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아시아 작가들의 소설을 겹쳐 읽었다. 찬호께이의 <기억나지 않음, 형사>,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 가쿠다 미쓰요의 <종이달>. 이 세 작품을 다 리뷰로 쓸 순 없고 한 작품만 고르기로.

 

찬호께이의 <기억나지 않음, 형사>처럼 찾고 있는 범인이 바로 자기 자신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물론 이런 이야기의 원조는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외국 작품으로는 윌리엄 요르츠버그의 <폴링 엔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폴링 엔젤>은 알란 파커 감독, 미키 루크 주연의 <앤젤 하트>로 영화화되었다. 영화도 걸작이다. 한국 작품으로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올드 보이>가 있다. 영화 속 주인공 오대수란 이름은 오늘만 대충 살자란 뜻이라기보다는 오이디푸스의 한국식 줄임말이다. <기억나지 않음, 형사>는 장편임에도 찬호께이의 단편집인 <13.67>에 못 미친다. 그래서 패스.


















 




















<환상의 빛>에 이어 읽은 미야모토 테루의 <금수>. <환상의 빛>보단 재밌게 읽긴 했지만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소설에 비하자면 무언가 한참 부족해 보인다두 편이나 읽었는데아무런 감흥이 없다면 아무래도 나랑은 코드가 안 맞는 걸로.

 

세 소설 중 하나를 골라야한다면 나는 아무 고민없이 <종이달>을 꼽겠다. 밀실살인을 소재로 한 미스테리 소설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다. ‘밀실살인을 소재로 한 미스테리를 쓰는 작가는 어떻게 하면 독자를 속일것인가만 고민한다. 인간의 생명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들. 손을 잘라 밀실에 가두고 싶다. (나올 수 있으면 나와 봐)

 

반면 사회파 미스테리 작품은 매번 침을 질질 흘려가며 읽는다. 내가 읽은 범위 안에서 사회파 미스테리의 두 거장은 기리노 나쓰오와 미야베 미유키다. 특히나 기리노 나쓰오의 <아웃>, 미야메 미유키의 <화차>는 투 썸 업. (최근 미미 여사의 소설들을 볼 때, 이제 그녀의 필력은 방전(‘아웃’)된 걸까. 아쉬운 일이다.) 소설을 원작으로 한 변영주 감독의 <화차>도 좋았다. 각색의 모범 사례. 최근 기리노 나쓰오와 미미 여사가 헛발질할 때, 독자인 나 역시 덩달아 헛발질하다 얻어 걸린 소설이 있었으니, 가쿠다 미쓰요의 <종이달>이다. 금시초문의 작가. 일본 작가들은 파도, 파도 끝이 없구나. 바다 끝,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의 포말 한줌에 불과한 걸까.


















 


<종이달>은 미야자와 리에 주연의 영화로 먼저 접했다. (미야자와 리에, 어릴 때 이렇게 예뻤었나.) 좋은 영화였고, 영화를 먼저 봤음에도 소설은 소설대로 좋았다.





 

우메자와 리카의 여고 시절 친구인 오카자키 유코는 갓 쓰기 시작한 비누 같은 청초함을 지닌 정의로운 소녀로 리카를 기억한다. 그런 리카가 1억엔을 횡령해 도주중이라니. 리카와 요리 학원에서 만나, 친해진 주조 아키는 묻는다.

 

"리카는 그 큰돈을 어디에다 썼을까. 무엇을 사고, 무엇을 손에 넣었을까. 아니면 무엇을 사려고, 무엇을 손에 넣으려고 했을까. 리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리카는 무엇을 보고 있었던 걸까. 지금 리카는 어디에 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정말 그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백화점 안을 가로질러가면 더 빨랐다. 그래서 백화점 안을 걸어갔을 뿐인데, “피부 상태 무료 진단합니다.”라는 점원의 말에 그날따라 리카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얼마 전 만난 대학생 고타의 매끈한 피부를 떠올렸다. 점원이 늘어놓은 화장품 앞에서 이거 다 살게요.”하고 말했지만, 리카에겐 돈이 없었다. 고객이 맡긴 5만엔이 있었을 뿐. 고객의 돈은 되돌려 놓으면 된다. 그게 처음이었다. 고객의 돈에 손을 댄 건은. 리카는 그 다음날 백화점으로 가 카드를 만든다. 쇼핑을 하지 않으면 손해인 느낌이 들어 이것저것 샀을 뿐인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리카는 이미 6만엔을 긁었다.

