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
차인표 지음, 제딧 그림 / 해결책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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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배우 차인표의 첫 창작소설 데뷔작이다. 15년 전 발표한 소설 『잘가요 언덕』을 제목을 바꿔 재출간했다. 차인표는 97년 여름 고국을 떠나 70년 만에 필리핀의 한 작은 섬에서 발견된 훈 할머니에 관한 뉴스를 보며 슬픔과 수치심과 분노를 느낀다. 훈 할머니는 열여섯 꽃다운 나이에 위안부로 강제 징용되어 캄보디아로 끌려갔다. 소설은 그녀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담았다. 기구한 운명 가운데서도 양심과 용서와 사랑을 통해 극복해가는 잔잔한 인간상을 그렸다. 올해 영국 명문 옥스퍼드 대학의 아시아중동학부 한국학 필수 교재로 지정되어 화제가 됐다. 최근에는 모 예능에 소개되면서 베스트셀러 1위에 진입하기도 했다.

15년 만에 이 소설을 다시 잡았다. 당시 영화배우 차인표가 장편소설을 썼다는 소식은 솔깃했다. 연예인의 책 출간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포토집이나 에세이가 아닌 소설ㅡ그것도 장편ㅡ을 집필했다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개성 있는 연기를 펼치는 것과 소설이라는 상상력의 세계를 써내는 것은 전혀 다른 작업이다. 당시 연예인들이 이런저런 에세이를 쏟아내는 풍토가 있었다. 이에 책을 읽기 전 차인표 부부의 잉꼬 같은 부부애나 잦은 선행으로 굳어진 긍정적 이미지는 모두 간과하기로 했다. 오직 작품 자체만을 감상하고자 했다. 결론은, 참 잘 쓴 소설이(었)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1931년 가을 백두산의 어느 자그만 마을로 독자의 시공간을 옮겨놓는다. 호랑이 마을로 불리는 작은 마을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제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던 오욕의 때였다. 그곳에서 평화로운 삶을 사는 순진하고 마음씨 착한 처녀 순이. 포수 아빠와 함께 엄마를 죽인 원수 백호를 사냥하러 나갔다가 호랑이 마을에 안착한 용이. 일본제국주의 군인으로서 소대장의 지위로 호랑이 마을에 도착하는 가즈오. 이 세 명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가는 주인공들이다. 세 인물의 애절한 사랑과 엇갈린 운명이 뒤섞이며 소설은 절정을 이룬다.

소설 속에서 일본군 대위로 등장하는 가즈오 마쯔에다는 매우 인상적인 인물이다. 소설은 따뜻한 문체로 쓰인 이야기의 본류와 각 장마다 반복되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가즈오의 편지를 교차해서 들려준다. 순수한 애국심에 자원입대했지만 가즈오가 목도한 전쟁의 현실은 반인륜적 폐륜의 생생한 현장이었다. 가즈오의 내면에는 어머니에 대한 효심과 한 여인을 뜨겁게 사랑하는 진정성이 있었다. 양심의 문제에 깊이 고뇌하고 한 여인을 사랑한 나머지 죽음에까지 이르는 가즈오의 기구한 운명을 작가는 애절하면서도 차분하게 잘 그려냈다.

흥미로운 관점이 있다. 소설 속에서 인간의 시공간을 초월한 두 개의 시점이 존재한다. 순이가 용이에게 알려주고자 했던 밤하늘의 '엄마별'이라는 존재와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며 신적 권능으로 등장인물들의 시공간을 조망하는 '새끼 제비'가 바로 그것이다. 순이는 볼 수 있었지만 용이는 볼 수 없었던 엄마별은 일차적으로 모성의 상징적인 현현이다. 소설 전체의 서사적 관점에서 '용서'라는 찬란한 절대선을 이끌어내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이야기의 말미, 용이의 살아생전에는 볼 수 없었고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별의 실재가 자신의 죽음을 넘어 70년의 세월이 지나 순이에게 "따뜻하다, 엄마별."이라는 짤막한 고백으로 전해지는 모습은 이 소설의 가장 감동적인 명장면이다. 엄마별. 그것은 용서의 다른 이름이었다.

