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 / 서병훈 / 책세상 / 155쪽

(20.4.5. - 20.4.16.)

간음하지 마라. 도둑질하지 마라 등의 도덕 규범이 성립한 수 있는 궁국적 기반은 무엇인가? 인간 본성이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가, 아니면 도덕이나 윤리는 그저 인간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계약의 산물에 불과한 것인가?

또는 이런 질문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조수미와 이미자 중 누가 더 훌륭한 '가수'인가? 이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조수미와 이미자를 어떻게 비교할 수 있느냐며 조수미 쪽에 손을 드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슨 소리냐, 이미자 노래의 참맛을 모르고 그런 말 하지 말라고 강력하게 반박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사람마다 취향과 생각이 다른데 일률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주장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수를 세거나 길이나 무게를 재는 것에 대해서는 쉽사리 의견이 일치한다. 경험적 판단을 재정할 확실한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 좋고 나쁜지 또는 존경받을 일이고 수치스러운 일인지에 대해서는 각각 생각이 다르다.

이런 문제를 놓고 소피스트들은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고 주장했다. 가치 문제는 각자가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인간이 아니라 '신이 만물의 척도'가 되지 않으면 올바른 삶을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신이란 인간의 주관적 판단을 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가치체계를 뜻한다. 넓게 보면 서양 철학사는 이 두 주장을 중심으로 한 논쟁으로 점철되었다. 오늘날에는 대체로 소피스트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다. 특히 자유주의자들이 그렇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자유주의자 중에서도 객관적, 보편적 가치를 찾는 사림들이 있다 그중 밀John Stuart Mill(1806~1873)이 대표적이다.

(P.6)

밀이 생각하는 공리주의는 자기 발전을 도모하는 정신적 쾌락에 집중된다. 그래야 인간으로서의 품위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품위와 대립되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을 제의하면 결코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고, 만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밀은 또한 인간이 사회적 감정social feeling을 타고난다고 믿었다. 이웃을 자기 몸처럼 아끼며 일체감을 느끼는 사회적 존재가 바로 공리주의에서 생각하는 인간의 본질이다.

결국 밀의 공리주의는 자기 발전과 타인에 대한 배려라는 두 가치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의 성가를 드높이는《자유론On Liberty》도 이런 바탕 위에서 꽃피었다. 자유란 마음 내키는 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공리주의가 고민하는 가치의 방향과 어긋나는 것은 참된 자유가 아니다.

(P.8)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우리 삶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기준을 둘러싼 논쟁은 별 진척을 보이지 않고 있다. 지식의 발전 과정을 되돌아볼 때, 이것만큼 우리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 또 있을까? 인간의 삶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주제임에도, 이 문제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여전히 심각한 낙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철학이 처음 생기면서부터 최고선summum bonum, 달리 말하면 도덕성의 기초에 관한 의문이 사변 철학의 핵심 과제가 되었다. 그동안 최고의 지성들이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온몸으로 매달렸으나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저 치열한 논전 끝에 여러 분파와 학파로 갈라졌을 뿐이다. 젊은 시절 소크라테스는 나이 많은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의 말을 경청한 뒤(플라톤의 대화편이 두 사람 사이에 실제로 벌어진 대회를 담고 있다면), 당시 영향력이 컸던 이른바 소피스트의 도덕률에 대항해서 공리주의 이론을 주장했다. 이후 2,000년 이상의 세월이 홀렀지만, 여전히 똑같은 토론이 이어지면서 철학자들이 두 학파로 나뉘어 다투고 있다. 오늘날 사상가 또는 넓은 의미의 인류가 이 주제에 의견이 일치될 가능성은 소크라테스 시대보다도 높지 않다.

(P.13)

어떤 한 과학 분야의 제1원리라고 궁극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진리들은 그야말로 그 분야에서 익숙하게 다루는 기본 개념에 대한 형이상학적 분석의 최종 결론이다. 이런 진리와 과학의 관계는 건물과 주춧돌보다는 나무와 뿌리의 관계에 더 가깝다. 뿌리는 땅 위로 파헤쳐져서 햇빛에 드러나지 않더라도 자신이 해야 할 임무를 잘 수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학에서는 특정 부분의 진리가 일반 이론보다 먼저 발견되지만, 도덕이나 입법 활동 같은 실천적인 분야에서는 반대 현상이 일어난다. 모든 행동은 어떤 특별한 목적을 추구한다: 따라서 행동 규칙도 추구하는 목적에 따라 특성과 색깔이 규정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무엇인가 추구할 때는 그것에 관해 먼저 분명하고 자세하게 파악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순서가 뒤바뀐다면 말이 되지 않는다. 옳고 그른 것을 시험하는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분간하기 위한 수단이어야지. 거꾸로 이미 가려낸 것의 결과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는가?

(P.13)

나는 이 책에서 더 이상 다른 이론에 대해 논의하지 않고, 다만 공리주의 또는 행복 이론을 소개하고 평가하며. 그것을 입증하는 일에만 치중하려 한다. 그런 이론을 지칭하는 용어 자체의 통상적이고 일반적인 의미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입증 할 수 없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궁극적인 목적에 관한 질문은 직접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어떤 것이든 좋은 것이라고 증명되려면, 따로 증명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좋은 것이라고 받아들여지는무엇인가를 얻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만일 누군가 그 자체로 좋은 것을 전부 포함하는 포괄적 법칙이 있으며, 그 나머지 좋은 것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서 좋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법칙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면 된다. 그러나 그 법칙은 흔히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의미의 증명 대상은 될 수 없다. 그렇지만 그 수용 또는 거부가 맹목적 충동이나 자의적 선택에 의해 좌우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증명이라는 말 속에는 여러 뜻이 들어 있어. 논쟁의 대상이 되는 다른 철학적 명제만큼이나 이 문제도 증명 대상이 될 수 있다. 주제는 이성적 능력의 인식 대상이 된다. 이성적 능력은 단지 직관에만 힘입어서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깊이 고려해 지성은 특정 주장에 대해 동의 또는 비판하게 되는데, 이것이 곧 증명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P.18)

효용과 최대 행복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고 있는 이 이론은, 어떤 행동이든 행복을 증진시킬수록 옳은것이 되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낳을수록 옳지 못한 것이 된다는주장을 편다. 여기서 '행복'이란 쾌락, 그리고 고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쾌락의 결핍과 고통은 '행복에 반대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론이 정립하고 있는 도덕적 기준을 분명하게 설명하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특히 고통과 쾌락이라는 개념이 무엇을 뜻하고 그 범위가 어디까지 인지에 대한 의문이 많다. 그러나 소소하게 설명할 것이 많다고 해서 이 도덕 이론의 핵심 명제가 흔들리는 것은 아니다. 즉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쾌락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며. 바람직한 모든 것(다른 모든 이론과 마찬가지로, 공리주의에서도 바람직한 것은 무수히 많다)은 그 자체에 들어 있는 쾌락 때문에 또는 고통을 막아주고 쾌락을 늘려주는 수단이 되기 때문에 바람직하다는 것이 공리주의의 핵심 명제가 된다.

이 이론은 많은사람들, 특히 느낌feeling과 목적purpose에 관한 대표적 사상가들의 심각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이 말하듯) 인생에는 쾌락보다 더 높은 목적이 없다고, 다시 말해 쾌락 이상으로 더 좋은 욕망과 더 고상하게 추구할 만한 것이 없다면 이것은 극단적으로 야비하고 천박한 이론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 옛날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을 돼지에 비유하면서 심한 야유를 보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현대에 들어서도 이 입장을 취하는 사림들은 독일과 프랑스, 영국의 공격자들로부터, 비록 표현이 점잖기는 하지만, 비슷한 취급을 받고 있다.

이런 공격을 받으면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은 늘 똑같은 방식으로 반격을 가했다. 즉 자신들을그렇게 비웃지만, 인간이 돼지가 즐길 수 있는 쾌락 이상의 것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처럼 상정하는 그들이야말로 인간을 비참한 존재로 만드는 장본인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돼지와 똑같이 규정히는 자들이라면 그와 같은 비난에 반박할수 없을 것이다. 그것이 근거 없는 비방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일 인간이 돼지와 똑같은 쾌락을 즐긴다면, 한쪽에 좋은 삶의 규칙이 다른 쪽에 대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이다.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이 말하는 삶의 방식과 짐승의 그것을 비교하는 것이 모욕적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이것은 짐승에게 해당되는 쾌락이 인간의 행복 개 념을 만족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나는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이 공리주의 원리에서 자신들의 행동 규범을 도출해내는 과정에 전혀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런 일을 제대로 하자면 기독교뿐과 아니라 스토아 학파의 여러 요소도 포함해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에피쿠로스 학파의 인간존재 이론치고 단순 감각 작용에서 생기는 쾌락보다 지성, 느낌과 상상력, 도덕 감정의 쾌락에 대해 더 큰 값어치를 부여하지 않은 것은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리주의 이론가들도 정신적 쾌락이 내재적 본질에서는 몰라도 항구성, 안전성, 비용 등의 주변적 장점에서 육체적쾌락보다 한결 더 우월하다고 주장해왔다.

(P.24)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가장 적합한 개념은 인간으로서의 품위sense of dignity다.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런저런 형태로 지니고 있는데,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각자의 능력에 비례해서 커진다. 그리고 그런 의미의 품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그 품위가 행복을 구성하는 필수적인 요소가 된다. 따라서 품위와 대립되는 것은 일시적인 순간을 제외하면 길고 진정한 욕망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혹시 이런 인간적 품위를 너무 강조하다 보면 행복을 잃게 된다고, 다시 말해 상황이 비슷할 경우 우월한 사람이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에 비해 행복을 덜 느끼게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과 만족content이라는 전혀 다른 두 개념을 혼동한 결과다. 즐거움을 향유하는 능력이 낮은 사람 일수록 손쉽게 만족을 느낀다는 것은 불문가지의 사실이다. 반면에 그런 수준이 높은 사람은 자신이 도달할 수 있는 행복 이라는 것은, 세상이 늘 그렇듯, 언제나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불완전한 것을 감내할 만하다면, 그는 그것을 참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불완전함 때문에 얻게 되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지 못하는 까닭에, 그것에 대해 의식조차 하지 못하는 사람을 부러워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결국 만족해하는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워하는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 민족해하는 바보보다 불만을 느끼는 소크라데스가 더 나은 것이다. 바보나 돼지가 이런 주장에 대해 달리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한쪽 문제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비교 대상이 되는 다른 사람들은 두 측면 모두잘 알고 있다.

