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15. 폴 리쾨르의 제안을 따라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사유는 권력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반감과 결부되지 않기 위해, 시작 단계에서부터 우리를 불관용에 대한 거부로 이끕니다. 그리고 불관용에 대한 거부는 분노의 샘을 마르게 하여 사유를 관용으로 나아가게 하지요. 그러므로 관용은 어떤 대상들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견딜 수 없음Intolerable’과 불관용을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견딜 수 없음’은 헤겔적 의미로 불관용의 ‘이중 부정’의 산물로서, 관용이 승리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지요.) 불관용에 대한 거부로서의 관용은, 얼치기 관용이 승리했을 때 생기는 ‘무관심’이라는 사유의 덫을 유발하지 않습니다.
사유가 절 행복하게 해주었을까요? 어떤 답변이든 단호하게 말한다면 정직하지 못한 것일 테죠.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사유는 가장 견디기 어려운 지루하고 혐오스러운 조건에서도 편안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유는 최후의 의식을 위한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지요.
p120. 당신의 텍스트는 독자들에게 일방적으로 말을 한다기보다 독자와 대화를 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미하엘 하네케가 언급했던, 영화와 관객 사이의 관계와 유사해 보입니다. 그는 관객에게 숟가락으로 떠 먹여주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영화의 의미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관객에게 부여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은 영화 속에서 어떤 것들은 설명하지 않고 남겨둔다고 합니다.
p121. ‘질문의 저주’에 대해 모리스 블랑쇼는 아주 유명한 답변을 남겼습니다. 의문 품기가 금지되고 의문 자체를 간단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자유는 끝이 난다는 거죠. 우리는 지속적으로 의문을 품는 한 자유롭고, 더 이상 의문을 갖지 않으면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p123. 독자나 관객의 능력을 박탈하지 않고 그들의 능력을 향상시키려는 모든 사람은 플라톤이 말한 동굴 거주자의 경험을 염두에 두고 시작해야만 합니다.
p125. 사회학 덕분에 행복하셨습니까?
괴테가 제 나이쯤 되었을 때, 어떤 이가 그에게 행복한 삶을 살았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지요. “그럼요. 행복한 삶을 살았지요.” 그리고 바로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온전히 행복했던 한 주일은 기억할 수 없군요.”
p134. 참된 민주주의의 열정적인 옹호자인 코르넬리우스 카스토리아디스는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질문 자체를 그만두는 것이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이며, 질문을 그만두면 우리는 참된 민주주의로부터 멀어지게 될 것이라고요. 전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p142. 요컨대 홉스적 질문이란, 해야 한다고 이미 정해진 것을 인간이 행하면서도 마치 의지에 따라 행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만드는 방법에 관한 문제이다.
제프리 알렉산더가 <사회학에 대한 현대적 입문>에서 제시한 실마리를 취하자면, 사회학의 미래는 인간에게 자유를 제공하는 문화정치학으로서 사회학을 다시 정립하고 부활시키려는 노력에 달려 있습니다.
이러한 경로에 도달하는 방법, 따라야 하는 전략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통념이나 ‘행위자의 지식’과의 끝없는 대화에 참여하는 것일 겁니다. 물론 이때, 세넷이 제안한 비공식성, 개방성, 협력이라는 교훈을 따라야 하죠. 제가 반복해서 강조하지만, 최근 세넷이 ‘휴머니즘과 그 현대적 의미'에 관해 쓴 에세이에서 제안한 이 세 가지 교훈은 철저하게 흡수하고 확실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비공식성’이란, 대화의 규칙이 미리 정해져 있지 않고 대화 과정을 통해 비로소 만들어진다는 뜻입니다. ‘개방성’은 어느 누구도 자신만이 옳다고 확신하는 진리를 갖고 있거나, 오로지 타인을 납득시키겠다는 태도를 지닌 채 대화에 참여해서는 안 됨을 뜻합니다. ‘협력’은 대화의 모든 참가자들이 교사이자 동시에 학생이라는 점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대화의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지요.
p145. 은유는 그레고리 베이트슨이 말한 ‘제 3의 학습’ 상황에서만 정당성을 지닙니다. 이미 확립되어 있는 개념의 네트워크가 새로운 현상을 포착하기에는 충분하지 않거나 설익었을 때, 그러한 개념의 네트워크를 새로운 인식론적 틀에서 재조립하여 눈에 띄지 않던 특성들을 두드러지게 할 필요성이 있을 때 말입니다.
