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서아 가비>를 리뷰해주세요.
노서아 가비 - 사랑보다 지독하다
김탁환 지음 / 살림 / 2009년 7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은 고종독살음모사건과 관련해 실제 김홍륙의 에피소드를 모티프로 했다. 김탁환의 '리심'에 러시아 역관 김홍륙과 고종의 대화가 나온다. 조선 제1호 커피애호가였다는 고종에게 러시아 초대 공사 베베르의 처형, 독일여성 손택Sontag(안토니예프 존타크)이 러시아 커피를 가져오는 대목이다. 거기 묘사된 러시아 커피는 '텁텁하고 씁쓸한 맛이 강하고, 깔끔하지 못하고 군데군데 잡스러운 냄새들이 섞여있'다.  

나는 러시아 커피를 마셔본 경험이 없어 모르겠으나 작가는 실제로 마셔보고 묘사한 것인지.. 아마 그렇겠지. '노서아 가비'에서 러시아 커피는 '리심'에서의 묘사와는 달리, 쓰고 강하지만 부드럽기도 한, 매혹적인 검은 액체다. 뻬제르부르그 사람들은 특별히 '사상보다도 예술보다도 돈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지독한 액체'라고 주장한다고(14쪽). 책표지는 내가 좋아하는 커피색 바탕이다. 표지의 카피는 노서아 가비가 '사랑보다 지독하다'고 씌어있다. 정말?^^

목차가 우선 재미있다.  커피는... 으로 시작해서 커피에 대한 13개의 정의를 내려 두었다. 통속적으로 들리지만 그리 동의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 적당히 눈길을 끈다. 그 정의들은 이야기의 내용과 대체로 관련이 있다. 내 리뷰 제목은 그 중 하나를 따왔다. 각 꼭지 앞에 다양한 커피도구와 커피종류를 그림으로 그려놓았다. 이런 도구들, 그림으로 봐도 은근히 멋있다. 이야기는 상당히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세밀한 풍경묘사나 외모, 심리묘사, 상황설명은 접어두고 말을 타고 달리듯 넓은 공간적 배경을 거침없이 단문으로 내달린다. 따옴표도 과감히 생략하고 인물간의 대화도 빠르고 단호하게 이어간다. 

비극적인 시대 구한말 조선 역관의 외동딸, 그녀는 살가웠던 아버지를 여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조롱鳥籠속에 갇혀 살진 않을 거라고 다짐한다. 아버지에게 전수받은 몇가지 재능과 삶의 기술을 밑천으로 러시아 이름 따냐로 다시 태어난 주인공. 영화로 이미 제작되고 있다는 후문을 듣고 보니 이 여인으로 어울릴만한 배우가 누굴까, 생각해보게 된다. 상당히 매력적이고 입체적인 성격이다. 게다가 광활한 러시아 숲을 유럽 귀족들에게 판 돈과 조선의 은행돈까지도 수중에 쥐는 사기꾼 중의 사기꾼이 아닌가. 강인하면서도 섬세하고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매혹적인 분위기가 연출되어야할 것 같은데. 뱃심 두둑하면서도 내면엔 외로움을 간직한, 그러나 결코 차갑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 바리스타는 물론 몇개 외국어, 말타기, 무술 외에도 사람을 부드럽게 압도하는 대화술을 가진 희대의 사기꾼으로 탄생되어야 할 것 같은데. ^^    

커피와 담배의 나날로 '감히 인생을 요약해버리는 여자의 속삭임'. 이렇게 커피의 정의가 시작되고 이야기는 과거로 직진한다. 따냐가 미국에서 1898년 대한제국의 황제가 된 고종의 편지를 읽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수미상관을 이룬다. 자칭 스토리 디자이너답다. 뉴욕에서 문학카페를 하는 그녀는 팩션으로 탄생한 통쾌경쾌한 사기극의 주인공이다. 나라가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그들, 따냐와 이반(두사람 모두 조선이름이 중요하진 않다)에게 인생은 배반과 음모, 협잡의 세계다. 이런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사기꾼의 철칙을 지키는 게 우선! 무엇보다 이익을 좇을 것, 쓸모가 없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가차없이 버릴 것,  진실해서도 정직해서도 안 되고 일이 끝나면 같은 곳에 머물러 있지 않을 것. 사랑의 감정에 잠시 흔들리던 따냐가 사태를 파악하면서부터 사건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영화화 된다면 따냐의 사기꾼 애인 이반 역할로 누가 좋을까. 사기꾼다운 그럴싸한 말솜씨와 사람으로부터 동정심과 신뢰감을 얻기 쉬운 인상과 진지한 태도를 겸비한, 준수하나 마른 체형의 남자로. 

