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우스트의 선택 - 생명공학의 위험과 비윤리성
박병상 지음 / 녹색평론사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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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기본적으로 녹색평론에서 나온 책들은 생명존중사상이 투철하다. 그 사상이 필요하다고는 인정하면서도 정작 내 자신이 도시적 삶에 익숙해져 있어 조금은 거리감이 느껴지는게 사실이다.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계기는 '황우석'교수 사건 때문이다.

뭐랄까? 황우석교수 사건 황색저널리즘에 빠져들면서 매일 보여지는 기사는 여성지(여성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지에 등장하는 내용들을 빗대어서)에 나오는 기사 제목만큼이나 선정적이다. 이건 아닌데 말이다. 이 기회를 계기로 생명공학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하고, 생명윤리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건 영 아닌 듯 싶다. 

'파우스트의 선택'은 생태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는 박병상이라는 분이 쓴 생명공학에 대한 글이다. 황금빛 미래가 그려지는, 앞으로 대한민국을 책임질 대표적인 학문인 생명공학. 그 생명공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는 드문 책이다. 저자는 과학적인 업적뒤에 버려진 실패의 가능성과 실패물들, 성과라는 과학자의 욕심속에 무시되는 생명윤리, 식량증산에 대한 오해, 생명공학이 갖는 남성주의 과학문화와 함께 자본에 결속된 생명공학의 폐해에 대해 종합적으로 짚어낸다. 

도대체 태아는 언제부터 사람일까? 그 경위야 어찌되었건 지금 현재는 14일 이전의 배아는 생명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곧 14일 이전의 배아는 실험대상이 될 수 있다. 생명공학이 갖고 있는 바로 근본적인 문제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과연 언제부터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과학자는 윤리학자들과 교묘한 타협을 한다. 그래서 현재의 14일이 기준이 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과학적 성과가 장밋빛으로 보기 시작하면 완전한 성체의 모습을 갖기 전까지로 후퇴할 지도 모른다. 그리고 14일 이전에 실험된 사용된 배아들은 어떨까? 14일 이전의 배아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실험에 실패해도 상관없을까? 9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한 대학병원에서는 실험에 쓰이던 14일 이전의 배아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일이 있었다. 뭔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 

복제양 돌리가 나타났고, 우리나라에서도 복제소와 더불어 복제개 스너피까지 있다. 우리는 그 성공한 복제물들을 보고 있다. 하지만 그 복제물을 위해 실패한 개체들은 도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혹시나 실험이 잘못되어 돌연변이가 생길 가능성은 없을까?  

초등학교 시절, 중학교 시절 슈퍼호박, 슈퍼돼지들과 관련된 기사들을 읽었다. 어렸던 나에게 그런 거대한 식물, 동물이 나오면 굶주리는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론은 어떤가? 여전히 제3세계의 아이들은 굶어죽고 있다. 식량생산은 거의 혁명적인 수준으로 증가했는데 왜 굶주리는 사람은 줄지 않는 것일까? 결론은 단순하다. 생명공학이라는 이름으로 연구를 하는 연구비는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에서 나온다. 간혹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본은 사람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자본을 증식할 수단으로 볼 뿐. 식량혁명이 이루어진다고 할지라도 자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 제3세계에는 도움이 될 수 없다. 굶주려 죽는 사람을 모두 배불리게 먹일 수 있는 곡물들이 사료로 변환되는 현실.. 생명공학은 장밋빛이 아니라 자본의 또 다른 얼굴뿐이다. 

황우석 교수가 줄기세포 복제에 성공했을 때 누구보다도 감격했던 것은 난치병 환자들이었다고 생각한다. 불치의 병을 고쳐줄 그런 세상을 뒤흔들만한 사건. 하지만 생명공학은 철저히 자본의 논리를 따른다.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의학의 발전은 인류의 건강에 이바지했던 시대를 넘어 20세기에 들어서서는 의학의 발전이 인류의 건강증진에 이바지하지 않는다. 자본이 투입되기 시작하면서 수익이 나는 곳에만 의학의 혜택이 돌아간다. 그런 상황은 종종 목격할 수 있다. 불과 몇 해 전 우리나라에서는 제약회사가 의료보험수가 인상을 요구하면 신장병환자들에게 필수적인 혈액투석제(?)의 공급을 중단한 바 있다.  

