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와 벌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4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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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롤로그 : 다시 읽은 소설 『죄와 벌』

오래전 읽은 소설을 다시 집어 든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최근 내 주변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결국 사람들 간의 문제인데 이런저런 일들을 지켜보면서 '인간은 어디까지 악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인간의 악함의 크기와 종류는 과히 천차만별인 것 같다.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악랄하고 교만하고 싹수없을 수 있겠다. 하지만 정도라는 게 있지 않은가. 이성(理性)이 없고, 예의가 없고, 절제가 없다. 제발 적당히들 했으면 좋겠다.

이런 씁쓸함은 비단 타인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나 자신 또한 역시 추악하다는 진실을 자주 직시한다. 신은 인간의 마음에 양심이란 씨앗을 심어놓았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은 양심을 '벌레'와 '천명의 증인'으로 비유했다. 총신대학교 문병호 교수는 전자를 '내부에서 끊임없이 갉아먹는 고통'으로, 후자는 '모든 변명을 반박하는 압도적 확증'으로 주석했다. 서글픈 건 세상에는 (나를 포함해) 양심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이 불편한 진실을 극적이고 적나라하게 마주한 순간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이 다시 내 손에 들어왔다.

⑴ 죄(罪), 그리고 인물

죄는 무엇인가. 국어사전을 펼치니 '잘못이나 허물로 인하여 벌을 받을 만한 일'로 설명되어 있다. 죄를 기독교적으로 접근하면 의미는 조금 달라진다. 기독교에서는 죄의 기준이 타인이나 사회에 있지 않다. 하나님에게 있다. 기독교에스 죄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에 부족한 것이나 어기는 것"으로 정의된다. 즉 하나님과의 인격적이고 언약적인 관계에서 발생한 불순종은 모두 죄이다. 그렇기에 죄는 상태이고 현상이다. 죄를 존재나 물질로 본 마니주의자들의 오만한 어불성설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오래전 폐기처분되었다. 흥미로운 건 세상의 죄의 개념과 기독교의 죄의 개념이 많은 부분 겹친다는 점이다. 하나님의 법은 소위 '도덕법'이라는 명명으로 역사 이래 인간의 법에 녹아들었다. 그렇기에 역사가 시작된 이래 살인을 저지르거나 도둑질을 하는 건 예외 없이 죄로 인식되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규정한 법조항(십계명, 곧 도덕법)의 많은 부분이 지금 우리가 지키고 있는 각 국가의 실정법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죄와 벌』에서 바로 이 죄의 문제를 천착한다. 도스토옙스키가 만들어낸 대부분의 인물이 그렇듯이 주인공 라스콜리니코프는 불안하고 극단적인 인물이다. 가난한 삶을 살지만 진지하고 독특한 사색을 가진 청년이다. 자신의 자취방에서 "사회에 불필요한 인간을 없애 더 큰 공공의 선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은 정당한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공상에 빠진다. 공상은 곧 현실이 된다. 자신의 사상을 시험해 볼 요량으로 동네에 있는 고리대금업자 노파를 계획적으로 직접 살해한 것이다. 범행은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막상 살인을 저지르고 나니 극심한 혼란과 망상의 증세가 그를 억누른다. 며칠간 고열과 의식의 혼탁 상태가 이어진다. 그러던 중 지인과 경찰을 만나 대화하는 과정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이 아슬아슬하게 노출되고 방어된다. 소설은 에필로그 직전까지 그 긴장감을 철저히 유지한다.

상식적으로 볼 때 아무 이유 없이 노파를 죽이고 우발적으로 그 여동생까지 죽인 라스콜리니코프의 범죄는 분명 엽기적 중범죄다. 그는 마지막까지 반성하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살인의 정당성을 부여한다. 자신은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비범성, 즉 특별함과 초월함을 갖고 있다는 망상으로 자기 자신을 합리화한다. 범행 후 여러 사람과의 만남에서 그의 예민하고 망상적인 행태는 점점 심해진다. 긴 소설 분량 대부분이 라스콜리니코프의 내적 혼란으로 채워져 있다. 그는 자신을 제대로 회복시키지 못한다. 자기우월과 자기혐오가 뒤섞인 정신분열적 실존이 인간 라스콜리니코프의 진본이다.

라스콜리니코프를 변화시키는 존재는 소냐이다. 술주정뱅이 마르멜라도프의 딸로서 아버지가 마차 사고로 치여 죽은 후 아버지 장례 과정에서 라스콜리니코프를 만난다. 소냐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춘을 택한 불운한 여인이다. 인간에 대한 연민과 자기희생을 잘 드러내며 작가적 장치라는 면에서 신앙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마치 순종과 희생으로 자기를 부정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소냐는 인간의 진정한 구원(부활)이 어디에 있는지를 발견하는 길잡이가 되어준다. 그녀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수시로 신약성경의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를 들려준다. 죄를 비껴가지 말고 자수함으로써 정면 승부해야 할 것을 권면하기도 한다. 이런 대목은 기독교적 상징과 은유를 잘 담아낸다. 소냐는 종국 라스콜리니코프를 자수시키고 참회의 가능성으로 이끈다.

도스토옙스키는 왜 그토록 병적인 인간을 전면에 내세웠을까. 솔직히 라스콜리니코프는 위대한 고전의 주인공으로는 전형성과 일상성이 거의 없는 또라이다. "비범한 인간은 도덕법칙을 초월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사상에 도취되어 사람을 둘이나 도끼로 찍어 죽인 인물이다. 미친놈이다. 이 막장극을 통해 도스토옙스키는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그건 아마 '역설'이 아니었을까 싶다. 인간성의 추악한 실체를 극한까지 몰고 감으로써 결국 하나님 없이는 인간은 어떤 선도 행할 수 없음을 깨우치고야 마는 그런 역설 말이다. 즉 도스토옙스키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극단적인 망가짐을 보여줌으로써 은혜로 살 수밖에 없는 인간론을 강하게 설파한다.

인간을 어떤 존재로 보느냐는 인류의 사상과 종교의 역사에서 항시 뜨거운 주제였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선하게 본 몇 안 되는 철학자다. 죄의 문제를 부조리(absurdism)란 신조어로 비껴간 카뮈 같은 자도 있다. 그러나 인간 본성을 악하거나 타락했다고 본 전통이 훨씬 두텁고 오래된 흐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를 위시하여 그를 계승한 루터와 칼빈은 인간을 전적 타락(Total Depravity)한 존재로 규정했다. 홉스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주장하며 인간은 자연 상태에서 이기적 욕망에 지배된다고 말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 에로스, 타나토스 등을 통해 인간의 악성을 탐구했고, 니체는 선과 악을 권력 투쟁의 산물로 해석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인간을 '믿을 만한 존재'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철저히 인간은 절대적으로 악하다는 입장에 서 있다. 아우구스티누스-칼빈의 계보인 것이다.

