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자본론>을 읽기 위해 지난 달 임승수의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김수행의 <자본론>, 와타나베 이타루의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을 읽고, 이번 달엔 우치다 타츠루, 이시카와 야스히로의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를 읽었다. 우치다 타츠루는 ‘마르크스의 ‘마’자도 모르는 사람’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게 ‘마르크스의 대단함’을 낱낱이 보여줄 것이라 공언한다. 우치다 타츠루는 성공한 듯 보인다. 그러나, 이시카와 야스히로는 글쎄.
책은 마르크스의 책에 대한, 우치다 타츠루와 이시카와 야스히로가 서로에게 건네는 서한 형식을 취한다. 언급되는 마르크스의 책은 네 권이다. <공산당 선언>, <유대인 문제>,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경제학 철학 수고>, <독일 이데올로기>
공산당 선언
아직 <공산당 선언>을 완독하진 못했지만, 야스히로가 설명하는 공산당 선언의 내용을 우치다 만큼 쉽게 설명하도록 노력해보겠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인간에겐 ‘먹고 사는’ 문제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세상엔 잘 먹고 잘 사는 놈들이 있고 못 먹고 못 사는 사람들이 있다. 마르크스가 보기엔 역사 내내 잘 먹고 잘 사는 소수의 놈들이 못 먹고 못 사는 다수의 사람들의 몫을 빼앗아 배를 불려왔다. 그렇다면 이런 부조리를 깨부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곡괭이와 삽을 들고 청와대로 습격해야 할까. 마르크스는 우선 약자들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약자들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강자들(새누리당)이 정치적 권력을 행사한다. 민주주의가 짓밟히는 이유다.
약자들이 정치적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는 강자들이 약자를 착취한 무기를 빼앗아야 한다. 기계나 공장. 이렇게 되면 다수의 약자를 괴롭히는 정치권력이 없어지게 된다. 이럴 때, 각자의 자유와 만인의 자유가 조화로운 사회가 가능하다. 이것이 공산주의 사회다. 우리가 목격한 공산주의 국가와 마르크스가 꿈꾸었던 공산주의 국가는 전혀 다르다. 마르크스가 꿈 꾼 공산주의 사회는 지금은 사라진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 국가 보다는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핀란드, 스웨덴같은 북유럽 사회주의 국가와 비슷하달까.
우치다 타츠루는 마르크스를 읽으면, 마라토너들이 느끼는 ‘러너스 하이’와 비슷한 ‘아카데믹 하이’를 느낀다고 말한다. 왜 마르크스를 사랑하느냐? 그건 마르크스를 읽으면 머리가 좋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라고. 마르크스를 읽었다고 무언가가 한 순간에 해결되지는 않는단다. 단지, 마르크스를 읽으면 자신이 감옥 안에 있었다는 깨달음을 준다고. 우츠다 타츠루가 꼽는 <공산당 선언>의 명문중의 명문은 이렇다.
공산주의자들은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를 강제적으로 전복시킴으로써만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공공연하게 선언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하게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은 혁명에서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은 세계를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
- <공산당 선언> 87쪽
우치다 타츠루는 몇 페이지에 걸쳐 위 글이 왜 명문 중의 명문인지를 조곤조곤 설명해 준다. 매력적인 해설이다. 리베카 솔닛은 울프의 에세이가 반反비평의 모범이라고 말했다. 비평이 작품을 못 박는 거라면 반反비평은 작품을 해방시킨다.
위대한 비평은 예술 작품을 해방시킴으로써 작품을 더 완전히 보여주고, 계속 살아 있게 하며, 끝없이 이어지면서 끝없이 상상력을 북돋는 대화로 이끌어 들인다. 해석에 반대하는 게 아니라 구속에 반대한다. 영혼을 죽이는 것에 반대한다. 그런 비평은 그 자체로 위대한 예술이다.
- 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p 142
정성일 같은 비평가는 작품을 못 박는다. (이러한 ‘비평을 위한 비평’을 우리는 흔히 ‘딸딸이’라 부른다.) 그러나, 신형철 같은 섬세한 비평가들은 작품을 해방시킨다. 우치다 타츠루 역시 그러하다.
