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정가제 시행전 마지막 날, 인터넷 서점 사이트 전부 다운되는 바람에 미처 구입하지 못했던 책이다.
안용태의 <영화읽어주는 인문학>보다 먼저 정여울은 철학과 영화의 만남을 주선했었다. 안용태가 철학위주로 영화를 보고자 했다면 정여울은 좀 더 영화중심적이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꼼꼼하게 영화의 내러티브를 쫓아간다. 그래서일까. 책을 읽다 세 번이나 울컥했다.
롤랑 바르트와 <색계>, 푼크툼, 세계와 나는 ‘상처의 틈새’로만 만난다.
정여울은 punctum을 ‘풍크툼’으로 번역했으나, punctum의 의미를 고려하자면 ‘푼크툼’으로 쓰는 게 더 적절해보인다. 철학자, 사상가들의 어떤 개념들은 인상파 화가의 그림만큼이나 매혹적일 때가 있다. 내게는 바르트의 푼크툼이 그러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는 그저 평화롭다 못해 권태로웠던 세상이 돌이킬 수 없는 영혼의 상처를 입었을 때야 비로소 그 투명한 속살을 보여준다. 절대로 나을 것 같지 않은 상처, 그렇게 지독한 상처의 틈새로만 간신히 보이는 세계의 투명한 아름다움. 그것을 롤랑 바르트는 ‘푼크툼’이라고 불렀다. 명쾌하게 분석될 것만 같은 세계가 어느 순간 전혀 해독할 수 없는 상형문자로 바뀌어 버릴 때,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푼크툼’과 만나는 순간이다."
푼크툼은 라틴어로 뾰족한 물체로 인해 받은 상처, 흔적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사진의 푼크툼은 평온했던 이의 의식을 찌르는, 나에게 상처를 입히고 자극을 주는 우연하고 돌발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푼크툼의 특징은 물론 예리한 ‘아픔’이지만, 푼크툼의 더욱 중요한 특징은 그 상처가 이해할 수 없고 분석할 수 없다는 것, 그리하여 예비하거나 대처할 수도 없고, 정리해서 요약할 수도 없다는 데 있다.
그는 사진의 이미지를 크게 두 가지로 분류했다. 스투디움과 푼크툼, 스투디움이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일반화된 상징이라면, 푼크툼은 좀처럼 해독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아픔을 낳는 상징이다. 스투디움이 소통 가능한 획일적인 상징이라면 푼크툼은 소통 불가능한, 그리하여 더욱 소중한 비밀을 간직한 상징이다.”
나는 사랑을 푼크툼과 연결하려 한 적은 없었다. 왜 그랬을까. 정여울의 혜안이다. 스투디움의 사랑의 방식이 있다면 푼크툼의 사랑의 방식이 있다. 푼크툼으로서의 사랑을 말할 때 <색,계>만큼 적절한 영화도 없어 보인다.
“내가 이름 붙일 수 있는 것은 진정으로 나를 아프게 하지 못한다.”
- 롤랑 바르트, <카메라 루시다>
조지프 캠벨과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너’를 찾으러 가는 길 끝에서 ‘나’를 발견한다.
크리스토퍼 보글러의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이후 캠벨의 ‘영웅의 여정’ 내러티브는 어느새 전형적이고 상투적인 작법이 되어버렸지만 ‘원형’과도 같은 이야기 방식이기에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역시 전형적인 캠벨의 ‘영웅의 여정’의 길을 따른다.
“여러분의 작업을 하기 위해서는 모든 비판을 미루어두어야 한다. (....) 비판을 미루어두는 것은 이른바 ‘너는 할지니’라는 용을 죽이는 것이다. 그놈을 죽여버려라. 우선 글을 쓰도록 하라. 비평가는 잊고 그저 쓰기만 하라. 비판적 요소를 끌어안고 문장을 다듬는 것은 그 다음에도 충분히 할 수 있으니까. ”누가 과연 이런 걸 보려고 하겠어?“하는 생각 때문에 괴로울 수도 있다. 그러면 여러분의 주장에 대해 공감할 만한 사람을 떠올린 다음, 그 사람을 위해 글을 쓰라. (...) 가령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한 소녀를 위해 쓴 것이었다. ”
- 조지프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386쪽
방랑하는 시간은 긍정적인 시간이다. 새로운 것도 생각하지 말고, 성취도 생각하지 말고, 하여간 그와 비슷한 것은 절대 생각하지 마라. 그냥 이런 생각만 하라. “내가 어디에 가야 기분이 좋을까? 내가 뭘 해야 행복할까? (.....)룰렛 공은 결코 ‘아, 여기 내려앉는 것보다는 차라리 저기 내려앉아야 사람들이 나를 더 좋아할 거야’하고 생각하진 않는다. (....)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하는 생각을 치워버려야 희열이 온다.