​(P.28)

공리주의가 사람들에게 언제나 이 세상 또는 사회 전체를 포괄하는 일반성에 입각해서 살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을 잘못 이해하는 것이다. 대다수의 선한 행동은 사회 전체의 이익이 아니라 당사자 본인의 이익을 위해 의도된 것이다. 이 개인들의 이익이 모여 사회의 이익이 형성된다. 그리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아주 덕스러운 사림이라고 해서 자기와 관련되는 특정인을 넘어 반드시 많은 사람들을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가 잘 아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줌으로써 다른 사람의 권리 즉 정당하고 합법적인 기대를 침해하게 된다고 스스로 확신하게 되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한 주변 사람듣을 더 위하기 마련인 것이다. 공리주의 윤리에 따르단 행복을 증대하는 것이 덕스러움의 목표다. (1,000명에 한 사람 정도를 제외하고 나면) 누구게든지, 공익 자선사업가처럼 자기가 가진 능력을 발휘해서 덕스러운 일을 광범위하게 벌일 수 있는 상황은 아주 예외적으로만 생긴다. 이런 경우에는 그 사람에게 공공의 효용을 우선 고려하라고 요구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경우에는 그도 사적 고용 즉 일부 사람들의 이익 또는 행복을 증진하는 일에만 신경 쓰면 된다. 사회 전반에 걸쳐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라면 항상 포괄적인 목표에 마음을 쓸 필요가 있다. 어떤 일에 대해 절제가 필요한 경우--때로 유익한 결괴를 낳을 수도 있지만, 도덕적 고려 때문에 하지 않는 경우-다시 말해 일반적으로 해를 끼질 것이기 때문에 하지 말이야 할 이유가 충분한 경우인데도, 이것에 대해 확실 하게 의식하지 못한다면 양식 있는 행위자라고 할 수 없다. 이 정도의 공공 이익에 대해서는 여타 모든 도덕률도 신경을 쓰라고 한다. 사회에 분명히 해를 끼치는 일인데 누가 그것을 제지하지 않겠는가?

(P.44)

행복이 도덕의 목적이며 목표라는 명제를 설정한다고 해서. 그 목적지로 가는 길을 만들면 안 된다거나. 그 방향으로 가는 사림에게 이쪽이 아니라 저쪽으로 가야 한다고 충고한 수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선원들이 항해력을 계산하느라 기다릴 수 없다고 해서 항법술이 천문학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는 없다. 선원들은 합라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항해력을 계산할 수 있는 상태에서 바다로 나간다. 마찬가지로 모든 합리적인 존재는 현명한 것과 어리석은 것을 구분하는 훨씬 어려운 여러 문제뿐 아니라,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상적인 문제에도 대처하기 위해 마음을 미리 일정한 방향으로 잡고서 인생이라는 바다에 나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이 예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한, 그들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을 근본적인 도덕 법칙으로 채택하든지 간에 그것에 입각해서 하위 규범도 만들어내야 한다. 다른 모든 이론 체계도 그렇지만, 그런 하위 규범이 없다면 특정 상황을 맞아 아무런 주장도 펼 수가 없다. 따라서 그와 같은 2차 원리들이 존재할 수 없다거나, 인류가 삶의 경험을 통해 그 어떤 일반적인 결론을 끄집어내는 일 없이 지금까지 지내왔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상태로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강변하는 것은, 각종 논쟁으로 가득 찬 철학사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황당한 주장이다.

(P.53)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나머지 논거는 주로 인간 본성이 일반적으로 나약하다는 것과 양심적인 사람들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삶의 방향을 잡기가 어려워 곤혹스러워한다는 사실에 집중 되어 있다. 흔히 공리주의자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도덕 규칙을 예외적으로 적용하는 경향이 있고, 유혹을 받으면 규칙을 지키기보다 그것을 위반하는 쪽으로 효용을 해석하려 한다고 비난한다. 그러나 과연 효용이 악행을 정당화하고 우리 자신의 양심을 속이는 수단을 제공해줄 수 있는 유일한 신념 체계인가? 그렇지 않다. 세상에는 도덕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된 견해를 보이는 수많은 이론이 있다. 정상적인 사람 들이 믿고 따르는 모든 이론이 다 그렇다. 따라서 행동 규칙에 예외가 생기는 것은 특정 신념 체계의 결함이라기보다 인간사 자체가 너무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행동도 언제나 의무적으로 따라야 한다거나 반대로 항상 지탄받아야 마땅하다고 이분법적으로 잘라서 말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어떤 윤리 체계도 특수한 상횡에 부응하기 위해 행위자의 도덕적 책임 아래 어느 정도 융통성을 발휘함으로써 그 규칙의 엄격성을 완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빈틈이 있기 때문에 각종 신념 체계마다 자기 기만과 부정직한 궤변이 비집고 들어오는 것이다. 모든 도덕 체계 속에 명백하게 모순된 의무 조항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윤리 이론이 까다롭고 복잡하며 개인 행동을 양심적으로 지도하는 일이 진정 어려워진다. 정도는 다르지만 각 개인의 지성과 덕성에 힘입어 이런 어려움을 실질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누구든지 간에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 그리고 상호 갈등하는 권리와 의무에 대해 판정을 내려줄 궁극적 기준을 가지는 데 자격이 따로 있는 것처럼대해서는 결코 안 된다.

​(P.54)

일반 행복은 윤리적 기준으로 일단 받아들여지기만하면 공리주의 도덕의 힘을 키워주게 될 것이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감정이 바로 이런 굳건한 기초가 된다. 사회적 감정이란주변의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망인데, 이것은 이미 인간 본성 속에서 강력한 원리로 작동하고 있으며 다 행스럽게도 굳이 인위적으로 가르치지 않더라도 문명이 발전하면서 그에 비례해 점점 강해진다. 사회 상태social state는 인간에게 처음부터 너무나 자연스럽고 필요하며 또한 익숙한 것이라서 어떤 예의적 상황 또는 의도적으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든지 자신을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다. 인류가 야만 상태의 고립을 점점 멀리하면서 이런 사회적 결합은 더욱 견고해지고 있다. 따라서 사회 상대의 유지에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은 무엇이든지 보는 사람의 존재 상황에 대한 인식에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되고. 따라서 인간의 운명을 구성하는 큰 인자(因子)가 된다. 주인과 노예 관계라면 모를까, 이제 어떤 인간 사회도 관련된 사람들의 이익을 골고루 반영하지 않고는 아예 존재하기도 어렵다. 평등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는 모든 사람의 이해관계를 평등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존립이 가능하다. 문명사회라면 절대군주를 제외하고는 각자가 평등한 권리를 향유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이러한 원칙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이 가면서 이러한 방향으로 진보가 일어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이익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에게 심각한 해를 끼쳐서는 안 되고, (그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경수에) 서로 견제하며 사는 것 정도만 허용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다. 또한 사람들은 타인과 협력하며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집단적인 이익을 (적어도 당분간은) 행동의 목표로 삼도록 자신에게 다짐하는 일에 의숙하다. 그들이 서로 협력하는 한, 각자의 목표가 서로 일치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이익이 곧 자신의 이익이 된다고 하는 감정이 일시적으로나마 존재하는 것이다.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는 모든 것, 그리고 사회가 건강하게 발전하는 것은 각자가 타인의 복리에 대해 실제적으로 더욱 관심 갖게 할 뿐 아니라, 타인이 좋은 일에 대해 더욱 감정적 일체감을 느끼거나 아니면 적어도 그런 일에대해 점점 더 강력하게 실제적으로 관심을 쓰게 해준다. 그래서 마치 본능적인 것처럼, 다른 사람에대해 당연히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는 존재로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그들에게 좋은 일을 우해 자연스럽게 그리고 반드시 관심을 가지는 것이 맟 생존을 위한 물리적 조건인 것처럼 된다. 그 결과 이런 감정을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간에, 사람들은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고 강화하는데 뜨거운 관심을 가지고 강력한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있는 힘을 다해 다른 사람들도 그런 감정을 가지도록 추구할 것이다. 혹은 설령 자기는 그런 것을 가지지 못하더라도, 다른 사람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 못지않게 진지하게 느낄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정심이 확산되고 교육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아주 작은 감정의 씨앗이 뿌려지고 자라난다. 그리고 강력한 외부적 제재에 힘입어 그것을 둘러싼 집단 협력이 광범위하고 긴밀하게 일어난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우리 자신과 인간의 삶을 이런 식으로 인식하는 일은 점점 더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이해관계의 대립을 초래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 대다수 사람들의 행복을 무시하는 개인 또는 계급 사이의 법적 불평등을 발전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정치적 진보가 한 걸음 한 걸음 더욱 그런 방향으로 역사를 몰아간다. 인간 정신의 발전과 발을 맞추어, 각 개인의 마음속에 사회의 나머지 사람 전부와 일체감을 느끼고 싶어하는 마음이 지속적으로 강해진다. 이런 일체감이 완벽해진다면. 다른 사람을 배제한 채 자기에만 유리한 상황을 생각하거나 갈망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해진다. 우리가 지금 이런 일체감을 하나의 종교인 것처럼 가르칠 수 있다고, 그리고 한때 종교가 그랬던 것처럼 교육과 제도와 여론의 모든 힘이 말과 실천이라는 두 측면에서 사람들을 유아기에서 벗어나 크게 성장할 수 있게 한다고 상정한다면, 이 개념을 인식할 수 있는 사람 그 누구로 행복이라는 도덕률이 궁극적 정당성을 충분히 지닌다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수 없을 것이다.

(P.67)

돈이 가치 있는 것은 단지 그것을 가지고 다른 물건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돈 자체보다는 다른 것에 대한 갈망, 즉 원하는 것을 만족 시킬 수 있는 수단이기 때문에 돈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돈에 대한 집착은 인간 삶을 좌우하는 가장 강력한 동인 중 하나일 뿐 아니라 많은 경우에 그 자체로 갈망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때로는 돈을 소유하려는 욕망이 그것을 사용하고자 하는 욕망보다 더 강렬하기도 하며, 돈보다 더 고상한 다른 목적에 대한 갈망이 전부 사그라질 때도 돈에 대한 욕심은 더 커질 수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어떤 목적을 위한다기보다 그 목적의 일부분으로서 돈을 갈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에는 행복을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 그 자체로 행복에 관한 개인의 생각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다른 위대한 목적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다. 예를 들면 권력이나 명성 같은 것도 그렇다. 물론 이런 것에는 각각 어느 정도 즉각적인 쾌락이 따라다니며, 그런 성질이 적지 않게 자연스럽고 내재적인 것 같은 모양새를 취한다는 점에서 돈과 엄연히 구분된다. 그런 것만 제외하면 나머지는 상당히 유사하다. 그래서 권력과 명성이 지닌 가장 강력한 매력은 우리가 원하는 다른 것을 획득할 수 있도록 매우 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이다. 권력과 명성에 대해 사람들이 그토록 심하게 집착하고, 어떤 면에서는 다른 어떤 욕망보다 더 애착을 갖는 것은 그것과 우리가 갈망하는 모든 대상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는 수단이 목적의 한 부분이 된다. 아니 그것을 수단으로 삼는 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게 그 목적을 구성하는 요소가 되고 있다. 한때 행복을 얻기 위한 도구로 갈망되던 것이 그 자체로 갈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 자체로 갈망의 대상이 되면서 행복의 한 부분으로서 갈망되고 있다. 사림들은 단지 그것을소유한다는 이유만으로 행복해지거나 행복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대로 그것을 가지지 못하면 불행해 진다. 그것에 대한 갈망은 행복에 대한 갈망과 다르지 않아서, 음악에 대한 사랑 또는 건강해지고 싶어 하는 갈망보다 더 강렬하다. 그것은 행복에 다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 행복에 대한 갈망을 구성하는 요소 중 일부인 것이다. 행복이란 추상적인 관념이 아니고 구체적인 하나의 전체다. 따라서 그것이 그 전체의 부분이 된다. 공리주의의 기준은 이와 같은 관계를 정당화하고 인정한다. 처음에는 우리의 원초적 갈망을 충족하는데 아무 관심이 없고, 그저 그런 발향에 도움의 되거나 일정한 상관관계를 가진 정도였던 사물들 자체가, 그 영향을 받는 인간 삶의 영역 속에서 지속성, 심지어는 강도의 측면에서 원초적 쾌락보다 더 가치가 있는 쾌락의 원천이 되곤 한다. 만일 세상 이치가 이렇지 않다면 인생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행복을 느끼기에도 대단히 부족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P.78)