많은 책을 읽고 여러 사람을 만나면서 명확하게 깨달은 게 있다. 인간은 절대로 선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에게 인간은 "가만히 놔두면 자신의 자유의지로 악에 빠질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규정된다. 법과 도덕은 인간의 악을 감소시키기 위한 마지노선일 뿐이다. 인간 구원은 인간 밖에 존재한 강력한 외부의 힘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 라스콜리니코프의 성실한 친구 라주미힌은 소설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밝고 친절하고 합리적인 사람으로서 나중에 두냐와 결혼해 건강한 삶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소설에서 멀쩡한 사람은 그 하나밖에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라주미힌은 끝내 라스콜리니코프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일말의 변화도 이끌어내지 못한다. 도덕적으론 성공했지만 구원의 성취에는 다가서지 못한 인물이다.

또한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죄가 일상화된 형태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극단적이되 이론적이라면 스비드리가일로프는 일상화된 죄의 얼굴이다. 그는 하인을 학대하고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의심을 받는다.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혹도 받는데 이에 대해 인물 간의 심증만 있을 뿐 소설에서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마치 현대인의 내밀한 일상에 실재한 죄의 형상을 은유한 것 같다. 그는 죄를 설명하거나 변명하지도 않는다. 죄와 함께 살아가는 인물로서 죄가 일상을 넘어 권태에 도달한 완성형 악인이다. 그렇기에 그에게는 양심의 고통이 없고 회개 또한 불필요하다. 자기 욕망의 목적이었던 두냐(라스콜리니코프의 여동생)를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결국 그는 자기 부정과 자기 소멸의 길을 택한다. 신도 없고 절대적 의미와 가치가 없는 세계는 공허하며 그 어떤 삶의 본질도 찾을 수 없기에 결국 스스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예심판사(수사관) 포르피리는 『죄와 벌』을 신학소설이나 인간론 사상서로 읽히게 하는 주요한 인물이다. 포르피리는 가장 이른 시점에 라스콜리니코프가 범인이라는 내적 확신을 갖는다. 명확한 확신을 갖고 있음에도 라스콜리니코프를 체포하려 하지 않는다. 고발하지 않고 도망칠 길을 막지도 않는다. 대신 라스콜리니코프에게 계속해서 말을 건다. 대화 속에서 논리적 우위를 점하는 방식이다. 확신은 가득하지만 정죄하지는 않는다. 합리적이고 냉정하고 통찰력이 있지만 그 또한 라주미힌과 같이 라스콜리니코프의 영혼을 구하지는 못한다. 왜 틀렸는지는 알지만 어떻게 부활할 것인지는 제시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냐에게 바통을 넘긴다.

⑵ 소냐 - 구원이 작동하는 자리

반면 소냐는 라주미힌과 포르피리가 도달하지 못한 '특별한 은혜'를 아름답게 웅변해낸다.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서는 가능성의 통로의 길 위에 서 있다. 소설 『죄와 벌』에서 소냐를 깊이 있게 이해하는 건 이 소설의 단 하나의 명료한 주제, 즉 '인간의 죄와 구원의 문제'를 관통하는 핵심 작업이다. 소냐의 삶은 고단하고 가난하고 비루해 보인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았다. 라주미힌처럼 도덕적 고지(高地)에 올라선 인물이 결코 아니다. 하지만 소녀가 위대한 건 '자기 위치'를 안 다는 것에 있다. 그녀는 스스로 죄인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를 판단하지 않는다(못한다). 어떤 이론이나 지적도 없다. 남의 눈의 티끌이 아닌 자기 눈의 들보에 주목한 소냐의 겸손함은 율법적 정죄가 아닌 은혜의 통로만이 인간의 살 길임을 명징히 보여준다.

성경에 대한 소냐의 태도 또한 주목할 만하다. 소냐가 라스콜리니코프에게 반복적으로 읽어주는 나사로의 부활 이야기는 신약성경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기적의 메시지다. 죽은 지 나흘 동안 무덤에 있던 나사로를 예수께서 말씀 한 마디로 살려낸 이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적 사역 중 마지막이자 최대의 표적이다. 중요한 건 소냐는 이 본문을 설명하지 않고 그저 읽어주기만 한다는 점이다. 적용도, 논증도, 교훈도 덧붙이지 않는다. 그저 말씀을 있는 그대로 소리 내어 읽을 뿐이다. 이는 정통 기독교의 말씀론(성경론)과 깊게 맞닿아 있다. 말씀은 인간의 해석으로 효력을 얻지 않는다. 말씀은 스스로 살아 역사한다(sola Scriptura + viva vox evangelii). 라스콜리니코프는 말씀을 듣고 즉시 회개하지 않지만 "죽은 자라 불려 나오는 사건"이 그의 내면에 깊이 심어진다. 이는 성령의 사역이지 설득의 결과가 아니다.

많은 독자들이 소냐를 그리스도의 상징으로 감상하는 것 같다. 여러 온라인 리뷰를 읽어본 결과 소냐를 구원의 주체이자 동력으로 이해하는 후기가 제법 많이 눈에 띈다. 정통 기독교 신학에서 대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몫(Solus Christus)이다.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백을 요구하지 않고 회개를 재촉하지 않는다. 다만 그가 고난의 길로 갈 때 "함께 가겠다"고 말할 뿐이다. 이는 그리스도가 아닌 교회의 역할과 정확히 일치한다. 교회는 죄를 사하지 못한다. 회개하는 죄인과 함께 십자가의 길을 걷는 곳이다. 구원의 원인이 아니라 구원이 작동하는 자리이다. 대속은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이며 동행은 교회의 역할이다. 소냐는 인간을 구원시키는 '하나님의 은혜'를 발생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대체나 은혜의 생산이 아니다. 하지만 그 은혜를 피할 수 없게 만드는 환경이다. 결국 소냐는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 안에서 '머무를 수 있는 자리'가 어떤 모습인가"를 농밀하게 상징한다.

