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령이 치과 예약되어 있는 날이다. 컴퓨터 방과후 수업까지 하고 온 아이를 간단히 뭘 먹여 치과에 데려갔다. 예약시간보다 20분정도 늦었다. 그래도 앞에 사람 진료가 밀려서 오히려 가서 더 기다렸다. 지난 주에는 썩은 어금니, 그것도 영구치가 밀고 올라오는데 그냥 두어 뿌리도 남은 것 없이 옆으로 완전히 누운 것 하나를 뽑고 왔었다. 오늘은 윗니 중 구멍이 뻥 뚫린 이를 치료하러 간 거다. 그리고 다른 어금니 하나도 뽑았다. 이미 영구치가 아래에서 밀고 올라오고 있어서 뿌리가 남아있지 않다고, 뽑아야한다고 했다. 그러마고 동의했다.
제법 의젓하던 아이가 진료대에 눕자 조금 겁을 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썩은 이 치료를 시작하는데 조금 있으니 아이가 소리를 조금씩 내기 시작했다. 그냥 얕은 신음소리 비슷한 것. 대기실에 그냥 앉아 있으라는 간호사 말을 옆으로 살짝 물리고 아이가 보이지 않을 만한 위치에 서서 치료하는 걸 지켜봤다. 옆에 가서 바들바들거리고 있는 통통한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런데 엄마가 옆에 있으면 더 엄살 부린다고 오지 못하게 했다. 게다가 의사 선생님은 아이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어차피 아프다는 건 알고 있는데 그렇게 엄살부리고 소리내어봐야 나을 거 하나 없는데 뭐하러 네 힘 빼고 그러느냐고, 엄살 부리지 말고 참고 있으라고, 그러는 거다. 엄살이라니, 그 정도 신음소리가 엄살인가.. 나라면 병원 떠나가라 소리질렀을 건데..
처음 몇 마디는 넘겼는데 갈수록 의사의 말이 좀 야박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냥 잘 참아보라고 토닥거려주면 좋을텐데 뭐하러 저렇게 쌀쌀하게 구는지 속이 무지하게 상했다. 치료는 생각보다 길었고 아이는 급기야 눈물을 줄줄 흘렸다. 결국 아이가 너무 아파하는 것 같으니까 그제야 마취주사를 놓았다. 그냥 참고 하면 될 정도로 아픈 건데 네가 그리 못 참으니 주사 안 맞아도 될 걸 놓는다, 이러는 거다. 내가 보기엔 아이가 너무 잘 참는 편이었다. 나라면 아, 나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난 겁이 나서 15년 전 치과 치료 받고 어금니 하나 씌운 이후로 한번도 치과에 가지 않고 있다. 아휴, 치과치료는 상상만 해도 너무 끔찍하다. 하기야 치과 뿐일까마는.
주사를 맞은 후로 아이의 신음소리는 없었고 한참 시간이 더 걸렸다. 치료를 마치고 일어서 나온 아이를 꽉 안아주고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고 눈시울이 촉촉해있었다. 그리곤 바로 수업시간 다 됐다며 그 상가 5층의 어학당으로 올라갔다. 아이를 보내고, 겉보기보다 훨씬 깊이 썩어있어서 치료시간이 길어졌다는 말을 듣고 의사에게 수고하셨다고 인사를 하고, 보험적용 안 된다고(썩은 이 치료가 보험적용 안 되나? 몰라) '얼마'라고 하는 대로 지불하고,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1교시 마치고 아이가 전화를 걸어왔다.
"엄마, 좀 아파."
"마취 풀려서 좀 아플 거야. 잘 참고 마치고 와. 알았지."
"응, 그런데 그 의사 선생님은 내 고통을 조금도 이해해주려고 하지 않대. 되게 까칠했어."
"그래 성격이 그런가 봐. 좀 까칠하더라. 그지? 그래도 우리 희령이 잘 참고 치료 잘 받던대."
난 아이의 저 말이 왜 그렇게 마음 아픈지.. 아이가 상처입은 마음이 더 아프다. 작은 구멍 아래로 썩어있는 부위가 깊고 넓었다니.. 양치질 잘 하고 앞으로 예방하는 게 더 낫겠지?, 라고 말해줬지만 속으론 아이가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기다 더 힘들었다. 큰 아이 어릴 적 안과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나고 또 다른 일도 생각나 잠시 망연했다. 고통은 나눠가질 수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아프지? 그래그래.. 조금만 견뎌보자, 이렇게 곁에서 그 고통을 지지해주는 것도 고통을 덜어주는 법이지 않을까.
뜬금없이 시 하나..
나무 / 천상병
사람들은 모두 그 나무를 썩은 나무라고 그랬다. 그러나 나는 그 나무가 썩은 나무가 아니라고 그랬다. 그 밤, 나는 꿈을 꾸었다. / 그리하여 나는 그 꿈 속에서 무럭무럭 푸른 하늘에 닿을 듯이 가지를 펴며 자라가는 그 나무를 보았다. / 나는 또다시 사람을 모아 그 나무가 썩은 나무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 나무는 썩은 나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