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성석제 지음 / 하늘연못 / 2007년 6월
구판절판


중국이 스포츠 강국이 된 것은 국가적인 스포츠 육성책과 두터운 선수층, 포상제도와 국민의 관심 덕분이다. 무림고수는 아무 상관도 없다. '가들이 우얘든동' 우리에게는 '그렇다 카더라'가 있어 삶의 그늘이 시원해지고 우물은 깊어지며 숲이 우거진다. '그런대로 한 세상 지낼'만하게 즐거워진다.-85쪽

주목은 생장이 몹시 느린 나무다. 칠팔십 년을 자라도 키가 10미터가 안 되고 줄기의 지름은 20센티미터 정도다. 그렇지만 주목은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의 기본이 천 년인 '쳔년대계'가 있다. 백 년 정도만 참고 있으면 빨리 자라서 설쳐대던 나무들이 늙어 힘을 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생장이 빨라져서 마침내 주목은 산정의 제왕이 된다.-135쪽

추사는 귀양살이에서 서울로 돌아온 1852년부터 아버지의 산소가 있는 과천 청계산 자락 과지초당과 봉은사를 오가며 생애의 마지막을 보냈다. 추사의 만년작으로 대표적인 것은 봉은사의 현판인 '판전'으로 죽기 사흘 전에 쓴 글씨다. 같은 해에 쓴 글씨 '대팽두부大烹豆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자 원문 생략)
최고의 음식은 두부, 오이, 생강, 나물이요
최고의 모임은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손자로다.
......(중략)
이렇듯 명문가의 종손으로 태어나 살며 호의호식에 젖어 살던 추사가 인생의 종착점에 다다라 '최고의 음식은 두부...'라니 활연대오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랴. '대팽두부'는 노대가의 간명하고 고졸한 깨달음의 꾸밈없이 표현된 불후의 명품이다.-158-159쪽

엔도르핀과 같은 화학물질들은 뇌조직의 뉴런 사이를 오가면서 고통을 완화시키다가 고통의 원인이 줄어들거나 사라지더라도 신속하게 흡수되지 않고 남아 있게 된다. 이리하여 일시적으로 아편제가 과다한 상태가 되어 쾌감이 느껴지기 마련이다.
(중략)
이렇게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의 미량의 화학물질에 우리이 희로애락이 좌우된다는 것이 조금 허무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큰 문제는 뇌의 반복적인 '엔도르핀 과잉'으로 인해 운동중독이 된다는 것이다.-192쪽

로또에서 1등에 당첨될 수 있는 확률은 1/8,145,060이라고 한다. 내가 로또에 당첨되는 것보다 위대한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내 아버지의 정자이자 나의 한 부분이 언젠가 한 번은 일등을 했기 때문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니 평생 한 번도 일등을 못해봤다는 못난 생각은 하지 말자. 내 옆 사람이 그렇고 그 옆의 옆 사람, 옆의 옆 사람 모두 마찬가지다. 평생 한 번도 일등을 못해봤을 거라고 무시하지 말자. 그들은 우주의 별보다 많은 숫자의 분모를 거느린 확률을 뚫고 태어난 위대한 존재들이다.-195쪽

5월이었지만 계곡에는 지난 계절의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바위 위에 앉아서 밥을 비벼서 첫술을 입에 넣었다. 그 맛은 좀 무뚝뚝하다고나 할지 간소하다고나 할지, 세속의 식당 음식처럼 혀에 착 안겨오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평범한 밥 한 그릇에서도 문을 닫아걸고 치열하게 법과 자아로 가는 유위有爲만을 궁행하고 있는 절 식구들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누군가 자꾸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었다. 기다렸다는 듯 바람이 불며 소나무 가지가 들어 올려졌다. 멀리 하얗게 빛나는 희양산의 큰 바위가 바라다 보였다. 천년만년을 용맹정진으로 버텨온 큰 뜻 품은 사내 같은 그 견결한 이마를 바라보고 있자니 목이 메어왔다. 밥 때문이겠지. 나는 숟가락으로 희양산 깊은 속살에서 흘러 내려온 계곡물을 떠서 천천히 마셨다. 일평생 기억될 만큼 차고 달았다.-230-231쪽