과학적 지식을 요하는 생명공학의 경우, 어려운 말들을 쓰며 아름다운 세상을 그려내지만, 사실 천박한 자본주의와 같다. 경제논리속에 인권이나 윤리가 배제되는 것처럼, 생명공학의 논리속에 생명에 대한 인식과 생명윤리가 쓰레기취급 받고 있다. 경제논리속에 돈 많은 사람이 행복한 생활을 하는 것이 당연한 것 처럼, 생명공학도 돈많은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은 것들을 누리게 된다. '파우스트의 선택'은 생명공학이 멤피스트에게 자신의 영혼을 팔아버린 파우스트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생명윤리, 생태환경에서 점점 멀어지는 생명공학은 인류의 복지를 증진하기 보다는 사람다운 삶을 방해하는 방향으로 한걸음 한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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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 - '인도'라는 이름의 거울
이옥순 지음 / 푸른역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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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인도는 무엇일까?
대체로 우리에게 인도는 두가지 의미로 다가온다. 못사는 나라와 모든이가 현자인 나라.. 매체도 그렇고 우리가 접하는 책에서도 두가지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쳐줄 뿐이다.
'시간이 멈춘 듯, 여유롭게 사는 인도인의 삶과 문화','인도를 다녀오면 인생이 바뀐다','재충전의 시간을 가질 계획','새로운 충격과 자극을 기대' 라는 말들로 인도는 우리에게 인식되어 있다.


'인도에는 카레가 없다' 등의 인도와 관련된 우리의 오해를 지적하는 책을 써온 이옥순의 책 '우리 안의 오리엔탈리즘'은 "'인도'라는 이름의 거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과감하게 우리가 인식하는 인도에 대한 생각이 사실은 150년 전 영국이 인도의 식민지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이념과 똑같다고 지적한다. 인도를 바라보는 눈은 사실 우리가 느끼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19세기 제국주의자에게 감염된 인도 보기일 뿐이다. 이것을 저자는 '복제 오리엔탈리즘'이라 부른다.

오리엔탈리즘이란 에드워드 사이드가 지적한 데로 '동양과 서양 간의 인식론적 구분을 창조하고 확인하는 데 기여한 이념적 관념'이다. 다시말해 서양이 상상하고 날조해 낸 동양에 대한 이미지이다. 사실 제국주의 국가가 이런 오리엔탈리즘을 만들어낸 것은 그들의 식민지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런 관점은 여전하다. 지금 우리도 동양과 서양을 그런 차이로 인식하고 그런 면에서는 동양이 서양보다 우수하다는 역 오리엔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17세기 '동인도회사'를 통해 인도에 진입한 영국은 19세기 인도 전체를 지배하게 된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세포이난'으로 불리는 반영투쟁과 접한다. 이 때 부터 영국은 상업자본이 아닌 직접적인 통치를 하게 되는데, 식민주의를 정당화할 이념을 만들게 된다. 인도는 발전하지 못하고, 윤리를 갖지 못한 미개한 야만인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양인인 영국이 인도를 개화시키고 문명을 발전시킨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인도를 그럴 듯 하게 포장시키는 데 인도는 시간이 멈춘 신비한 곳이라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현자인 깨달음을 향해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 이념은 인도를 좋게 말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인도는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1부에서 19세기 영국이 날조해 낸 인도에 대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2부에서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작가들 '강석경','송기원','류시화' - 강석경은 오늘의 작가상, 송기원은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저명한 작가들이다. 류시화와 물론 베스트셀러 작가이고 - 의 글들을 통해 우리가 생각해 내는 인도에 대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강석경과 송기원은 각각 소설에서 인도를 그려내는 데 인도인의 헐벗은 이미지, 거지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돈 한푼을 따내기 위해 사기를 치고, 협박을 하는 미개인의 모습으로 그려낸다. 류시화는 그의 책 '하늘 호수로 떠나는 여행'에서 그런 미개 속에서도 깨달음을 추구하고 있다고 그려낸다.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이 힌두의 철학자답게 미화되고, 돈을 떼어먹은 사람은 집착과 소유를 벗은 것으로, 절도인을 행복의 메세지를 전달하는 성자로 그려낸다. 강석경, 송기원 그리고 류시화가 그려낸 인도에 대한 이미지는 놀랍게도 19세기 영국이 인도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해낸 이미지와 똑같다. 그리고 그런 이미지는 바로 우리가 인식하는 인도에 대한 이미지인 것이다.