'새끼 제비'의 존재 또한 소설 속에서 특이하게 상징된다. 새끼 제비는 서사 안에 갇혀 있지만 동시에 위에서 서사를 조망해 내는 독특한 캐릭터다. 일본군의 동태를 살피고 순이와 용이의 러브 스토리를 응원한다. 인간의 악한 성품에 실망하는가 하면 한순간 하늘로 치솟아 시공간을 광각화하기도 한다. 어쩌면 새끼 제비는 작가 차인표의 작품 속 개입일 수도 있으리라. 소설 말미에 70년 만에 고향 호랑이 마을 찾은 쑤니(순이) 할머니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장면이 있다. 그때 파란 하늘을 가르며 날아가는 제비떼가 인상적으로 묘사된다. 어디엔가 있을 따스한 나라를 찾아 멀리 날아가는 제비떼의 모습은 이 세상 모든 치유되어야 할 자들을 향해 날아가는 작가 차인표의 또 다른 분신이지 않을까.

작가는 소설에서 의도적으로 존어체를 사용했다. 엄마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선생님이 학생에게 동화책을 읽어주듯 포근하고 따뜻한 문체로 이야기를 이끈다. 만약 존어체가 아니었다면 소설이 주는 감동은 희석되었을 것이다. 엇비슷한 이야기라 할지라도 문체에 따라 소설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진다. 용서하지 못함으로써 번민하고 비루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깨어지지 않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따뜻하고 겸손한 문체는 용기와 겸손이 필요하다는 작가적 메시지를 오롯이 전하는 외적 기능이 된다.

포근한 문체와 흡입력 있는 전개, 잘 짜인 서사와 명확한 메시지가 돋보인다. 차인표의 첫 소설 『언젠가 우리가 같은 별을 바라본다면』은 성공한 소설의 전형을 두루 갖추었다. 차인표의 문장은 공손했고 따뜻했고 평온했다. 차인표는 작가 후기에서 소설의 초고를 손볼 때 어머니로부터 들은 조언을 소개한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조언한다. "상상력은 중요하다. 그러나 사실을 배제한 상상력은 모래로 성을 쌓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 상상력과 사실은 종이 한 장 차이다. 작가 차인표의 상상력이 정지하지 않기를 기대한다. 그가 원하고 갈망하는 모든 상상력이 결국 사실이 되어 우리 앞에 당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한 마리의 '새끼 제비'가 되어 깨어져야 할 모든 용기 없는 자들의 전도자가 될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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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 상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정요석 지음 / 크리스천르네상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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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월한 신앙서적을 만났다. 정요석 박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 Ⅰ·Ⅱ』는 장로교회의 표준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이후 '웨민'으로 칭함)를 주해한 해설서다. 웨민 해설서는 시중에 많이 출간되어 있다. 로버트 쇼나 R. C. 스프로울의 책을 필두로 국내 출간된 해설서만 수십여 권에 이른다. 단언컨대 지금껏 내가 읽어본 웨민 해설서 중 최고다. 깊고 풍성하고 은혜롭다. 사역자와 평신도, 학생과 성인 모두를 아우를만큼 폭넓은 수준으로 쓰였다. 웨민을 딱딱한 교리적 관점을 넘어 우리의 삶까지 적용한 흔적이 엿보인다. 이런 귀한 책을 왜 이제서야 만났을까, 하는 자괴감이 들 정도로 눈부시다.

주지하다시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는 1647년 영국에서 여러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경건과 학식을 겸비한 121명의 목사와 신학자, 귀족과 하원의원 등 159명으로 구성된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Westminster Assembly, 이하 WA)가 5년 8개월간 기도와 금식을 동반한 마라톤 회의와 충분한 숙려 끝에 완성했다. 문장 하나하나 매우 신중하게 다듬고 수정하여 처음부터 아예 논쟁을 배태할 여지를 주지 않았다는 게 현대 신학자들의 일관된 견해다. 영국과 미국은 물론 미국에 영향을 받은 한국 장로교회의 공식적인 표준 문서로 지금까지 채택되어오고 있다.

교회에 새롭게 부임한 담임목사님 주관으로 웨민 교리 공부를 하던 중에 보다 깊은 흐름을 통찰하고 싶었다. 웨민 신앙고백과 소요리 문답은 이미 오래전 수차례 훑어본 교리서라 색다를 건 없었으나 무언가 '깊이'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가령 삼위일체와 예정론을 교리적으로 아는 것 이상으로 그것을 평소 내 삶과 언어에 어떻게 녹여내는가에 대한 방법적·언어적 고민이 있었던 것이다. 즉 뜬구름 잡는 신학 교리가 아닌 삶과 신앙의 실제적인 적용을 원했다. 이런 내 갈증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는 적확했고 탁월했다.

