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유럽 최고의지성인이자 세계적인 극작가인 브레히트도 '사진은 거짓말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브레히트 옆에는 늘 가위와 풀이 있었다. 나치를 피해 도망다니던 그의 유일한 즐거움은 거짓 사진을 오려 사행시를 쓰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보게 형제들, 지금 무얼 만들고 있나? - 장갑차" "그럼 겹겹이 쌓여있는 이 철판으론?" "철갑을 뚫는 탄환을 만들지."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왜 만들지? - 먹고 살려고." -<장갑차와 강철탈환 사진 앞에서>
나의 마지막 바람은 그가 뒈지는 것. 너희도 들었겠지. 그가 철천지원수라는 걸. 그건 사실이야. 난 그런 말을 해도 돼. 내가 지금 있는 곳을 아는 건 오직 르와르 강 한마리 귀뚜라미뿐이거든. - <무명용사의 묘비 사진 앞에서>
이렇게 브레히트는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문과 잡지의 거짓 사진을 오려 그 옆에 진실한 사행시를 썼다. 그 사진시가 유명한 <포토 에피그람 Fotoepigram>, 사진의 또 다른 진실을 밝힌 브레히트의 사진시다. 영화 <스토커>에도 역시 브레히트의 목소리가 들린다. 사진은 과연 행복의 증거인가? -53-55쪽
메이킹 포토의 구성,해체,재구성은 실재가 아닌 가상을 전제로 한다. 연출된 가상의 이미지이지만 그렇다고 삶의 리얼리티까지 배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더 적극적,전략적으로 드러낸다. 1980년대 포스트모더니즘 사진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찍지 않고 구성,해체,재조립하려 한 것은 사라진 실재, 사라진 리얼리티 때문이다.-72쪽
삶과 죽음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보는 까닭은, 우연적인 삶 속에서 인간이 어떻게 죽음을 느끼는지, 그럼에도 그때그때 존재의 자국이 어떻게 남는지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웃음과 미소는 그 자국 중의 하나다. 영화 속에서 웃음은 존재와 부재의 중요한 상징으로 자리한다. 웃음의 존재는 죽음 이후를 겨냥한다. 망자의 생전에 웃는 모습은 산 자에게 그리움의 표상이다.-141쪽
그렇다면 왜 초상일까? 사진의 등장으로 만들어진 초상의 새로운 형태form가 바로 카메라를 마주보는 正面性이다. 초상의 정면성은 세월이 흐르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그것은 전면을 통해 나타나는 초상의 정체성이다. 이를 우리는 '파사드facade'라고 부른다. 파사드는 건축에서 쓰는 말로 건축의 중심, '퍼스펙티브perspective'의 중심을 의미한다. 자주 하는 말로 '전면에 내세운다'고 할 때 그 전면성이 바로 파사드다.-145쪽
파사드는 전면을 통해 드러나는 대상의 특징이자 성격이다. 사진에서 파사드라는 말을 쓴다면 전면을 통해서 대상의 정체성identity을 드러내는 초상사진일 경우일 것읻. 그렇다면 사진의 정면성과 전면성에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는데, 정면성이 물리적인 방향이라면 전면성은 심리적인 형상이며, 정면성이 모델과 카메라의 관계라면, 전면성은 모델과 관객과의 관계다.
사진 발명 직후에는 긴 노출과 초점 때문에 카메라를 응시할 수밖에 없었고, 단체촬영의 경우 한정된 프레임 때문에 서로 몸을 밀착해 사진가를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면성'을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초상사진의 정체성은 정면성보다는 오히려 전면성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특히 가족사진에 두드러진다.-146쪽
뒷모습은 무심한 저쪽, '한 판의 공간, 한 자락의 옷, 하나의 전체로서' 숨죽인 모습이지만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뒷모습은 확실히 모든 것이 드러나는 앞모습과 달리, 늘 존재론적 불안감을 내포하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뒷모습은 우리 삶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 말해질 수 있음과 말해질 수 없음의 어떤 간극, 또 그 간극만큼의 거리를 알게 한다.-209쪽
디지털 시대를 맞아 사진은 재현의 위기와 마주쳤다. 더 이상 사람들은 사진을 현실을 재현하는 가장 유효한 도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뮬라크르simulacre 시대를 맞아 이제 진실의 대명사에서 탈각되고, 시대의 증언자, 시대의 목격자로서의 권능도 상실했다. 시뮬라크르 세계에서 '현실의 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을 참이라고 확신하지 않으며, 그것들이 가짜라고 해서 회의하지도 않는다.
사진의 죽음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사진이 참이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과 현실이 참이어야 하는데, 이미 우리 세계는 모조물로 채워진 가짜다. 우리 삶이, 현실이 점점 모조의 세계를 연출하는 이상 사진의 정체성을 잃고 만다. 테크놀로지의 상징인 사진이 테크놀로지에 의해 정체성을 의심받는 상황이 된 것이다. -220쪽
이렇듯 사진은 기억을 넘어서 현재화된다. 사진은 그 점에서 롤랑바르크가 말했듯 어떤 '푼크툼(punctum, 찌름)'이다. 푼크툼은 말 그대로 타이어가 미세한 바늘 촉에 찔려 터지는 것처럼, 사진의 작은 세부, 아주 작은 이미지가 보는 이에게 마치 화살처럼 날아와 남기는 상처다. 그러므로 사진은 존재의 자국, 흔적, 상처이며, 궁극적으로는 죽음을 기억하는 메멘토 모리다.-222쪽
수전 손택은 <사진에 관하여>에서 "카메라도 총이나 자동차처럼 중독되고, 유희적이며, 황홀감을 유발시키는 기계fantasy-machine"라고 말하며, '사진적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진적 폭력은 사진을 찍는 행위가 단순한 수동적인 관찰을 뛰어넘어, 관음증 환자처럼 은밀하고 노골적으로 들여다보는 시각적 잔인성에서 온다. ...... 이미지 사냥꾼인 카메라 그리고 세계의 수집가인 사진 앞에서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것이 윤리성이라고 수전 손택은 말한다. 그녀는 "세계에 대하여 사진이 가지고 있는 지식은 우리의 인식을 자극시킬 수는 있지만, 궁극적으로 사진은 주체적으로 윤리적 혹은 정치적인 지식을 공급해주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238 쪽
영어의 이미지image는 라틴어 이마고imago에서 온 '유령'이라는 뜻의 단어다. 또 형상이란 뜻의 영어 피규어figure도 귀신이란 라틴어 피구라figura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진이 세상에 처음 나왔을 때처럼 거울이미지는 유령, 귀신, 마법의 영역으로 인식된다. -254쪽
사진 보는 법을 배웠다는 것은 거울 속의 세계를 알았다는 뜻이다. 이는 또 세상을 거울처럼 좌우대칭으로 본다는 뜻이다. ...... 거울이 진실이라는 것은 착각이다. 거울이 완벽한 반영이라는 것도 허구일 뿐이다. 거울 속의 이미지는 한 순간 거울 밖의 존재를 배반할 수 있다. 영화는 바로 이것, 거울 속에 또 하나의 독자적 세계가 있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속지 마시길, 거울은 닮은꼴일 뿐이니까.-25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