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철수의 힘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1만5000원

서울시장 선거와 대선후보 단일화에서 양보를 했던 안철수가 이번에야 말로 국민들의 선택을 받게 되었다. 4.24 재보선에 출마하면서 잠잠했던 그에 대한 관심이 다시 일었다. 작년 안철수와 관련된 몇 책 읽기를 했다가 단일화 이후 접었는데 그 때 남겨진 책이 강준만의 '안철수의 힘'이었다. 재보선을 앞두고 다시 그의 책을 집어 들었다. 아마도 금주내 후기를 올릴 계획인데(계획대로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에 앞서 강준만이 이야기하는 책들 중에 관심이 있는 책들을 먼저 페이퍼에 남겨둔다.

 

 

왜 도덕인가? / 마이클 샌델 지음 / 한국경제신문사·1만6000원

"정지적 논쟁이 서로에 대한 적대감 보다는 상호존중 정신으로 행해진다면 더욱 바람직하다. 그러나 최근 정계에서 말하는 예의란 대개 불법선거 운동이나 부정행위들에 관한 덜 비판적인 조사를 고상하게 일컫는 말에 불과할 때가 많다. 마찬가지로 당파주의를 초월하자는 목소리 역시 정책차이를 흐릿하게 만들고 원칙과 확신이 결여된 정치를 정당화한다. "(70쪽, 마이클센델 책 134쪽)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 사울D. 알란스키 지음 / 아르케·1만5000원

알란스키는 1971년에 출간한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에서 "문제가 극단적으로 나뉘어야만 사람들은 사람들은 행동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100퍼센트 천사의 편에 있으며 그 반대편은 100퍼센트 악마의 편에 있다고 확신할 때 행동할 것이다...."

.. 이와 관련해 한국에 알린스키를 가장 먼저 소개한 아시아교육연구원 원장 오재식이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이 가슴에 와 닿는다. "종교적 차원에서 보면 사람은 다 엇비슷하다. 나빠봐야 51퍼센트 정도일 것이다. 반대로 좋아봐야 역시 51퍼센트 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전략적 차원에서 상대와 싸움이 벌어졌을 때는 상대가 100퍼센트 나쁘고 내가 100퍼센트 좋아야 이기는 것이다. 이것을 종교화하고 신념화해야만 전투를 할 수 있다. " (74쪽)

 

두 문화 / C.P.스노우 지음 / 사이언스북스·1만2000원 

"53년전 영국의 작가이자 과학자인 C.P 스노우는 인문·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과 자연과학을 전공한 사람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의사소통하지 못하는 문제가 현대 서구 문명의 중대한 장애물이자 심각한 위협이라고 우려했다. 그런 '두 문화' 폐해는 고등학교 때부터 '문과-이과' 편 가르기를 하는 한국에서 양상을 달리해 나타나고 있다. ... 더욱 큰 문제는 문과·이과 모두 일방적이고 편향적인 시각에 길들어 각각 그 내부에서도 소통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91~92쪽)

 

 

(98~99쪽)

 

 

 

 

 

 

 

 

 

(작성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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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자체가 쉽게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많은데 죽음에 대한 부분 역시 어렵다. "삶은 죽음을 내포하고 있으므로[生卽死], 죽음을 내포하고 있는 이 삶의 진실을 이해하는 것은 곧 죽음을 극복하는 것이 된다.[死卽生] 즉 죽음이 필연적일 수 바에 없는 삶의 실상을 아는 것은 곧 영원히 사는 것이 된다는 생즉사 사즉생의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95쪽) 생과 사를 동일시 하여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는데 이를 반대로 생각해보면 생과 사가 서로 구분되므로 괴롭고, 번뇌가 생긴다. 그래서 생과사를 동일하게 여기게 되면 번뇌의 원인이 사라지는 無常, 無我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정신의 수련을 통해 해탈에 이르게 된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불교에서는 죽음 역시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다. 아마도 다른 종교에서 죽음 이후에 삶에 대한 공포를 통해 절대자에게 의지하도록 한다면 불교는 개인의 수양을 통해 죽음을 극복하게 하는 것 같다.