2권으로 구성된 책은 웨민 33장을 매우 자세히 살핀다. 1권은 '14장 - 구원하는 믿음'까지 다루고 2권은 이후 33장 끝까지 다룬다. 각 항의 한 문장 한 문장을 떼어내 깔끔한 개혁주의적 해석과 일반 신자도 이해하기 쉬운 비유와 설명으로 주해한다. 이 책의 탁월함은 신앙고백의 문장 독해만을 다루지 않는다는 점이다. 가령 웨민 8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두 본성(신성/인성)을 다룰 때에 "신성과 인성은 변환이나 혼합이나 혼동됨이 없이, 한 위격 안에서 분리할 수 없게 서로 연합되었다"는 문장의 주석 외에도 테스토리우스의 두 인격과 유티케스의 단성론의 문제점, 그리고 교리 논쟁의 역사적 전개 과정을 함께 다룬다. 그럼으로써 '칼케돈 공의회(451)'의 교회사적 유의미성을 독자에게 알기 쉽게 전달해 준다.

이 책의 또 다른 탁월함은 각 장을 다룰 때 연관성 있는 다른 장·항을 수시로 인용한다는 점이다. 이런 설명 방식은 웨민이 전체적으로 얼마나 유기적이고 통일성 있게 조직되어 있는지를 드러냄과 동시에 해당 장을 더욱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풀어내는 기술적 장치가 된다. 예컨대 소명, 중생, 칭의, 양자, 성화, 견인, 영화로 이어지는 구원론의 논리적 서정을 다루면서 '3장 - 하나님의 작정'과 '8장 - 예수 그리스도'의 주요 항들을 수시로 인용·반복하는 것이다. 독자는 전체에서 부분을 들여다보는 '전체 성경적' 안목을 고양할 수 있고, 매장마다 수시로 소환되는 앞선 장들을 반복적으로 읽으면서 교리 공부의 효율도 높일 수 있다. 근거 성경 구절을 직접 수록해 성경을 찾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은 덤이다.

두꺼운 책을 정독하면서 "교리가 이토록 은혜로울 수 있구나" 하는 감동과 도전이 적지 않았다. 문장 하나하나가 너무 은혜로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교리 학습은 앎의 영역을 넘어 실천의 차원에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하나님의 작정은 인간을 꼭두각시로 만드는 게 아니라 나 같은 사람조차도 구원의 은혜를 입었다는 걸 알려주기에 주변에 예수 믿지 않은 사람을 전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나를 올려놓는다. 모든 게 예정되어 있어 우리의 기도는 무의미한 게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에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통로가 된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래서 나를 기도하는 사람으로 각성시킨다. 자만과 교만은 줄어들고 겸손과 섬김이 증가한다. 교리가 삶을 바꾸는 것이다.

근자에 자유주의 신학이 득세하면서 개혁주의 신학을 고집하는 장로교회에서도 신자에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가르치는 교회가 많지 않다고 한다. 먹고살기 힘들고 멘토와 힐링을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죄와 회개는 따분한 얘기일 수 있다. 어린이 영어 학교나 부흥회와 같은 실용적이고 촉촉한 터치를 갈망하는 신자들이 많다. 교회는 양적 부흥을 위해서라면 일단 온갖 이벤트를 다하고 본다. 하지만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다. 더욱이 성경의 일부 구절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이단적 세계관에 함몰되는 경우가 많은 시대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항시 전체 성경(tota scriptura)과 함께 가야 한다. 그래서 개혁주의 신학(신앙)은 성경->신조->신학->신앙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보수적인 개혁주의 장로교 신자 중에서도 '이중예정'이나 '제한속죄'와 같은 교리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어하는 분들이 꽤 있다. 가령 제한속죄는 도르트 신조가 결의한 칼빈주의 5대 강령 중 하나로 '전적 타락', '무조건적 선택', '불가항력적 은혜', '성도의 견인'과 함께 구원론의 핵심을 이루는 교리다. 이 5대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의 원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을 인정하지 않고 시간의 문제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에 불가해한 신정론의 늪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웨민은 신론(2~5장)을 다룰 때 가장 먼저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방식(2장)을 다루고 그 후에 작정과 섭리(3~5장)로 넘어간다. 웨민은 그만큼 성경의 완벽함과 신자의 부족함 사이를 잘 가늠한다.

