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우리 역사교육의 역사 - 고대부터 현대까지 한국 역사교육이 걸어온 길
역사교육연구소 지음 / 휴머니스트 / 2015년 3월
평점 :
품절
우리나라에서 역사교육이 시작을 알기는 어렵지만, 조선전기 <동몽선습>에서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동몽선습>은 역사서라기 보다는 중국중심의 충, 효 등이 강조된다. 조선후기에 이르러서야 자국사라는 개념이 생겼다.
<동사강목>은 유교적 도덕 사관을 바탕에 깔고 있는 강목체 역사서답게 대의명분과 충성, 절의라는 도덕 기준에 따라 자국사를 바라보고, 절의를 지킨 인물과 애국 항재을 강조했다. 중국을 세계의 중심으로 파악하던 견해를 부정하고, 화(華)와 이(夷)를 구분하는 기준이 지리에 있지 않음을 역설함으로써 전통적 화이관에서 빠져나온 것이다. 강목체 사서의 기본 특징인 유교적 교훈 중심의 정치사, 사대부 중심의 역사인식이라는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었지만, 독자적인 자국사 연구와 편찬에서 일대 획을 그은 책이었다. (55쪽)
조선말에 이르러서 주체적인 역사와 역사교육에 대한 개념이 형성되었지만, 일제시대 들어 역사교육자체가 말살되는 데에까지 이른다. 일제시대의 국사는 일본사의 한 부분을 차지할 뿐이었는데, <보통학교 국사>가 대표적이다.
"천황은 히로시마 대본영에 계셨는데 좁은 집무실에서 밤낮으로 모든 일을 친히 처리하셨다. 그리고 황송하옵게도, 출정군인과 고락을 함께하시겠다는 생각으로, 불편함을 숨기시고 마디마디가 에이는 혹한에도 스토브조차 사용하지 않으실 정도였다. 그리하여 출정 장병은 집을 잊고 몸을 던져서 점점 충성과 용맹을 나타내고, 국민은 모두 이것을 후원하여 상하가 마음을 하나로 하여 국사에 열심을 다했기 때문에 드디어 이와 같은 커다라 승리를 얻었던 것이다.<보통학교 국사 하권, 134~135쪽>"
천황의 솔선수범과 국민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청일전쟁의 승리를 가져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사는 부정적인 내용으로 일관되었다.
"당파싸움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율곡은 이것을 걱정하여 그 싸움을 그치게 하려고 힘을 다했지만 효력이 없었고, 점차 많은 당파를 만들어 각각 정권을 잡으려고 다른 사람을 죄에 빠뜨리려 꾀하매, 이때부터 정치는 크게 어지러워졌다. 지금까지도 조선인 사이에 노,소,남,북 4색의 구분이 있음은 그 잔재이다.<보통학교 국사>하권 11쪽"
<보통학교 국사>에는 위대한 일본제국의 역사상과 부끄러운 한국의 역사상이 하나의 교과서에서 선명하게 대비되어 있었다. 전자를 통해서는 한국의 독립이 불가능함을 알게 하고, 후자를 통해서는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을 당연하게 여기도록 가르친 것이다. (115쪽)
일제강점기는 이렇게 왜곡된 역사를 가르쳤지만 더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역시 역사에 개입하게 하는 여지를 만들어준 것이다.
역사교육을 국민통합과 국민의식 형성의 중요한 도구로 활용하려 했던 조선총독부의 정책은 광복 이후에도 교육정책 입안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다. 이렇듯 한국사교육을 민족의식과 국민의식 형성을 위한 도구로 적극 활용하려는 과도한 정책적 의도와 경향은 황국신민화 정책기의 역사교육 정책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다. (150쪽)
그리고 뒤이어 벌어진 한국전쟁은 한국역사가 객관적인 시각을 갖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
6·25전쟁은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방향을 바꾸어놓았다. 학자들 사이에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해방 직후만 해도 역사교과서에 38선의 성립과 남북 문제에 관해 미국과 소련 양쪽에 공평하게 책임을 돌리는 서술이 우세했다. 그러나 6·25전쟁으로 민족의 대립이 동족상잔으로 이어지고 분단이 고착되면서 외세나 제국주의가 아니라 민족의 다른 반쪽이 가장 중요한 적으로 등장하는 적 개념의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까지 경계의 대상이었던 외세가 '새로운 적'인 민족의 다른 반쪽을 넘어서기 위한 지원 세력으로 여겨졌다. 전쟁으로 남북 분단이 고착되면서 교육과정과 교과서 속에 이데올로기 문제가 핵심 사안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까지도 남북 양쪽에서 정권 유지와 반대 세력 축출에 6·25전쟁과 남북 분단을 활용하는 폐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169쪽)
역사교과서과 본격적으로 정권의 홍보물로 전락한 것은 박정희시대 후반부부터이다.