도덕 이론가와 입법가들이 볼 때,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행복권을 누려야 한다는 말은 행복하게 사는 데 필요한 모든 수단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지녀야 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물론 인간사를 살아가면서 불가피한 경우. 그리고 모든 개인이 관련되는 일반 이익을 위해 그런 원칙이 일정 부분제한받을 수밖에 없지만, 이런 경우도 엄격하게 규정되어야 한다. 다른 모든 정의에 관한 격률과 마찬가지로 행복권 역시 보편적으로 무조건적으로 적용될 수는 없다. 이미 이야기한 대로 그와는 반대로 사회적 편의라는 개념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따라 여러 제약이 따르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일단 원칙이 적용된다면, 그것은 정의의 이름으로 지시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일부 공인된 사회적 편의 때문에 제한이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모든 사람은 평등한 대우를 받을 권리를 가진다. 그러므로 더 이상 사회적으로 도움을 준다고 생각되지 않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 불평등은 단순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 불의라고 규정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개인의 권리를 심각하게 짓밟는 그런 처사가 지금까지 어떻게 용인되어 왔는지 의아해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 역시 사회적 편의라는 개념에 대해 똑같이 잘못 이해한 나머지 다른 불평등에 대해 눈을 감고 지내왔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래서 그런 오해를 거두고 나면 자신들이 그동안 눈감고 지내온 것들이나 장차 혹독하게 비판하려는 것이 똑같이 형편없다는 것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사회 진보의 전 역사는 수정과 변화로 점철되고 있다. 사회 발전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인식되던 괸습이나 제도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둘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 불의나 폭압으로 낙인찍히며 오명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노예와 자유인, 지주와 농노, 귀족과 평민의 관계가 그랬다.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가시권 안으로 들어와 있지만, 피부책과 인종, 성별에 따라 신분의 차이가 매겨지는 것도 앞으로는 그런 신세가 될 것이다.

(P. 123)

<해제>

공리주의는 흄David Hume을 거쳐 벤담에 의해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벤담은 원래 법을 공부한 사람으로, 새로운 도덕 이론을 만드는 것보다 현실을 개혁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그가 공리주의를 체계화한 것 역시 현실을 고치는 데 도움이 될 원리를 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벤담은 효용이라는 잣대를 제시했다. 효용을 증대할 수 있는 사회 정책이라면 좋은 것이라는 논리를 전파해 나간 것이다. 그는 이러한 내용의 공리주의를 통해 당시 팽배하던 직관주의적 도덕관의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또한 벤담은 사람들이 현실에서 보여주는 보습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람들이 쾌락의 굴레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굳이 무시하려 드는 기존의 도덕 철학에 대해 냉소적 자세를 취했다 벤담은 공리주의 사상의 기초가 되는 내용을 다음과 같이 단정적으로 정리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에 의해 고통과 쾌락이라는 절대 군주와도 같은 힘의 지배를 받는다. 이 두 요소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할 것이라는 점을 예측하게 해줄 뿐 아니라 나아가 어떻게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규정하기까지 한다. 옳고 그름의 기준이 되는 이 힘을-거역하면 할수록 결국은 그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확인하게 될 뿐이다.

벤담은 인간의 삶은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감소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각자 자유로이 쾌락을 증진하고 고통을 감소시킬 수 있다면, '최대 다수의 최다 행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P. 127)

밀이 정신적 방황을 극복하는 데는 워즈워스의 시가 큰 힘이 되었다. 사색과 분석 못지않게 수동적인 감수성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었기 때문이다. 그가 1836년 “공리주의가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의 틀을 세우기 위해서는. 이성 못지않게 감성이 소중하다는 것, 그리고 시가 철학의 필수 요건이 된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내용의 편지를 쓴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밀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이겨내면서 음악, 시, 미술 등이 인간의 교양을 넓히는 데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로크, 흄, 하틀리 대신에 워즈워스, 콜리지, 괴테 등을 읽기 시작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밀은 아버지와 벤담의 그늘을 벗어나게 된다.

밀은 공리주의자를 자칭했지만 전통적 공리주의자. 특히 벤담과 여러모로 달랐다. 우선 두 사람의 세계관이 달랐다 밀은 행복이라는 말을 벤담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그 뿐 아니라 밀은 각 사물이 내포한 가치의 객관적 차이를 인정했다. 효용이라는 논리적 도구를 빌린다는 점을 제외하면, 밀의 공리주의는 벤담과 큰 차이가 난다.

(P. 132)

공리주의는 효용과 최대 행복 원리를 도덕의 기초로 삼는 이론이다. 밀은 행복을 제외하면 사람이 진정 갈망하는 것은 없다는 확신 아래, 어떤 행동이든 행복을 증진시킬수록 옳은 것이 되고 행복과 반대되는 것을 낳을수록 옳지 못한 것이 된다는 주장을 편다. 여기서 행복이란 쾌락, 그리고 고통이 없는 것을 뜻한다. 인간의 삶에서 그 자체로 즐거움을 주거나 쾌락을 주거나 고통을 피하게 해주는 수단이 아니라면 어떤 것도 좋은 것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쾌락이야말로 목적으로서 바람직한 유일한 것이 된다. 이것이 공리주의의 핵심 명제다.

밀은 이처럼 행복의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것을 효용이라고 부르면서, 이 기준에 따라서 도덕률을 확립하고자 했다. 어떤 행위든 행복을 증진시켜주면, 즉 쾌락을 늘려주거나 고통을 줄여주면 정당한 것이 되고. 그 반대면 나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사림들은 흔히 타인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고귀하게 여긴다. 그러나 공리주의지들은 생각이 조금 다르다. 회생 그 자체가 선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사림을 행복하게 해주거나 행복하게 만드는 수단을 증대해주는 등, 행복의 전체 양을 증진하지 않는 희생이란 쓸데없는 허비라고 보는 것이다.

(P.133)

밀에 관한 전통적 해석은 밀이 공리주의의 한계를 직시하며 그것을 극복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입장을 견지한다. 이들 중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영국의 저술가 벌린Isaiah Berlin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밀은 자유가 수단적 가치를 지닌 것이라는 공리주의적 시각과 반대로 전체 복리의 증진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 도덕적 중요성을 지닌 것이라는 생각, 이 두 상반된 관점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채 문제 해결에 실패 했다. 밀은 직관이 아니라 이론을 추구한다면서 공리주의 원칙을 고수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자유라는 도덕적 가치에 대한 직관적 당위론을 주장했다. 밀이 이러한 모순의 늪을 헤쳐 나오지 못했다는 것이 벌린의 생각이다

밀은 인간이 사회성을 타고났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체성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긴다. 자기 발전 또는 진보가 효용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가 상정하는 이런 가치들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충분한 경험과 웬만한 수준의 이성을 갖춘 사람들이 합심하여 토론한 결과 얻어낸 결과물인가? 그들이 모든 것을 다 경험하고 난 뒤 도달하게 된 결론의 결정체인가? 아니다. 밀이 홀로 가치 있는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을 뿐이다. 사회성만 해도 그렇다 밀 자신이 말했듯이, 인간은 잘못된 사회 제도와 교육의 결과로 인해 이기심에 젖어 있고 그 결과 남보다 앞서 가기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적어도 경험과 관찰을 통해 본 인간의 실상은 이런 것이다. 그렇다면 밀은 어떻게 해서 사회성이라고 하는 천성적 경향을 발굴해낼 수 있었을까? 스스로의 직관에 의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신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밀은 직관주의에 빠져 있다.

(P. 144)

결국 밀의 기대와 달리, 공리주의가 우리 삶에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기준을 둘러싼 논쟁에 결정적인 마침표를 찍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 도덕성의 기초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여전히 열려 있다. 이 대목에서 '정의론'의 대가 를스John Rawls에 대한 평가를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롤스의 구성주의는 규범 회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되었지만 그의 장담(혹은 기대)과 달리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데 실패 했다. 그럼에도 규범 회의주의에 맞서 '정치철학의 부활'을 이끌어낸 를스의 공헌은 결코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 이 학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밀의《공리주의》도 마찬가지다. 비록 제1원리를 둘러싼 논쟁은 계속될 수밖에 없지만, 철학이 가야 할 길, 도전해야 할 과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돋보이는 것이 바로《공리주의》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답게 시는 것인지, 그리고 우리가 왜 이웃사람들을 내 몸처럼 아끼지 않으면 안 되는지 등에 관한 밀의 성찰은 철학이 죽은 시대, 철학을 폄하하는 사회 속에서 더욱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

(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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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 <공리주의> ​

(Utilitarianism)

(철학사상 별책 제2 제9호)

김영정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99쪽

(20.4.9. - 20.4.15.)

<자유론>이나 <공리주의>(On Utilitarianism)가 밀의 생애 중반기에 쓰여진 주요 저작이라면 ꡔ논리학 체계ꡕ(System of Logic)나 <정치경제학 원리>(The Principle of Political Economy)는 그보다 조금 이전에, <대의정치에 대한 고찰>(Considerations on Representative Government)과 <여성의 예속>(The Subjection of Women)은 그 이후에 쓰여진 밀의 주저들이다. 특히 ꡔ여성의 예속ꡕ은 당시로서는 드문 여성주의(feminism)적 시각을 반영하는 것으로 최근 새로이 주목받고 있는 저서라고 할 수 있다.

(P.6)

벤담(Jeremy Bentham)의 저술들이 공리주의라는 새로운 사상을 정립하고 이를 법률에 적용시키기 위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라면, 윤리이론과 관련된 밀(John Stuart Mill)의 저술들, 특히 <공리주의>(On Utilitarianism)는 이처럼 공리주의의 개념을 분명히 하고, 유럽 대륙의 철학자들에 의해 공리주의에 제기된 물음들과 밀 스스로 확인한 의문들에 답하기 위한 의도에서 저술된 것이다. ‘개요’, ‘공리주의란 무엇인 가?’, ‘공리의 원리의 궁극적 제재에 대하여’, ‘공리의 원리는 어떻 게 증명되는가?’, ‘정의와 공리의 관계에 대하여’ 등의 총5장으로 구 성되어 있는 이 책은 ‘공리’와 ‘쾌락’의 어의적 부정합성에 대한 해 명을 포함하여 공리주의와 여타 이론들을 비교하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지 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공리주의는 인간의 특성을 해명하지 못한다는, 즉 공리주의는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여타 존재 ― 가령 돼지 ― 를 동일하게 취급하고 있다는 비판에, ‘쾌락의 질적 차이’를 강조하는 이른바 ‘질적 공리주의’로 응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밀에 따르면 “만족한 돼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천 치보다는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낫다.” 바보천치나 돼지가 어떤 다 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자신들 각자 의 입장만을 알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바보천치나 돼지에 비교 되는 상대방은 양쪽 모두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P.7)

​공리의 원리 principle of utility

공리주의의 도덕성은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최대 선 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고 인정한다. 공리주의는 다만 희생 그 자체가 선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따름이다. 행복의 총량을 증대시 키지 않는 희생이나 증대시키려는 경향을 갖지 않는 희생은 무용지물(無 用之物)로 간주된다. 공리주의가 인정하는 자기 포기는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나 행복의 수단인 어떤 것에 대한 헌신뿐이 다. 이때 다른 사람들이란 인류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든, 인류전체 이익 의 범위 내에 있는 개인이든 모두 무방하다.