리이트 밀즈나 어빙 고프먼이나 로버트 니스벳 등 당신들이 사례로 들었던 학자들은 이러한 의도를 지니고 있었지요.
은유는 사유의 과정에서 연쇄적으로 진행되는 생각과 순간을 서로 연결해주는 수단입니다. 새롭게 주목되기 시작한 현상을 명명할 수 있는, 가능하고도 유일한 두 가지 방법 중 하나를 대표하지요.
p149 은유적인 병치는 다른 효과를 발휘하기도 합니다. 의도하지 않았던, 그래서 인식을 위해 별 쓸모도 없고 해로울 수도 있는 효과들이죠. 은유의 대상이 가진 많은 특징들이 눈에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은유를 통해 대상의 유사성은 암시되지만 동일성은 드러나지 않는 거죠. 유사성이 암시되는 경우에도 그 차이들은 부정되지 않고 단지 우회될 뿐입니다. 즉 ‘하위 리그로 강등’되는 거죠. 은유는 부분이 전체를 나타내는 것이자 전체가 부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두가지 적용 범위의 형태를 변형시켜, 존재하는 유사성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새로운 ‘제3의’ 대상을 불러냅니다.
p152. 짐멜은 그의 저서 <렘브란트: 예술철학에 대한 에세이>에서, 렘브란트 회화의 분명하지 않은 윤곽과 흐릿한 경계선, 그에 따른 반향의 풍부함을 언급했습니다. 그러면서 회화의 표준에 대한 렘브란트의 명백한 반란을 칭송했지요. 짐멜은 이러한 반란을, 화가가 그리고 있는 대상(인간!)의 참된 개별성을 포착하려는 화가의 열망이 드러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대상의 참된 개별성은 단순히 인간의 개별성이라고는 할 수 없는 ‘독특한 특징’들을 마냥 재생산해서 쌓아올린다고 해서 도달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인간의 경험에 대한 묘사는 명확성이라는 과학적 표준을 충족시킬 수 없습니다.
p153. 짐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술의 본성이 완전하고 철저하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우주의 구성을 목표로 삼고 있다면, 역사적으로 주어진 예술의 모든 형식은 이 목적에 단지 부분적으로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요. 역사적으로 유한한 그 어떤 예술 형식도 세계의 총체성을 포괄할 수는 없다는 거죠. 은유는 사유의 좋은 요소입니다. 은유는 의도와 수행 사이의 변증법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면서, 결국 그것이 드러낸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p155. 스파드는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개념 성장의 은유적 뿌리>
(안나 스파드가 바우만 딸이었다니!)
소리가 음악을 구성하는 요소이듯 언어는 개념 형성을 위한 구성요소이다. 언어는 단순히 이미 만들어져 있는 이념들을 포착하기 위한 도구라기보다는.....새로운 개념들이 창조되는 수단에 가깝다. 언어는 우리가 각자의 경험을 조직할 때 사용하는 개념적 구조의 전달자이다. 라코프와 존슨이 이미지 도식이라고 부른 것 이외에 우리가 세계를 지각할 수 있는 수단은 없다. 우리는 언어를 하나의 맥락에서 또 다른 맥락으로 옮겨 놓을 때, 언어-의존적이고 구조에 의해 강요되는 이미지 도식을 수행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은유에 대한 최신의 연구가 도달한 가장 중요한 메시지에 따르면 언어, 지각, 지식은 서로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p160.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는 그의 책 <역사: 최후 이전의 최후의 것들>에서, “편협한 안전”은 “전 세계적인 혼란”으로 향한 길을 제공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크라카우어는 “분명하게 고정된 모든 것을 공포스러워했던 ” 에라스무스를 칭송합니다. 에라스무스는 “진리가 도그마가 되는 순간 더 이상 진리일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크라카우어는 이렇게 주장합니다. “서로 경합하는 여러 원인들 가운데 어떤 것도 논쟁을 끝내는 결정적인 것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사람은 “가능하다면 궁극 원인이라는 개념에서 벗어나서 궁극 원인 개념 자체를 폐기할 수 있는 사유와 삶의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요.
