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 <너의 이름은> 더빙판이 개봉하면서, 신카이 마코토의 소설 세편을 연달아 읽었다. (7월에) 솔직히 이야기하자면 소설로의 의미를 찾기는 힘들지만, 묘사만으로도 훌륭한 작품을 만들 수 있다는 데 감탄하며 그 묘사를 읽기 위해 소설을 집어 들었다. 


애니 <너의 이름은>은 많은 이들이 소개하고, 추천하였기 때문에 굳이 애니에 대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달 필요는 없다. 

커뮤니티 등을 보면 미야자키 하야오와 비교하면 신카이 마코토를 비하하는 경우를 보곤 한다. 우주, 세계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세계가 분명 큰 세계를 지향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신카이 마코토를 폄하할 이유는 없다고 본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이 잘 나가던 시절을 보냈고, 70년대생인 신카이 마코토는 끝물을 잠깐 맛봤을 뿐, 잃어버린 20년을 실감한 세대이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시대에 세상에 나온 청년세대와는 분명 다를 수 밖에 없다. 신카이 마코토는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너의 이름은>을 보는 순간 동일본 대지진을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지진 전 센다이를 다녀온 나는 지진 뉴스를 가슴아프게 봤고,기억속에 남아있다. <너의 이름은>을 보면서 동일본 대지진 이후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잃은 이에 대한 위로가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세월호 사건을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했다.) 예술가로 최선의 방법으로 그들을 위로한 신카이 마코토를 다시 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신카이 마코토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애니가 최선이다. 


소설과 영화는 스토리상으로 큰 차이는 없지만 화자는 조금 다르다. 소설은 타키와 미츠하의 1인칭, 즉 두 사람의 시점만으로 그려 진다 그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말할 수 없다. 한편 영화는 애초에 3인칭, 즉 카메라가 비추는 세계다. 그러므로 타키와 미츠하 이외의 인물도 포함해, 말 그대로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장면도 많다. 소설과 영화, 각각의 매력을 충분히 즐겨주기를 바라지만 이처럼 미디어의 특성상 필연적으로 상호보완적이 되었다. 

소설은 혼자서 쓰지만 영화는 수많은 사람의 손길을 거 쳐 완성되는 건축물이다. ... 이 이야기는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형태가가 장 잘 어울린다'고 썼는데, 그것은 영화가 앞서 말한 수많은 분들의 재능이 모여 맺어진 화려한 결정체이기 때문이 다. 영화는 개인의 능력을 훨씬 넘어선 곳에 있다. 

그래도 나는 결국 이 소설을 썼다. 

어느 순간부터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어딘가에 타키나 미츠하와 같은 소년소녀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이 이야기는 물론 판타지지 만 그래도 어딘가에 그들과 비슷한 경험과 추억을 간직한 사람이 있을 것 같아서다. 소중한 사람이나 장소를 잃고 말았지만 발버둥 치자고 결심한 사람 아직 만나지 못한 무엇 인기에, 언젠가 반드시 만날 것이라 믿으며 계속 손을 뻗는 사람 그리고 그런 마음은 영화의 화려함과는 다른 절실함으로 그려져야 한다고 느꼈기에 나는 이 책을 썼다. (287-289쪽 ,작자후기)


* 신카이 마코토의 <구름의 저편, 약속의 장소>나 <별을 쫓는 아이 : 아가르타의 전설>을 보면 그의 작품세계가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아직 더 보여줄 것이 많은 감독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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