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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왜 책을 읽어야 하는지 묻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책을 사료처럼 던져주자.
책을 필사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문장들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둘째, 빌려온 책이기 때문에. (내 책상 위에는 항상 리뷰 대기 중인 소유한 책만 한 백 여권 정도 있다. 빌려온 책들 때문에 계속 밀린다.)
셋째, 결정적으로 리뷰가 써지지 않아서다. (필사를 하다보면 어떻게든 쓰게 된다.)
‘참 좋은데 뭐라고 표현할 방법이’ 막막한 책들이 있다. 게다가 이 책의 경우엔 말미에 이현우의 추천 글이 실려 있다. 깔끔하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알고 싶은 독자들은 추천의 글만 읽어도 감을 잡을 수 있다. 원래 계획대로 쓰자니 추천의 글과 똑같은 글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런 상황이니 더더욱 리뷰쓰기가 힘들었다.
할 수 없이 필사를 했다. 그다지 두툼한 책도 아니고, 선별한 문장들만 필사를 했건만 하루 종일 걸렸다. 필사를 끝내고 나서는 기절했다. 다음 날은 저녁 약속도 펑크 내고는 하루 종일 잤다.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었다.
책 한 권을 재독하고 필사하는데 에너지를 전부 다 소진시킨 느낌이었다.
이 책은 그런 책이다. 저자의 열광적인 문체와 주장에 호응하다보면
자신의 에너지가 바닥을 칠 정도의 책.
크게 보자면 책을 읽는 방법엔 다독의 길과 정독의 길이 있다.
사사키 아타루는 후자를 강조한다.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는 성경을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었다.
나중에는 성경 박사가 된 루터는 물었다.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그 당시엔 누구나 교황을 따르고 추기경을 따르고 대주교가 있고 주교가 있고 수도원이 있었다. 심지어 ‘천국행 티켓’을 돈을 받고 팔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읽어도 성경에 그런 건 쓰여 있지 않았다. 루터는 결국 대 이단으로 선고 받아 보름스 국회에 소환되어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는다. 루터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든 성구를 계속 따르겠다.” “따라서 나에게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이 루터로부터 이른바 16세기의 ‘종교개혁’, 혹은 ‘독일혁명’, ‘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대혁명이란 무엇인가? 성서를 읽는 것이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루터에 따르면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다신교를 믿던 초로의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목소리를 듣는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래서 그는 로마서를 읽었다. 성경을 읽은 그는 쇠망해가던 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
그의 이름은 사도 바울 이래 최대의 신학자가 된 성 아우구스티누스다.
역시나 성경을 읽던 한 여인이 있었다. 그녀 앞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다.
예수가 그녀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너에게 마치 펼쳐진 책처럼 될 것이다.”
그녀가 십자가의 성 요한과 함께 개혁 운동에 나선 아빌라의 성 테레지아다.
문맹인 상인 앞에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난다. 상인은 도망친다. 그러나, 아내 하디자의 설득에 다시 가브리엘을 찾아간다. 천사가 “내 이야기를 듣겠느냐?” 물어도 상인은 “싫습니다.”하고 거부한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상인이 듣겠다고 하자 천사가 말한다.
읽어라. 창조주이신 주의 이름으로,
아주 작은 응혈에서 사람을 만드셨다.
읽어라. 너의 주는 더없이 고마우신 분이라,
붓을 드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사람에게 미지의 것을 가르쳐주신다.
천사는 상인의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었다. 그것을 상인의 신체에 돌려주었을 때 그의 마음은 신앙과 지혜로 가득 찼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무함마드였다.
신은 무함마드에게 붓을 주고 말한다.
“써라.”
그렇게 해서 쓰인 책이 ‘책의 어머니’ <코란>이다.
무함마드와 그가 받아 적은 책 <코란>에 의해 현대 이슬람 문명이 태동했다.
11세기 말 피사 도서관에서 유시티니아누스 법전이 발견되었다. 무려 600년간 망각에 묻혔던 책이었다. 이후 이 책이 근대 모든 법의 원천이 된다. 중세해석자 혁명은 무엇인가? 이 책을 옮김으로써 시작되었다.
유스니티아누스 법전을 옮기던 당대의 법학자를 상상해보자. 이건 법전이다. 이상하게 오역하면 죽는다.
(현대 번역가들 책상 앞에 붙여 놓자) 손으로 베껴 써야 하는데 한 글자라도 틀리면 큰 소동이 벌어진다. 번역을 하고 제본, 주석, 수정, 색인을 하는데 100년이 걸린다.
텍스트란 곧 법이다. 그러나 텍스트는 꼭 문자를 필요치 않는다.
신체에 법과 신화를 새기면 그것 역시도 텍스트, 곧 문학이다.
르장드르, 사사키 아타루의 관점에서 춤, 음악, 연극, 노래, 회화 이 모든 것이 다 문학이다.
사사키 아타루는 문학의 종언, 예술의 종언, 역사의 종언, 인류의 멸망을 말한 이들을 경멸한다. 옴 진리교같은 사이비 종교. 헤겔, 코제브, 하이데거, 아감벤 같은 철학자 등등.
20만년 중 5천년이니 80세 수명의 인간으로 비유한다면 현 인류는 겨우 두 살에 불과하다.
문학이 끝났다고?
니체는 자비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0부를 찍었고 7부만 지인에게 보냈다.
세계에서 단 7부.
19세기 문맹률은 어땠을까? 여기서 문맹률의 판단 기준은 ‘사인을 할 수 있는가’였다. 잉글랜드는 30퍼센트. 프랑스는 40~45퍼센트, 이탈리아는 70~75퍼센트, 러시아는 90~95퍼센트였다.
이때 러시아 작가엔 누가 있었나? 푸시킨, 고골, 도스토예프스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등등. 당시 러시아 인구는 4000만 명이었다. 사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400만 명. 즉 당시의 러시아 작가들은 0.1%에 승부를 걸었던 셈이다.
읽는다는 것은 혁명이다. 루소가 그랬고, 무함마드가 그랬고, 전태일이 그랬다. 전태일은 무엇을 읽었나? 근로기준법을 ‘읽어 버리고’ 말았다. ‘목구멍을 찢고 심장을 꺼내 씻을 정도로’ 읽고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하루에 15시간 일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는 물었으리라.
책을 읽고 있는 내가 미친 것일까, 아니면 이 세계가 미친 것일까.
만일 세계가 맞다면, 법이 맞다면 책이 틀린거겠지.
결국 그는 자신이 읽은 책을 들고 자신의 몸을 성화처럼 태웠다.
그가 남긴 불씨는 이후 한국 현대사 혁명의 순간마다 불꽃처럼 타올랐다.
벤야민은 말했다. “밤중에 계속 걸을 때 도움이 되는 것은 다리도 날개도 아닌 친구의 발소리다.”라고.
발소리가 들려온다. 들리고야 말았다.
아무것도 끝나지 않는다. 아무것도 당연하지 않다. 이제 시작이다.
읽어라. 써라, 고쳐 읽어라. 고쳐 써라. 발표하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