도스토옙스키는 일갈한다. 인간은 인간 밖에 실재한 '강력한 은혜'가 아니고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것을. 도스토옙스키에게 인간은 구원에 있어 절대 무능력한 존재다. 그래서 그는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일관되게 은혜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을 탐구했다. 노파와 그의 여동생을 잔인하게 죽인 라스콜리니코프는 자기 행동에 끊임없이 괴로워하지만 끝까지 죄책감을 느끼거나 회개하지 않는다. 범행 후 공포와 혼란, 신경증과 피해 망상을 겪지만 그것들은 윤리적 죄책감과는 거리가 있다. 그는 자기 힘이나 이성, 내면의 양심이 아닌 오직 소냐의 절대적 사랑에서 무너진다. 벌을 받을 때보다 사랑받을 때 더 붕괴하는 도스토옙스키 인간관의 절정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냐는 설명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라스콜리니코프의 옆에 함께 있을 뿐이다. 죄책감이나 회개로 인해 구원으로 간 게 아니라 구원의 가능성을 먼저 만났기 때문에 죄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은혜인 것이다. 신(하나님)은 그 은혜를 인간이 피하거나 거부할 수 없도록 작정하셨다. 그래서 불가항력적 은혜(Irresistible grace)다. 『죄와 벌』이 윤리나 도덕 소설이 아닌 '은혜 소설'로 불리는 이유다.

⑶ 영향받은 작가와 기독교

도스토옙스키는 독실한 기독교(러시아정교회) 신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을 가진 건 아니다. 젊었을 때 벨린스키, 생시몽, 푸리에와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던 중 급진적 사회주의 모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총살 직전 차르의 특사로 구제받은 경험을 통해 인간의 불완전성과 유한성을 경험한다. 이후 시베리아 유형 생활을 보내며 신약성경을 깊이 탐독한다. 이런 과정이 도스토옙스키가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원인으로 분석된다. 산상수훈 정도의 도덕적 기독교에 머문 톨스토이와 달리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십자가와 부활을 온전히 붙잡았다는 점에서 그의 신앙은 정통 기독교에 머물러 있다.

아이러니한 건 도스토옙스키에게 영향을 받은 사상가 중 반기독교인이 수두룩하다는 점이다. 니체, 사르트르, 프로이트와 같은 이들은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거나 신을 부정한 사람들이다. "그는 내가 무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다."라고 도스토옙스키를 치켜세운 프리드리히 니체는 동시에 "신은 죽었다."를 외쳤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역설적 문장을 차용한 장 폴 사르트르는 본질에 앞서야만 하는 실존적 인간론을 설파했다. 도스토옙스키를 가장 위대한 소설가로 꼽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죄의 기준을 신이 아닌 인간 내면의 심리적 억압의 기제로 천착했다. 헤르만 헤세는 기독교 탈주 후의 영성을 그렸고, 앙드레 지드는 반기독교적 개인주의를 탐색했다. 흥미로운 건 이들을 통해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성이 더 강해진다는 사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믿는 자리에서' 인간을 쓰지 않고 '믿음이 무너지는 자리까지' 인간을 데려간 뒤 거기서도 예수를 놓지 않았던 작가였다. 니체, 카뮈, 사르트르는 인간의 죄·고통·자유를 끝까지 밀어붙였지만 '은혜 앞에서 무너지는 인간'이라는 도스토옙스키의 통찰 앞에서는 멈춰 섰다. "인간은 스스로 책임질 수 있을 만큼 강한가."라는 질문 앞에 도스토옙스키의 대답은 일관된다. "아니오. 그래서 은혜가 필요합니다." 철학적으로 불편하고 윤리적으로 모욕적인 답변이겠지만 소설이라는 장르 안에서 답변했기 때문에 그 일관됨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 문학의 힘이 있다.

소설의 힘은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데 있다. 이야기로 그저 보여줄 뿐이다. 철학자와 심리학자는 '전제->논리->결론'이나 '개념->체계->설명'의 방식으로 논증한다. 논박이 가능하고 회피가 가능하다. 그러나 소설은 전제와 결론보다 과정과 경험으로 말한다. 라스콜리니코프, 소냐, 라주미힌, 스비드리가일로프 등은 사유의 결과물이 아니라 삶의 실험체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모두 '신 없이는 못 버티는 인간들'이다. 도스토옙스키는 단 한 번도 신 존재 증명을 하지 않았다. 신이 없는 인간을 끝까지 밀어붙이고 인간의 선의를 끝까지 시험한다. 자유를 무한히 부여하고 책임을 전부 떠넘긴다. 그리고 질문한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 독자는 이 질문에서 도망칠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그 인간으로 살아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기독교는 '설득'이 아니라 '피할 수 없음'이 된다. 정리하자면 도스토옙스키는 신이 없으면 '끝까지 살 수 없다'는 것을 서사로 증언해낸 것이다.

⑷ 도체스토옙스키의 시간, 그리고 톨스토이

『죄와 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는 시간이 굉장히 압축되어 있다는 점이다. 독자의 입장에서 오랫동안 읽었는데ㅡ길고 무거운데ㅡ실제 소설 속에서 이야기가 흐르는 시간은 아주 짧다. 소설 시작부터 결말까지 1년 남짓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시베리아 유형을 떠나기 전까지는 몇 달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핵심 사건들은 2-3개월 안에 몰려 있다. 살인 전후의 핵심 드라마는 2주 정도다. 즉 노파 살인, 정신 혼미, 경찰 조사, 소냐와의 만남, 인물들 간의 심리전, 스비드리가일로프 사건, 자백 등등. 소설 전체를 덮고 있는 이 모든 게 약 10일~2주 안팎에 벌어진다. 더욱이 재판 과정은 생략되었고 시베리아 유형은 에필로그 몇 장으로 요약되었다. 정리하면 『죄와 벌』은 분명 긴 소설이지만 이야기 속 시간은 짧고 인간의 내면만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어난 소설이다.

이는 도스토옙스키 소설의 주요한 특징이기도 하다. 『백치』도 실제 서사 기간은 1년에 불과하며 주요 사건은 특정 시기에 집중되었다. 가장 충격적인 작품 『악령』도 이야기가 흐른 시간은 수개월이다. 이 소설 또한 결정적 며칠에 모든 사건이 폭발한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도 인물들 간의 설교와 토론이 많지만 사건 자체는 매우 빠르고 흐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이야기 전체가 1년 안에 이뤄지지만 핵심 서사는 부친 살해 전후 며칠에 불과하다. 이는 톨스토이의 작품들과 명백히 대조되는 지점이다. 『안나 카레니나』는 '결혼-불륜-파국'으로 이어지는 긴 세월을 다룬다. 『전쟁과 평화』는 나폴레옹 전쟁 초기부터 몰락까지 약 15년의 역사를 관통한다. 『부활』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장기적 회고 구조를 갖는다. 이러한 차이는 두 작가의 소설의 결이 완전히 달라질 수밖에 없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시간의 단위는 대화다. 그의 소설은 상황이나 배경 묘사가 축소되어 있다. 정확히 말해 의식과 대화가 배경을 압도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인물들을 항상 떠든다. 이에 대해 미하일 바흐친은 '폴리포니(polyphony) 서사'로 정의했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작가의 목소리가 중심이 되지 않고 여러 인물의 말이 서로 충돌하면서 의미가 만들어지는 구조를 가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 세계관에서 시간의 흐름은 중요하지 않다. 결정적 순간이 중요하고 이를 따라가는 인간의 의식이 시간의 압축성을 주도해낸다. 반면 톨스토이에게 시간은 일상과 반복이다. 순간이 아닌 변화와 축적의 시간이다. 톨스토이의 시간은 흘러가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인간은 단 한순간에 드러나고 톨스토이의 인간은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