p165. 시간이 흐르면서 ‘현대성’은 전설 속 프로테우스처럼 그 모습을 바꿉니다. 얼마 전까지 ‘포스트모더니티’라고 호칭되었던 것, 그래서 제가 그 핵심을 집어 ‘유동적인 현대성’이라고 부르기로 한 것은, 변화야말로 유일한 영원성이며 불확실성이야말로 유일한 확실성이라는 확신이 커졌기 때문입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저는 ‘단단함’과 ‘유동성’을 이분법적인 어려운 수수께끼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 이 두 가지 조건은 서로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는, 변증법적 동맹의 쌍이라고 간주합니다. (장 프랑스와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해지지 않고서는 현대적일 수 없다’고 했을 때는 아마도 이런 종류의 동맹을 염두에 두었을 겁니다.) 단단한 사물이나 상태를 추구하면 역으로 움직임이 유발되고 유동적인 상태에 빠지게 되는 일이 흔하지요. 유동성은 단단함의 적이 아니라 단단함을 추구했기에 나타난 결과입니다. 단단함 추구가 없었더라면 유동성도 태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p168. 파우스트는 아름다운 순간을 정지시켜 영원히 그 순간에 머무르고자 했다가 지옥에 대한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혔지요. 사르트르는 이러한 공포를 추적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끈적끈적한 물체를 만졌을 때의 본능적이고 원초적인 적대감까지 추적했지요. 사르트르가 이러한 공포는 증상적으로 보자면 인간이 유동적인 현대의 문턱에 들어섰기에 느끼는 공포라고 설명될 수 있습니다.
p174. 하지만 어떤 단어들은....아주 즙이 풍부한 단어들이 있는데요. 이러한 단어들은 듣는 사람의 상상력에 호소하면서 어떤 이미지를 환기시키고 자극합니다.
p175. 현대적 정신의 탄생의 고통에 대한 날카로운 아포리즘을 남겼던 리히텐베르크는 오래전에 이러한 곤경을 예견한 바 있습니다. 이미지가 인간의 세계에서 홍수를 이루기 시작해 인간간의 언어 능력이 익사 상태가 되었다고요. “단어 속에서 감각이 표현되는 것은 단어 속에서 표현된 음악과도 같다.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은 표현되어야 하는 사물과 충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를 원하는 시인은 독자를 곧장 그림으로, 그림으로 표현되는 사물로 이끌어야 하는 것이다. 그려진 풍경은 즉각적인 기쁨을 제공하지만, 시로 표현되는 풍경은 우선 독자들 각자의 머릿속에 그려져야만 한다.”
p177. 사회학자가 대화를 나누면서 수행해야 하는 이중의 역할이 있습니다. 사회학은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익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익숙하도록 해야 하죠. 사회학자가 이 두 가지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각자 알아서 수행하도록 기대 또는 강요되는 직면한 과제에서, 각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요인이 무엇이고 종속시키고 있는 요인이 무엇인지를 알아채고 명료하게 드러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대화는 매우 어려운 기술입니다. 이 대화는 논쟁에서 이기거나 자신의 관점을 관철시키기보다는 문제를 명료하게 만드는 데 상대방도 동참하도록 이끄는 것을 포함합니다. 대화에 참여하는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오히려 다양화하는 것, 모든 대안을 경시하지 않고 가능성 있는 결과를 확장시키는 것, 대안적 관점을 꺽어버리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고 다함께 이해를 추구하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대화를 지속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고무되어야 합니다.
p183. 프리드리히 빌헬름 셸링은 시작이 마무리될 때 ‘회고적 충격’이 될 것 이라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시작은 마지막 지점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분명하지 않지요. 시작 이전에 있었던 것들은 언제나 시작의 결과를 통해서만 모습을 드러냅니다.