신천지나 알미니안이 요동치고 있는 혼탁한 시대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존재는 귀하다. 나는 목사, 장로, 집사뿐 아니라 교회의 가르치는 직분 모두, 즉 구역장과 교사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가르침을 신봉하고 순종할 것에 선서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고약한 사조가 교회 안까지 침범해 참된 진리를 허물어뜨리려 하는 세태가 정말이지 짜증 나서 못 견디겠다. 이럴 때 성경을 붙잡고 성령의 조명하심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한다. 그 거룩한 컨택의 건강한 안내서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놓여 있다. 그리고 그것의 가장 풍성한 강해서로 정요석 박사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삶을 읽다』가 놓여 있다.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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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공지영 지음 / 해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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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인 줄 모르고 구독했다. 원래 책을 읽기 전에 사전 검색을 하지 않는 편이다. 과거 작가의 에세이가 대부분 그러했듯이 그저 그렇고 그런 소소한 이야기 모음집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읽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어? 예루살렘에 간다고. 아차 싶었다. 그제야 책 표지가 보였다. 황량한 사막 위에 솟은 성스러운 교회 사진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결론부터 말하면 굉장히 감동적인 에세이다. 공 작가가 이렇게 산문을 잘 썼나. 오래전부터 작가의 팬이었지만 나름 객관적 거리를 유지해왔다. 조금은 냉정하다고나 할까. 소설가로서 공지영은 인정해도 산문가로서 공지영은 쉽게 인정 못했다. 픽션과 논픽션을 풀어내는 작가의 '글결'이 다르다고 봤기 때문이다. 근데 이번 에세이는, 너무 좋았다.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는 공지영의 예루살렘 순례기이다. 작가는 수년 전 모든 sns 활동을 접고 서울을 떠나 경남 하동군 평사리에 정착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주요 배경이 된 후 '문학의 성지'처럼 여기던 곳이다. 그곳에서 작가는 '더 이상 글을 쓸 수 있을까'라는 작가로서의 존재론적 균열에 빠진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있던 어느 날 한 후배의 부고를 접한다.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 오래전부터 동경해온 예루살렘 순례 길을 결심한 것이다. 예루살렘은 작가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끝났기에 가능했지만 돌아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발발했다.

작가는 요르단 암만을 시작으로 갈릴래아 호수, 요르단 강, 쿰란, 나자렛, 베들레헴, 예루살렘 등을 차례로 순례한다. 예수의 탄생과 성장, 고난과 죽음, 부활의 역사를 훑는다. 국경을 이동할 때마다 예수의 사랑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쟁 지역의 삼엄함을 목격한다. 여러 성소를 방문해 걷는 동안 성경을 묵상하며 거기에 자신의 삶을 포갠다. 작가에게 예루살렘의 글라라 수녀원은 특별한 곳이다. 그곳은 안정된 수도자의 길을 버리고 오직 예수를 닮고자 했던 샤를 드 푸코 성인의 흔적이 담겼다. 작가는 푸코 성인의 삶을 많은 지면을 할애해 추적한다.

작가의 대표 에세이 『수도원 기원 Ⅰ·Ⅱ』의 계보를 잇는 듯하지만 결은 다르다. 두 책 모두 기독교(가톨릭) 신앙을 기본으로 깔고 있다. 다만 『수도원 기행』이 외부로부터 제안받아 기획되어 기행문 콘셉트가 강한 반면 이 책은 자전적 성찰에 더 방점을 두었다. 작가 스스로 그렇다 할 동기 없이 무심코 떠난 여행이었다. 무엇보다 글쟁이로서의 존립 위기의 한가운데서 출발한 순례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로니컬하게도 이전보다 더 자유화한 작가적 고백과 성찰이 돋보인다. 미혹적 문장이 이끄는 울림이 대단하다. 완성형 에세이다.

예수의 길을 따라가며 작가는 한없이 낮아지는 자아의 현존을 느낀다. 작가가 전 인생을 통틀어 깨달은 '인간 인식의 불완전성'을 예루살렘에서 더욱 명징하고 밀도 있게 받아들인다. '내가 틀릴 수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 자기 자신이 알고 믿은 것이 실상 거짓과 위선에 가려져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안 충격은 비단 작가 혼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작가의 마음을 이해한다. 작가의 통찰을 재청한다. 인간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걸.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절대적 믿음의 대상은 오직 신밖에 없다는 것을.