내가 청소년기나 이십 대 때에 도스토옙스키를 읽었다면 지금보다 더 매료되었을 것이다. 아직 인생의 희로애락을 다 겪어보지 못한 청춘의 시기는 많은 걸 모르지만 동시에 모든 질문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시간대다. 이 시기는 지혜의 응축과 깨달음의 밀도보다는 직감이 우선한다. 그래서 라스콜리니코프나 이반과 같은 인물에 더 몰입할 수 있었을 것 같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삶은 변하기 마련이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우고 부모의 늙음을 보면 '왜 살아야 하는가'보다 '어떻게 오늘을 견디는가'가 더 중요한 주제가 된다. 더욱이 아이를 키우는 순간 톨스토이는 더 넓게 열린다. 아이는 하루아침에 변하지 않는다. 서서히 자라고 배우고 멀어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는 거의 없는 경험이다. 반면 톨스토이에게는 핵심 주제다. 내가 톨스토이의 소설에 더 깊이 감동받는 이유이다.

# 에필로그 : 4대 장편으로 향하는 관문

나는 이미 여러 지면에서 도스토옙스키보다 톨스토이가 더 탁월한 소설가임을 수차례 주장해왔다. 지금도 그 견해에는 변함이 없다. 인간은 단 한순간에 드러난다고 보는 도스토옙스키적 극단보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형성된다고 보는 톨스토이적 일상이 보편 인간의 경험과 성찰에 더 부합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내 입장은 내가 소설의 배경, 상황 전개, 심리의 축적, 인간이 환경 속에서 변해가는 과정 등을 주목하는 내 소설관의 기준에 깊이 종속되어 있다. 소설을 삶의 형식으로 읽어내는 나 같은 독자에게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은 여전히 불편한 텍스트로 남는다. 하지만 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 불편하긴 하지만 꼭 읽어야 하는 대상으로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시각이 변모했다는 점이다. 이는 과거 그의 소설에서 내가 붙잡지 못했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라는 측면에서의 독서를 리셋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제 <프롤로그>로 돌아가자. 나는 이 글을 열면서 "최근 내 주변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여러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리고 그것이 배경이 되어 『죄와 벌』을 다시 집어 들었음을 고백했다. 대략 50년의 삶의 경험을 통해 얻은 내 통찰은 인간은 오류가 많고 추악하며 불완전한 존재라는 깨달음을 여실히 축적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기독교 신앙은 '인간은 사랑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당위를 지시한다. 서로 부딪히는 진실과 당위의 혼합 속에서 타인과 세계를 바라보는 건강한 인간론을 다듬어보길 원했다. 이에 마냥 "인간을 사랑하라."라는 교훈을 주기보다 "그런 인간을 보고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라는 가혹하고 정직한 질문을 던지는 도스토옙스키를 손에 들게 된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4대 장편 중 『죄와 벌』과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다. 이번에 『죄와 벌』을 재독했으니 이제 순서대로 『백치』 - 『악령』 -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재독) 순으로 4대 장편을 독파할 예정이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역동적으로 관통하는 도스토옙스키의 대작들을 통해 더 깊고 풍성한 인간론의 백미를 탐구해 보려 한다. 그래서 나의 지향은 "인간은 혐오스러울 만큼 타락했지만, 결국 바로 그 자리에서만 은혜가 의미를 갖는다."라는 궁극의 깨달음에 더 감동적으로 도달하는 것이다. 『백치』와 『악령』은 기존 소장본인 열린책들본으로 읽을 것이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만 김연경 번역의 민음사본으로 읽을 것이다. 번역에 대한 사유는 나중에 각 책들의 리뷰에서 밝히겠다.

서평을 마무리하자. 나는 옳다는 확신에 가득 차 타인을 무시하고 배제하고 끝내 '죽여버리는' 라스콜리니코프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 많이 있다. 그런데 정작 『죄와 벌』을 읽는 동안 "네가 혐오하는 그 인간의 씨앗이 사실은 네 안에도 있다"라는 불편한 속삭임이 끊임없이 귓속을 맴돌았다. 그래서 이 긴 여정(도스토옙스키 4대 장편 독파)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에게 간절히 울부짖는다. 하나님! 인간은 도대체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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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미국의 1920년대를 '풍요와 쾌락의 시대'로 명명한다. 1920년대는 미국뿐 아니라 서방세계가 여러 분야에서 호황을 맛본 시기다. 미국에선 '재즈 시대'로 불렸고 독일에서는 '황금의 20년대'라고 불렸다. 경제적 풍요뿐 아니라 문화, 예술, 사회 모든 면에서 활활 타오른 역동적인 시기였다. 하지만 20년대의 번영은 1929년 월스트리트 주가의 대폭락으로 끝을 맞이했다. 이후 1930년대는 대공황의 시대였고 그동안 겉으로 드러나지 않던 기존 체제의 모순이 하나둘씩 폭발되기 시작했다. 결국 1939년 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1920년대의 미국 뉴욕을 배경으로 한다. 1인칭 화자 닉 캐러웨이가 소설의 실질적 주인공 제이 개츠비를 관찰하고 조명하는 이야기다. 대략적인 스토리는 이렇다. 뉴욕의 큰 섬 롱아일랜드에 닉의 대학 동창 톰 뷰캐넌이 살고 있다. 톰은 닉의 친척인 데이지와 결혼한 사업가다. 자신감 넘치지만 건방지고 거만한 성격을 가졌다. 톰은 데이지 몰래(?) 정부와 바람을 피운다. 그 때문인지 부부 사이가 좋지 않다.

개츠비는 닉의 옆집에 산다. 개츠비는 수시로 지인과 유명 인사를 자기 집에 초대해 화려한 파티를 여는 것으로 유명하다. 평소 개츠비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닉은 우연히 그의 파티에 초대를 받아 처음 그를 만난다. 개츠비의 첫인상에 엄청난 매력을 느낀 닉은 그와 점점 더 가까워지며 여러 가지 몰랐던 사실들을 알게 된다. 개츠비의 엄청난 재력에 대해 세간에 여러 소문이 떠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금주법 시대에 불법 밀주와 도박으로 돈을 벌었고 데이지의 과거 연인이었던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설의 이야기는 급물살을 타며 긴장을 배가시킨다.