(P.19)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는 것을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해 두어야겠다. 그것은 공리주의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정당한 행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행위자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 사이에서 선택 해야 할 때, 공리주의는 행위자에게 전혀 이해관계가 없고 자비로운 제3 자처럼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요구한다. 나사렛 그리스도의 황 금률 가운데서 우리는 공리주의 윤리의 완전한 정신을 찾아낸다. 스스로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 라는 것은 공리주의 도덕의 이상(理想)을 나타내는 극치이다. 이 이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으로서 공리는 다음과 같이 명령할 것이다. 첫째로 법률과 사회적 장치가 모든 개인의 행복이나 (보다 실제적으로 말한 다면) 이익을 가능한 한 최대로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해야 하고, 둘째로 교육과 여론(與論)은 인간의 성격에 대해 거대한 힘을 가지 고 있는데, 이 힘을 이용해서 각 개인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주지시켜야 한다. 즉, 자신의 행복과 사회전체의 선 사이에는 결코 녹아 없어져 버릴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특히 자신의 행복과 보편적 행복에 관해 규정하는 ―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 행동양식의 실행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점을 교육과 여론이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인간은 아무도 일반적인 선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얻​으려는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일반적인 선을 증진시키려는 직접 적인 충동은 각 개인을 습관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될 것이고, 이 러한 충동과 결부된 심정은 각 개인의 정조(情調)면에서 넓고 현저한 위 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P.19)

​공리의 원리의 증명 (the proof of the principle of utility)

이상의 고찰로부터 실제로 소망되는 것은 행복 외에 아무 것도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렇지 않고 그 자신을 초월한 목적, 즉 궁극적으로 행복 의 수단이 되는 것 외에 소망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 행복의 일부로서 소망될 것이다. 행복의 일부가 되지 않는 한에서 그 자체를 위해 소망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덕 그 자체를 위해 덕을 구하는 사람 은 덕을 의식하는 것이 곧 쾌락이거나 덕의 결여를 의식하는 것이 곧 고 통이기 때문에, 또는 양쪽 모두의 이유가 겹쳤기 때문에 덕을 갈구하는 것이다. 실제로 쾌락과 고통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할 수 없고 거의 언제 나 함께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일한 사람도 얻게 되는 덕에 따라 쾌 락을 느끼고, 그 이상 얻지 못하게 될 때 고통을 느낀다. 덕을 얻어도 쾌 락을 느끼지 못하고, 덕을 상실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누가 덕을 사랑하고 덕을 구하려 하겠는가? 이런 덕은 구한다고 한들 겨우 덕이 자 기 자신이나 자신이 보살펴주는 사람들에게 다른 이익을 조금 줄지 모른 다는 것이 고작이다. 이로써 우리는 공리의 원리가 어떤 종류의 증명을 허용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게 된다. 지금 내가 말한 것이 심리학적으로 참이라면, ― 다시 말하면 인간 본성이 행복의 일부도, 행 복의 수단도 아닌 것을 아무 것도 소망하지 않게끔 구성되어 있다면, 행 복의 일부인 동시에 행복의 수단인 것만이 유일하게 바람직한 것이란 사 실 외에 우리는 아무 것도 증명하지 못할 것이고 또한 그밖에 다른 증명 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행복이야말로 인간 행위의 유일한 목 적이며, 행복의 증진은 모든 인간행동을 판단하는 판정기준이 된다. 이로 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이 필연적으로 따라나온다. 즉, 행복이야말로 도덕 의 기준이 되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부분, 즉 행복의 수단은 전체, 즉 행 복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P.37)

공리주의와 정의

왜 유독 공리주의에서 정의(justice)가 문제되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 해서는 먼저 정의의 개념에 대한 일반적 오해를 지적할 필요가 있다. 흔 히 우리는 정의(justice)를 문자그대로 정의(正義)로 해석하여 종종 정 의와 옳음을 동의어로 취급하곤 한다. 그러나 유럽어 권에서 정의 (justice)는 이른바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 즉 제반 가치를 분배하는 사회적 원리를 의미한다. 따라서 정의는 비록 각자의 정의관 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하더라도 언제나 최고 덕의 지위를 차지하는 개념 인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에 따르면 정의를 포함한 모든 윤리적 덕목들 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적 원리의 지위만을 부여받 는다. 동일한 맥락에서 정의도 종래의 최고 덕의 위치를 상실하고 공리의 원리에 따라 강조되거나 무시될 수 있는 부차적인 덕이 되고 마는 것이 다.

물론 정의와 공리의 원리의 이러한 마찰은 공리주의자에게는 이론적으 로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밀(John Stuart Mill)은 이러한 비판에 대해 두 가지 전략을 통해 공리주의를 옹호한다. 그것은 우선 정의라는 덕목 자체가 공리의 원리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며, 나아 가 정의는 공리주의적 틀 내에서도 유의미할 뿐 아니라, 매우 중요한 도 덕개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근거로 밀은 도덕법칙이 처세의 목적으로 준수되는 다른 법칙들보다 더욱 강력한 구속력을 갖는 것은 그것이 인간 복지의 본질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점을 해명 함으로써 정의나 권리 개념이 더욱 절대적인 구속력을 지닌다는 것을 입 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공리의 원리의 일종으로서 인간이 다른 사람에게 해악을 가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칙(no harm principle, 그 중 에는 상호간의 자유에 부당하게 간섭하는 것을 포함되어 있다)은 인간의 삶에 있어서 그 어떤 준칙보다 중요한 준칙이라는 것이 밀의 생각이다.

(P.38)

정의의 관념

​ 정의의 관념은 다음 두 가지, 즉 행동의 준칙과 준칙을 제재하는 심정을 전제한다. 전자[행동의 준칙]는 인류전체에 공통 적인 것을 전제하며, 인류의 선을 지양하는 것이어야만 한다. 후자[심정] 는 이 준칙을 위반하는 사람을 처벌하려는 욕구이다. 더욱이 여기에는 이 런 위반으로 인해 고통받는 분명한 피해자라는 개념도 포함된다. 즉, (이 경우에 적절한 표현을 찾아 사용한다면) 피해자의 권리가 준칙의 위반에 의해 침해당하는 것이다. 여기서 정의의 심정은 자기 자신과 자신이 공감 하는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거나 손해를 입힌 것에 대해 반격하고 복수하 려는 동물적 욕망이 인류의 공감을 확대시키고 인간의 현명한 이기심을 개념화하는 능력에 의해 모든 사람을 포괄하게끔 확대시킨 것처럼 보인 다. 현명한 이기심으로부터 감정은 도덕을 이끌어내고, 공감의 확대에 의 해 특별히 사람을 가동시키는 힘과 자기주장을 펼치는 힘을 이끌어낸다.

(P.49)

정의와 편리(공리)

정의는 어디까지나 다음과 같은 어떤 사회적 공리를 나타내는 데 적절 한 이름이다. 즉 (경우에 따라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지만) 하나의 종 (種, class)으로서 어떤 다른 공리보다도 특히 중요하고, 따라서 보다 절 대적이고 명령적인 공리인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정의라는 사회적 공리 는 정도 상으로도 다르고 종류도 다른 심정에 의해 자연스럽게 보호되고 또한 마땅히 보호되어야 한다. 이런 심정은 단지 인간의 쾌락이나 편의를 촉진시킬 뿐인 관념에 부수하는 보다 온화한 감정과 구별되는데, 이 구별 은 명령의 보다 분명한 본성에 의해 그리고 제재의 보다 강력한 성격에 의해 생겨난다.

(P.54)

​칸트(Immanuel Kant) 비판

지금 이런 선천적인 도덕주의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나의 목표는 아니 다. 그렇지만 하나의 사례로서 이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상가의 한 사 람인 칸트의 체계적 저작 <도덕형이상학>에 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칸트의 사상체계는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로 철학적 사색의 역사에 오랫동 안 길이 남을 것이지만, 이 탁월한 사상가는 방금 말한 저작에서 도덕적 의무의 기원과 근거로서 보편적 제1원리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네 행위의 격률이 모든 이성적 존재에 의해 법칙으로서 채택되도록 행동하 라.” 그러나 칸트가 이 교훈으로부터 실제적인 도덕성의 의무를 연역하 고자 했다면, 그는 십중팔구 실패할 것이 틀림없고, 해괴하게도 모든 이 성적인 존재가 가장 극악무도한 비도덕적 행위의 법칙을 채용한다는 어떤 배리(背理)현상을 나타내거나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더라 도)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사실을 나타내게 될 것이다. 즉, 그가 제시하려 한 것은 누구나 보편적으로 채용할 수 있는 결과가 어느 누구도 결코 그 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지 않는 그런 결과라는 점이다.

(P.59)

​공리, 쾌락, 행복

벤담(Jeremy Bentham)에 따르면 “공리(utility)는 어떤 것이든 이해 관계가 걸린 당사자에게 혜택, 이점, 쾌락, 선, 행복(이 경우에 이 모든 어휘는 동일한 의미를 갖고 그것은 고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을 가져다 주거나 불운, 고통, 악, 불행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그러한 속성을 의미한다.”