우리는 셸링의 이러한 주장에, ‘분명하지 않은 것’의 ‘드러냄’은 단 한 번의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원칙상 영원한 과정이라는 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래의 뜻과는 모순되게 ‘과거’의 내용은 지속적으로 재평가되고 재편됩니다.
p184. 아주 오랫동안 저는 프로이트의 견해를 따라, ‘문명’이란 일종의 대립되는 요소들 사이의 타협 과정이라고 여러 차례 주장해왔습니다.
p186. 역사의 진행이 보여주는 ‘진자운동과 유사한’ 궤적 때문에, ‘앞으로 가는 것’과 ‘뒤로 가는 것’ 혹은 ‘유토피아’와 ‘노스탤지아’ 사이에는 사실상 혼동을 불가피하게 배태하고 있는 밀접한 유사성이 있습니다.
p202. 한나 아렌트는 “사유는 인간의 행위 가운데 가장 고독한 것”이라는 말을 꺼낸 적 있는데요, 개인적 경험에서도 저도 그러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p206. 어떤 질문에 대해 긍정적인 대답이든 부정적인 대답이든 양자 모두는 서로 반대되는 상대방 주장의 설득력을 꺽을 수 있을 정도로 설득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철학의 방법이지요. 이러한 능력에 관한 바츨라프 하벨만큼 좋은 사례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하벨은 생각을 통해 세계를 변화시키는 뛰어난 기술의 소유자였습니다. 미래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게 될지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또한, 어느 누구도 국민들이 그 다음해에 어던 종류의 노래를 기꺼이 부르려 할지 미리 말할 수 없다고 정확하게 덧붙이기도 하였죠.
p207. 리얼리티와 그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 사이의 긴밀한 연관은 단지 가정이 아니라 인간 실존 조건의 불가피한 속성입니다. 만약 당신이 하이데거의 용어를 선호한다면, ‘세계 –내 – 존재’라는 인간의 특별한 양태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체험된 세계’인 생활 세계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활 세계는 인식론뿐만 아니라 존재론, 리얼리티와 리얼리티에 대한 지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문제가 되고 있는 쟁점은 세계에 대한 지각의 변화, 그리고 이를 통해 리얼리티 속에서 원하는 변화를 유발할 수 있는 실현 가능성으로 압축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세계에 대한 지각을 변화시킴으로써 리얼리티를 변화시키는 것’이지요.
다시 하이데거의 용어를 사용한다면, 현실을 구성하고 있는 단편들이 수중에zuhanden 있는 상태에서 눈앞에vorhanden 있는 상태로 바뀜으로써 목적 지향적인 행위의 대상으로 전환될 수 있는 기회가 높아지는 것이지요. 저는 인간 세계를 ‘통념’의 비가시성으로부터 끄집어내어 관심의 초점이 되게 하고, 주목되는 영역이자 의식적 행동의 현장으로 바꾸어놓는 소명을 지닌다고 믿습니다.(통념이란 심사숙고되지 않는 공통의 감각이자 지식이며, 우리는 흔히 사유할 때는 통념을 사용하면서도 통념 자체에 대해서는 거의 사유하지 않지요.) 친숙한 것을 낯설게 하고, 문제되지 않았던 것을 문제로 삼음으로써 말입니다.
p211. 우리 시대의 ‘위험’을 선구적으로, 그리고 주도적으로 탐색해온 중요한 이론가 울리히 벡이 지적했던 것처럼, 현대성이 시작될 때부터 지식은 “개연성의 의미론적 지평 내에서, ‘알지 못함’과 혼합”되어 있습니다. 벡의 주장에 의하면, 과학의 역사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는 첫 시도인 확률 계산법의 탄생에서 시작”했지요. 그 이후 ‘위험’이라는 범주를 통해 “통제 가능성이라는 오만한 가정”의 영향력은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p213. ‘위험’이라는 범주는, 자연적인 환경이 무조건적 규칙성에 속박될 수 없음을 알려주었습니다. 선험적인 투명성과 완전한 예측 가능성이라는 이상과는 달리, 확실성이라는 조건에 보다 근접할 수 있는 가능성은 오히려 축적된 지식의 실천적이고 기술적인 능력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데 있다는 겁니다.
p214. 즉 사건들의 개연성이 미리 결정되어 있으며 정밀하게 조사, 탐구, 평가 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는 가정 말이죠. 물론 이러한 가정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음이 분명해졌지만,‘위험 계산’이라는 전략은 여전히 매력적인 제안입니다. 하지만 이 매력적인 전략은 완전하고 오류없는 확실성이 가능하다는 약속, 또는 그러한 미래를 예측하거나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주는 정신적 위안으로 전락했습니다.