단순히 보면 데이지를 잊지 못한 개츠비가 과거 사랑을 되찾기 위해 발버둥 친 사랑가로 읽힌다. 하지만 소설은 더 무겁고 복합적인 여러 상징을 심어놓음으로써 그 시대의 미국적인 것과 미국적이지 않은 것 사이의 긴장과 충돌을 묘사한다. 숭고함과 비루함, 정신과 물욕, 인내와 욕망이라는, 개인적이면서도 공동체적인 가치를 이데올로기 차원에서 탐구하고 고발한다. 통속적인 연애소설을 넘어 1920년대의 미국 사회의 모순적 단면을 상징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고전은 문학사에 영웅을 남긴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를 통해 피예르와 나타샤를 남겼고, 괴테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와 로테를 남겼다. 카뮈는 뫼르소를, 도스토옙스키는 로쟈(라스콜니코프)를, 헤세는 싱클레어를 남겼다. 이 소설도 여지없이 매력적인 인물을 탄생시켰다. 개츠비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데이지를 향한 개츠비의 일편단심은 눈물겹다. 순수하고 진지하고 희생적이다. 개츠비의 모든 관심과 언행은 오롯이 데이지를 초점으로 한다. 가난에서 거부(巨富)가 되고, 매일 성대한 파티를 열고, 닉에게 접근한 것도 모두 데이지와의 사랑을 되찾기 위함이었다. 개츠비의 사랑은 대상의 실체와 무관하게 불변적이었다는 점에서 진한 감동이 있다.

반면 데이지는 속물적이다. 품위 있고 교양 있는 척하지만 내면에는 물욕이 가득 찬 여성이다. 남편 톰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개츠비에게 다시 돌아가는 건 쉽게 용기를 내지 못한다. 자신에게 다시 오라는 개츠비의 요청에 데이지는 잠시 흔들린다. 하지만 개츠비가 밀수와 도박이라는 불법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알린 톰의 고발에 마음이 다시 닫힌다. 개츠비의 사랑은 무조건적이었지만 데이지의 사랑은 조건적이었다. 개츠비는 자동차 사망사고를 낸 데이지를 대신해 범인이 되고자 한다. 이 사건의 오해로 결국 총에 맞아 사망한다. 자기 때문에 죽게 되었는데도 개츠비의 장례식에 얼굴조차 내밀지 않는 데이지의 모습은 악랄하기까지 하다. 시대의 상징성 면에서 개츠비가 정신을 은유한다면 데이지는 물질을 은유한다.

소설에서 마음을 뺏긴 인상적인 문장이 있다. 개츠비가 데이지를 자기 집에 처음 데려온 장면을 묘사한 문장이다. "그는 (...) 그녀의 무척 사랑스러운 눈이 보이는 반응 정도에 따라 집에 있는 모든 것의 가치를 재평가하는 것 같았다." 시인이자 번역가인 황유원은 일간지 칼럼에서 이 문장을 인용하며 "타인은 가끔 지옥이지만 세상을 새로이 보는 창문이 되기도 한다"고 해석했다. 매일 보는 집안의 풍경이 사랑하는 사람(데이지)의 눈으로 보니 전혀 새롭게 보인다는 의미다. 사랑이 자기 자신의 시각과 통찰을 더 깊고 넓게 만드는 것이다. "상대에게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의 눈이 내 눈을 대체하기 때문"이라는 황유원의 관찰은 그냥 지나치기 쉬운 소설의 명장면(명문장)을 제대로 읽어내는 계기가 됐다.

또한 소설의 마지막 문장도 인상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라는 마지막 문장은 영미문학 역사상 가장 뛰어난 마무리로 평가받는다. 언뜻 보면 문장이 모순된 것처럼 보인다. '과거로 떠밀려가는 것'과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은 양립 난해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문장의 여백이다. 과거로 떠밀리면서도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는 불가능이란 현실을 이겨내는 '일관된 노젓기'가 있어야 한다. 이 노젓기는 한 사람이나 한 세대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의, 여러 세대에 걸친 누적된 공감과 노력에 기반한다. 그것이 개인의 삶을 바꾸고 우리의 인생을 바꾸며 세계의 역사를 바꾼다. 작가는 물질주의의 팽배로 정신과 신앙이 오염된 미국 사회가 언젠가는 위대하게 부활할 것임을 유려한 명문장으로 희망하고 있다.

소설의 제목을 고찰하자. 개츠비는 왜 위대한 것일까. 매력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온갖 불법을 저지르고 끝내 사랑을 되찾지 못한 채 총에 맞아 죽은 비극적인 인물에게 '위대함'을 수여하기엔 쉽지 않다. 그 위대함이 데이지에 대한 사랑의 집념일 수도 있고, 아메리칸드림의 화려함일 수도 있고, 화자 닉의 시선에 비친 '위대함'일 수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나는 '아이러니로서의 위대함'으로 풀이한 문학평론가 사라 처치웰(Sarah Churchwell)의 견해를 지지한다. 즉 첫사랑을 되찾기 위한 성공과 열정의 외면적 찬사를 뜻함과 동시에 도덕적·실체적 삶의 붕괴와 비극적 죽음의 허망한 위대함을 역설적으로 함의한 것이다. 이러한 긍정과 냉소의 다층적 의미는 독자에게 열린 해석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소설의 폭을 과히 넓히는 특별한 장치가 된다.

서평을 정리하자. 대학생 때 읽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에서 처음으로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알게 됐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 속 등장인물을 통해 "『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이상 읽은 사람만 자신과 친구를 할 수 있다"라며 이 작품을 극찬했다. 하루키의 미화에는 호불호가 갈릴 것이지만, 매년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는 인기 순문학 작가의 극찬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 않을까. 분명한 건 개츠비라는 매혹적 인물을 탄생시킨 것 하나만으로도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가치는 충분하다. 시대와 나이, 정신과 물질, 좌절과 희망이라는 인간 세계의 여러 층위를 묘사하고 탐구한 고전 『위대한 개츠비』를 이웃들에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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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분자반 - 성경과 역사에서 배우는 올바른 직분자의 모습 건강한 교회 세움 시리즈 4
안재경 지음 / 세움북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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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교회에 대해 갖는 여러 오해가 있다. 그중 가장 지독한 것이 목사를 교회의 '대표이사'로 여기는 것이다. 이들에게 성도 수 많고 예배당이 큰 대형교회 목사는 경영 수완이 출중한 대기업 CEO다. 반대로 성도 수와 예배당 평수가 적은 소교회 목사는 무능력한 자영업자다. 한편 장로와 안수집사는 다른 성도보다 서열이 높은 임원급으로 생각한다. 장로가 되려면 돈 좀 있어야 하고 장로들이 카르텔을 형성해 목사의 경영권을 견제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이는 전부 잘못된 인식으로 작금의 한국교회가 세상에서 얼마나 큰 조롱을 받고 있는지 보여주는 방증이라 하겠다.