밀(John Stuart Mill)은 이러한 벤담의 쾌락주의적 공리, 쾌락, 행복 등의 개념을 대체로 수용한다. 그러나 밀은 벤담과 달리 쾌락은 단순히 동질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며 쾌락을 향유하는 주체에 따라 쾌락의 질 (質)이 현격히 달라질 수 있다고 본다. 그래서 밀에 따르면 “만족한 돼 지보다는 불만족한 인간이 낫고, 만족한 바보천치보다는 소크라테스가 되 는 것이 더 낫다.” 바보천치나 돼지가 어떤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하더 라도, 그것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자신들 각자의 입장만을 알고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바보천치나 돼지에 비교되는 상대방은 양쪽 모두 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P.67)

쾌락의 질

공리의 원리는 어떤 종류의 쾌락이 다른 종류의 쾌락보다 훨씬 더 바람직 하고, 한층 더 가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다른 모든 것을 평가할 때는 양 외에 질도 고려하게 되는데, 유독 쾌락을 평가할 때만 양에 의존하라 는 것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쾌락에서 질적 차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의 쾌락이 단 순히 양적으로만 다른 것보다 큰 것이 아니라 순전히 쾌락 그 자체로서 다른 쾌락보다 가치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 물음에 대해 가능한 대답은 오직 하나밖에 없다. 두 개의 쾌락 중에서 양쪽을 모두 경험한 사 람이나 거의 모든 사람이 그것을 선택해야 할 도덕적 의무감에 관계없이 결연히 선택하는 쪽이 보다 바람직한 쾌락인 것이다. 양쪽을 잘 아는 사 람들이 두 개의 쾌락 중에서 하나를 훨씬 높게 평가하고, 이런 선택이 보 다 큰 불만을 동반할 것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또한 마음만 먹으면 언제나 다른 쪽의 쾌락을 맛볼 수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쪽이 나타내는 쾌락 의 양 때문에 본래 쾌락을 버리지 않고 이 쪽을 선택한다면, 선택된 쾌락 의 향유는 질적으로 우세한 것이고 또한 양을 압도하기 때문에 양자를 비 교할 때 양을 거의 문제삼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 든다.​

(P.69)

​공리와 편의 utility and expedience

다시금 공리는 종종 편의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 말을 원리와 대립시켜 온 통속적인 용법을 이용하여 공리주의를 비도덕적 학설로 아주 간단하게 낙인찍어 버린다. 그러나 편의는 권리와 대립시켜 사용할 때, 이를테면 정 부관리가 자신의 지위를 보전하기 위해 국가의 이익을 희생시키는 경우처 럼, 보통 행위자 자신의 특수한 개인적 이익에 대해 편리하다는 의미로 사 용되고 있다. 이보다 다소 좋은 의미로 사용될 때는 어떤 직접적인 문제나 일시적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편리한 것을 의미하지만, 보다 높은 단계 에서 규칙을 지키면 훨씬 편리하게 생각되는데도 불구하고 때로는 규칙을 파괴하는 사태를 초래하기도 한다. 편의의 의미가 이쯤 되면, 유용하다기 보다 오히려 유해한 것의 일부가 되고 만다. 이처럼 한때의 고통스러운 순 간 또는 자기 자신이나 타인의 역경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을 말하는 것이 때로는 편리할지 모른다.

(P.75)

공리의 원리

​ 공리주의의 도덕성은 다른 사람들의 선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최대 선 까지도 희생할 수 있는 힘이 인간에게 있다고 인정한다. 공리주의는 다만 희생 그 자체가 선이라고 인정하지 않을 따름이다. 행복의 총량을 증대시 키지 않는 희생이나 증대시키려는 경향을 갖지 않는 희생은 무용지물(無 用之物)로 간주된다. 공리주의가 인정하는 자기 포기는 단 하나뿐인데,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나 행복의 수단인 어떤 것에 대한 헌신뿐이 다. 이때 다른 사람들이란 인류 전체를 지칭하는 것이든, 인류전체 이익 의 범위 내에 있는 개인이든 모두 무방하다.

공리주의를 공격하는 사람들이 좀처럼 인정하려 들지 않으려는 것을 나 는 여기서 다시 한번 말해 두어야겠다. 그것은 공리주의가 행위자 자신의 행복이 아니라 관계된 모든 사람의 행복을 정당한 행위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행위자 자신의 행복과 다른 사람들의 행복 사이에서 선택 해야 할 때, 공리주의는 행위자에게 전혀 이해관계가 없고 자비로운 제3 자처럼 엄정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요구한다. 나자렛 그리스도의 황 금률 가운데서 우리는 공리주의 윤리의 완전한 정신을 찾아낸다. 스스로 해주기를 바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 라는 것은 공리주의 도덕의 이상(理想)을 나타내는 극치이다. 이 이상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수단으로서 공리는 다음과 같이 명령할 것이다. 첫 째로 법률과 사회적 장치가 모든 개인의 행복이나 (보다 실제적으로 말한 다면) 이익을 가능한 한 최대로 전체의 이익과 조화를 이루도록 배치해야 하고, 둘째로 교육과 여론(與論)은 인간의 성격에 대해 거대한 힘을 가지 고 있는데, 이 힘을 이용해서 각 개인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주지시켜야 한다. 즉, 자신의 행복과 사회전체의 선 사이에는 결코 녹아 없어져 버릴 수 없는 관계가 형성되어 있고 특히 자신의 행복과 보편적 행복에 관해 규정하는 ― 소극적이고 적극적인 ― 행동양식의 실행 사이에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점을 교육과 여론이 가르쳐야 한다. 이렇게 한다면 인간은 아무도 일반적인 선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서 자신의 행복을 얻 으려는 생각을 품지 않을 것이며, 또한 일반적인 선을 증진시키려는 직접적인 충동은 각 개인을 습관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동기가 될 것이고, 이 러한 충동과 결부된 심정은 각 개인의 정조(情調)면에서 넓고 현저한 위 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공리주의 도덕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공리주의의 참된 성격을 안다면, 그들은 다른 도덕이 지닌 어떤 장점을 공리주의 도덕이 결여하고 있다고 말할지 나는 모른다. 또한 다른 어떤 윤리체계가 인간성을 더 아름답고 고귀하게 증진시킬 수 있을지, 이 윤리 체계는 윤리적 명령을 실행시키기 위해 공리주의가 갖지 않은 어떤 동기 에 의존할지 나는 모른다.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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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제러미 벤담 / 책세상 / 148쪽

(2020. 4. 4.)

근대 감옥은 과거의 감옥과 연속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혁의 흐름 속에서 발명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금 처벌의 생성 과정에서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 정파가 나뉘기도 했고 종교적으로는 정신을 치료하는 방식에 대한 논이 난무했으며 건축에서도 새로운 건축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감금 시설 모델이 쏟아져 나왔다. 파놉티콘은 이러한 시기에 등장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벤담이 왜 새로운 사회 모델로 감옥을 선택해 실험하려 했는지는 분명하다. 파놉티콘은 감옥 계획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벤담은 이 계획이 모든 시설로 확대되기를 바랐다. “이 원리는 다행스럽게도 학교나 병영, 즉 한 사람이 다수를 감독히는 일을 맡는 경우에 적용할 수 있다." (70쪽) 즉 벤담에게 피놉티콘은 사회의 모든 곳에 적용 되어야 할 모델인 것이다.

따라서 피놉티콘은 공리주의와 초기 자본주의 이론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이는 널리 알려진 시각 메커니즘, 즉 공간을 재배치해 감시자는 수감자를 볼 수 있으나 수감지는 감시자를 보지 못하는 것만이 아니라. 수감자를 꼼짝달싹 못하게 하는 치밀한 운영 방식이나 당시 중요한 논리 중 하나인 노동 가치를 교정, 생산 이익과 완벽 하게 결합시켰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파놉티콘은 당시의 사고가 집약된 건축물인 것이다.

(P.8)

파놉티콘

프랑스어로는 피놉티크Panoptique로 발음하지만 여기서는 벤담 Jeremy Bentham이 쓰고 널리 알려진 피놉티콘panopticon으로 표기한다. 어원은 그리스어로 '모두'를 뜻하는 'pan'과 '본다'는 뜻의 'opticon'을 합성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판옵티콘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발음이 의미를 충분히 분절(판+옵티콘)하기는 하지만, 이 책에서는 외래어 표기 규정에 띠라 '피놉티콘'으로 한다.

(P.128)

만일 다수의 사림에게 일어나는 일을 모두 파악할 수 있는,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이끌 수 있도록 그들을 에워 쌀 수 있는, 그들의 행동과 [인적] 관계, 생활환경 전체를 확인하고 그 어느 것도 우리의 감시에서 벗어나거나 의도에 어 긋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수단이 있다면, 이것은 국가가 여러 주요 목적에 사용할 수 있는 정말 유용하고 효력 있는 도구임에 틀림없다.

예를 들면 교육은 학생을 둘러싼 전체 환경의 결과물이다. 한 인간의 교육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바로 그의 행동 전부를 관찰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사물들에 둘러싸이게 하는가. 그리고 어떤 생각을 하게 할 것인가를 선택해서, 우리가 원하는 대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위치에 그를 놓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단 한 사람이 다수를 완벽하게 감시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많은 사람이 한 사람에게 집중할 수 있는가? 만일 단 한 명이 관리하는 것처럼 빈틈없이 업무가 진행된다면, 관리자들에게 일관되게 업무 지시를 하거나 감시 체계를 보완하는 조치는 더 이상 필요 없다.

우리는 새롭고도 유용한 이 아이디어가, 현재까지 많은 사람 을 모아서 이뤄낸 힘을 능가하는 감시 권력을 단 한 사림에게 줄 것임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여기에는 벤담이 매우 단순한 원리를 적용함으로써 이를 해결했다고 판단하는 현안이 있다. 그것은 감옥이다. 장점이 많은 이 원리는 적용 가능한 어떤 시설보다 입법 기관에서 가상 먼저 관심을 갖게 하는 특징이 있다. 중요성, 다양성, 어려움, 이것이 바로 이 원리를 적용하는 데 있어서 [감옥에] 우선권이 있는 이유다. 같은 원리를 연속적으로 다른 시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그가 요구한 까다로운 주의사항 중 몇 개만 없애 면 될 것이다.

감옥을 완전하게 개혁한다는 것은 죄수들이 바른 행동을 하도록 교화를 보장하고, 지금까지 신체적·정신적 타락으로 오염된 건강과 청결, 질서, 근면을 확고하게 하며, 비용을 감소시키면서도 공공의 안전을 견고히 하는 것이다. 그리고 간단한 건축 아이디어로 이 모든 것을 이루려는 것이 바로 이 글의 목적이다.

(P.19)

이 건물은 중앙의 한 점에서 각 수용실을 불 수 있는 형태로 된 하나의 벌집과 같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감독관은 마치 유령처럼 군림한다. 이 유령은 필요할 때는 곧바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드러낼 수 있다.

이 감옥의 본질적인 장점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파놉티콘 panoptique/panopticon이라고 부를 것이다.

(P.23)

결과적으로 우리는 감옥에서 진정으로 본질적인 개혁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현재 수감자들의 바른 행동을 확고히 하면서 미래의 교정을 보장할 것이다. 또한 국가의 재정 상태를 향상시키면서 동시에 공공의 안전을 강화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선을 행하고 악을 행하지 못하게 하도록 거대한 권력을 부여받은 단 한 사람의 인간이 있는 새로운 국가의 도구를 장 조할 것이다.

피놉티콘의 원리는 감시와 경제성을 연결해야 하는 거의 모든 시설에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그리고 반드시 이 [파 놉티콘〕아이디어를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는 없다. 쇠창살을 제거할 수도 있고 많은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할 수도 있으며 감시를 편안하게 하거나 불편하지 않게 할 수도 있다. 이 계획에 따라 지어진 공장은 진정한 산업 건물로서, 한 사림이 수많은 직협을 감독하는 편리함을 주고, 개폐가 기능한 다양 한 공동 주택에는 이 원리를 유연하게 적용할 수 있다. 한편 피놉티콘식 병원은 청결함이나 환기, 의약품 관리에서

어떤 소홀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부속실[병실〕의 완벽한 분할은 환자들을 더 잘 구분할 수 있게 하며, 흰색 철관들은 환자가 관리인과 지속적으로 의사소통을 하게 할 것이다. 각 선택에 따라 쇠창살 대신 내부에 유리창을 설치해 기온을 유지 할 수도 있고 시선을 완벽하게 확보하기 위해 커튼을 치지 않을 수도 있다. 마지막으로 이 원리는 다행스럽게도 학교나 병영, 즉 한 사림이 다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는 경유에 모두 적용할 수 있다. 피놉티콘 장치를 통해 단 한 사람에 의한 용의 주도함의 이점은 다른 체계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성실함보다 더 나은 성공을 보장한다.