이런 우리의 인식속에는 인도인만 있다. 그리고 시간이 멈춰버린 인도만 있다. 인도사회와 인도의 변화에 대해서는 놀랄정도로 무심하다. 그나마 피상적으로 IT 강국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그래서 인도가 핵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 돈으로 나라나 더 발전시키지'라는 식으로 생각할 뿐이다.

실제로 우리는 우리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미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편견, 특히나 서양이 만들어낸 '동양'이라는 이미지를 벗어나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서양이 만들어낸 '동양'이라는 이미지가 이미 내면화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닥. 그렇기 때문에 인도에 대해서 '동양'에 대해서 거짓되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점에서 이 책은 의미가 있다. 비단 인도에 대한 문제뿐만 아니라 우리가 '한국'이라는 우리 사회, 문화를 인식함에 있어서도 이런 '복제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런 우리의 생각을 되돌아보도록 요구한다. 나에 대한 성찰을 촉구하는 ...

* 다만 단점이 있다면 내용이 조금 늘어져 있다는 것. 200여페이지에 달하지만 100여 쪽의 내용으로도 우리안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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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공지영 지음 / 푸른숲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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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다는 것, 소설의 재미 중에 하나는 바로 카타르시스일게다.
감정적환희가 아닌, 글자 하나 하나가 눈속에 박혀들고 마음으로 스며들고 몸서리쳐지는,,,
때로는 유쾌해지기에, 혹은 동질감을 느끼기에 소설을 읽기도 하지만,
그 몸서리를 잊지 못해 다시금 소설을 읽을 때도 많을 것이고,
그 순간 함께 행복해진다.

<무소의 뿔처럼 가라>, <고등어>로 머릿속에 남아있던 공지영의 소설을 10년만에 손에 들게 되었다. 애초에 <별들의 들판>을 사려던 것이 얼떨결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까지 손에 들려져 있었다.

가끔은 소설은 독자들에게 '삶'에 대해서 묻는다. '삶이란 무엇이냐?'고, 그 때 마다 독자는 나는, 대답을 유보할 수 밖에 없고, 소설만 응시할 뿐이다. 곁눈질로 삶에 대한 힌트만 찾을 뿐.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나에게 다시 한번 묻는다. '삶이 무엇이냐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는 여자와 사형수간의 만남을 소재로 하고 있다. 남 부러울 것 없던 집안의 막내 딸 유정은 세번째 자살기도를 한다. 집안의 골치거리 역을 하고 있는 유정에게 수녀인 유정의 고모는 한가지 제안을 한다. 고모가 하고 있는 사형수들을 만나는 일에 일주일에 한번, 한달간 동행하기로.

열입골살짜리 소녀를 강간, 살해하고 그녀의 어머니를 살해하고, 가정부마저 살해한 후, 인질극을 벌이다 잡힌 윤수는 사형수로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 보통사람들이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할 잔인 무도한 자다.

그런 그들이 사형수들을 만나는 일을 하는 수녀인 유정의 고모를 매게로 만남을 갖는다. 유정의 고모는 사형수들을 교정하는 일을 하는 종교위원이지만, 교화가 아닌 하나의 사람으로 사형수들을 대한다. 고모를 매개로 모든 삶에 대해 냉소적인 유정과 삶에 대해 온통 적개심으로 가득찬 윤수가 서로의 삶을 소통해낸다.

언뜻 착한 고모를 매개로 냉소적인 유정과 적개심으로 가득찬 윤수가 서로의 삶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삶을 살만하다고 느낀다는 단조로운 스토리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맘을 터 놓고 소설과 맞대면하게 되면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의 삶의 고통이 지금 현재의 단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면 유정처럼 냉소적으로 되거나, 아니면 사회에 대해 불만(조금 더 한발 진행하면 적개심)의 눈을 갖게 될 것이다. 아니면 유정의 고모처럼 세상을 사랑하던지의 모습일 것이다. 소설속의 인물들과의 관계는 나와의 관계인 것이다.

