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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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길에 나섰드랬습니다. 겨자색 들판과 약간은 흐릿한 회청색 하늘 아래 길은 제자리걸음을 걷는 양, 우리를 태운 버스는 가는 듯 마는 듯 굴러갔습니다. 길 위에 길이 어찌나 빠르게 겹쳐오는지 미처 길을 느낄 새가 없었나 봅니다.
내려서 발로 길을 밟았습니다. 햇살에 눈이 부셨지만 똑바로 올려다 보았습니다. 능선처럼 누운 무덤들은 천오백년을 침묵으로 버티고 있고 우리들은 제멋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았습니다. 진흥왕 척경비보다 퇴천3층석탑이 눈을 잡아 끌었고 석탑의 깨어진 귀퉁이 돌들을 보며 탑을 한바퀴 돌았습니다. 견고해 보이는 석탑은 앞과 뒤가 다른 모양새를 띄지 않았고 3층 처마끝 부연으로 치켜올라간 맵시가 멋스러웠습니다.
며느리서까래, 부연을 부여잡고 나는 오래오래 전 며느리와 시아버지의 일화를 그려봅니다. 누가 지은 이야기인지 알 수 없지만 서까래의 1/3 가량의 길이로 덧된 부연의 기능과 아름다움이 재치있는 이야기와 어울립니다. 며느리의 지혜로 날아갈 듯한 곡선을 완성한 늙고 완고한 시아비의 주름살을 생각해보다 그만 일행과 조금 멀어져 있었습니다.
길 위에 서면 시간의 길을 생각하게 됩니다. 시인이 말하길 길이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다던 길과는 달리, 시간은 시간이 아니었던 시절은 없지 싶습니다. 면면히 이어지고 겹쳐지고 빠르게 달아나고 밀어낸 시간들이 길 위에 나란히 있습니다. 가다가 터널을 만나면 내가 가고 있는 시간이란 길의 소리에 귀기울여 봐야겠습니다.
나도 시간도 하나의 길이란 생각이 드는 아침입니다. 내 안의 터널을 만나면 잠깐동안 막막하지만 감각은 다시 몇배로 살아나고 집중력은 높아지고, 오로지 나아갈 방향은 빛이 비쳐들어오는 출구밖에 없다는 절박감이 그곳을 향해 질주하게 만드는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