 

리카는 남편인 마사후미와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 어쩌다가 리카는 자신의 고객의 손자인, 피부가 매끈한 대학생 고타와 잠자리를 갖게 된다. 누군가가 이렇게 만져주는 것이 이토록 좋은 것이었던가. 눈물을 흘리며 리카는 깨닫는다.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아름다운 것을 어루만지듯이 이렇게 만져주길 바랐다고. 줄곧 기다렸다고. 줄곧.

 

역의 플랫폼에는 사람이 없었다. 리카는 긴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렸다. 파르스름한 하늘에 하얀 달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리카는 손가락 끝까지 가득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만족감이라기보다는 만능감에 가까웠다. ....자유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리카는 죄책감도 불안감도 전혀 느끼지 않고, 인적 없는 플랫폼에서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만능감의 쾌락에 잠겼다.

 

리카의 생활은 이날을 경계로 달라진다. 이날이후로 리카는 옷과 액세서리를 사는 데 주저함이 없어졌다. 자신에게 만능감을 느끼게 해준, 고타 앞에서 지루한 아줌마처럼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 고타가 빚으로 괴로워하다니. 고타의 구두쇠 할아버지이자, 툭하면 치근대는 고조의 예금 증서를 위조해 리카는 고타에게 돈을 넘긴다. 어차피 혈연 아닌가.

 

그렇게 시작된 것인데, 끊임없이 만능감을 누리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매달 카드 사용액이 월급을 넘어섰고, 리카는 가짜 증서를 계속 만들 수밖에 없었다. 리카는 고타에게 차를 사주고 집을 사주고 시계를 사주고 옷을 사준다. 고타는 자신이 조금만 움직여도 될 법한데,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웨이터에게 파라솔 위치, 바꿔줘요.”라고 거들먹거리는 사람이 되고 만다. (영화 속에서도 인상깊은 장면이었다.) 리카는 고타와 함께 불꽃놀이를 본다.

 

불꽃 너머에 달이 있어요.”

 

깍은 손톱처럼 가는 달이 걸려 있었다.

불꽃이 떠오르면 그것은 사라지고,

불꽃의 빛이 사라지면 슬슬 모습을 드러냈다.

 

- p. 298. 

 

허영이 만들어낸 만능감의 빛이 점차 희미해져 간다. 고타는 어느새 리카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용돈이 부족하다고 슈퍼에서 물건을 훔친 딸 지카게의 뺨을 후려치고 남편 신이치와 말싸움을 벌인 유코는 리카를 떠올리며 묻는다.

 

넌 무얼 샀니? 무얼 손에 넣으려고 한 거니? 그 물음은 어느새 유코 자신에게 향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절약을 한 거지. 무엇 때문에 저축하려고 한 거지. 그래서 무엇을 얻을 생각이었던 거지.” 

 

리카의 예전 애인이었던 가즈키는 아내 마키코의 모든 빚을 청산한 이후 이혼을 앞둔 아내에게 묻는다.

 

당신이 말하는 불편함이나 풍족함은 돈으로밖에 해결할 수 없는 걸까? 이것이 있어야 이 아이들이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돈이 아니라 물건이 아니라, 우리가 주는 것은 무리일까?”

 

일본인들에게 종이달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사진이 발명된 초창기, 일본 사진관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들어, 그 가짜 달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종이달은 연인이나 가족과 함께 보낸 가장 행복한 한때를 의미하게 되었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과 카드만 있으면 누구나 만능감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화폐가 조장한 하나비(한 순간의 불꽃놀이)에 지나지 않는다. 허영의 불꽃이 사그라들면 곧이어 냉혹한 진실이 드러난다.