타츠루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란 그저 단순한 ‘노동자’가 아니라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노동자”다. 따라서 마르크스의 문장은 동어반복이다. 그런데 박력이 차고 넘친다. 왜? ‘족쇄를 끊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명령’과 ‘당위’의 문장을 이어붙인다. 여기서 ‘불편함’이 아니라 ‘붕 뜨는 느낌’, ‘도약의 느낌’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타츠루가 보기에 마르크스 문장이 뿜어내는 ‘마약성’은 여기에 있다.
마르크스가 애용한 유명한 어구 중 ‘salto mortale’이 있다. ‘목숨을 건 도약’. 타츠루는 마르크스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마르크스와 함께 점프하는 것’이 아닐까 묻는다. 마지막 문장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다.
정의롭고 공정한 세계를 위한 싸움을 앞두고 기본적인 마음가짐으로서 ‘단결’을 내세웠다는 점에서 나는 마르크스가 위대하고 느껴요.....참된 혁명의 선언은 ‘미움’이나 ‘파괴’를 부추기는 말이 아니라 ‘우애’를 담은 말로 끝맺지 않으면 안 돼요.
- p52.
유대인 문제
<유대인 문제>는 바우어의 논문에 대한 마르크스의 응답이라고 한다. 바우어의 논문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고.
유대교도의 해방은 말할 것도 없이 당연하지만, 독일에서 억압받는 이들은 유대인뿐 아니라 모든 인민이다. 따라서 유대인 문제는 모든 독일인의 해방을 둘러싼 문제로 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한 독일인의 해방을 달성하려면 독일 국가가 기독교의 굴레를 버리고 근대 국가가 될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독일의 인민 스스로 기독교나 유대교 같은 특정한 종교로부터 빠져나와 자유로운 자기 의식을 획득해야 한다.
바우어를 비판하기 위해 마르크스가 만든 개념이 ‘정치적 해방’과 ‘인간적 해방’이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정치적 해방’ 역시 진보지만 ‘종래의 세계질서 내부’에 머무르는 진보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적인 욕망, 이기주의’는 시민사회의 원리이고, 실제적인 욕망과 이기주의의 신은 ‘화폐’다.
오늘날 신자유주의 국가는 대개 ‘정치적 해방’이 실현된 사회다. ‘약육강식에 미쳐 날뛰는 경쟁 사회’. 경쟁에서 패해도, 남에게 모욕을 당해도, 배를 곯아도 모두 자기가 감당해야 하는 사회. 마르크스가 보기에 작금의 신자유주의 국가는 ‘정치적 해방’을 이루었을지언정 여전히 ‘인간적 해방’을 이룬 것은 아니다.
참으로 해방된 인간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분열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웃이나 공동체 전체를 늘 배려하고, 그런 일을 진심으로 기쁘게 할 것이 분명해. 그리고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면 그런 인간이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런 인간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아닐까?
- P 93.
마르크스는 그러한 인간을 ‘유적 존재’라 불렀다.
마르크스는 인간이 자기 이익을 최우선으로 추구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 쓰는 만큼의 열의로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신경을 쓰는 ‘유적 존재’가 되는 것을 ‘인간 해방의 완수’라고 봤어요.
- P 94
마르크스가 열일곱 살에 쓴 <직업의 선택에 관한 어느 청년의 고찰>은 ‘유적 존재’ 개념의 단초를 제공한다.
“어떤 지위를 선택할 때 우리를 이끌어주어야 할 주요한 안내 요소는 인류의 행복이며 우리 자신의 완성이다. ....도리어 인간의 본성이란 자신과 동시대 사람들의 완성을 위해, 그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 일할 때에만 자기의 완성을 달성할 수 있게끔 되어 있다.”
(1835년 8월, <전집> 제 40권, 519쪽)
P 78
‘유적 존재’는 인류의 해방과 자신의 완성을 일치시키는 사람이다.
헤겔 법철학 비판
마르크스에 따르면 종교 비판은 해묵은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하여, 천상의 비판은 지상의 비판으로 바뀌어야 한다. 종교의 비판은 법의 비판으로, 신학의 비판은 정치의 비판으로 바뀌어야 한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기득권의 시녀인 헤겔 철학을 비판한다. 인간적인 해방을 이루는 주체가 바로 ‘다수의 약자’들이다. 족쇄 말고는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노동자.