15년 전이다. 작가와 서초동에서 술자리를 가진 적이 있다. 직접 만나 보니 '현실에 제법 화나 있는 여성 작가'란 아우라가 분명 있었다. 동시에 '작가라는 존재는 타자와 세계를 극히 세밀하게 바라보는구나' 하는 이미지도 강렬했다. 누구나 부조리를 안다. 비정의와 불공정을 목도한다. 못마땅하고 바꾸고 싶다. 하지만 들춰내기에 피곤하고 당장 이익이 되지 않기에 대부분은 그냥 넘어간다. 특별한 개입이나 혁명적 행동이 없는 한 이 세계ㅡ큰 사회이든 작은 조직이든ㅡ의 조악함과 비루함은 일반 사람에게는 크게 문제 되지 않는다. 그러나 작가는 다르다. 작가는 독자보다 불편하고 예민하다. 조명하고 들춰낸다. 아니 들춰내고야 만다. "꼭 말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문학의 임무"라는 소설가 조정래의 말처럼 그들은 현실을 비틀어 더 생생한 진실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때 나는 소설가 공지영에게서 그걸 생생히 느꼈다. 그리고 그해에 소설 『도가니』가 출간됐고 이듬해 그녀는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

책의 제목을 생각한다.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얼핏 보면 부정적인 뉘앙스가 풍긴다. 하지만 책을 읽은 사람은 안다. 외로움이 부정적인 걸 의미하지 않는다는걸. 외로움은 독특한 상태다. 인간의 본질이기도 하다. 꼭 필요한 무언가이다. 반드시 인정해야 하는 어떤 내적 체제와 같은 것이다.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자유를 관통해야 하듯 신에게 도달하기 위해서는 필히 외로움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것이 외로움이 가진 거룩한 비밀이다. 참된 고독에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공지영의 산문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를 자신 있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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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에게 희망을 (무선) 생각하는 숲 6
트리나 폴러스 지음, 김석희 옮김 / 시공주니어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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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읽는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의 풍파를 이겨낸 검증된 텍스트이기 때문이다. 동화에도 고전이 있다. 『어린 왕자』, 『아낌없이 주는 나무』, 『나의 라임오렌지나무』와 같은 책 말이다. 오랜 시간 동안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준 위대한 이야기들이다. 나에게도 어린 시절에 감명 깊게 읽은 특별한 동화가 한 권 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다. 초등학교에서 중학생으로 넘어가는 시기였던 것 같다. 집 책장에 꽂혀 있던 것을 당시 진지하게 탐독했던 것만큼은 선연히 기억한다. 이후 내 '신분이 바뀔 때마다' 반복해서 읽었다.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은 1972년에 출간되었다. 지난 50여 년간 17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권이 팔려나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다. 작가 트리나 폴러스는 올해 나이 아흔둘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반전, 환경, 여성 운동을 아직까지도 열심히 하고 있는 행동주의 작가다. 칼 마르크스가 주장한 대로 "세계를 변혁시키는 게 지식인의 의무"라고 한다면 폴러스는 그 가장 적확한 본보기다.

호랑 애벌레와 노랑 애벌레가 주인공이다. 애벌레 기둥에서 만난 두 애벌레가 고치를 지나 나비에 이르는 과정이 아름답게 그려졌다. 처음부터 두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길을 알았던 건 아니다. 애벌레 기둥에 올라섰다가 실패하기도 하고 거기서 떨어지는 애벌레를 보고 낙심하기도 한다. 그 여정을 통해 두 애벌레는 서로 믿고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하지만 생각이 달랐고 가는 길이 달랐다. 호랑 애벌레는 다시 기둥으로 향하고 노랑 애벌레는 홀로 남는다.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고치(번데기)의 과정을 반드시 겪어야 한다는 걸 노랑 애벌레는 알게 된다. 결국 노랑나비가 된 노랑 애벌레는 기둥 높은 곳에서 발버둥 치고 있는 호랑 애벌레를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그에게 나비가 되는 길이 무엇인지를 안내한다. 노랑나비의 인도에 따라 기둥을 내려간 호랑 애벌레는 노랑나비와 마찬가지로 고치의 과정을 통해 호랑나비가 된다. 둘은 함께 하늘을 훌훌 날아오른다.

이 짧은 이야기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는 자그만 애벌레의 모습이 고단하고 남루한 우리네 삶의 현실을 오롯이 은유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와의 체제 대결에서 승리한 건 제도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사회주의보다 더 나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성에 더 맞았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인간에게 효율과 경쟁만 강조하는 자본주의는 일부분 수정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을 알려준 시기다. 누군가를 이기는 것에 희열을 느끼나 정작 다른 누군가가 나를 이기는 것에 결핍을 느끼는 게 인간이다. 경쟁은 세상을 윤택하게 하나 우리를 구원해 주진 못한다.