상상의 여지를 두루 남겨둔 인물들을 상상해보는 것 이상으로 이 책을 읽고 떠올릴 수 있는 건, 누구나 갖고 있음직한 커피에 대한 소소한 추억이다. 뜨겁거나 미적지근하거나.. 마지막 장의 제목처럼 커피가 '끝나지 않는 당신의 이야기'라면 커피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나로서도 커피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일 테다. 어디서 누구와 어떻게 마시느냐에 따라 커피의 맛은 다르다. 내 몸과 마음의 반응도 다르다. 커피는 대화의 중개자로, 어색함의 해결사로 역할하는 경우가 많지만, 나에게 최고의 커피는 혼자 멍하니 마시는 커피다. 아침마다 부드러운 밀크거품을 내어 카페라떼를 만들어 마시고, 작가처럼 나도 길을 가다 커피향기가 나는 곳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들어가 카페라떼를 주문한다. 달리기 한 시간으로 소모되는 칼로리를 마시는 것이라지만 하루 두세 번은 마시니 그 칼로리가 어디로 다 가지...  

그래도 부드러운 거품이 입술에 살짝 묻는 그 커피가 제일 부담없다. 진한 풍미를 원할 땐 가끔 원두를 갈아 드립해서 마시는데 코와 입으로 들이키는 맛이 집안에 번지는 향과 함께 일품이다. 자신이 만든 커피가 세상에서 제일 맛나다고 뻐길 수 있으면 행복한 게 아닌가. 하지만 나도 자판기 커피나 커피믹스의 유혹에 약하긴 마찬가지다. 그건 마시고 나면 후회되는 때가 많다. 값싼 언어를 소모하고 났을 때 기진맥진 허무로 다가오는 자기혐오 비슷한 것. 그래도 진한 욕설을 싸구려처럼 퍼부었을 때 같은 쾌감은 있다. 그건 종이컵으로 마셔줘야 제맛이다. 가벼운 일회성, 값 이상의 따뜻함, 진하고 솔직하게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위장에서 부글거리는 느낌!

영화 '블룸형제 사기단'에서 고아 상속녀인 그녀 레이첼 와이즈의 대사가 문득 떠오른다. 속임 당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속여라... 지랄같은 세상, 자기혐오에 속임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외롭고 어려운 처지를 객관화하고 자신의 처지를 스스로 속여서라도 행복을 가꾸고 지키란 뜻이다. 물론 긍정적인 쪽, 생을 긍정적으로 밝게 사는 비법이었다. 그리고 완벽한 사기란 모두가 좋은 쪽으로 되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어떤 식의 대가는 반드시 지불되고, 누군가의 희생도 따르는 법.

<노서아 가비>는 암울한 시대의 물결에 빠져 허우적대지 않고 인물들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며, 가볍고 신나게 읽힌다. 행간에 상상력을 부여하면서 읽으면 즐거움이 배가될 것 같다. 자료를 두루 찾고 상상력을 발휘한 흔적이 많지만 치밀한 심리묘사는 고의로 생략한 듯하고 쿨하게 내닫는다. 고종의 아관파천 시절 임금에 대한 공격이 이반의 입을 빌어 신랄하다. 그나저나 러시아어를 모르긴 하지만 뿌쉬킨의 시를 러시아어로 낭독하면 어떻게 들릴까. 아름다울 것 같다.

13가지 정의 외에 내가 하나를 덧붙인다면, 커피는 집착이고 중독이다. 그러니 사랑보다 지독하다는 말은 맞는 게 되나? 작가는 따냐의 맘을 빌어, 집착은 곧 파멸이라고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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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9-08-12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는 집착이고 중독이죠. 요즘 커피가 대세인건가요? 부쩍 커피에 관한 책들 이야기가 많아집니다. 다 예전에 그 커피프린스 1호점 때문일까요? ^^

프레이야 2009-08-12 01:34   좋아요 0 | URL
커피, 일상적인 기호품이 되었지만 좀더 멋지게 마시는 방법은
정말 좋은 사람과 마시든지, 그렇지않은 다음엔
혼자, 지극히 혼자가 되어 마시는 커피가 최고일 것 같아요.
커피프린스1호점, 그런 가게 해보고 싶던걸요.^^

바람돌이 2009-08-12 01:35   좋아요 0 | URL
그래서 카페나 해볼까 하고 뛰어들었다가 다들 망한답니다. ㅎㅎ

프레이야 2009-08-12 01:38   좋아요 0 | URL
우헷~ 그러니까 말에요.
커피는 결국 파멸이라니까요 ㅎㅎ

후애(厚愛) 2009-08-12 0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언니는 아침에 형부 출근하고, 아이들 학교가고 없을 때 베란다에 서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시는 게 최고로 행복하다고 하네요. ㅎㅎㅎ 그런데 요즘은 아이들 방학이고 형부가 집에 있어서 커피 마시는 행복을 못 느끼고 있다고 투정부리는 언니에요. ㅋㅋㅋ 전 커피를 마시고 싶은데요. 편두통 때문에 못 마시고 있어요. ㅠㅠ

프레이야 2009-08-12 09:55   좋아요 0 | URL
아아~ 저랑 아주 비슷해요.
아침 나절 조용한 때 혼자 음미하는 커피^^
커피가 편두통에 안 좋은가 보네요.ㅠㅠ

穀雨(곡우) 2009-08-12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에 묻은 커피맛이 에스프레소처럼 깊고 진하네요.
커피 좋아라하는 사람은 대개 다 비슷한 모양입니다.
맛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하고 향기에 취하니...
멋진 리뷰, 인상적입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자주 들르도록 하겠습니다.