(P.69)

<해제>

피놉티콘은 아마도 건축 분야 외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건축 계획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이를 다루는 분야는 건축 영역을 넘어서 사회과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왜 실현되지도 운영되지도 않은, 단지 계획으로만 머문 이 건축물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것일까? 푸코가《감시와 처벌) 에서 한 분석이 파놉티콘을 다시 크게 주목받게 한 계기임에 들림없지만 가장 큰 이유는 피놉티콘 그 자체에 있다.

파놉티콘은 감옥 건축 계획이다. 그러나 이것은 완벽한 감시를 통해 수감자를 교정하려는 목적만으로 계획된 것은 아니다. 피놉티콘은 벤담이 일생 동안 연구하고 생각해온 것, 즉 법률이나 구호 제도, 경찰 체계, 특히 교육과 노동, 경제 제도를 현실에서 구체화할 수 있는 표준 모델이다. 벤담은 파놉티콘을 통해서 모든 사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나아가 그는 당대 사회를 완벽한 합리성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로 재배열하여, 마치 만유인력으로 우주를 재구성한 뉴턴처럼 자신의 신념에 따른 새로운 우주를 꿈꿨다.

이익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이 세계를 구체화하는 장치 이자 사회 곳곳에 설치하게 될 기본 장치인 파놉티콘을 위해 벤담은 자신의 재산과 한창때의 20년 이상을 희생했다. 따라서 파놉티콘은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서 자주 등장한 유토피아 모텔 중 하나다. 유토피아가 사회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이상적인 모델이라면. 파톱티콘 역시 이 런 목적에 적합한 일종의 유토피아로 불 수 있다. 그러므로 벤담의 사고의 집약이자 그가 꿈꾼 이상 사회의 축소판인 파놉티콘은 어느 하나로 제한할 수 없는 다중적 의미를 지닌 공간 장치다.

(P.71)

감금 자체가 처벌인 오늘날과 달리 근대 이전의 감옥은 재판과 형벌을 받기 위한 대기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18세기 후반의 산업혁명으로 촉발된 자본주의와 합리주의가 본격화되는 전환기 속에서 상황은 달라졌다. 변화된 사회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문제들은 기존의 사회 정의나 처벌 체계를 흔들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질서 체계가 필요하도록 했다. 당시 큰 문제였던 유랑의 급증은 경범죄로 이어지는데, 특히 먹을 것을 훔치는 등의 행위는 과거에는 괸용을 베풀었지만 더 이상은 용납되지 않았다. 자본주의 질서에서는 생산력이 없는 사림들에게 노동이나 처벌로 그 대가를 지불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한편 전통적 처벌 방식인 신체형(특히 공개 처형)에 대한 반발로 인해 점점 처벌의 실행이 미뤄지면서 선고와 집행 간의 시간적 간격이 벌어졌다. 그리고 형벌 자체가 완화되어 주로 구금형으로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감옥에 사람이 넘쳐 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감옥은 모든 악의 소굴이자 질병의 근원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태를 해결하고자 등장 한 것이 새로운 성격의 근대 감옥이다. 그런데 근대 감옥이 근대 법전과 함께 생겨났다거나 과거 감옥의 연장선에 있다고 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오히려 근대 감옥은 18세기 후반 생산력이 없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구빈원이나 병원 등의 수용 시설을 모델로, 사법 기관과는 독립적으로 만들어졌다. 즉 근대 감옥의 출발은 처벌 그 자체에 목적을 두어 죄인이 처벌 받은 후에 사회로 바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재사회화와 교 회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감옥에 수감된 죄인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다수의 죄수들은 과거에는 그다지 큰 범죄로 취급하지 않던 행위를 저질렀으나 새로운 처벌 제도에서 처벌 대상이 된 사림들이었다. 이들 다수는 음식을 훔치는 등의 경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노동하지 않는 거지나 유랑자였다. 이들에게 노동의 가치와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습득하게 하는 것이 사회 혼란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방법이라 여겨졌으며 감옥은 이를 위한 교육 장소였다. 특히 박애주의 개혁자들은 감옥을 징벌히는 곳이라기보다는 정신을 치료하는 곳으로 여겼다. 나아가 당시의 정신병을 치료히는 의사들은 범죄는 '질병처럼 다루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수용실은 '범죄의 진정한 의무실' 이며 감옥은 '정신의 병원'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벤담에게도 영향을 끼치는데, 감옥 이외에 파놉티콘의 중요한 적용 대상이 바로 학교와 병원이었다는 점에 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실제 건축사의 흐름에서도 병원은 근대 감옥 건축이 등장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모델로 간주되었으며 근대 학교 건축은 감옥 건축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P.77)

근대 권력과 파놉티콘

푸코에게 파놉티콘은 근대 '권력'을 아주 잘 설명해주는 장치다. 피놉티콘을 통해 이전 시대와는 다른 새운 권력 행사 방식의 등장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푸코에 의해 정의된 '권력' 이란 무엇이며 파놉티콘에서는 어떻게 행사되는가?

파놉티콘 내에서 드러나는 푸코의 권력의 개념은 다음의 두 가지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첫 번째로 권력은 소유히는 것이 아니라 '작용'한다. 두 번째로 권력은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 하는 것이다.

파놉티콘에서 권력은 권력을 소유한 감시자 혹은 사법권자와 피권력자인 수감자의 관계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그보다는 시각적인 봄-보임의 불평등을 통해 규율의 내면화를 이루게 하는 그 작용 자체가 권력의 특성이며, 과거의 보여주기 위한 공개 처형 같은 가시적이고 드러나는 권력의 작용이 아니라 은밀하고 숨겨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새로운 권력망에 있게 되는 것이 근대에 나타나는 권력 작용의 방식이다. 또한 과시하며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각 대상자의 신체를 대상으로 작용한다는 의미에서 생체권력(bio-pouvoir)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편 권력은 신체를 억압하면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한 방식으로 사람을 변화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생산하는 것이다. 파놉티콘의 공간적인 주요 원리를 수용실과 감시탑이라 했을 때. 수용실(2~4명을 수용한다 할지라도)은 각 수감자를 공간적으로 분리함으로써 권력이 작용하게 하는 전제 조건이 된다. 개인별로 나눔으로써 '파악할 수 있는 신체'로 단위화 하는 것이다. 그리고 파놉티즘의 작동은 자기 감시 메커니즘의 내면화를 통해 '순종적인 신체' 혹은 규칙에 따르는 신체를 만든다.

​(P.120)

파놉티콘에서 찾아내는 것은 감시만은 아니다.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감시로 인해 내면화가 일어난다는 것은 결국 사회에 익숙해지는 방식이다. 만일 현대 문명과 격리되어 살아온 사람이 갑자기 서울 한복판에 살아야 할 경우, 적응하는 데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그는 사회의 복잡한 관계망에 삽입되지 않은 모래알 같은 상대에서 하나 둘씩 복잡한 사회 구조에 익숙해지게 될 것이며. 마치 복잡한 기술을 배우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럼 이렇게 적응이 필요한 우리시대의 생활양식은 어떤 것이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우리는 우리 삶에 어떻게 익숙해져가는가? 익숙해진다는 것은 과연 바람직한가? 이 질문의 출발점으로 피놉티콘을 선택하는 것은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추적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길이 피놉티콘의 심장을 가로지르고 있다. 파놉티콘이 확장해가는 지적 영역은 매우 방대하다. 이미 푸코라는 프리즘이 파놉티콘의 다영한 형태를 드러냈지만, 앞으로도 각각의 빛은 계속해서 더욱더 분화되거나 다른 색과 결합해 확장할 것이다.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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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담 <도덕 및 입법의 원리 서설>

(Intrduction to the Principles of Morals and Legislation)(1789)

(철학사상 별책 제2 제8호)

강성화 /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 104쪽

(2020. 4. 4.)

그의 혁명적 사상은 <서설>의 윤리학적 함축에서 더욱 분명하 게 나타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으로 압축되는 그의 윤리이론은 서구 역사상 그리스, 로마 시대 이후 처음으로 나타나는 종교독립적 윤리이론 이다. 이는 신의 명령이나 그에 의지한 지배자의 이익만을 옹호하는 무조 건적, 신비주의적 태도가 공적 윤리에 더이상 영향을 미쳐서는 안된다는 선언이며, 설령 신의 명령이 의미있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오직 이성적 쾌락계산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계몽주의적 시각의 완성이다. 또한 이는 윤리의 주체를 쾌락과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 모두로 확장 함으로써, 모든 인간의 행복을 동등하게 취급하는 근대 평등주의의 경험 론적 토대이며, 윤리의 주체를 인간 뿐 아니라 동물에게까지 확대했다는 ​점에서 동물해방론의 선구(先驅)라고 할 수 있다.

(P.7)

(공리주의 의의)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언뜻 단순한 내용으로 구성되는 공리주의 (utilitarianism)는 벤담 초년 시절의 이러한 굴곡을 비교적 충실히 반영 하고 있다. 공리주의는 무엇보다도 신성이나 초월적인 그 어떤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물리적 감각 ― 쾌락과 고통― 에서 윤리의 근거를 찾고 있다. 유럽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종교와 무관한 윤리이론이 제창된 것이다.

(P.19)​

(공리주의 비판)

물론 이러한 벤담의 비종교적 윤리설은 이미 당대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인간이 단순히 쾌락만을 추구 하는 존재라면 인간은 그러한 면에서 역시 쾌락만을 추구하는 돼지와 다를 바 없고, 결국 공리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 ‘돼지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리주의의 또 하나의 큰 기여자 (John Stuart Mill)은 그 유명한 ‘배부른 돼지보다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낫다’라는 문구를 들 어 대응한다.