 

불교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먼저 눈에 들어온 부분은 49재에 대한 부분이다. 좀 이해하기 힘든 개념이기는 한데 죽은 후에도 칠일이 지나면 다시 태어나는 조건을 갖게 되는데 그 최대기간이 칠칠일(49일)로 본다. "대승불교의 범망경에서는 "부모나 형제나 화상이나 스승이 죽으면, 그 날은 물론 삼칠일(21일)이나 칠칠(49일)일에도 마땅히 대승의 경전과 계율을 독송하고 강설하는 경건한 모임을 가져 복이 도래하길 구하고 좋은 삶을 얻길 구하라"(84쪽) 49재는 불교의 바탕위에 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불교가 아닌 무교, 기독교(카톨릭 포함)에서도 많은 이들이 49재에 모여 별도의 예를 차리는데 불교의 영향을 받을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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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무속신앙에서는 삶과 죽음을 '이승'과 '저승'으로 설명한다. 일단 사람이 죽게되면 저승차사(저승사자)의 안내를 받아 몇 단계를 지나게 되는데 여기서 죄의 경중에 따라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다. 예를 들어 어른말에 겉 대답을 한 자는 발설지옥에서 염라대왕이 혀를 뺀다. 역적죄를 짓거나 살인, 강도를 한자는 독사지옥에서 변성대왕에 의해 독사에 의해 괴롭힘을 당한다. 이렇게 단계별로 형벌을 받고 나면 저승에서의 영생을 얻게 되는데 죄의 경중에 따라 단계가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죄의 정도가 너무 심해 지옥의 형벌로도 안 될 때는 소나 말, 지네 등으로 환생을 하게 된다. 영생이라는 개념과 환생이라는 개념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사람으로는 환생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특징이다. 죄가 없고 공덕이 있는 사람은 영생을 얻기도 하고 때로는 새나 나비로 환생을 한다.

 

책에서 설명하기로 지옥은 총 10단계인데 크게 나누어 보면 공덕(인심), 효와 어른에 대한 공경, 역적/살인/강도, 결혼생활의 4가지로 묶을 수 있다. 즉, 당시의 시대적 윤리관념이 무속신앙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승과 저승이라는 개념을 통해 무속신앙은 현재의 삶을 중요시 여긴 것을 알 수 있다. 공덕을 쌓고 사회적으로 형성된 윤리체계를 따른 이들은 영생을 얻고 그런 윤리적 체계를 거부한 사람들은 지옥의 형벌을 받아야 하거나 심하면 소나, 말, 지네 등으로 환생해 고통을 겪는다.

 

무속신앙이 경우에 따라서 지나칠 정도로 굿 등에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지난 시절에는 삶의 윤리적 규범을 강조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지금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많은 죽음과 관련된 부분에서 온전한 기독교라기 보다는 무속신앙의 토대위에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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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평론가들의 평론을 읽어보겠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그냥 일반인으로 그런 실행을 하기는 쉽지 않다. 2000년대 초반 '비평과 전망' 이후 '작가와비평'을 관심있게 보고는 있지만 한 사오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만큼 문학에 대한 관심 또한 적었다. 오랜만에 손에 든 책이 김정남의 평론집 '꿈꾸는토르소'였다. 하지만 최근 문학작품을 손에 든 기억이 적기 때문에 공감할만한 내용을 찾아낼수는 없었다. 생소한 시인, 소설가도 적지 않았다. 특히 시 부분에 있어서는 처음 들어보는 시인의 이름이 많았다. 대신 흥미를 갖게 된 시인이 몇 있다. 꿈꾸는 토르소를 통해 소개받았다고 보면 된다.  

'관념적이고 작위적인 것보다 사실적이고 질박한 것이 더 힘이 세고 오래 간다는 게, 문학에 대한 내 생각이다. 장식적 수사와 관념의 찌꺼기는 그것이 화려하면 할수록 스스로 가짜임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시인 김선태의 '시 맛'은, 잘 차린 남도 음식이 그러하듯, 속 깊게 곰삭은 인생의 속내를 맛깔스럽게 전해준다. 여기에 올라온 산해진미는 바다에서 오른 것들이 많지만, 그러한 단순한 소재주의에 주목하는 것 또한 편식이 아닐까. 그의 시는 오히려 자연사와 인간사 그 전부를 꿰뚫는 탁월한 직관을 통해서 얻어진 황홀한 세계이다. 그의 시심으로 건져올린 세상사에는 고통도 슬픔도 상처도 모두 익을 대로 익어, 비로소 딱 알맞게 발효된 생의 진면목이 숨어있다. 이러한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그는 더 이상 엄숙주의속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다. 시집 『살구꽃이돌아왔다』(창비,2009)에는 진솔한 눈물이, 질박한 관능이, 수수한 웃음이 있다.'(69쪽)