- 조지프 캠벨, 박중서 역, <신화와 인생>, 갈라파고스, 99~100쪽
수잔 손택과 <굿 윌 헌팅>, 편집되는 고통, 유통되는 슬픔을 넘어
이 글을 읽고 다시 < 굿 윌 헌팅>을 보고 싶어졌다. 인용된 윌과 숀의 대화 장면에서 눈물이 핑 돌다니!
숀 아버지가 알코올중독이셨다. 늘 고주망태였지. 완전히 술에 찌들어서, 두들겨 팰 사람을 찾곤 했지. 난 엄마와 동생이 맞지 않게 하려고 먼저 덤볐지. 반지를 끼고 계신 날이면 더 볼 만 했어.
윌 그 남자는 .......늘 탁자에 렌치와 각목과 혁대를 늘어놓고는, 절더러 선택하라고 했죠.
숀 나 같으면......혁대로 하겠다.
윌 전 렌치를 택하곤 했어요.
숀 왜?
윌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정이었죠.
숀 네 양부였니?
윌 네...... 제 평가 결과는 어때요? 애정결핍 같은 건가요?
숀 이 기록들.....모두 다 헛소리야. 네 잘못이 아냐.
윌 알아요.
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봐. 네 잘못이 아니야.
윌 알아요.
숀 (숀은 윌의 내장기관까지 다 뚫어버릴 듯한 깊은 눈빛으로 윌을 바라보며 다시금 힘주어 말한다) 네 잘못이 아냐.
윌 안다고요!
숀 (숀은 점점 윌을 벽 쪽으로 몰아 세운다) 아냐, 넌 몰라. 네 잘못이 아니다.
윌 (윌은 숀의 집요한 반복에 분노와 공포를 동시에 느낀다) 안다니까요!
숀 (다시금 소름끼치도록 차분한 목소리로, 같은 문장이지만 매번 다른 울림으로 윌에게 다가가간다) 네 잘못이 아냐.
윌 (감정이 폭발하며) 알았으니까 성질나게 하지 말라고요!
숀 네 잘못이 아니야.
윌 (이제는 절규하는 윌) 제발, 성질나게 하지 말란 말이에요. 선생님만이라도!
숀 (숀은 여전히 놀라우리만큼 차분한 목소리로, 같지만 다른 이야기를 한다. 네가 죄책감에서 빠져나오지 않으면 평생 행복해질 수 없다는 것을, 숀은 이 짧은 문장으로 대신하는 듯하다) 네 잘못이 아니었어. 네 잘못이 아냐.
윌 (윌은 그제야 숀의 메시지를 알아듣고, 처음으로 울어버린다. 그리고 숀에게 안겨 마음껏 운다) 젠장, 정말 죄송해요.
숀 (윌을 힘껏 품에 안으며) 다 잊어버려.
수잔 손택의 실천 역시 영화 <굿 윌 헌팅>만큼 감동적이다. 우리처럼 타인의 고통을 연민으로 바라보며 안도하는 대신 그녀는 고통받는 사람들 곁으로 날아가 그들과 함께 했다. 그녀는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연출했다.
“문화, 특히 진지한 문화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사라예보 사람들이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존엄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 예를 들면, 화장실이 오물통이 되지 않도록 변기에 물이 나오게 하는 데 거의 하루 종일 매달리면서 굴욕감을 느끼는 것이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공공장소로 가서 줄을 서 떠온 물을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다. 이런 굴욕감은 공포보다 훨씬 클 수도 있다.
연극을 무대에 올린다는 것은 사라예보의 연극 관계자들에게는 큰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도 해왔던 일들을 계속한다는, 즉 자신들이 정상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고작 물 긷는 사람이나 인도주의적 원조를 받는 수동적인 사람이 아닌 것이다. 실제로 사라예보에서는 자신의 일을 계속하는 사람을 가장 운 좋은 사람이라고 여긴다. (.....)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와 배우들은 월급을 받지 않았다. 다른 연극인들도 기꺼이 우리 리허설에 참석하곤 했는데, 이것은 단순히 우리의 작품을 보고 싶어서가 아니라 매일 극장에 간다는 사실이 좋아서였다. 연극을 공연한다는 것은 하찮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성을 표현하는 즐거운 일인 셈이다.”