처음 애저찜을 앞에 두게 된 채만식은 '애색'해서-마음이 애처롭고 안타까워서-애저찜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기야 영계백숙은 안 애색한가. 구워서 짝짝 찢어 먹는 명태 새끼인 노가리는? 새끼 이전 상태로 '우리가 일상 흔연히 감식하는 우유며 어란이며 하는 것도 다 따지고 보면 천하 잔인스러운 짓이요, 하필 애저찜만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아침에 여관집 마당으로 꼴꼴거리며 돌아다니던 도야지 새끼가 눈에 밟히고, 또 간밤에 술자리에 불려온 애기 기생이 노래를 한답시고 애를 써 쌓는다 시달림을 받는다 하는 게 생각이 나 젓가락을 놓아버렸다고 적고 있다.-248쪽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왜놈'의 '왜'를 '키 작은 사람'이라는 뜻으로 알고 있다 '왜소矮小'하다고 할 때의 '왜'와 倭(왜)는 분명히 다르다. 키가 작고 재빠르다는 왜인들의 인상이 우리나라 사람들 눈에는 작게 느껴졌을 수 있다. 속 좁고 자기 위주로만 생각하는 정신적 왜소증이 혼동을 초래하는지도 모른다.

남의 나라 땅에 슬쩍 발을 걸치고 동정을 엿보다 그 발을 근거로 자기 것이라 우기는 데 이골이 난 조상의 피가 아직 흐르고 있는 것일까. 왜인들의 도발은 그칠 줄 모른다. 댜오위타이섬을 두고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중국에서는 이런 추악한 일본인을 '르번꾸이즈'라고 부른다. '일본악귀' 정도의 뜻이다.-351쪽

"네가 버린 불씨 화재 되어 돌아온다!"
흔히 보듯 '내가 버린 불씨 화재 되어 돌아온다'는 것도 아니고 '네가 버린 불씨 화재 되어 너에게 돌아간다'도 아니었다. '네가 잘못하면 내가 손해 본다'는 이 청천백일하의 간단명료한 가치관! 나는 죽 끓이는 해녀들이 깜짝 놀라도록 큰소리로 웃고 말았다.-360쪽

사냥을 할 때면 개는 주인보다 최소한 네 배 이상의 거리를 뛰어다닌다. 주인보다 훨씬 더 뛰어난 감각과 기동력을 가지고 느려터지고 둔한 주인의 능력에 맞춰서 최선을 다해 사냥감을 추적하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사냥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인 순간의 주인공은 개가 아니라 주인이다. 주인이라는 인간은 개가 그토록 힘들게 추적해서 쏘기 좋도록 공중에 날려 보내준 사냥감을 놓쳐버리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개를 탓한다. 저렇게 똑똑한 꿩을 찾아내면 어쩌라는 거냐고.

한 해의 모든 순간이, 매분 매시 하루 한 주 한 달이 개처럼 충직하고 영민한 시간일진대 주인공인 우리에게는 그 순간을, 기회를 허공에 헛총질하는 식으로 허비하면 안 된다는 최소한의 윤리가 있다. 지금 '58년 개띠'들은 사회 곳곳에서 여전히 개발에 땀나게 뛰고 있을 것이다. 진희 씨, 영준 형, 성겸 형, 형근 형, 봉희 형..... 그들이 보고 싶다.-388-3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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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 2007-10-17 08: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수다스러운 책이죠.
어찌 그리 지식과 정보를 두루두루 얘기하는지.
얼마전 읽은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네요. ^)^

프레이야 2007-10-17 10:22   좋아요 0 | URL
입담이 어찌 좋은지 재미나게 읽었어요.^^

씩씩하니 2007-10-17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목에 대한 부분에서,,,가슴이 찡해요..참 슬픈 나무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늘..

프레이야 2007-10-17 13:39   좋아요 0 | URL
어머, 하니님, 저도 주목이 가장 찡했는데요^^
우린 너무 조급해 하고 갈급해 하는 건 아닌가 싶어요.
백년동안 때를 기다린 주목의 지혜가 저를 부끄럽게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