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쌀 한 알 - 일화와 함께 보는 장일순의 글씨와 그림
최성현 지음 / 도솔 / 2004년 5월
품절


어려움에 처했을 때는 '아, 수행하라는가 보다' 생각하고 자신의 삶을 돌아다보는 게 좋다. 그것을 장일순은 '바닥을 기어서 천 리를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그만의 언어를 써서 표현했다. 납작 엎드려서 겨울을 나는 보리나 밀처럼 한 세월 자신의 허물을 닦고 가다보면 언젠가는 봄날이 온다는 것이다. 겨울에 모가지를 들면 얼어 죽는다는 것이다.-63쪽

여汝보세요
평생을 피곤하게 가시는 당신에게 드리고 싶은 것이 마음에 있는데 표시가 잘 안 되네요. 오늘 보니까 피나무로 만든 목기가 있어 들고 왔어요. 마음에 드실지. 이 목기가 겉에 수없이 파인 비늘을 통해 목기가 되었듯이 당신 또한 수많은 고통을 넘기며 한 그릇을 이루어가는 것 같아요.-82쪽

"세상의 농심이란 농심은 모두 다 라면 속으로 사려져 버렸습니다."
한원식이 말하는 세태 비판이었다. '참, 말이 싱싱하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장일순은 한원식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중략)
"그렇게 옳은 말을 하다 보면 누군가 자네를 칼로 찌를지도 몰라. 그럴 때 어떻게 하겠어?
그땐 말이지, 칼을 빼서 자네 옷으로 칼에 묻은 피를 깨끗이 닦은 다음 그 칼을 그 사람에게 공손하게 돌려줘. 그리고 '날 찌르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냐고, 고생했냐'고 그 사람에게 따뜻하게 말해주라고. 거기까지 가야 돼."-116 쪽

한편 최병하는 이렇게 말했다.
"모월이란 '가부장은 가라'는 뜻이라고 봐도 돼. 가부장적 사고를 버리고 어머니 품 같은 자세로 살자는 거야. 어머니는 참 대단하지 않아?... 그 안에 세상이 다 안긴단 말이야. 그것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母였어요.
월, 곧 달은 칠흑같이 어두운 세상에서 길 안내를 하는 존재지. 술에 취한 놈이든 도둑놈이든 가림이 없지. 남녀노소 가림이 없어요.
이 두 가지가 합쳐서 모월이야. 이 모월에 들어오면 나갈 수가 없어. 편안하니까, 신나니까. 그런 원주를 만들자는 뜻이셨지."-119쪽

장일순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회를 변혁하려면 상대를 소중히 여겨야 해. 상대는 소중히 여겼을 적에만 변하거든. 무시하고 적대시하면 더욱 강하게 나오려고 하지 않겠어?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라 변화시키는 것이 중요하다면 다르다는 것을 적대 관계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 이 말이야."-156쪽

기자가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그런 혁명도 다 있습니까?"
"혁명은 새로운 삶과 변화가 전제가 되어야 하지 않겠소? 새로운 삶이란 폭력으로 상대를 없애는 게 아니고, 닭이 병아리를 까내듯이 자신의 마음을 다 바쳐 하는 노력 속에서 비롯되는 것이잖아요? 새로운 삶은 보듬어 안는 정성이 없이는 안 되지요."
장일순은 내개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서로 때를 닦되 버리는 일은 없어야 돼."-157쪽

"선생님, 꼭 책을 쓰십시오. 그렇게 해야 선생님의 훌륭한 말씀을 여러 사람이 들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장일순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건 말이지, 엄청난 일을 해놓고도 아무 흔적 없이 사라지신 분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지 니가 몰라서 하는 말이야."-183쪽

장일순이 있는 곳에는 산소가 있었다. 그 산소를 마시고 사람들은 잃어버리고 살던 청년의 가슴을 회복하고는 했다.
태백에서 건설업을 하는 박해성은 20대 후반에 장일순을 만났다.
"어렵지 않고 편안해서 좋았어요. 그러면서도 조심스러웠죠. 그래서 편안하면서도 바짝 깨어 있어야 했어요. 그 덕분인지 댁을 나올 때면 그때마다 새롭게 바뀌어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했어요."
박해성도 '장일순표 산소'를 마셨던 모양이다.-188쪽

그 아이에게 배우라는 것은 곧 그 아이의 때묻지 않은 마음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천진한 마음, 순수한 마음으로 글씨를 써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심중무물心中無物이라 했다.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마음속에 든 것이 있으면 편안하지 않다. 그것이 부끄러움일 때는 더욱 그렇다. 대통령이면 뭐하고, 부자면 뭐하랴. 가슴에 뭘 두고는 행복하지 않은 걸.-208쪽

'어디서나 제 안의 주인공을 잃지 않으면 어디에 사나 참되리라.'
는 임제 선사의 <임제록>에 나오는 유명한 글이다. 조주 선사는 '사람들은 24시간에 부림을 당하지만 나는 그 24시간을 부린다'는 글을 남겼는데, 어디서나 주인 의식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그런 뜻도 되리라. 24시간을 부린다...-25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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