영업 경력 20년 차다. 지금 회사에서만 18년을 보냈다. 회사 인트라넷에 영업사원별 달성률이 전면에 배치된다. 치열히 경쟁했고 도전받았고 자극받았다. 경쟁과 실적은 나를 나 이상으로 만들었지만 때로는 나를 나 이하로 만들기도 했다. 이제는 안다. 경쟁에 끝은 없다는 것을. 정상은 누군가를 밟고 이김으로써 오르는 게 아니라는 것을. 나 스스로 나비가 되어 훨훨 날아올라 도달하는 것임을. 그렇기에 책 속에서 현자(賢者)와 같이 등장하는 애벌레는 "어떻게 나비가 될 수 있어요"라는 노랑 애벌레의 질문에 "한 마리의 애벌레의 상태를 기꺼이 버릴 수 있을 만큼 날기를 절실히 바랄 때 이루어진단다"라는 멋진 조언을 남긴 것이리라.

또 하나의 감상이 있다. 제목은 '꽃들에게 희망을'이지만 정작 책에는 꽃 자체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애벌레에게 희망을'이나 '나비로 나아가는 희망을'이 맞는 제목 아닌가, 생각했던 때가 있다. 근데 지금은 그 꽃의 의미를 어느 정도는 알 것 같다. 꽃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책을 읽고 있는 독자, 즉 나 자신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책 속에서 약동하는 애벌레나 변이를 완성한 나비의 모습에 심취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정작 중요한 메시지는 꽃이란 존재에 있다. 나비의 행복은 정상에 오르는 게 아닌 꽃을 만드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꼭대기의 무의미함이 아닌 꽃 자체로서의 아름다움에 인간 삶의 궁극이 있다. 우리가 꽃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단순한 이야기와 가벼운 스케치의 그림으로 구성된 이 책은 매번 읽을 때마다 다른 울림을 준다. 읽을 당시 나이에 맞는 느낌과 감동이 전달된다고나 할까. 내 경험을 말하자면 이렇다. 소년 때에는 애벌레가 나비가 된 것 자체에 환희했다. 청년 때에는 두 애벌레 사이의 사랑에 감격했다. 나이가 든 후에는 나비가 되는 것의 본질을 궁구했다. 노년이 되어서는 또 어떻게 읽힐지 자못 기대한다. 서두에 언급했듯이 내가 이 짤막한 동화를 내 신분이 바뀔 때마다 읽게 된 이유다.

유튜브 영상을 기획하는데 함께 일하는 정 PD가 어린이를 위한 동화를 추천하자고 권했다. 어떤 책을 추천할까 고민하다가 책장 한구석에 박혀 있던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책장을 연 순간 몰랐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됐다. 지금으로부터 32년 전 누군가에 의해 선물 받은 책이라는 것을. 정갈한 손 편지로 쓰인 문구가 당시 지독한 사춘기를 겪고 있던 중학교 1학년의 내 모습과 오버랩됐다. 이후 기나긴 고치의 과정을 겪었던 내 젊은 시절의 드라마가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 기분 좋은 기억의 복기가 책이 주는 감동과 혼합되어 내 눈가를 적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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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평점 :
절판


한국에서 큰 사랑을 받는 작가들이 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 파울로 코엘료와 같은 작가들 말이다. 이들은 한국에서 유독 큰 사랑을 받는 해외 작가들이다. 국내 작가보다 더 큰 사랑을 받는 것 같다. 그중 하루키의 인기는 독보적이다. 거대한 선인세(先印稅)가 이를 증명한다. 선인세란 말 그대로 미리 주는 인세인데 출판사에서 총 판매량을 예상하고 주는 것이다. 2009년 출간작 『1Q84』의 선인세가 10억이라는 얘기가 정설처럼 돌았다. 그만큼 국내에서 믿고 보는 작가라는 뜻이다. 그 하루키가 6년 만의 신작을 들고 왔다.

신간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지난 2017년 출간된 『기사단장 죽이기』 이후 6년 만의 장편소설이다. 1980년 발표한 이래 책으로 출간하지 못한 중편소설을 다시 손보고 확장시켜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작가가 청년 시절에 쓴 작품을 43년이 지나 세계적인 작가가 된 시점에서 완성시켰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펜을 든 시점이 2020년이다. 코로나19의 창궐로 전 세계의 벽이 세워진 때였다. 작가는 왜 40년이 지난 시점에서 자신의 미완성작을 손봐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총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열일곱 살의 남자 고교생 '나'가 한 살 아래 여고생 '너'를 좋아하면서부터 시작한다. 둘은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 시상식에서 3등과 4등으로 처음 만난다. 고등학교 2학년 소년인 '나'와 1학년 소녀인 '너'의 이야기다. 너(소녀)는 나(소년)에게 "진짜 내가 사는 곳은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이고, 지금 현실의 존재는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대역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어느 날 돌연 사라져버린다. '나'는 좋아했던 소녀를 찾아 도시로 간다. 이후 소설의 시점은 벽 안팎이 교차되며 연신 판타지적 이야기가 쏟아진다.