소설에서 유정은 이런말을 한다. 사실과 사실이전의 사실인 진실에 대해. 소설속의 인물들에게서 나타나는 냉소, 증오, 사랑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사실 이전의 사실은 상처라는 진실을 갖고 있다. 소설의 인물들이 사실속에서 진실을 찾아감으로 삶의 존재를 회복하는 것 처럼 독자(나)는 소설속의 인물들을 만나 마주보며 내 안의 진실을 찾아간다. 이 소설이 좋은 소설이라는 것은 독자와 소통하는데 있다. 그러기 위해선 인물들이 서로에게 서로의 진실을 내어 놓은 것처럼 나도 내 마음을 열고 소설을 대해야 한다.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 은 존재의 회복, 삶에 대한 간절함을 던져주는 것 이외에도 부록으로 사형제도의 문제, 수형자들의 문제를 던져준다. 영치금 한푼 없어 제대로 된 약 하나 복용하지 못하는 수형자들이 많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보다 불쌍한 사람이 있어서 그보다 나는 낫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 소설을 편견으로 읽은 사람일 것이다.나보다 나은 사람이건 못 한 사람이건 서로의 진실을 보담는 것이 삶의 의미를 회복하는 길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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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장된 학교 - 한 사회학자의 한국교육의 패러다임에 대한 지적 성찰
김덕영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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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민족은 유대민족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이다라고 배워왔다. 많은 한국인들은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청소년들이 세계 수학 올림피아드에 나가서 거둔 좋은 성적들, 기능 올림픽에서의 1등(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각종 음악회에서의 1등에다 요즘은 유럽의 영화제에서까지 1등을 하고 있다.(1등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민족은 학문적인 분야에서는 아직 노벨상을 배출하지 못했다. 노벨상만 획득했어도 각 민족마다 노벨상 몇 개인지를 산출해 1등, 2등을 갈랐을텐데 말이다. 물론 요즘은 황우석교수로 인해 노벨상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졌다. 우리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이라는 것을 보여줄 아주 좋은 기회가 된 것이다. (물론 우리만의 생각이겠지만) 

 

서열문화, 민족마저도 1등, 2등으로 가르는 문화는 우리 교육이 낳은 가장 큰 폐단이 아닐까? 독일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저자는 그런 의문에서 부터 우리 교육문화의 문제점에 접근한다. 서울대가 1등, 연대 혹은 고대가 2등,3등으로 쭈욱 순서 매김을 외국 대학에 대해서도 거리낌없이 해대는 모습에서 저자는 우리 교육의 폐단을 읽어낸다. 각 대학마다 특성이 있고, 같은 학문이라고 하더라도... 학문에 중심을 두는 대학도 있고, 실용적인 면에 중심을 두는 대학이 있음에도 무조건 1등, 2등을 붙이기를 좋아한다. 이는 대학의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의 내면에 까지 깊숙히 자리 잡고 있다. 우리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똑똑한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사실, 그것은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 각 민족들을 1등, 2등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결과이다.

 

'위장된 학교'는 크게 세부분에서 교육의 문제에 접근한다. 첫째가 바로 앞에서 언급한 서열문화이다. 결국 교육의 문제는 서열문제를 푸는 것이 핵심이다. 서열문제를 풀지 못하는 교육개혁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그 서열문화가 점점 확대재생산 되는데 있다. 예전과는 달리 대학 입학 후 일류대학 진학을 위해 휴학 후 다시 수능시험에 도전한다던지, 졸업 후 사회생활에서 학벌이 미치는 영향은 이미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둘째, 교육의 전근대성이다. 현대교육이 등장한 100여년 전부터 교육의 형식은 현대적이 되었다. 현대적인 교육이 되었다 함은 개인을 객채화시켰던 전근대적인 교육이 아니라 자아를 하나의 주체성있는 개인으로 교육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우리의 교육은 겉으로는 현대적인 교육의 방법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교육이라는 미명아래 끊임없이 감시하고 처벌하는 규율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셋째, 경쟁력없는 대학의 문제이다. 교수와 학생의 사이가 위계질서로 잡혀져 있고, 각 교수들간에도 사제관계 혹은 선후배 관계로 묶여 있어 생산적인 논쟁은 ?을 수 없고 주례사 비평 수준의 토론만 있을 뿐이다.

 

비판의 소재들이 명확하고, 저자의 전공인 사회학이나 철학적인 측면에서 잘 짚어내고는 있지만, 사례를 적용하는 부분에서는 지나쳐 보인다. 때론 지나침의 본래 비판의 의미를 훼손시킬 수도 있다는 점은 이 책의 분명한 약점이다.