교회 직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이런 맥락에서 안재경 목사(예장고신)의 『직분자반』은 소중한 책이다. 이 책은 성경과 역사에서 배우는 올바른 직분의 정의를 알려준다. 총 4부로 구성되어 직분의 주체가 인간의 의지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주권에 있음을 전달한다. 1부는 직분의 성경적 의미를 다루고, 2부는 성경에서 세워진 다양한 형태의 직분을 다룬다. 3부는 목사를 비롯해 현재 교회에 존재하는 직분의 종류를 소개한다. 4부는 교회 직원을 세우는 실제적인 방법과 임직 훈련을 설명한다. 즉 직분의 의의부터 역사와 직무를 넘어 실제 교회에서 세우고 교육하고 임직하는 모든 과정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대중성이 이 책의 강점이다. 난해하고 전문적인 신학 용어를 배제하고 평범한 목회적 언어로 쓰인 점은 이 책의 타깃층을 분명히 한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성도라면 누구나 부담 없이 개혁주의 장로교회의 직분론을 쉽게 정리해 볼 수 있다. 직접적인 성경적 근거가 있는 직분인 목사와 장로와 안수집사를 무게 있게 다루었다. 매 장마다 내용을 요약하고 토론 주제를 실어 복습할 수 있도록 했다. 불필요하거나 본질에 벗어난 부분은 다루지 않은, 제목 그대로 '직분자반'에 충실한 기술이 돋보인다.

교회 직분의 의의를 신·구약의 통일성의 관점에서 설명한 점은 이 책의 가장 탁월한 부분이다. 구약과 신약을 율법과 복음으로 무 자르듯이 구분하는 건 적절치 않다. 구약과 신약의 본질은 동일하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장 6항은 신·구약의 차이를 "본질이 다른 두 개의 은혜언약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 하나의 동일한 은혜언약이 다양한 경륜들로 나타난 것이다."라고 정리한다. 구약의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의 직분은 신약에서 그리스도에 의해 통합되고 완성되었다. 그리스도의 승천 후 초대 교회에 세워진 다섯 직분 중 '사도'와 '선지자'와 '복음 전하는 자'는 교회를 세우기 위한 '창설직'으로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목사'와 '장로'와 '집사'가 남아 있다. 이 세 직분은 주님 오실 때까지 교회 내에 항상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항존직'으로 불린다. 이렇게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계획에 따른 신·구약의 연속성이라는 관점에서 교회 직분을 이해하는 훈련은 매우 중요하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바로 장로의 직무에 관한 내용이다. 통상 장로의 역할이란 천국 열쇠를 쥔 치리회의 일원으로 성도를 잘 다스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보다 우선하는 장로의 역할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장로가 '말씀이 선포되는 강단을 보호하는 직분'이라는 점이다.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면 장로는 그 말씀을 보호한다. 목사를 감시하고 설교권에 간섭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일에 (목사와 함께)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저자는 이것이 장로를 세운 가장 중요한 이유라고 강조한다. 그렇기에 장로는 말씀에 정통해야 한다. 말씀의 바른 이해와 통치 안에서 치리회(당회)에 참여하고 성도를 심방하고 교회를 세워나가야 하는 것이다.

안수집사에 대한 바른 이해도 중요하다. 흔히 안수집사를 장로로 가는 관문이나 사전 훈련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강력한 안수집사회를 구축해 장로회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로와 안수집사(이후 집사라 칭함)는 직무와 성격이 뚜렷이 구분되는 직분이다. 장로가 다스리는 자라면 집사는 구제를 위해 부름을 받은 자이다. 성도들의 교제로부터 소외되는 이들이 없는지 돌아보고 긍휼을 베풀기 위해 세움을 입은 직분이 바로 집사이다. 그렇기에 집사는 교회에서 가난하고 상처받고 소외된 자들을 긍휼히 여기고 그들을 돌보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목사는 말씀을 바르게 선포함으로, 장로는 그 말씀으로 다스림으로, 집사는 그 말씀으로 돌봄으로써 교회는 건강하고 아름답게 서나 갈 수 있다.

고백하자면 6월 초 섬기는 교회에서 안수집사로 피택되었다. 이 책은 교회 임직자 교육 과정의 교재로 만났다. 이 서평도 그 교육의 일환이다. 임직을 준비하면서 직분에 대한 바른 이해와 성경적 고찰이 절실하다. 앞으로 내 남은 인생에서 교회 직분에 대해 이토록 신학적이고 실제적으로 배우고 가다듬을 날이 또 있을까 싶다. 그래서 더 열심히 배우고 훈련받고자 한다. 하나님은 직분자를 수단으로 통치하신다. 사람에게 만족을 주는 중직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중직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나아갈 뿐이다.

서평을 정리한다. 『직분자반』은 교회 직분자 교육 교재로 손색없는 탁월한 책이다. 한국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가 직분자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할 때 직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는 건 매우 긴요하다. 교회 직분에 서열과 계급은 없다. 교회의 머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모든 직분은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다. 단 질서와 구별이 있을 뿐이다. 직분 공부를 해본 적 없는 일반 신자부터 중직에 있으면서도 이에 대한 조예가 부족한 직분자들에게 안재경 목사의 『직분자반』을 추천한다. 부디 한국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자신의 직무를 행사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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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턴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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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무료한가. 그래서 재미있는 소설을 읽고 싶은가. 하지만 가벼운 장르소설은 싫은가. 그렇다면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중 하나를 선택하기 바란다. 이시구로의 소설은 한결같이 재미있고 묵직하고 감동적이다. 초기작 『창백한 언덕 풍경』(1982)부터 최신작 『클라라와 태양』(2021)까지 그의 소설은 삶과 시간과 기억 너머에 있는 인간성의 희망을 추적한다. 대부분 1인칭 화자를 주인공으로 배치해 역사와 추리, SF까지 다양한 장르를 다룬다. 인간 문명의 이기와 한계를 고발하는 동시에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 또한 인간 내면에 존재하고 있음을 적극적으로 옹호한다.

『녹턴』은 2009년에 출간된 이시구로의 유일한 소설집이다. '음악과 황혼에 대한 다섯 가지 이야기'라는 매력적인 부제가 눈에 띈다. 총 다섯 개의 단편소설을 담고 있는데 부제가 암시하듯 단편 곳곳에 음악을 듣고 연주하는 인물이 정면에 배치된다. 이시구로는 음악을 문학적 소재로 차용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작가로 평가받는다. 『녹턴』에는 자신의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실존적 질문을 던지는 다양한 삶의 양태가 녹아 있다. 음악적 예술혼 위에서 사랑과 기억과 시간을 관통하는 애잔한 단편들이 독자의 가슴을 적신다.