‘돼지의 철학’이라는 비판은 이론적으로 뿐 아니라 자신에게 상당한 충격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는 돼지의 쾌락과 인간의 쾌락은 질 적으로 다른 것이므로 공리주의가 돼지와 인간을 동등하게 취급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P.20)

공리주의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공리주의를 이기주의와 혼동하는 것 이다. 이는 공리주의의 쾌락주의적 성격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많이 발생하 는데, 가령 공리주의는 새디스트의 쾌락도 윤리적인 것으로 인정하는 반직관적 이론이라고 하는 주장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서 은 매우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요지는 쾌락이나 고통이 그 자 체로 선 또는 악이라는 주장과 모든 쾌락이나 고통이 선 또는 악이라는 주 장은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디스트의 경우를 예 로 들어보면 고통을 가함으로써 그가 느끼는 쾌락은 그 자체로서는 선이지 만 그것이 더 큰 고통, 즉 더 큰 악을 유발하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그러 한 행동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백한 사실에도 불구하고 새디스트의 행위가 부분적으로 쾌락을 유발한다는 사실에 근거해 공리주의를 반직관적 이론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공리주의를 새디스트 일인의 관점에만 연결시킨 결과이므로 개인의 최대행복과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혼동한, 즉 이기주의와 공리주의를 혼 동한 것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P.20)​

이상의 비판들이 공리주의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공리주의 에 대한 가장 원론적인 비판금욕주의자의 존재유무에 관한 것이다. 주 지하다시피 공리주의는 쾌락과 고통을 각각 선악의 원천으로 간주하는 바, 만약 쾌락과 악을, 고통과 선을 연결시키는 사람이 있다면 공리주의의 이 러한 형이상학적 전제는 일순간에 부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 이 더욱 설득력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른바 금욕주의자들을 우리 주 변에서 흔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금욕주의자야말 로 공리주의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반론인 것이다. 이에 대해 벤담은 금욕주의자의 유형을 자세히 검토해 볼 것을 권유한 다. 그에 따르면 금욕주의자는 대체로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세속적 금욕주의자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금욕주의자이다. 우선 세속적 금욕주의자는 금전이나 육체적 쾌락과 관련된 사항에서는 금욕주의적 태도 를 보이는 반면에 가령 사회적 영예와 관련해서는 강한 명예욕을 갖고 있 는 경우가 많다. 그런 면에서 이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금욕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종교적 금욕주의자의 경우도 비록 현세의 행복을 추구하지는 않지만 내세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벤담이 볼 때는 이 또한 쾌락주의자의 한 유형일 뿐이다. 나아가 금욕주의가 진정으로 좋은 것이라면 사회적으로 권유되어야 하는데, 그 어떤 경우에도 당사자의 동의없이 금욕주의가 강요되는 경우는 없으며, 더욱이 국가 체제로서 금욕주의 가 채택된 경우는 전례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스파르타 같은 체제가 있었 지만 그것은 안전을 목적으로 한 금욕주의였지, 금욕 그 자체가 목적이지 는 않았다는 것이다.

(P.21)

(공리주의에 대한 현대적 논의)

공리주의에 대한 또다른 비판은 공리주의는 다수의 이해관심을 실현하 기 위해 소수의 이해관심을 침해하는 것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일면 타당하고, 일면 부당한 것인데, 공리주의적 소수 억압이 다수결 규칙을 통해 발생하는 것과 동일한 소수 억압으로 이 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다수결 규칙은 다수와 소수의 이 해관심을 저울질하지 않고 단순히 선호하는 사람들의 수에 따라서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명백한 소수억압이 발생할 수 있지만, 공리주의는 선호하 는 사람들의 수 뿐 아니라 선호하는 정도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소수

억압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다수결 규칙 하에서 발생하는 것보다는 완화된 형태로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공리주의자인 (John Stuart Mill)이 <자유론>을 통해서 소수자 억압에 반대한 사실만 보아도 분명히 드러난다 하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공리주의가 소수자 억압의 가능성을 여전히 내포 하고 있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절차주의(proceduralism)나 권리 를 중시하는 이론들에서는 여하한 잔여이익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잔여이익을 위해서 절차나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허용되지 않 는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이러한 이익의 실현을 허용할 뿐 아니라, 강도가 동일하다면 다수자의 이익 실현을 정당화해 준다는 면에서 소수자 억압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방식의 소수자 억압 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이 이론적 약점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P.22)

공리주의와 관련하여 마지막으로 검토해 볼 문제는 도덕적 소외 (alienation), 또는 인격적 통합성(integrity)과 관련된 문제이다. 주지하 다시피 공리주의자는 개인적 결단이 필요한 순간에 항상 공익을 우선시해 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공익 우선 결정이 때로는 개인에게 치명적인 인격 적 훼손을 요구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자신의 지식을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하고 싶지 않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공익을 위해 화학무기를 생 산하는 과정에 참여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Bernard Williams). 물론 당사자가 그러한 희생을 기꺼이 감내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지만, 설령 그러한 희생을 감내하지 않으려 한다고 해서 그를 도덕적 으로 비난할 수는 없다고 한다면, 공리주의는 지나치게 엄격한, 그래서 오 히려 도덕으로부터 인간을 소외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일찍이 은 공익을 증진을 자신의 행복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감성을 함양해야 한다는 해결책을 제시했지만, 이러한 해결책이 모든 사람이 수용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대의 공 리주의자들은 공리주의를 행위지침과 분리하는 방향에서 해결책을 찾으려 고 한다(Railton 1988 참조). 그럴 경우 쟁점은 특정한 행위자가 특정한 시 점에 특정한 행위를 해야 하는가, 그렇지 말아야 하는가가 아니라 어떤 도덕규칙이 적절한 도덕규칙인지 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이상의 경우라면 문제는 당사자 각각의 판단이 아니라 그들에게 어떤 도덕적 규칙이 허용되 어야 하는 것인가 하는 것이 될 것이고, 그렇다면 강한 이타주의나, 인격적 통합성의 파괴를 허용하는 규칙들은 적절한 도덕규칙으로 자리매김 될 수 없을 것이므로, 도덕적 소외도 더 이상 발생하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것이 다.

(P.23)

(공리의 원리 principle of utility)

자연은 인류를 고통과 쾌락이라는 두 주권자의 지배하에 두었다. 오직 고통과 쾌락만이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 뿐 아니라 무엇을 해야 할 것 인가를 지적해 준다. 한편으로는 선악의 기준이, 다른 한편으로는 인과의 사슬이 그것들의 옥좌에 걸려있다. 그것들은 우리의 모든 행동과 우리의 모든 말, 그리고 우리의 모든 생각을 지배한다. 우리가 그 지배를 뿌리치 기 위해서 행하는 모든 조력은 단지 우리가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명증 하거나 확증하는데 기여할 뿐이다. 공리의 원리는 고통과 쾌락에 대한 우 리의 종속을 인정하고, 이성과 법의 손을 빌어 그것이 지복(至福)의 제도 를 건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체계의 기초가 될 수 있다고 가정한다. 그러한 사실을 의문시하려고 하는 체계는 의미대신에 소리를, 이성대신에 충동을, 빛 대신에 어둠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P.25)

(반직관성 비판)

공리주의에 따르면 가령 한 명의 건강한 사람을 살해하여 장기이식을 필요로 하는 여러 명의 사람을 살릴 수 있을 때, 설령 그 건강한 한 사람 을 살해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는 아무런 다른 이유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러한 살해가 정당화될 수 있다는 반직관적 결론이 도출될 수 있다고 하 는 것은 공리주의에 대한 가장 친숙한 비판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은 역으로 다수와 소수의 이해관심이 충돌하고, 그 중에서 필연적으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가 발생한다면, 다수가 아니라 소수를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역비판이 가능하고, 또 우리의 직관에 벗어난다고 해서, 즉 온건한 입장이 아니라 극단주의적 입장을 취하고 있 다고 해서 그 이론이 반드시 잘못된 것인가 하는 반문이 가능하다.(여기에 대한 상세한 논의는 Kagan 1989를 참조하라) 또한 공리주의가 권리를 강조하는 이론들에 비해서는 개인이나 소수자 의 권익보호에 취약한 것이 사실이지만, 각자의 이익추구의 강도를 고려 하지 않고, 오직 수의 다과에 의해서만 의사결정을 내리는 다수결 원칙과 비교한다면, 강력한 소수자의 욕구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진일보한 윤리이 론이라 할 수 있다.

(P.29)

( 소수자 억압)

공리주의의 이론적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들 중 하나는 공리주의는 다수 의 이해관심을 실현하기 위해 소수의 이해관심을 침해하는 것을 이론적으 로 정당화해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비판은 일면 타당하고, 일면 부당한 것인데, 공리주의적 소수 억압이 다수결 규칙을 통해 발생하는 것과 동일 한 소수 억압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 잘못이다. 다수결 규칙 은 다수와 소수의 이해관심을 저울질하지 않고 단순히 선호하는 사람들의 수에 따라서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명백한 소수억압이 발생할 수 있지만, 공리주의는 선호하는 사람들의 수 뿐 아니라 선호하는 정도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소수 억압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다수결 규칙 하에서 발생하 는 것보다는 완화된 형태로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공리주의자인 (John Stuart Mill)이 <자유론>을 통해서 소수자 억압에 명백히 반대한 사실만 보아도 분명히 드러난다 하겠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공리주의가 소수자 억압의 가능성을 여전히 내포 하고 있는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절차주의나 권리를 중시하는 이론 들에서는 여하한 잔여이익이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러한 잔여이익을 위해 서 절차나 권리를 무시하는 것이 이론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 리주의는 이러한 이익의 실현을 허용할 뿐 아니라, 강도가 동일하다면 다 수자의 이익 실현을 정당화해 준다는 면에서 소수자 억압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이러한 방식의 소수자 억압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공리주의자들은 그것이 이론적 약점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 을 것이다.

(P.35)

(쾌락주의​)

쾌락주의와 관련된 또다른 논란 과연 좋음이 쾌락이나 고통만으로 규정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견해차이다. 벤담과 은 궁극적으로 쾌락과 고통 만이 좋음의 구성요소라고 보았지만 그 외에 진리나 우정, 도덕적 덕 등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견해도 현대에 와서 설득력있게 제시되고 있다. 이에 대한 폭넓은 공감대가 아직 형성된 것은 아니지만 후자의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공리주의’보다는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라는 용어를 사 용하는 경향이 있다.

(P.39)

(공리)

벤담(Jeremy Bentham)에 따르면 “공리(utility)는 어떤 것이든 이해 관계가 걸린 당사자에게 혜택, 이점, 쾌락, 선, 행복(이 경우에 이 모든 어 휘는 동일한 의미를 갖고 그것은 고통의 경우도 마찬가지다)을 가져다주거나 불운, 고통, 악, 불행이 일어나는 것을 막아주는 그러한 속성을 의미한 다.”(BI p.12) 그러나 이 용어는 다른 한편으로 “‘행복’이나 ‘지복’처럼 ‘쾌 락과 고통’이 의미하는 바를 드러내지 못한다. 또한 그것은 이해관계가 걸 린 사람들의 수, 즉 하나의 부대조건(circumstance)으로서 여기에서 문 제되고 있는 선악의 기준 ―그것만으로 인간행위의 타당성을 모든 상황에 서 적절히 판정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이러한 표현을 쓰는 것은 아니다― 을 형성하는데 가장 큰 기여를 한다고 할 수 있는 관련자들의 수를 고려 할 수 없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행복과 쾌락이라는 관념과 다른 한편으로 는 효용이라는 관념사이의 명백한 연관관계를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그렇지 않았더라면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을 이 용 어(공리의 원리)를 수용하기 어렵게 되었다.”(BI p.11, 각주a)고 서술하고 있다. 공리라는 말은 행복이나 쾌락과 달리 그 자체로 목적이라기보다는 그런 것을 산출하는데 유용하다는 의미를 지닌 것으로 해석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P.59)

(​동기)