- 수잔 손택, 김유경 역, <강조해야 할 것> 시울, 412~413쪽
문학은 우리 아닌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줄 아는 능력을 길러주고, 발휘하도록 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 아닌 다른 사람이나 우리의 문제 아닌 다른 문제에 감응할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아주 잠깐만이라도 우리 자신을 잊을 능력이 없다면, 도대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겠습니까?
- 수잔 손택, 이재원 역, <타인의 고통> 이후, 208쪽
질 들뢰즈와 <시간을 달리는 소녀>, 시계로 잴 수 없는 시간의 무한탈주.
크로노스와 카이로스의 시간이 있다. 들뢰즈는 크로노스와 아이온의 시간을 말한다. 직선적 시간의 중력으로 인간을 빨아들리려는 모든 권력, 그것이 바로 크로노스의 시간이다. 한편 영원히 이 순간에 빠져들고 싶은 희열의 시간, 그것은 아이온의 시간이다.
심리학적으로 중요한 감흥을 불러일으키고 중대한 의미를 갖는 시간, 이런 시간들을 현상학적 시간, 또는 아이온의 시간이라고 한다. (...) 노동이나 이동, 소비 생활등의 모든 영역에서 절대적 속도를 갖는 것, 속도의 중력에서 벗어난 외부를 창조하는 것, 강요된 속도나 시간에 벗어난 자율적인 속도와 리듬을 갖는 것. 이것이야말로 낡은 시간적 형식을 변형시키는 일이며, 자율주의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형식의 시간, 새로운 리듬의 시간을 창안하는 것이 될 것이다.
- 이진경, <근대적 시간공간의 탄생>, 푸른 숲, 76~77쪽
잃어버린 시간, 다시 말해 시간의 흐름, 존재했던 것들의 소멸, 존재들의 변화에 대해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기호들이 있다. 그것은 우리와 친숙했던 사람들을 다시 보게 되는 뜻밖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더 이상 윌에게 익숙하지 않게 되어버린 그 사람들의 얼굴은 시간의 기호들과 시간의 영향을 순수한 상태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사람들의 얼굴 특성을 변질시키고 다른 특성들을 늘리거나 또 무르게 하고 부숴버린다. 시간은 그 자체로는 비가시적이기 때문에, 우리 앞에 나타나기 위해 육체들을 찾아다닌다. 그러다가 육체들을 만나기만 하면 어디서든 그들을 붙잡아 그 위에 자신의 환등기를 비춘다.
- 질 들뢰즈, 서동욱,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43쪽.
타임리프 능력을 갖게 된 ‘시간을 달리는 소녀’ 마코토. ‘나의 시간’을 찾으려는 노력이 결국엔 타인의 시간을 빼앗는 일이라니! 치아키의 고백을 무마시키려 아무리 타임 리프를 해도 ‘마음의 시간’은 좀처럼 바뀌질 않는다. 어느덧 치아키는 이제 미래로 돌아가야만 한다. 마지막 대사 장면에서 두 번째로 또 울컥.
치아키 (마코토가 건네준 타임 리프 장치를 보며) 이걸 네가 어디서 찾았어? 아니, 너! 이게 뭔지는 알아?
마코토 알아
치아키 누가 가르쳐줬는데?
마코토 네가
치아키 난 그런 소리 한 적도 없고, 할리도 없어.
마코토 네가 모두 다 얘기해줬어. 네가 살던 시대도, 이게 뭔지도.
치아키 너 어디서 온 거야?
마코토 미래에서.
치아키 너도 타임 리프를 할 줄 알아?
마코토 이젠, 못해.
치아키 이 얘기를 하려고 일부러 과거로 돌아온 거야?
마코토 응
치아키 바보같이 내가 왜 얘기했을까?
마코토 그 그림은 미래에 가서 봐. 이젠 없어지거나 타버리지 않을 테니까. 네가 온 미래까지 무사히 남아 있게끔, 내가 어떻게든 해볼게.
치아키 그래, 부탁해..... 돌아갔어야 했는데. 어느새 여름이 됐어. 너희랑 함께 있는 게 너무 즐겁다 보니.
치아키. 마코토 ! 늘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너 말이야......(이제 ‘고백’을 들을 준비가 된 마코토의 잔뜩 설렌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심드렁하게) 함부로 뛰다가 다치지는 마라. 넌 주의력이 부족하잖아. 먼저 생각을 하고 행동을 해
마코토 (치아키의 고백을 기다리던 설렘이 사라져버리자, 잔뜩 실망한 얼굴로) 뭐야? 그게 마지막 인사야?
치아키 바보,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마코토 그래! 걱정해줘 고맙다! 알았으니까 얼른 가.