 

저자의 서열문화에 대한 비판이나, 교육의 전근대성에 대한 비판은 교육문제의 핵심을 잘 짚어내고 있다. 그럼에도 치열하게 생각되지 않는 것은 교육에 대한 문제제기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짚어내는 문제는 이미 많은 진보적인 사람들에 의해 지적되었더 왔던 바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의미를 갖는것은 교육문제에 대한 비판과 대안제시는 줄기차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문제에 대한 논의를 더 이상 희망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똑같은 비판만 계속해 온다고 생각하면서, 한국사회의 어쩔 수 없는 현상으로 받아들이게 될 때,그 때야 말로 한국 교육에 희망이 없는 때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교육의 문제에 대한 또 하나의 비판일지는 몰라도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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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세트 - 전10권 - 양장본 조정래 대하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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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읽은 소설중에 한권만 추천하라고 하신다면 저는 주저없이 조정래의 [한강]을 꼽겠다. ^^ [아리랑]과 [태백산맥]을 보면서 오래전부터 한번 도전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실제로 읽어보지는 못했다 -_-;; [태백산맥]의 경우는 집 책꽂이에 항상 꽂혀있는데도 말이다 ^^ - 일단 끝까지 읽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을 경우 아예 시작을 하지 않는 개인적 성격도 한 몫 - 언젠가는 꼭 도전하리...

아마 조정래님의 대하소설을 시작하지 못했던 것은 조정래님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도 한 몫 작용했다. 함부로 대해서는 안될듯한... 그럼에도 -게다가 시간적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한강]에 도전했던 것은 일종의 객기였다... ^^ 이렇게 시간보내다간 조정래님의 대하소설 한번 읽어보지 못할 것 같아서... -'04년, '05년 [태백산맥], [아리랑]에 한편씩 도전하겠다는 다짐 하나 - 결국 봄날의 두달반을 끙끙대어야만 했죠... ^^

[한강]을 읽어내려가는 것은 1960년대부터 1970년대의 이르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우는 시대의 역사를 보는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각각의 장소에 있는 한강의 기적에 발을 뻗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미시사가 뭉쳐져서 그 시대의 역사 전체를 보여주는..(개발논리시대의 역사를 알고 싶다면 한강 10권을 띤다면 마음속으로 느낄 수 있을거라 생각된다. ^^ )

지난해 봄에 읽은 내용이라 세부적인 부분까지는 생각되지는 않지만 크게 저는 세가지의 시대적 배경이 생각난다.

첫째, 유일민과 유일표를 통해 보여지는 아직도 지속되는 남과 북의 문제. 유일민 가족은 아버지의 월북이라는 꼬리표를 단채 여러가지 사회적 제약들을 몸으로 버텨냈다. 남과 북의 이념의 문제가 정치적으로 이용되면서 연좌제라는 사회적 억압의 기제를 사용하는 시대적 상황은 아직도 변함이 없다. - 노무현 장인이 이북에 부역했다는 과거가 문제가 되었던 대선을 보면 -

둘째, 한인곤을 통해 보여준 군인 정치와 한강의 기적시대 때의 부동산 투기의 모습이다. 정치적 부패의 기본 틀이 잡히고 재산의 축적이라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되어버렸던 모습은 여전히 동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셋째, 천두만과 천두만 가족에서 보여지는 일자리의 문제와 산업역군이라는 미명아래 착취당해야만 했던 노동자의 현실을 보면 먹고 자는 문제가 조금 나아졌다는 것은 빼놓고 경제적 구조의 문제는 여전한 것을 볼 수 있다.

- 지금 기억나는 부분만 적었답지만. 한국현대사의 큰 줄기를 짚어나간 대작이었다.

2003년 읽은 소설 중 이 한권의 소설로 [한강]을 꼽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때문다. 시대적 배경으로는 6-70년대를 보여주고 있지만, 사실은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지금의 사회적 모습을 보여주기에... 현재의 삶의 부조리들이 바로 그 시대로 부터 형성되었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의 삶을 보여주면서 우리네 삶의 모습도 제공해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조정래의 문학이 뛰어난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저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작가들에게 정말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 시대적 삶을 보여주면서 보편적인 역사로 승화시키는 능력, 그래서 조정래님의 명성은 단순히 대작을 남겨서가 아니라 살아있는 역사의식을 갖게 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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