 

여자행원 공금횡령사건의 이면에는 언제나 남자가 있다고 한다. 리카의 경우처럼 그건 단지 섹스의 문제가 아니라, ‘소중한 것을 다루듯이, 아름다운 것을 어루만지듯이만져지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행복을 돈으로, 상품으로 대체할 수 있는 걸까?

 

행복을 얻기 위해 무언가를 사고 싶은 분들이 있다면 이 책을 사시라.

그리고 무언가를 사고 싶을 때마다 이 책을 읽으시라.

무엇을 사더라도 행복을 손에 넣을 순 없다.

불꽃의 빛이 사그라들면 종이달이 있다.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5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깊이에의강요 2016-06-18 0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환상의 빛이 더 끌리더라구요ㅎ^^

시이소오 2016-06-18 02:41   좋아요 1 | URL
강요님이 그렇다면
재독을 해야겠어요
. ^^

북깨비 2016-06-18 0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꺄아~ 어떡하죠 저 그럼 기억나지 않음, 형사 결말을 알고 읽게 되는 건가요? ㅋㅋㅋㅋ 알고 읽어도 재밌을까요? ㅠㅠ 금수 감상 구경하러 들어왔다가 가와바타 야스나리 라는 작가를 발견하고 갑니다. 일단 설국이 제일 많이 팔렸다고 뜨길래 장바구니에 담았어요. 설국열차..와는 상관없지요? 처음 보는 작가와 작품이라.. ^^;;

시이소오 2016-06-18 06:12   좋아요 1 | URL
아, 죄송해요ㆍ 스포일러네요. 왠지 그래도 될것 같길랭^^;

가와바타 야스나리, 일본 소설의 섬세함의 정점이아닐까,생각해봅니당 ㅎㅎ 설국열차와는 아무상관이 없어용 ^^

samadhi(眞我) 2016-06-18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리노 나쓰오, 「아웃」 정말 좋지요. 저는 미미여사보다 기리노 나쓰오가 더 좋더라구요. 시이소님이 올리신 내용은 일부러 읽지 않았습니다. 종이달 흥미가 생겨서 읽어보려구요.

시이소오 2016-06-18 11:46   좋아요 0 | URL
넵. 책으로 직접 만나시길^^

moonnight 2016-06-18 2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엔젤 하트를 책보다 먼저 만났어요. 엄청난 충격을 받았-_-;;;;; 원작이 있다는 걸 나중에 알고 구해 읽었는데, 책도 물론 좋았습니다. 시이소오님 글 덕분에 떠올라, 반갑네요^^

시이소오 2016-06-18 22:17   좋아요 0 | URL
저 어릴땐 알란파커 ` 더 월` 이 최고의 영화
인줄 알았더랬죠 .
저도 옛날 생각이 떠올라
^^

루쉰P 2016-06-18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화차는 저도 정말 좋아하는 명작이죠 ㅎ 전 마쓰모토 세이초의 소설도 무척 좋아하는 데 아직도 많이 사지를 못 해 속상해요 ㅠ

종이달 진짜 읽고 싶네요 아 정말 재미지겠다 아마 시이소오님이 제 앞에서 물건 파셨음 다 샀을거에요 ㅋ

시이소오 2016-06-18 23:38   좋아요 0 | URL
ㅋ ㅋ ㅋ 세일즈를 할걸 그랬나요?

루쉰P 2016-06-18 2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무래도 ㅋㅋ 근데 말로 팔지 마시고 글 써서 ㅋ

시이소오 2016-06-18 23:43   좋아요 0 | URL
루쉰p님, 덕분에 계속 사고싶게끔 독후감을 써야겠네요.^^

루쉰P 2016-06-18 2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괴롭습니다 ㅋ 돈은 없고 볼 책은 많고 글구 뇌의 한계랄까요 ㅋ 하지만 전 약속을 지키는 자 반드시 읽을테니 써 주세요 ㅠ 즐거운 밤 되세요 ㅋ

시이소오 2016-06-19 01:40   좋아요 0 | URL
ㅋ. 알겠습니다. 루쉰p님도 즐거운 주말 밤 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