조르주 와겐버그는 학자적인 지혜로 오늘날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습니다. (그의 책 <메두사의 영혼: 세계의 복잡성에 대한 이념>) “방정식의 해결책은 여러 가지로 갈라질 수 있지만 단지 하나의 해결책만이 정확하고, 그것만이 체계의 리얼리티를 반영한다. 문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아는냐는 것이다. 우연이 그것을 결정한다.....
존 그레이는 이미 수 십년 전에 이렇게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주권국가의 정부는 시장이 어떻게 반응할지 미리 알지 못한다...국민국가의 정부들은 1990년대에 멋도 모르고 행동했다.”
p220 사회 조직의 ‘형태론’에 있어서의 급진적 변동 또한 사영화로 인한 또 다른 결과입니다. 가장 근원적이고 극적인 변화는 ‘생산자 사회로부터 소비자 사회로의 이행’입니다. 비판이론은 생산자 사회의 시기에 가장 왕성하고 열정적이며 생산적인 사간을 보냈지요.
p221. 오늘날 ‘프레카리아트’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대체하고 있습니다만, 프레카리아트는 그러한 역할을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박탈되고 강등되고 고통 받고 굴욕당하고 있는 모든 인간을 총칭하는 포괄적인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p224. 경고음이 필요할 때 경고음을 울리는 것은 당연히 지켜야 할 약속입니다. 심지어 그 경고음을 들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위대한 폴란드 사상가이자 시인인 체스와프 미워시가 수십 년 전에 언급했던 말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세계는 부조리의 화신이자 돌아버릴 것 같은 정신의 산물의 모습으로 우리를 후려친다.”
하지만 2010년에 정치가로 변신한 베테랑 전사인 스테판 에셀이 93세의 나이에 쓴, 호소문 같은 제목의 <분노하라!>는 27개 언어로 번역되어 수백만 부가 판매되었습니다. 이 책은 수백만 명의 젊은이들을 비롯해 수많은 스페인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서도록 했지요.
p226. 에셀은 자신의 책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제가 직접 번역해보겠습니다.
지금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변화해야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위에서 인간이 만들어낸 이처럼 많은 황폐함을 본 적이 없다. 파괴는 수세기 동안 지속되고 있다. 대체 언제 끝이 날 것인가? 우리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부 바로 곁에 무시무시한 궁핍이 동거하고 있는 상황에 동의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지난 수십 년간 그랬던 것처럼 테러리즘이 더 번창하도록 허락한다면, 궁지에 몰려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하지만 이 작은 책은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이 책은 경계경보이자 여론에 대한 호소, 양심에 대한 간청이자, 세계의 처지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고 수동성으로부터 벗어나자는 요청이다.
p230. 비판이 자기 의제의 최상위에 두어야 하는 것은 인간다움에 대한 존중, 그리고 존중받을 권리라 믿습니다. 우리가 ‘사회의 핵심적 관심사’에 도달할 기회를 유지하고 싶다면 말입니다. 존중이 부활되지 않는다면 연대가 생겨날 가능성도 없습니다.
p231. 타인의 말을 듣고 우리의 말을 타인이 경청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귀 기울여 듣기’의 기술을 배워야만 합니다. 우리의 소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자기확신과 공손한 태도 사이의 균형이 요구됩니다. 또한 용기도 필요하죠. 인간의 경험을 해석하는 사회학자의 작업은 변덕스러운 사람에게는 추천하고 싶은 성격의 삶이 아닙니다.
p252. 대중은 항상 옳지는 않다. 대중이 원하는 것 또한 항상 옳지는 않다. 현재 대중이 생각하는 방식 또한 어떤 경우에는 매우 위험할 수 있다. 그렇기에 대중사회학이 취하는, 대중의 수준으로의 하향운동은 적절하지 못하다. 공공의 사회학은 대중의 상향운동을 돕고, 자신도 상승하여 그곳에서 공중으로 변화한 대중과 대화하려는 시도이다. 라이트 밀즈가 핵심을 잘 표현했듯이, 사회학의 쓸모는 대중의 공중으로의 전화를 이뤄낼 때 최종 완성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