첫 번째 소설 「크루너」는 이탈리아 베네치아 광장에서 밴드로 활동하는 기타리스트 얀(야네크)이 화자로 등장한다. 그가 광장에서 연주하던 중 한물간 가수 토니 가드너를 우연히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얀의 어머니는 오래전부터 토니의 광팬이었다. 얀은 토니에게ㅡ어머니와의 관계도 있고 해서ㅡ적극적으로 다가가 말을 건다. 근데 토니는 아내 린디와 헤어지기 위한 이별 여행 중이다. 토니는 린디의 인생 여정을 얀에게 자세히 들려주고 린디의 호텔 창문 밖 곤돌라 위에서 그녀를 위한 세레나데를 준비한다. 토니가 노래를 부르고 얀은 기타 반주로 합류한다. 몇 달의 시간이 흐른 뒤 얀은 토니와 아내의 이별 소식을 전해 듣고 그날 밤(베네치아에서의 만남)을 회상한다.

두 번째 소설 「비가 오나 해가 뜨나」는 레이 찰스의 곡 'come rain or come shine'에서 따온 제목이다. 레이먼드는 자신의 절친 찰리의 요청으로 런던에 있는 찰리 집으로 향한다. 레이먼드가 친구 집에서 겪는 예기치 않은 에피소드가 소설의 주된 이야기다. 찰리는 아내 에밀리와의 부부 생활에 위기가 닥쳤다. 에밀리는 레이먼드의 대학 동기여서 서로 아는 사이다. 아내와의 위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사람은 친구 레이먼드밖에 없다고 여긴 찰리는 레이먼드에게 도움을 청하고 해외로 출장을 떠난다. 찰리의 요청을 수락하긴 했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레이먼드의 의도하지 않은 실수가 발생한다. 그런데 레이먼드와 에밀리가 옛 시절에 음악을 매개로 공유했던 기억 너머의 공감대로 인해 이야기는 예상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간다. 열린 결말을 통해 독자는 사랑과 우정과 시간을 관통하는 음악의 힘에 대해 깊이 숙고하게 된다.

표제작 「녹턴」은 첫 단편 「크루너」와 연결된다. 토니 가드너의 아내 린디가 「녹턴」에도 등장한다. 린디는 「크루너」에서 화자 얀과 남편 토니로부터 언급되고 수식되는 수동적 인물이었다. 하지만 「녹턴」에서는 보다 적극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린디는 재능은 있지만 추한 외모 때문에 저평가를 받는 색소폰 연주자 스티브와 함께 위험하고 대담한 일을 벌인다. 스티브와 린디 모두 전과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 당대 최고의 의사 보리스로부터 성형수술을 받는다. 같은 병원에서 같은 의사에게 수술을 받고 서로 옆방에 놓이게 된 두 사람은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만나 서로 인정하고 의지하는 관계가 된다. 그러던 중 생각지 못한 사건에 휘말린다. 블랙코미디와 같은 이야기 속에서 삶과 사랑과 자존의 의미를 깊이 있게 탐구한다.

아직 꿈을 이루지 못한 무명의 젊은 뮤지션 '나'가 시골 카페를 운영하는 누이 부부의 집에 머물면서 일어나는 일을 그린 「말번 힐스」는 수록작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 화자는 누나의 카페에 종종 들리는 스위스인 부부 틸로와 소냐와 가까워진다. 그들은 관광차 영국에 방문했는데 음악과 예술에 대한 명확한 철학을 가진 프로 뮤지션이다. 그러나 두 부부 사이에 벽이 존재하고 갈등이 있음을 화자는 알아차린다. 소설의 말미에 남편 틸로가 산책하는 동안 화자와 소냐가 대화하는 장면은 삶과 성공의 방정식에 지친 수많은 독자에게 위로를 안긴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건 마지막 단편 「첼리스트」다. 헝가리 출신 첼리스트 청년 티보르는 우연히 미국의 중년 여인 엘로이즈를 만나 첼로 개인 교습을 받는다. 티보르는 교습을 받을 때마다 엘로이즈에게 빨려 드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그런데 엘로이즈는 말로만 코칭할 뿐 자신이 직접 첼로를 켜진 않는다. 티보르의 의심이 쌓이는 만큼 소설의 긴장은 고조되며 무언가의 비밀이 밝혀진다. 짧은 이야기 속에서 절정으로 치닫는 서사의 전개 과정이 몰입감 있게 펼쳐진다.

다섯 편의 소설 모두 음악을 소재로 하여 인간이 처한 현실과 이상의 문제를 관통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낭만을 꿈꾼다. 그러나 낭만으로만 살 수 없는 게 인생이다. 실력과 경쟁이라는 냉엄한 자본주의 질서 속에서 진짜 사랑과 진짜 행복을 발견하는 건 쉽지 않다. "'참 나'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옳은 명제임에도 일부에게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린다. 하지만 '나'가 '나 외의 것'과 명확하게 구분된다는 인식 하에서만 인간 문명의 발전은 가능하(했)다. 나를 발견하는 것. '참 나'를 인식하는 것. 그것이 타자와 어떻게 분리되는지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사랑하고 진실한 행복을 가능케 하는 전제조건인 것이다.

『녹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신의 꿈과 사랑을 채우지 못한 결핍의 존재들이다. 부재와 결핍은 인간에게 그늘을 드리운다. 흥미로운 건 인물들의 또 하나의 공통점이 모두 음악을 갈망한다는 점이다. 어떤 이는 노래하고 어떤 이는 연주하며 어떤 이는 교습한다. 음악은 인간에게 종교와 사상을 뛰어넘어 하나가 되게 하는 윤활유가 되지만 동시에 개인적인 침잠 속에서 외부를 잠시 잊게 하는 힐링과 위안을 제공하기도 한다. 음악은 모든 공간을 채우고 전 시간을 장악한다. 소설 『녹턴』의 주인공은 음악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2017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노벨상위원회는 이시구로에 대해 “위대한 ‘감정적 힘’을 가진 소설을 통해 세계를 연결하는 우리의 환상적 감각 아래에 있는 심연을 발견했다”고 높게 평가했다. 또 “그는 과거를 이해하는데 큰 관심을 보여왔고, 개인이자 사회로서 우리가 생존하기 위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탐구하고 있다”며 “제인 오스틴과 프란츠 카프카를 섞어놓은 듯하다. 여기에 마르셀 프로스트의 성향도 약간 가미돼 있다”고 극찬했다. 카프카와 프로스트의 소설을 많이 읽지 않아 한림원의 평이 낯설긴 하지만 이시구로의 소설 속에 오스틴의 로맨스와 유머감각, 카프카의 꿈과 기억, 프로스트의 시간과 의식의 흐름이 여러 층위에 긴밀하게 뒤섞여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서평의 서두로 돌아가자.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 지루하고 난해하고 만연한 소설은 질색이다. 그러면서 동시에 교훈과 감동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잘 아는 소설의 존재 목적은 '인간성의 탐구'이다. 즉 '좋은 소설'은 재미있고 감동적인 방식으로 인간성을 옹호하고 성찰하는 소설이다. 이 명제에 가장 가까이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녹턴』을 아낌없이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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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의 길
김욱동 지음 / 연암서가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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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입장에서 번역된 책을 읽을 때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역자가 얼마나 거대한 엉덩이의 힘을 사용했을까, 하는 것이다. A4 용지 한 장 분량의 서평 한 편 쓰는 것도 이렇게 어려울진대 방대한 원문을 읽고 이해하고 분석하며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번역가들의 수고는 감히 어림잡기 힘들다. 존경스럽기도 하다. 글쓰기는 고통이다. 글은 써본 사람만이 안다. 시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하나의 완결된 형태의 텍스트를 직접 써본 사람만이 아는 고통의 영역이란 게 있다. 그것을 알기에 역자의 수고는 그 자체만으로 경이로워 보인다.

