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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 아이돌론
사이토 미나코 지음, 나일등 옮김 / 한겨레출판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2016년의 발견이 우치다 타츠루였다면 2017년의 발견은 단연 사이토 미나코다. 이 책 한권만으로 발견이라고 말하기에 충분하다. 깊고 넓고 선명하다. 아직까지 독후감을 쓸 만한 정신적, 육체적, 시간적, 공간적 여유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입이 근질근질거려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겠다.
책에는 8명의 일본 작가에 대한 사이토 미나코의 ‘작가론론’이 실려있다. 네 작가는 익히 친숙하고 좋아했던 작가고 나머지 네 작가는 잘 모르거나 아직까지 읽어본 적이 없는 작가다.
다와라 마치, 하야시 마리코, 우에노 지즈코, 다나카 야스오는 나로선 전인미답의 지역이다. (우에노 지즈코를 아직 읽지 못했다니!) 사이토 미나코의 ‘작가론론’을 읽고서 네 작가 모두 읽고 싶어졌다.
좋아했거나 싫어했던, 혹은 자주 읽었던 작가로는 무라카미 하루키, 무라카미 류, 요시모토 바나나, 다치바나 다카시다. 사이토 미나코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각도로 이들을 분석하는데 그녀의 논리는 꽤나 매력적이다. 한 명씩 건드려볼까
무라카미 하루키
네지메 쇼이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다방 주인 문체’라고 말했다. 공감이 가지 않는가. 하루키 소설에는 마실 것(맥주나 위스키)과 먹을 것(샌드위치, 스파게티), 기분 좋은 음악(스탄 게츠, 째즈, 클래식)이 끊임없이 흐른다. 그러나 내가 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다방 주인 문체’가 아니다. 이번에 <기사단장 죽이기>를 읽으면서 이전에는 전혀 생각지 못했던 걸 느꼈다.
‘어라, 이거 수수께끼네.’
새삼스레 내가 깨달은 건 하루키 문학이 퍼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은 무려 15년 전인 2002년에 씌어졌다. 그럼에도 하루키 문학이 퍼즐임을 정확히 지적한다.
게임 해독 열풍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발전해버립니다. 게임의 소문을 듣고 몰려든 손님들은 냅킨 한 장부터 테이블 다리에 이르기까지 하루키 랜드에 있는 거의 모든 기기에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p25
‘방법적으로는 챈들러, 테마 그 자체로는 피츠제럴드 (마쓰자와 마사히로)’, ‘ 무라카미 하루키와 킹은 매우 닮은 감정의 질을 가지고 있다. (가자마 겐지)’ ‘도스토엡프스키의 <분신>(요코오 가즈히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낙엽>이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았다>(노야 후미아키)’ ‘들뢰즈/가타리(스즈무라 가즈나리)’,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무라카미 게이지>
그는 이곳저곳에 먹이를 뿌려놓는다. 몇 가지 진짜 수수께끼, 즉 테마 주변부에 2차적인 수수께끼를 뿌려놓는 것이다. 게으른 독자나 장거리 달리기에 소질이 없는 독자 또한 그 먹이에 이끌려 먹이를 쪼아 먹는 사이에 골에 도달해버리고 만다. 게다가 그 2차적 수수께끼는 지적 스노비즘을 자극하는 역할도 한다. 거기에 보기 좋게 걸려든 독자는 수수께끼 풀이에 모든 열정을 쏟는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만큼 수수께끼 풀이, 해독 사전을 낳은 작품도 드물지 않을까. 비평가들조차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2차적 수수께끼의 해독에 열중한다. - 노야 후미아키 p28
사이토 미나코는 하루키 문학이 사실 게임 소프트 웨어 그 자체라고 말한다. 즉 RPG 게임. 뭐 그리 대단한 발견은 아니다. 켐벨의 ‘영웅의 여정’을 따르는 모든 소설 및 영화는 RPG니까. 또한 그녀는 1990년대 후반 무라카미 하루키가 ‘소박한 시대로 회귀’했다고 진단한다. 그녀는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해 뭐라고 썼을까? 혹시 ‘게임시대의 부활’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내가 푼 <기사단장 죽이기>의 수수께끼 하나만 언급하자.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맨시키가 자신의 딸로 추정되는 마리에와 대면하는 장면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데이지와 재회하는 장면에 대한 패로디 혹은 오마쥬라는데 열 손가락 전부 다 건다. (그런데 이정현은 장 언제 지지나?)