“종교가 존재하는 것은 종교를 통해서만 메울 수 있는 사회적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즉 민주정치를 실현한 사회에는 고유한 사회적 결함이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우치다 타츠루는 <헤겔 법철학 비판>의 마르크스에 동의하지 않는다. 타츠루가 보기에 ‘악의 집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오히려 사회 전체에 퍼져있다. 따라서 살펴야 할 것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다. ‘겨 뭍은 개가 똥 묻은 개 나무란다’고 할까. 그런데 타츠루는 전혀 논리와 맞지 않게, ‘우선 나를 모든 멍에로부터 해방시키라는 말을 자기 입으로 말하는 인간’을 절대 신용하지 않는단다. 그럼 어쩌라는 거지?? 악은 사회 전체에 퍼져 있으므로, 기득권을 비판할 수도 없고, 나를 바꿀 수도 없는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하지? 대다수 인간은 그렇다면 누군가 나를 해방시켜 줄 때까지(증여)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나는 타츠루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는다. 분명 ‘악의 무리’가 있다. 다만 소수의 악의 무리와 다수의 약자 사이엔 특정한 집단이 있다. ‘악의 부역자’들. 나치 수용소를 예로 들자면, 나치와 유대인 사이에 ‘존더코만더스’(나치 수용소에서 유대인을 태워죽이고, 약간의 혜택을 누리는 유대인). 일제강점기로 보자면 식민인 일본과 피 식민인 한국인 사이에 친일파들. 오늘날 ‘한국의 존더코만더스’들은 사법부, 검찰, 경찰, 재벌, 언론, 방송, 학계에 널리 자리 잡고 있다. 죽 한 그릇 더 먹겠다고 다수의 국민들을 착취하는 자들.
프랑스가 나치 부역자들을 처단했듯, 이 바퀴벌레같은 ‘악의 부역자’들을 법으로 강력하게 처단해야 한다.
경제학 – 철학 수고
대다수 약자들이 일을 해서 생산물을 만든다. 그러나,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소수의 강자들에게 돌아간다. 그런 상태에서 대다수 약자에게 일이란 더 이상 기쁨이 될 수 없고, 고통이 된다. 이런 상황을 마르크스는 ‘소외’라고 불렀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정치적 해방’만으로는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 인간적 해방이 필요하다. 타츠루의 표현으로, 인간 자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은 좋아지지가 않는다. 어떻게 인간을 바꿀 것인가. 마르크스는 인간이 ‘유적 존재’를 지향하면 바뀐다고 말했다. 유적 존재를 지향하는 것. 그것이 ‘코뮌주의’다. 원초적 형태의 코민주의는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재산을 공유하는 제도를 말한다. 여성까지도. 플라톤의 <국가>에서 제시하는 국가가 이러한 예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제시하는 ‘코뮌주의’는 보다 문명화되고 인간적인 코민주의다. 자신의 자연스러운 욕구를 채우는 행위가 그대로 공공의 복리로 이어지는 사회. 공자가 말한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의 사회. 즉, 누구나 마음가는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사회.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회적이지 않고, 사회적이지 않은 인간은 인간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다.
독일 이데올로기
<독일 이데올로기>에 와서야 마르크스의 ‘사적유물론’의 기본적인 해명이 이루어진다. ‘유물론’은 흔히 받는 오해처럼 ‘정신보다 물질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론’이 아니다.
‘유물적’이라는 말은 그것이 인간 사회의 역사적인 변화의 원동력을 ‘신’이나 ‘자아’같은 사회 외부에 있는 어떤 정신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사회 자체의 내부에서 탐구한다는 뜻이에요.
p168
옛날에 인간이 물에 빠지는 것은 그들이 중력의 사상에 붙들려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믿었다고 한다. ‘중력의 사상’없이 물에 몸을 던지면 빠지지 않기라도 한단 말인가. 옛날에 신을 믿고 동물원 사자 우리로 내려간 사람들이 있었다. 아무런 예외 없이 처참하게 갈기갈기 찢겨 사자 밥이 되었다. 혹시 사자가 신을 믿고 기도를 올렸기 때문일까. 아무리 신을 믿고 사자 우리에 가도 찢겨 죽는다. 쉽게 말하면 이게 유물론이다.