고전을 즐겨읽는 나에게 세계문학 번역가들은 모두 지적이고 정서적이고 문화적인 채권자다. 특히 원문을 잘 이해하여 탁월한 한국어 역량으로 군더더기 없이 번역한 명망 있는 번역가들의 수고는 찬란하다. 가령 고 박형규 명예교수(고려대 노어노문학과)와 김화영 명예교수(고려대 불문학과)는 톨스토이와 카뮈의 작품세계를 안정적으로 탐독하는 데 도움을 준 분들이다. 세계 문학사에서 난해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10년 동안 매일 같이 6시간씩 번역 작업에 매진해 완역본을 낸 김희영 명예교수(한국외대)의 집념도 대단하다. 우리 같은 일반 독자는 이들의 수고와 헌신에 기대어 문학을 향유하고 있음을 부인해선 안 된다.

피츠제럴드와 헤밍웨이 등 오랫동안 영미문학을 번역해온 김욱동 명예교수(서강대)가 번역을 주제로 책을 출간했다. 『번역가의 길』은 작가이자 학자이며 번역가인 김욱동 교수가 번역에 관한 자신의 소신과 철학을 밝힌 책이다.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번역에 관한 여러 주제를 훑는다. 책의 구성은 이렇다. 번역의 의미와 성격을 가장 먼저 배치했고 여러 오역 사례를 실었다. 속담에서 드러난 성차별을 꼬집고 성경 번역의 긴요성을 논지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명대사를 일제강점기 이후 지금까지 국내에서 어떻게 번역해왔는지 추적한다.

저자가 소개한 고전문학의 오역 사례는 일반 독자가 놓치기 쉬운 부분이라 흥미를 끈다. 저자는 우리가 서점에서 쉽게 선택하는 피츠제럴드, 포크너, 헤밍웨이 번역본의 오역을 구체적으로 소개한다. 저자가 진단하는 오역의 원인은 여러 가지다. 그중 번역자가 원천어에 대한 문해력이 부족하거나 소설의 시대적·문화적·사회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가 대표적이다. 가령 무라카미 하루키가 번역한 『위대한 개츠비』와 『호밀밭의 파수꾼』은 가독성은 좋지만 정확성은 떨어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 한국 모 소설가의 『위대한 개츠비』 번역은 오역을 넘어 졸역 수준임을 여러 사례를 들어 증명한다. 잘 읽히는 유려한 번역은 정확성을 전제할 때만이 의미가 있음을 저자는 끊임없이 강조한다.

사실 잘 읽히는 번역과 정확한 번역 사이에 존재하는 긴장감은 독자들 사이에서도 뜨겁게 토론하는 주제다. 오래전 카뮈 번역의 올바름을 놓고 신생 출판사 대표가 국내 최고 카뮈 전문가에게 도전장을 던진 일이 있었다. 당시 많은 논란과 토론이 있었으나 결국 기존 권위를 전복하지 못한 채 싱겁게 끝이 났다. 그 사건은 번역에서 독창성보다 정확성이 더 중요하다는 당연한 원리를 독자에게 일깨웠다. 원문이 난해하면 난해한 대로 가벼우면 가벼운 대로, 즉 있는 그대로를 옮기는 게 가장 정확한 번역인 것이다. 16세기 번역 이론가 에티엔 돌레가 번역가로서 염두해야 할 가장 중요한 선결조건으로 '원천어와 목표어에 대한 완벽한 지식'을 꼽았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4장 「성경 번역에 대하여」 또한 흥미롭게 읽힌다. 사실 성경의 문체는 지나치게 예스럽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가장 많이 사용하는 성경은 '개역개정'이다. '개역개정' 번역 당시 보수적인 역자들이 문체를 조선어식으로 고집한 탓에 사어가 많고 의미가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에 개인적으로 '개역개정'을 기본으로 하되 명확하지 않은 부분은 불가피하게 주석을 보거나 '새번역'이나 '쉬운성경'을 참고하곤 한다. 한편 '새번역'의 경우 히브리어와 헬라어 원문에서 번역했고 쉬운 말로 되어 있어 의미 파악이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시편》을 전부 산문으로 번역해 가독성과 시적 느낌이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말씀의 음미성 차원에서 호불호가 갈리는 이유다. 신학적인 부분과 맞물려 있어 평신도가 뭐라 논설하긴 적절치 않지만 시대와 상황을 고려할 때 '개역개정'만 고집하는 게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드는 건 사실이다. 개신교단 전체를 아우르는 보편적이고 통합적인, 합의된 성경 번역에 대한 갈망은 지나친 욕심이자 환상일까.

서평을 정리하자. 작년 말 한강의 노벨문학상 쾌거에 온 국민은 열광했다. 평소 책을 거의 읽지 않던 사람도 서점에 나가 소설을 손에 쥐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노벨상 효과일 것이다. 한국 첫 노벨문학상 수상이라는 환호 속에서 놓치기 쉬운 헌신이 있다. 한강의 노벨상 수상의 성취 과정에 번역가 데보라 스미스의 수고가 있었다는 걸 잊어서는 안 된다. 그의 성실하고 적확한 번역이 없었다면 한국 작가가 쓴 한국어 소설의 노벨상 수상은 요원했을 것이다. 번역은 그만큼 중요하다. 어쩌면 우리는 작가의 글이 아닌 번역가의 글을 읽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번역의 현실과 중요성을 진솔한 에세이로 풀어낸 김욱동의 『번역가의 길』은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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