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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심장을 향해 쏴라
마이클 길모어 지음, 이빈 옮김 / 박하 / 2016년 2월
평점 :
품절
마지막 페이지까지 ‘에포케 (판단중지)’ 상태로 책을 읽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몇일 동안 판단을 내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 책이 픽션이었다면 판단은 좀 더 단순했을텐데. 살인자의 쌍둥이 아들 일화가 떠오른다. 쌍둥이 중 한 명은 아버지처럼 범죄자가 되어 감방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는 아버지를 탓했다. 다른 한명은 열심히 공부해서 변호사가 되었다. 인터뷰어가 물었다. 쌍둥인데 왜 그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되었냐고? 그는 말했다. “저는 아버지처럼 살고 싶지 않았거든요.”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길모어는 <롤링스톤>의 수석 편집장이었으며, 유명한 음악평론가였고, 이 책으로 전미도서협회상, LA타임스 도서상을 수상할 만큼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 반면 그의 형 게리 길모어는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살해한 살인범이었고, 1977년 사형당했다. 마이클의 셋째 형 게일렌은 게리처럼 술에쩔어 경미한 범죄를 저지르다가 칼에 찔려 죽었다. 첫째 형 프랭크 2세는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당잡부의 삶을 살았다.
형들과 마이클의 차이점이라면 유독 마이클만이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맞지 않았다. 아버지 프랭크는 아내인 뱃시를 때리고, 아들 프랭크, 게리, 게일렌을 때렸다. 뱃시는 또 프랭크, 게리, 게일렌을 때렸다. ‘본성과 양육’논쟁은 오늘날도 거듭되고 있지만 나는 본성보단 양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정폭력을 당해다고해서 다 괴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가정폭력을 당한 아이가 차후 괴물이 될 확률은 그렇지 않을 경우보다 더 높을 것이다.
가정폭력만큼이나 게리를 괴물로 만드는 데 일조한 것은 소년원과 감옥이라는 시스템이었다. 이른바 교도소(矯導所), 바로잡을 ‘교’, 이끌 ‘도’다. 마이클이 묘사한 미국의 소년원은 흡사 지옥도를 보는 것 같다. 소년들에 대한 일상화된 간수들의 강간. 구타. 상상할만한 모든 잔인무도한 일이 다 행해진다고 봐도 좋으리라. 소년들에게는 세상에 대한 분노와 복수심밖에 남는 게 없다.
그러나, 분명 게리는 회생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다. 그럼에도 게리는 모든 가능성들을 제쳐두고 자신에게 아무런 해를 가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 두 명을 잔인하게 죽였다. 나는 사형반대론자다. 그러나, 게리가 사형 당했다고 해서 그를 동정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책이 제기하는 윤리적 딜레마는 이런 것이다. 게리는 자신의 의지대로 사형당하고 싶어 했다. 사형반대론자인 마이클은 게리의 사형 의지를 꺽고 싶어 한다. 만일 마이클의 의지대로 게리가 사형을 모면하고 형기를 마친 다음, 사회로 나와 또 다시 무고한 시민을 죽인다면? 감옥이 교도, 교화는 고사하고 보다 교활한 괴물들을 생산하는 현실로 미루어보건대, 게리는 출소 후 또 다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을까.
책을 덮으며 의문이 남았다. ‘그런데, 저자는 왜 이 책을 써야만 했을까?’ 이미 노먼 메일러가 게리와 그의 가족을 인터뷰한 자료로 <사형집행인의 노래>라는 소설을 써냈다.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퓰리처상까지 받았다. 마이클은 분명 이 책을 씀으로써 다시 한번 ‘살인자의 동생’이란 오명을 뒤집어써야 했을텐데, 그럼에도 왜 그는 자기 집안의 치부를 들춰내면서까지 이 책을 써야 했을까.
이 책은 굳이 쓰여질 이유가 없었다. 나는 저자가 글로서 인정받고 싶은 욕구, 허영심이 가장 크게 작용했으리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그는 명성과 돈을 얻기 위해 가족의 비밀을 만천하에 까발긴 것이다. 만일 이러한 폭로가 오로지 마이클과 그의 가족에게만 국한되었다면 수긍할 수도 있었으리라.
책 말미에 저자는 그의 형 프랭크가 실은 마이클의 배다른 형인 로버트의 자식이라고 폭로한다. (결국 어머니는 아버지의 아들과 ‘통’해 프랭크를 낳았으니, 프랭크는 아들인가, 손자인가? 촌수가 어떻게 되는 건가?) 그의 형이 그 내용을 실어도 좋다고 허락했다손 치자. 그렇다면 로버트와 그의 가족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저자인 마이클 길모어는 명성과 돈을 얻기 위해 타인의 삶(혹은 배다른 가족)을 처참히 망가뜨린 것이다. <나의 투쟁>에서 칼 오베 크라우스고르는 알코올 중독으로 집안을 똥칠하며 죽어간 아버지의 일화를 소설에 썼다. 그의 작은 아버지는 그를 고소했다. 왜들 이렇게 자기 가족의 치부마저 드러내고 싶어 안달일까.
소비지상주의 사회에서 ‘자기 고백’은 이제 상품이 되었다. 심지어 이제는 픽션이 논픽션으로 둔갑하기도 한다. 제임스 프라이 자서전 <백 만개의 파편>은 오프라 북클럽에 소개된 이후, 두 달만에 200만부가 팔려나갔다. 웹사이트 <스모킹 건>이 그 작품이 ‘거짓, 날조’라고 비판하자, 제임스 프라이는 ‘자서전’이 완전한 허구임을 인정했다.
페이스북이 일상인 ‘전시 사회’, 누가 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지 배틀을 벌이는 것 같다. 최근 읽은 책의 반은 장르를 불문하고 ‘저자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제임스 프라이는 어린 시절 친구의 죽음마저 조작했다. 이 책에 씌여진 전부가 다 진실일까. (특히나 ‘하우스 공포물’을 연상시키는 귀신 이야기는?) 타인의 삶을 수단시하는, 오로지 자신만을 위하는 나르시시스트의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자기 고백 글’은 작품의 수준과 별개로, 무언가 끔찍한 구석이 있다.
나는 마이클의 형인 게리나 게일렌 같은 이들을 현실에서 만나고 싶지 않다.
또한, 마이클 같은 비열한 인간은 더더군다나 만나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