프레이야 2009-08-12 09:56   좋아요 0 | URL
곡우님 반갑습니다. 읽어주셔서 고맙구요.
에스프레소 좋아하시나 봐요.^^

카스피 2009-08-12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서아 가비라 책 제목이 재미있네요.근데 노서아는 알겠는데 가비는 무슨 뜻일까요?

프레이야 2009-08-12 09:57   좋아요 0 | URL
가비는 '커피'요^^
어젯밤 비가 많이 내리더니 아침엔 그치고 하늘이 좀 흐려요.
좋은 하루 보내세요. 참, 모닝커피는 하셨어요?

stella.K 2009-08-12 1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셨군요.
그렇다면 일전에 저랑 나눴던 의문을 푸셨겠군요.ㅎㅎ
근데 별점을 보니 그다지 프레이야님 마음엔 쏙 들지는 못했나 봅니다.
저는 나름 좋았는데. 하긴 이 책도 호불호가 좀 나눠지는 것 같더라구요.^^

프레이야 2009-08-12 10:46   좋아요 0 | URL
네네 알게되었지요. 근데 카페라떼가 칼로리가 높다는 건 그전에도 알고 있었어요.
전 다른 이유가 있는 줄 알았지요.ㅎㅎ
전 하루에 2-3잔 카페라떼 마시고 커피믹스도 종종 마셔요.
별셋은.. 술술 잘 읽혔고 재미도 있었는데 좀 미진하단 느낌이 들었어요.
작가의 개성으로 보면 무리없이 좋구요.^^

반딧불이 2009-08-12 1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도 추적추적 내리고 커피 생각이 간절한 날인데...프레이야님의 리뷰까지 그야말로 뽐뿌질을 하는군요. 두드러기야 나든 말든 일단 한잔 마셔야겠습니다.(마시고 두드러기 창궐하면 프레이야님 덕분임다~)

프레이야 2009-08-12 22:43   좋아요 0 | URL
앗, 두드러기요? 커피 알러지 같은 게 있나요?
우야튼 창궐하지 않아야할텐데요 ㅎㅎ

비로그인 2009-08-12 1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 커피는 지나간 옛사랑에의 그리움이려나요?
한때는 아침에 커피 한잔 못마시면 어떻게 사나..하던 때가 있었는데 위가 나쁜고로 이제는 점심 먹고 나서 까페 라떼 믹스 반개에 허쉬쵸콜렛 한 알이 다네요. (지금 마시는 중이랍니다)



프레이야 2009-08-12 22:45   좋아요 0 | URL
저도 위가 징후를 보이면 하루정도 끊었다가 다음날 또에요.
점심시간 마시는 커피군요. 초콜릿으로 카페인 보충? ㅎㅎ

무스탕 2009-08-12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김탁환의 글은 처음 읽었는데 과연 술술 읽히는구나.. 생각은 들더군요. 그리고 전작들도 이런 스타일인가 궁금도 하고요.
전 이반이 젤 궁금했어요. 도대체 이 남정네의 몇%가 진실일까.. 싶은게요.

프레이야 2009-08-12 22:48   좋아요 0 | URL
이반, 영화로 태어나면 꽤 매력남일 것 같지 않던가요?
살아남은 따냐보다 비극적이기도 한 인물이니까 더 연민이 가는 남자 같다고 할까요^^
진실은 글쎄요.. 전 1%정도이지 않았을까 싶어요.ㅎㅎ

맥거핀 2009-08-13 0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탁환 작가는 다른 건 잘 모르겠고..참 재미있게 써요.
(몇 개 읽다보면 패턴이 매번 비슷해서 살짝 질리기도 하지만요.)
러시아 커피..어떤 맛일지 궁금하네요. (커피를 안 마시는 1人..;)

프레이야 2009-08-13 09:59   좋아요 0 | URL
네, 이이기꾼답더군요.^^
근데 그 좋은 커피를 안 마시는군요.ㅠㅠ

같은하늘 2009-08-14 02: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탁환 작가님이 책을 재미나게 쓰신다니 급 관심이 가긴하는데...
저도 커피를 안 마시는지라 커피에 열광하시는 분들의 마음을 잘 몰라요...^^

프레이야 2009-08-14 07:42   좋아요 0 | URL
네, 재미있게 읽혀요.^^
같은하늘님도 커피를 안 마시는군요. 이게 중독성이라..ㅠ

순오기 2009-08-15 0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실을 안 다녀서 댓글이 늦었어요~~ 이 책 궁금해요. 언젠가는 보겠지만...^^
커피 끊은지 1년 반쯤~ 집에서는 안 마시고 나가서 마실 기회되면 마시는 정도니까 완전 끊었다곤 말 못해요.ㅋㅋ

프레이야 2009-08-15 13:14   좋아요 0 | URL
이 책, 재미있게 읽혀요. 좀 아쉬운 점도 있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