사이토 미나코는 하루키에 대한 글을 끝마치며 하루키 랜드는 시종일관 ‘보쿠’라는 일인칭으로 상징되는 ‘남자 아이들의 세계’였다고 지적한다. 공감 백만배다.
왜 하루키 소설에 의미도 없는 섹스 장면이 난무하는가? 섹스 장면조차 없다면, 소설이 너무나 유치해지기 때문이다. 거의 동화 수준이다. 어쩌면 하루키가 사용하는 어른들의 기호(섹스, 맥주, 위스키, 스파게티, 클래식, 째즈 등)들은 ‘소년 하루키’를 은폐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루키는 그래서 팔리는 걸까. 소년이 아닌, 소녀가 아닌 ‘진짜 어른’은 얼마나 될까. 사실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 ‘소년, 소녀’가 살고 있지 않은지.
퍼즐로서의 하루키 문학을 풀기 위해선 하루키 전작 및 그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 예를 들어 스티븐 킹, 피츠제럴드, 레이먼드 첸들러 전작을 해야 하는데,
어찌할까.
이미 일본엔 하루키가 쓰지 않은 하루키 단행본만 오십 여권 된다는데.
아무튼 빠른 시일 안에 ‘기사단장 죽이기 공략법’ 페이퍼를 써야겠다.
요시모토 바나나.
1988년은 하루키 시대의 개막이었다. <노르웨이의 숲>이 날개돋힌 듯 팔려나갔다. 그 다음 해인 1989년은? 바나나 열풍의 해다. 바나나 소설 다섯 권과 수필이 단기간 동안 이렇게나 미친 듯이 팔려나갔다니. 키친 130만부, 물거품/성역 90만부, 슬픈 예감 80만부, 티티새 140만부, 하얀 강 밤배 70만부, 파인애플링 50만부. 대충 계산해서 신인 작가의 책이 단시간에 570만부가 팔려나갔다.
일본에서 바나나를 읽는 독자층은 10대~ 20대 여성이 90%였다고 한다. 사이토 미나코는 바나나가 일본에서 공전의 히트를 친 ‘코발트 문고’의 계보를 잇는 작가라고 말한다. 즉 바나나 문학은 ‘소녀 문학’이다. 그런데 30대 시절의 나는 왜 그렇게 바나나를 좋아했던 것일까. 변태 아냐?! 하긴 뭐, 브론테 자매의 <폭풍의 언덕>이나 <제인에어>도 좋아했으니. 내 가슴 밑바닥엔 소년보다 소녀가 살고 있었던 걸까.
아마도 내가 바나나를 좋아한 이유는 바나나 소설 특유의 ‘그리움’의 정서 때문이 아니었을까.
무라카미 류
사이토 미나코는 류의 소설에 대해 ‘사람을 조잡하게 만드는 힘’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러니까 류의 소설을 읽으면 사람이 조잡해진다는 거다. 그런 힘을 가진 소설이 있다니!
일본에서도 류와 하루키를 비교하는 글들이 난무했었구나. 예를 들면 이런 비평.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으면 내성적으로 되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 든다. 즉, 하루키는 마리화나 같은 효과를 준다. 반면에 무라카미 류를 읽으면 강렬한 쾌락을 느낀다. 즉, 류는 각성제라고 할 수 있다‘ - 가메와다 다케시.
나 역시도 하루키 문학을 마약이라고 평했기에 마취제/각성제의 비교가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사이토 미나코는 이해는 하지만 한심한 코멘트라고 평가한다.