(치아키의 등을 밀어내며 억지로 치아키를 보내버리는 마코토.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흐르는 눈물을, 솟구치는 흐느낌을 막을 수 없다. 엄마 잃은 아이처럼 눈물 콧물 범벅이 되어 엉엉우는 마코토를 향해, 치아키가 다시 돌아온다. 너무 놀라 눈물을 뚝 그친 마코토를 살짝 안고, 미친 듯이 뛰고 있을 마코토의 심장을 향해, 치아키는 드디어 고백한다. 예전에 마코토가 ‘삭제해 버린’ 그 고백보다 훨씬 멋진 대사로.)
치아키 마코토......미래에서 기다릴게.
마코토 (치아키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일순간에 모든 아픔이 치유된 듯, 언제 울었냐는 듯이, 이제야 마코토다운 밝고 명랑한 표정으로)응! 금방 갈게! 뛰어갈게!
니체와 <쇼생크 탈출>, 초인의 오디세이, 지상에서 영원으로
아, “덕”이란 말이 얼마나 가증스럽게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가! 그들이 “나는 정의롭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듣노라면, 그것은 언제나 “나는 앙갚음을 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 니체, 정동호 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153쪽
검사나 국가에서 ‘덕’을 말할 때, 나는 왜 ‘떡’으로 들리는걸까.
좀더 유사하고 좀더 평범한 인간들은 언제나 유리한 입장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렇지만, 좀더 선택된 자, 좀더 예민한 자, 좀더 희귀한 자, 좀더 이해하기 어려운 자들은 고립되기 쉬우며, 따로따로 떨어져 있어 재난을 당하기도 쉽고 거의 번식하지도 못한다.
-니체, 김정현 역, <도덕의 계보>, 책세상, 291쪽
앤디는 평범하지 않았다. 앤디는 간수 하들리와의 협상을 통해 죄수들에게 맥주를 돌린다. 그리고 맥주 마시는 동료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웃는다. 이 책에서 세 번째로 울컥한 순간이었다. 감옥을 무대로 하는 소설과 영화는 주제에 상관없이 세계 자체의 은유를 내포하기 마련이다. 모든 곳이 감옥이니까! 앤디는 결코 시스템에 길들여지지 않는다. 앤디야말로 이렇게 말할 자격이 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시스템에 굴복하기보다 저항하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만들뿐이다.”
피에르 부르디외와 <순수의 시대> 아비투스, 일상이 창조하는 미시적 권력의 지형도
아비투스, 이 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hexis’(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habitus’로 번역됨) 개념에서 발전한 것으로, 원래는 ‘교육 같은 것에 의해 영향받을 수 있는 심리적 성향’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나, 부르디외는 사회구조(즉 장)와 개인의 행위(즉 실천)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을 극복하는 매개적 매커니즘으로서 개념화한다. 즉 아비투스는 일정 방식의 행동과 인지, 감지와 판단의 성향체계로서 개인의 역사 속에서 개인들에 의해서 내면화(구조화)되고 육화되며 또한 일상적 실천들을 구조화하는 양면적 매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말로 굳이 번역하자면 ‘실천감각’정도로 할 수 있으나 ‘습관’이나 ‘습성’과는 구별된다. 부르디에에 따르면, ‘습관’은 반복적이며, 기계적이고 자동적이며, (생산적이기보다는) 재생산적인 데 반해서, 아비투스는 고도로 ‘생성적’이어서 스스로 변동을 겪으면서 조건화의 객관적 논리를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아비투스는 역사에 의해 생산되는 창안의 원칙이면서도 역사로부터 (상대적으로) 벗어난다.
- 피에르 부르디에, 구별짓기 (상) 13쪽
역자 최종철씨는 아비투스를 굳이 번역하자면 ‘실천감각’이라 했으나, 번역하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아비투스의 개념이 탁월한 점은 그것이 ‘실천감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이 개인의 내면에 ‘구조화되고 육화되어 있음’을 통찰해냈기 때문이다. 즉 아비투스가 의식적으로 작동될 때 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작동될 때 섬찟하다.
최근에 귀가 고장나 이비인후과에 갔었다. 대기실에 미모의 아줌마가 눈에 띄었다. 아줌마옆으로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자연스런 한국말 때문에 몰랐지만 자세히 보니 동남아인이었다. ‘뭐가 부족해 동남아 남자랑 결혼을 해’라는 생각하고 있는 나를 보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입으로는 평등을 말하면서 나는 국가에 따른 보이지 않는 계급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 남자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가부장제’의 아비투스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아비투스는 생각과 상관없이 이미 우리의 몸에 새겨져(육화)있기 때문이다.