2부에서는 중년이 된 현실의 '나'를 그린다. 오랜 시간이 흘러 중년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도시에 사는 소녀를 잊지 못한다. 출판사 일을 그만두고 지방의 작은 도서관으로 이직한다. 그곳에서 도서관장의 일을 하며 전임 관장인 고야스, 사서인 소에다, 매일 도서관에서 엄청난 속독술로 책을 읽는 소년 M, 역 앞 커피숍을 운영하는 여성과 교류한다. 하지만 현실의 '나'는 이곳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아니면 자신이 실제인지 그림자인지 확신하지 못한다. 이 모호한 '나'의 의식 가운데서 끊임없이 판타지적인 일이 펼쳐지고 이야기는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듯 보인다.

소설의 막장을 덮은 후 머릿속에서 감상을 정리하느라 혼쭐이 났다. 책을 읽은 후 되도록 남의 리뷰를 들여다보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인터넷을 검색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소설은 꽤 넓은 해석의 여지를 남겨두고 끝맺는데 이런 식의 열린 결말을 좋아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어떻게 감상하고 정리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특별한 건 없었다. 많은 독자들이 '벽'의 의미나 옐로 서브마린 소년(M)의 정체에 관심을 갖는 것 같았다. 내 감상은 달랐다. 나는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라는 소설의 첫 문장에 주목했다. '나'가 '너'를 그리워한다는 걸 핑계로 결국 '진짜 나'를 찾는 희미하면서도 열정적인 자아 찾기의 여정으로 소설을 이해했다.

한 사람의 인생에서 하나의 특별한 사건이나 경험이 평생에 걸쳐 영향을 줄 때가 있다. 그것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도 그런 기억이 몇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안양천 또랑에서 친구들과 팬티만 입고 가재를 잡았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당시 우리의 또랑 놀이를 지켜보던 어느 어른이 나보고 "귀엽다"고 격려해 주던 당시 그분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3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생생하다. 그 강렬한 기억에 의존해 내 자존감의 일부분이 만들어졌다. 소설 속 '나'는 돌연 소녀가 사라진 후 몇 번이고 기억을 재생하며 그 도시에 갈 수 있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곳에서 진짜 소녀를 만날 수 있기를 원했다. 이후 현실과 관념의 세계를 수시로 오가는 듯한 정신없는 이야기 전개는 모두 '나'에게 각인된 '너'를 찾는 갈망이었다. 전임 관장 고야스와의 신비한 접촉과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소년 M과의 소통이 나는 모두 '나'와 '너'와의 관계 속에서 읽혔다.

어쩌면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작가 하루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 작품일지 모른다. 40년이 지난 작품을 일흔이 넘은 노 작가가 다시 꺼내들어 손보고자 한 건 창작의 부담이나 한계에 직면한 하루키의 자기 위안적 자아 찾기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하루키의 문장은 여전히 유려하다. 하지만 평행 이동 식의 억지 같은 스토리 전개 때문에 집중하기 힘들었다. 비록 만족스럽진 않지만 안 쓰고 내버려 두면 후회할 것 같아 인생의 느지막에 겨우 쓴 듯한 느낌을 받았다. 노년의 하루키가 3040 시절의 자기 자신에게 훈수 두는 것 같기도 했다. 특히 작가 후기에서 "작가가 일생 동안 쓸 수 있는 이야기는 한정적이고 계속 변주를 줄 뿐"이라는 보르헤스 말을 인용하는 거 보면 하루키 스스로 슬슬 창작에 한계를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생각했다.

너무 많은 얘기를 하려고 한 것 같다. 소설 초반부터 본체와 그림자 얘기가 나오고 분리와 구별의 개념이 나와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의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를 떠올리기도 했다. 심오한 철학적 존재론이나 신학적 비유가 있지는 않을까 사유했다. 결론적으로 무의미한 천착이었다.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 유령으로 등장하는 고야스, 도시로 가길 원하는 소년 M 모두 주인공 '나'의 관념의 세계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관념과 상징으로만 존재하는 세계. 그것은 하루키의 과거였고 내면이었고 글쓰기였다. 나는 그렇게 해석했다.