제가 이런 비교론을 의심스럽게 생각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만약 류나 하루키 둘 중 하나의 이름이 ‘무라카미’가 아니었다면 어떠했을까요. 만약 사온지, 이주인, 무샤노코지 같은 이름이었다면 그래도 이런 비교론이 성립했을까요? p240
크. 미나코의 말처럼 만약 이름이 달랐더라면 애초에 두 작가를 비교하기나 했을까. 늦게나마 이 책을 통해 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생물학 차원에서 보자면 여자에게 지혜는 없다. 지혜라는 것은 부성이라는 환상을 업고 있는 남자에게만 있는 것이다. / ......바보같은 여자일수록 귀엽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그도 그럴것이, 여자가 생리가 아닌 로직(지혜)에 의지한다면 아이를 낳지 않을게 분명하지 않은가.
- 무라카미 류, <모든 남자는 소모품이다> p243
류도 꼰대였다니! 이 글에 대한 야마다 에이미의 촌철살인의 비평은 이렇다.
.......그러나 이 말들에 숨겨진 의미 같은 것은 없다. 약한 남자는 어떻게 설명해도 그저 약할 뿐이다. 여자는 위대하다고 말하면서 자기 긍정의 요소를 찾으려고 해도 그런 것은 뻔뻔스러울 뿐이다. / 긍정적 언어도 마찬가지다.....무라카미 류는 의미 없는 말에 의미를 부여해서 독자를 지치게 하는 데 탁월하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허풍쟁이라고 부르지 않는가.
- 야마다 에이미
사이토 미나코는 야마다 에이미가 문고 해설 역사에 남을 훌륭한 해설을 했다고 평한다.
그녀는 “나는 이 책을 매우 싫어한다.”, “그의 몇몇 훌륭한 소설에까지 촌스러운 이미지를 덮어씌우는 최악의 수필집이라고 생각한다”며 무라카미 류가 너무 오랫동안 ‘최연소 아쿠타가와상 작가’ 타이틀을 달고 있었던 탓에 망가진 것이 아닐까 추측을 합니다. p244
더불어 사이토 미나코의 류에 대한 비평.
현실(논픽션)보다 허구(픽션)의 분량이 많아질 때 무라카미 류의 이야기 세계는 리얼하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픽션이라는 무장을 풀고 허구의 분량이 적어질수록 류 월드는 무참한 파열을 보입니다. 말씀드리기 좀 그렇지만, 무라카미 류의 수필에는 사람을 설득시키는 힘이 없고, 논픽션으로 현실을 재구성하는 힘은 더더욱 없습니다. p242
비난이자 칭찬일까. 무라카미 하루키든 무라카미 류든 결국 둘 다 어린아이에 불과한 것이구나.
다치바나 다카시
그동안 나는 다치바나 다카시를 완전히 오해했다. 아, 꼰대였어. 내가 다 부끄러워.
우먼 리브는 일부일처제가 여자의 성적 욕구를 봉쇄한다고 비난하지만 이는 그녀들이 정신적 불구임을 공표하는 것과 같다. 정상적인 여성의 성 심리에서는 여성 스스로가 일부일처를 원한다는 사실이 모든 심리학적 데이터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음란한 여자, 여러 남자를 원하는 여자는 예외없이 냉감증, 불감증이다. 오르가슴 부전이 님포마니아와 우먼 리브를 낳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되길원한다면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주는 남자를 하루빨리 찾아야 할 것이다.
- 다치바나 다카시 <시대와 상황의 병리학> p210
한마디로 여성이 자유롭고자 한다면 오르가슴을 느끼게 해주는 남자를 만나라?
그렇게나 많은 책을 읽은 다치바나 다카시는 어쩌다 이렇게 상상불가의 덜떨어진 말을 내뱉고 만 것일까. 다치바나 다카시는 소설 따위는 읽지 않는다고 거만하게 말하곤 했다. 혹시 소설을 읽지 않아서 공감능력이 완전히 0에 수렴하게 된 것일까. 다치바나 다카시는 ‘지식의 편의점’일까 ‘지식의 야바위꾼’일까.
편의점이든 야바위든 꼰대임은 분명하다.
결론.
소녀 하나, 소년 둘, 꼰대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