일반적으로 동기는 도덕의 판정이나, 처벌의 결정과 관련된 중요한 판 정기준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벤담(Jeremy Bentham)은 동기라는 개념을 엄히 분석하면 동기가 그러한 기준으로 의미있는 것은 그것이 공리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 자체가 판정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우선 동기는 이유와 구분되어야 한다. 후자가 행위에 대한 정당화 근거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면 전자는 단순히 그러한 행위를 하게 된 원인을 일 컫는 것이다. 그러므로 특정한 동기가 특정한 행위, 또는 결과를 야기했다 고 하여 그 동기가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이야기할 수 없다. 선하거나 악한 것은 동기가 아니라 그러한 동기를 갖게 한 다른 어떤 것 ―가령 쾌락에 대한 예상― 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동기를 도덕판단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이론들, 특히 공감과 반감의 원리는 원인과 이유를 혼동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감은 하나의 행위동기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행위가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단순한 동기로서의 반감은 아직 행위의 원인일 뿐 이유 로서 정당화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특정한 동기를 선하거나 악 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그러한 동기가 특정한 결과적 선악과 접히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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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판타스틱 과학클럽 (2020-07)​

판타스틱 과학클럽

최지범 / 스윙밴드 / 284쪼

​(2.28-3.1)

법과 제도가 그러하듯이 과거의 전통이 때로는 편리함을 방해할 때가 있다. 대표적인 예가 전류와 전자일 것이다. 전선에서 전기가 흐를 때 양전하를 가진 양성자는 가만히 있고, 음전하를 가진 전자가 움직이면서 전기에너지를 전달한다. 전자가 발견되기 전, 과거 사람들은 양전하를 가진 무언가가 움직이면서 전기가 흐른다고 생각했다. 이 가정을 가지고 전류가 흐르는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전자의 실제 흐름과는 방향이 반대였다. 2분의 1의 확률게임에서 진 것이다. 하지만 전자가 발견되고 나서도 사람들은 그냥 예전의 전통을 따르기로 했다. 그전까지의 교과서, 논문, 자기장에 대한 법칙 등 바꿀 것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전자의 흐름과 전류의 방향은 반대'라고 배우고 있다.

(P.37)

과학용어는 과학자들이 사용하지만, 과학자 또한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간사회의 일원이기에 불편한 전통이나 관습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사실과 근거에 따라 규칙을 찾고, 잘못된 규칙은 바로잡아 갱신하는 것을 업으로 삼는 과학자들조차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을 쉽게 탈피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경제학과 사회심리학에 등장하는 개념인 경로의존성은 불편한 체계라도 기존의 관습과 우연에 의해 표준으로 정착하는 현상을 일컫는다.

체계를 바꿀 경우 그간 축적된 수많은 논문과 저작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후세 사람들이야 편하겠지만 당신은 그런 과도기를 견뎌낼 인내심이 있는가? 그런 과도기에는 인공위성이 추락하고 발전소가 멈추는 혼돈이 올지 모른다. 이러한 혼란에 대한 두려움 탓에 불편한 관습은 자신의 경로를 굳건히 유지한다. 우리의 뇌에는 상당히 커다란 관성이 있어서 가던 방향으로 계속 갈 뿐 방향을 바꾸기는 어렵다.

(P.41)

수학적 논리와 공리, 정리는 순전히 추상적이고 이론적이지만 자연을 설명하는데 놀라올 만큼 유용하다. 중학생 때 나는 물체가 날아가는 궤적을 간단한 수식으로 정확히 예측 할수 있다는 사실에 꽤 놀랐던 적이 있다.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예측이 안 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답이 수학이었다니!

비단 하나의 물체만이 아니다. 수백 년 후에 태양계 행성이 어느 위치에 있을지도 수학을 통해 예측할 수 있고, 빛이 얼마나 굴절되는지도 알아낼 수 있다. 게다가 실험이 불가피한 다른 자연과학과는 다르게 종이와 연필만 있다면 누워서도, 서서도, 여행을 하면서도 계속 연구할 수 있다.

가우스는 수학을 과학의 여왕이라고 했다. 특히 현대물리학이나 이론과학을 하는 사람들은 수학자만큼이나 수학을 잘해야 한다. 양자역학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미분방정식, 복소함수론, 현대대수학 같은 수학 과목을 매우 잘할 수 있어야 한다. 과학을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수학을 꼭 열심히 공부하기 바란다.

다른 분야에서도 점점 수학의 영향력과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지금 세상은 전 분야의 과학화 및 전 과학의 수학화를 겪고 있다. 생태학이나 지질학처럼 예전에는 수학을 많이 사용하지 않던 분야에서도 수학적 분석과 모델링, 통계 처리는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신(神)의 언어라고 불리는 수학은 이제 인류가 반드시 익혀야 할 신어(新語)가 되어가고 있다.

(P.67)

철학계의 빛나는 별 임마누엘 칸트는 어떤 행동이 선한지 구분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보편성의 정식을 제안했다. 칸트는 어떤 행동이 보편화되었을 때의 결과를 상상해보라고 말 한다. 예를 들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약속을 어긴다고 가정해보자. 그릴 경우, 남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을 알기 때 문에 그 누구도 약속을 잡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약속의 개념과 목적 자체가 사라져버린다. 약속의 존재를 가정하고 논의를 진행했는데, 약속의 개념이 사라져버렸다. 이성적인 인간이라면 이러한 보편화를 원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약속을 어기는 행동은 올바른 행동이 아니다 칸트가 제안한 이 보편성의 정식은 귀류법을 상기시킨다. 만일 비윤리적 행위가 모순을 일으킨다는 윤리학의 귀류법을 극단까지 밀어붙이면 어떻게 될까? 나쁜 일을 하면 반드시 어디선가 모순적 자연현상이 일어나는 세상은 어떤 모습 일까?

(P.92)

인간과 세계는 이성으로 되어 있어 윤리적으로 옳지 못한 행 을 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모순이 발생한다. 세기의 대살인마가 활개치고 다녔을 때는 아주 강력한 창과 아주 강력한 방패가 부딪혀 방패에 금이 가고 창이 휘어지는 일이 벌어졌다. 방패는 창을 막지도 막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반면 창은 방패를 뚫은 것도 뚫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왕이 국가의 금고를 횡령했을 때는 역사상 처음으로 산에서 좀비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괴롭혔다. 좀비는 죽지도 죽지 않은 것도 아닌 존재였다.

역사에 따르면, 꽤 최근까지 이런 모순적 상황의 발생은 신의 존재증거로 여겨졌다.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반대 진영에서는 '그렇다면 중력의 존재와 시간의 존재 역시 신이 있다는 증거냐?'라고 반문한다. 자연 자체를 신이라고 한다면 나는 신의 존재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다.

수학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귀류법이라는 것을 알아냈다. 오류로 돌아간다는 뜻의 이 증명기법은 잘못된 가정은 모순을 낳는다는 성질을 이용해 잘못된 가정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따라서 잘못된 가정의 반대가 참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점차 세상이 이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믿게 되었다.

(P.95)

플라톤에 따르면 인간은 본질과 진실의 세계인 이데아를 보지 못한 채 그 투영된 모습만을 본다. 그는『국가』에서 동굴 속 죄수의 비유를 사용했다. 동굴 속 한쪽 벽에는 불에 의해 만들어지는 사물의 그림자만이 비춰진다. 그 벽만을 보게 몸이 묶여 있는 죄수는 사물의 일렁이는 그림자만 볼 뿐 그림자의 원인이 되는 사물은 볼 수 없다. 통계처리 또한 이러한 그림자를 보는 것과 같다. 진실은 정확히 보지 못하고 늘 표본으로부터 진실을 추론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험과 조사를 통해 우리는 동굴 속 죄수처럼 진실의 단편 만을 엿본다. 미약한 인간에게 추정은 불확실성에 대한 '미력하나마' 최선의 대응이다.

(P.111)

슈뢰딩거의 고양이 논변에서 확률적 불확실성을 발생시키는 원인은 입자가 여기저기에 퍼져서 존재하는 성질이다. 이중슬릿 실험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개의 전자가 어느 슬릿으로 통과했는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간섭현상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전자는 두 개의 슬릿을 동시에 통과한다. 정말이다! 그렇다면 고양이는 어떻게 된 걸까? 물론 고양이는 신비로운 전자가 아니고, 살거나 죽거나 단 하나의 상태만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코펜하겐 해석대로라면, 고양이는 죽어 있는 상태와 살아 있는 상태가 '중첩'되어 있다 즉 고양이의 생사 여부는 상자가 닫힌 동안에는 겹쳐 있다가, 우리가 상자를 여는 순간 파동함수가 붕괴하듯이 어느 하나로 결정된다.

전자도 그렇고 고양이도 그렇고, 우리의 무지(無知) 때문에 중첩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이라는 성질 때문에 여러 상태가 중첩되었다가 하나의 입자로 뭉치는 것이지, 우리가 진실을 모르기 때 문에 그런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P.160)

양자역학은 화학에도 영향을 미쳤다. 원자 주위에 있는 전자에 대해서도 슈뢰딩거 방정식을 통해 그 퍼짐 정도와 형태를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몇몇 교과서에서 말하는 것과 달리, 전자는 원자핵 주위를 돌고 있지 않다. 전자는 원자 핵 주위에 마치 구름처럼 퍼져 있다. 따라서 원자를 생각할 때 커다란 원자핵과 그 주위를 '공전'하는 전자를 떠올리는 것은 직관적이지만 사실에 가까운 비유는 아니다. 원자 사이에 작용하는 힘 역시 이러한 전자구름의 상호작용으로 이해 할 수있다.

거시적 세계에 완전히 적응해버린 인간의 뇌는 이런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질문을 던진다. 양자역학적 현상은 “왜” 일어나는가? 물리학자에게 물어봐도 딱히 만족스러운 답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냥 자연이 그렇게 생겼다. 이런 점은 '자연'이라는 개념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스스로 자 (自)에 그러할 연(然). 스스로 그러한 것, 그것이 자연이다. 어찌 보면 대학의 물리학과는 거시세계에 적응해버린 인간의 뇌를 스스로 그러한 것들에 친숙해지도록 개조시기는 곳일 수 있다.

(P.161)

지금의 인공지능은 주로 분석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지식과 기술을 창조할 능력이 생기면 어떻게 될까? 인공지능이 만들어내는 기술과 지식의 발전 속도가 인간보다 빨라진다면, 인류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기술의 지성이 인간 지성을 추월하는 순간을 기술적 특이점(Technological singularity)이라고 부른다. 세계전쟁 같은 큰일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인류의 과학기술은 계속 진보할 수밖에 없다. 기업들과 국가들은 수익 극대화를 위해 기술개발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또한 많은 전 문가들이 프로그래머들과 협력하여 자신의 밥줄을 위협할 인공지능을 만들어내고 있다. 의료영상 분석 프로그램 개발에 참여하는 영상의학과 의사처럼 말이다.

핵무기를 개발할 때도 악마의 무기를 만들고 싶진 않지만 적이 만든다면 우리도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가 있었다. 모두가 협력하면 평화롭게 지낼 수 있음에도 달콤한 배신의 유혹이 도사리는 죄수의 딜레마 게임처럼 결국 우리는 특이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다. 마치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기술개발에만 목매다가 디스토피아를 자초해서는 안 될 것 이다. 인류의 멸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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