카를 융과 <뷰티풀 마인드>, 내 안의 메피스토펠레스와 사랑에 빠지다.
그 후 나는 진지한 아이가 되었다. (...) 라틴어 문법책을 가지고 와서 집중하여 열심히 공부하기 시작했다. 10분 뒤에 나는 기절 발작을 일으켰다. 나는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으나 몇 분이 지나자 상태가 다시 좋아져 공부를 계속했다. “빌어먹을, 졸도 따위는 하지 않을거야. ” (......)그렇게 10분이 지나서 두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이것도 첫 번째 발작과 마찬가지로 지나갔다. “자, 이제 정말로 너는 공부해야만 해!” 나는 꾹 참아냈다. 한 시간 후에 세 번째 발작이 일어났다. 그래도 나는 포기하지 않고 발작을 이겨냈다고 느낄 때까지 한 시간을 더 공부했다.
(...)몇 주 후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갔다. 학교에서도 더 이상 발작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수치스러운 사건 전체를 조정해 온 것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다른 누구 탓도 아니다. 나 자신이 가증스러운 탈영병이었다!
- 칼 구스타프 융, 조성기 역, <기억 꿈 사상>, 김영사, 66~67쪽
아들러와 마찬가지로 융 역시 트라우마를 인정치 않는다. 트라우마는 현재의 상태를 합리화하려는 마음의 질병이다. 고통은 이겨낼 수 있다. 비현실적인 긍정주의와 마찬가지로 비관주의 역시 우리의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뷰티플 마인드>의 주인공 존 내시가 ‘정신분열증 환자’로 자신을 정의내렸더라면 과연 그는 훗날 노벨상을 수상할 수 있었을까.
가스통 바슐라르와 원령공주, 창조적 몽상은 너와 나의 ‘다름’에서 시작된다.
단순한 인상주의와 몽상에 기반을 둔 주관성을 어떻게 구분하느냐 (.....)이 문제에 대한 바슐라르의 대답은 ‘자신에게 충실하기’이다. 인상주의는 사물의 겉만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몽상을 통하여 사물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원한다. 인상주의는 자신에게 최초로 전달되는 정보를 중요시한다. 그것은 다음 정보를 기다리지 않고 판단을 내린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최초의 인상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최초의 인상이 사라지기를 기다린다. 혜안의 눈을 가진 몽상이 시작되는 것은 이 최초의 인상이 걷힌 다음이다. 인식의 오류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이 혜안은 사물의 깊이를 보고자 하는 눈이다. 몽상가의 혜안은 최초의 경험이 지나간 후라야만 제대로 볼 수가 있다. 문학적 몽상의 활동은 텍스트를 충실하게 다시 읽을 때에만 비로소 시작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문학은 두 번째 독서에 있다고 바슐라르는 말하고 있다.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63쪽
몽상가에게 지독한 혜택을 주는 몽상 속의 상상세계는 자기 아니마를 위해 이루어진다. 아니마는 언제나 단순하고 조용하고 계속적인 삶의 피난처이다. 그래서 융은 ‘나는 아니마를 단순히 삶의 원형이라고 규정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식을 찾지 아니하고 삶, 단순한 삶을 꿈꾸는 사람은 여성성으로 기운다. 아니마 주위로 집중하면서, 몽상은 몽상가가 휴식을 발견하는 것을 도와준다. 가장 좋은 우리의 몽상은, 남자건 여자건, 우리 저마다의 속에 있는 우리의 여성성에서 나온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게 여성성의 흔적을 갖고 있다. 우리 속에 여성적 존재가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쉴 수 있을까?”
- 바슐라르, 김현 역, <몽상의 시학>, 홍성사, 108쪽
그래서일까. 미야자키 하야오의 주인공들이 대개 소녀인 것은. 바슐라르의 ‘몽상’속에 가장 아니마적인 세계는 하야오의 애니매이션이 아닐까.
원령공주 아무리 숲이 살아나도, 이젠 더 이상 시시신의 숲이 아니야.....시시신은 죽었어.
아시타카 시시신은 죽지 않아.......시시신은 생명 그 자체거든. 그는 삶과 죽음을 모두 갖고 있지.
내겐 삶을 돌려주셨어.
원령공주 난 널 좋아하지만, 인간은 용서 못해.
아시타카 그래도 좋아. 너는 숲에서, 나는 타타라 마을에서.
우리 그렇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 더 좋은 마을을 세우자.
나의 수줍은 램프를 격려하려고
광대한 밤이 그 모든 별들을 켠다.
- 타고르, <반딧불>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