즉 마르크스에게 중요한 것은 사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현실을 변혁하는 것.
“공산주의는 우리에게 만들어져야 할 상태도, 현실이 따라가야 할 ‘미래형’의 이상도 아니다. 우리가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폐기하는 현실적 운동이다. 이 운동의 제 조건은 지금 현존하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한마디로 공산주의는 이상적인 나라(유토피아)라는, 제멋대로 그린 설계도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껴안고 있는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그 모습이 정해지는 결과라는 말이에요.“
공산주의라는 것은 미리 정해진 설계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해 나가다 보면 다다르게 되는 결과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어떠한 시대든 지배 계급의 사상은 지배적 사상이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가 강자들의 사상인 것처럼.
“국가는 지배 계급에 속한 개인이 그들의 공동 이해관계를 관철시켜 어느 특정한 시대의 시민사회 전체를 총괄한 형태이기 때문에 그 귀결로서 모든 공통의 제도가 국가의 매개에 의해 정치적 형태를 띄게 된다. 그로부터 법률은 의지에 기초한다는, 그러니까 현실적 토대에서 떨어져 나온 의지인 자유로운 의지에 바탕을 둔 것 같은 환상이 생겨난다.”
국가나 법률도 그 내실을 들여다보자면 지배 계급의 경제적 이해관계를 관철시키고 있다는 말이지요.
p 197.
오늘날 한국의 사법부가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이는 몇 명이나 될까. 언론은 툭하면 박유천 성폭행 사건과 홍상수, 김민희 불륜 이야기만 쏟아낸다. 홍만표 비리 사건, 정운호 게이트, 어버이 연합과 연관된 전경련, 국정원, 청와대 관련 기사는 좀 체로 찾아볼 수가 없다.
우치다 타츠루는 <일본변경론>이란 책을 썼다. ‘변경의 백성’이라는 것이 일본인의 사고방식을 결정적으로 뒤틀리게 해놓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일본인은 이런 액자 속에 들어 있다’고 정기적으로 알려 주는 것이 그의 목표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보는 일을 상상해볼까요? 평범한 벽이 있고 거기에 액자에 넣은 그림이 걸려 있지요.....하지만 액자 안의 그림은 그렇지 않지요. 거기에 그려져 있는 것에는 ‘만인 공통’의 의미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흘깃 본 뒤 아무런 감동도 받지 않고 지나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그 앞에 서서 몸속 깊은 곳에서 전율을 느끼지요. 액자란 ‘그 안에 있는 것에 대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른 의미를 길어내시오’하고 지시해요. 즉 메시지를 해석하라는 지시를요. 그러니까 액자를 어느 곳에 갖다 댈 것인가, 무엇을 액자 안에 넣을 것인가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군요.
그 어떤 ‘그림’이든 누군가가 어떤 심오한 의도와 절실한 바람을 갖고 긴 세월 동안 제작해낸 것인 이상, 해석할 가치가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보기에 액자란 사람들을 해석으로 유도하는 장치인 셈이지요.
p 210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인간이라는 것der Mensch’를 비판한다. 타츠루에 따르면, ‘인간이라는 것’을 본질적으로 규정해버리면, 아무리 인간적인 행위를 하든지, 비인간적인 행위를 하든지, 인간의 자기동일성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현실적이고 역사적인 인간’이 인간의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본질’이 아니라 ‘행위’다.
임승수의 <원숭이를 이해하는 자본론>을 읽고, 마르크스의 천재성에 감탄했다면, 이 책을 읽고는 마르크스의 의로움에 감탄했다. 우치다 타츠루는 마르크스의 말마따라 ‘유적 존재’가 되기를 꿈꾼다. 모든 사람이 ‘유적 존재’를 지향하는 사회라면 그곳이 결국 유토피아가 아닐까.
우선은 나부터.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바꾸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