언제부턴가 하루키 소설에 집중하기 힘들어졌다. 하루키가 변한 것인지 내가 변한 것인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나에게 『1Q84』 이후의 하루키는 예전과는 달랐다. 과거에는 항상 중2병이 든 것 같은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에 몰입이 잘 됐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아의 고독과 존재에 집착스럽게 함몰되어 있는 인물들에 공감이 잘 안됐다.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 쟤는 왜 저러지. 그런데 그게 왜 문제가 되는데 등등. 이런 딴지 심성이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내 감상을 옥죄었다. 하루키 소설을 읽을 때마다 드는 소설 구조의 기시감 같은 것도 사실상 일상의 나열이나 목적 없이 흘러가는 서사와 다름없었다. 분명 다른 소설인데 매번 엇비슷한 소설을 읽는 느낌이랄까.

나는 10년 전 하루키의 장편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를 극찬하며 '하루키의 나'에 대해 내 나름의 해석을 덧붙인 바 있다. 당시 하루키의 '나'를 세계 속의 나가 아닌 자아 속의 나로 규명했다. 하루키의 '나'는 아무런 목적 없이 무의미한 것에 지나친 열정을 보임으로써 어떤 의미나 목적을 갖고 있는 '너'에 대한 우월성을 확보하는 자세에 존재하는 초월론적 자기의식이라고 고찰했다. '나' 외의 객관적인 세계는 존재하지 않고 모든 것은 '나'의 내용에 지나지 않고 타인의 자아도 '나'가 의식한 내용과 나란히 주어진 것에 불과하다며 하루키 표 주인공에 깊은 공감과 매력을 피력한 바 있다. 하지만 지금은 견해가 달라졌다. 일본 경제 황금기 때 백인 흉내 내며 문화 향유하던 권태스러운 시대상에 구속된 고독하고 우울한 인물상 이상 이하도 아닌 것이다. 위대한 작가일수록 작품 속 '나'는 우울하거나 병들어 있지 않다.

내가 하루키를 높게 평가했던 건 문장 탓이 크다. 스토리와 메시지는 좋으나 오직 문장 때문에 싫어했던 김연수와는 완전히 반대이다. 하루키의 소설은 문장은 훌륭한데 비해 스토리는 정말 빈약하다. 이런 점에서 과거 내 리뷰에서 하루키에 대한 긍정은 지나치게 과대평가되었다. 이런 인식은 이번 소설에서 강하게 작용했다. 작가는 글쓰기의 물리적인 양과 노력에서 성실해야 하지만 작품 안의 서사와 플롯에서도 성실해야 한다. 이러한 작가의 내·외재적 성실함이 좋은 작품을 만든다. 아무리 판타지라 해도 서사의 인과성과 합목적성이 침해돼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 뜬금없는 사건으로 다른 사건을 대체하고야 마는 하루키 식 이야기 구조는 피로감을 준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deus ex machana)'의 잦은 출현이랄까.

독자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리는 것 같다. 근데 호와 불호 사이의 온도가 다르다. 호는 대부분 미지근한데 불호는 거의 뜨겁다. 인터넷 리뷰에서도 호평은 고만고만한데 악평은 나름나름이다. 하루키 표 상징은 이 소설에서도 반복된다. 사랑과 그림자, 도서관, 재즈와 클래식, 맥주와 와인, 파스타와 샐러드 등 하루키 작품 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이야기 곳곳에 출몰한다. 전에 비해 옅게 드러날 뿐이다. 그리고 섹스 신은 아예 없다. 그간 하루키를 관습적으로 좋아했던 독자들에게는 나쁘지 않게 읽힐 것 같다. 그러나 나에게는 무의미한 피로를 주었다. 길게도 썼다. 하루키 소설이 이렇게 지루한 적은 처음이다. 작가로서 할 얘기가 많았는지 예전엔 없던 '작가 후기'까지 보탰다. 특별한 내용은 없다.

하루키는 1949년생으로 올해 나이 일흔넷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일 순위 후보로 거론된다. 노벨문학상의 최근 트렌드가 특정 작품이 아닌 작가의 전 문학 일생에 주는 헌사적 성격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오랜 기간 동안 꾸준히 써온 하루키만큼 노벨상에 가까운 작가도 드물 것이다. 그러나 노년으로 갈수록 소설에 힘이 빠지는 건 아쉽다. 이런 맥락에서 하루키와 나 사이에 거대한 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준 건 이번 신간이 나에게 준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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