1969년 교육과정의 부분 개정 이후 국사 교과서에 나타난 변화를 살펴보면, 각 시대별로 대외관계를 중시했으며, 현대사 부분에서 베트남 파병, 경제개발5개년계획, 새마을운동, 국가비상사태 선언, 남북 대화 등 구체적인 정부시책을 홍보하고, 5·16 쿠테타를 혁명으로 부르면서 합리화하기 시작했다. 이 개정은 이후 교육과정과 교과서의 방향을 보여주었으며, 국사교과서가 정권의 홍보 수단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출발점이 되었다.(177쪽)
이후 박정희 정권은 '국적있는 교육'을 강화하며 국사교과서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국사교과서가 국정화된 것도 이 때이다. 그리고 아울러 <시련과 극복>이라는 책을 역사 읽기 교재로 활용한다.
"고려인의 독립자존의 정신과 꺾이지 않는 기개는 국가가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발휘되었는데, 특히 이것은 무인의 전통으로 이어져, 일찌기 거란과의 항쟁에 있어서도 그러하였거니와, 몽고와의 항전에도 여지없이 발휘되었다."라거나, "삼별초가 3~4년 동안에 걸쳐 대몽 자주 항쟁을 벌인 것은 역시 고려 무인의 전통적 기백을 드러낸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라는 <시련과극복>의 서술은 무인의 국난 극복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단적인 사례다. 이러한 서술은 박정희 정부가 쿠테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이었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192~193쪽)
그런데, 이러한 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역사교과서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1994년에 있었다. 당시의 역사연구를 반영하여 6·25전쟁은 한국전쟁으로 바꾼다거나, 4·3항쟁으로 용어를 바꾸고 이승만과정의 독재화 과정 및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사항 등에 객관적 서술을 권고했는데, 이는 보수 우파의 강력한 공격을 받았다.
개정 시안의 내용이 알려지자 보수 언론과 단체들은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시안의 내용이 '위험한' 민중사관에 근거하여 북한을 지지하고 남한을 비판하는 입장으로 일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 이런 비판에 직면한 교육부는 논란이 된 용어나 내용을 대부분 종전의 교과서와 같이 되돌렸다. ...
이 사건은 국정 <국사> 교과서가 지나치게 지배층 중심의 역사관을 대변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따르고 있으며, 정권의 홍보 역할을 해왔다는 비판에 대한 보수·우익의 반격이었다. 민중사학이나 기존의 교과서 비판에 맞서 보수·우익 관점의 <국사>교과서 서술을 그대로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1994년의 '국사교과서 준거안 파동'은 2000년대 들어 <한국 근·현대사>교과서와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논란과 역사 이념 논쟁으로 이어졌다.(222쪽)
2000년대 후반 보수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들은 다시 역사교과서에 손을 댄다. 그리고 뉴라이트라는 집단이 나타나 역사전쟁의 선봉에 선다. 금성출판사는 그 논란의 중심에 섰다.
뉴라이트 파동과 관련해 저자는 신자유주의의 태동이라는 시각을 제시한다. 1980년대 부터 뉴라이트가 등장한 영국, 미국을 중심으로 자국사를 강화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반성의 입장에서 보려는 시각을 자학사관이라고 비판한 점 등이 비슷하다.
역사교육의 역사로 보면 우리에게 역사교육은 항상 왜곡으로 가득차 있다. 정치적인 공세는 다시 역사교과서를 국정화시키는데까지 돌아간다. 역사계의 성과에는 눈을 감고 가르치고 싶은 것만 왜곡해서 가르치겠다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