   
 

흔히 보름게는 개도 안 먹는다는 속설이 있지요. 왜냐구요? 이놈들은 주로 보름 물때엔 탈피를 하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여, 겉은 번드르르해도 속은 텅 비어 있으니 그야말로 무장공자라는 말씀이지요.  

허나, 서해 어는 갯마을에는 이 속설을 살짝 뒤집은 재미난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지요. 보름달이 뜨면 괜시리 시골 처녀들이 밤마실을 나가듯 야행성 꽃게들도 먹이를 찾아나선답니다. 그런데 달빛이 하도 밝아 물속까지 훤히 비추면서 꽃게들도 그림자를 드리우니, 아 글쎄 제 그림자인 줄을 모르는 이놈들은 등뒤의 무슨 시커먼 물체에 화들짝 놀라 삼십육계 게걸음을 친다는 겁니다. ..... 

어허, 그런데 말입이다. 호랑이 앞에서도 집게발을 쳐들고 대드는용기를 가진 이놈들이 그깟 제 그림자에 속아 도망을 치다니 참 우습지 않아요? 그러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놈은 다름아닌 제 자신이 아니었을까요?

 
 

꽃게이야기 중

시인 김선우는 처음 접한 것은 아니다. 이미 『내 혀가 입속에 갖혀 있기를 거부한다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데, 김정남이 소개한 '쓸쓸하다'라는 시가 가슴에 팍 꽂혔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시는 시집의 형태로 아직 출간되지 않은 것 같다. (실천문학 2009년 봄호에 실림)

   
 

쓸쓸하다,는 형용사 / 하지만 이 말은 / 틀림없는 마음의 움직임 

쓸쓸하다,를 / 동사로 여기는 부족을 찾아 / 평생을 유랑하는 시인들 

유랑이 끝날 때 / 시인의 묘비가 하나씩 늘어난다

 
 

쓸쓸하다-그림자의 사전 3

'김선우 시인의 짧은 시가 가슴을 울린다. "쓸쓸하다"라는 단어의 품사는 형용사다. 구체적인 사건없이 제시되는 이 단어는 추상적인 감정일 뿐이다. 막연하게 제시되는 '쓸쓸하다'라는 말은 그 자체로 어떠한 환기력도 지니지 못하는 관념어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인은 쓸쓸하다,라는 말이 마음의 정태적 상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감정상의 동태적 상황을 가리킨다고 말한다. 이 마음의 움직임! 이때 "쓸쓸하다"는 동사의 지위를 부여받는다. 그 "쓸쓸하다,를 / 동사로 여기는 부족을 찾아 / 평생을 유랑하는 "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관념의 여지가 만들어낸 쓸쓸함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감정에서 배태된 현재진행형의 감정을 지닌 존재들 말이다. 세상에 쓸쓸하고 상처 받은 존재들을 찾아나서는 자, 누구인가. 그가 바로 시인이다. 이처럼 존재의 외곽에 버려진, 쓸쓸한 삶의 궤적을 좇아, 고독함의 시업을 쌓아 올린 시인들은 그 유랑을 마친 후, 하나의 묘비로 남는다.'(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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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얼마전 문학계에 흥미진진한 논쟁이 하나 있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으로 대변되는 소셜네트워크(SNS) 사회 답게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를 통해 논쟁이 진행되었지만 나는 카페, 블로그를 통해서 이 사실을 알았다. 물론 이런 논쟁이 있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가 며칠이 지나지 않아 더 이상 논쟁하지 않겠다는 선언으로 끝나버렸지만,  논쟁이 끝나고 열흘이 넘어서야 이 논쟁을 다시 한번 살펴보았다.

 

논쟁의 주역은 소설가 김영하와 비평가 조영일이다. 김영하는 2000년대 주목받던 신인작가였고, 지금은 중견작가라 할 만큼 자신의 확고한 위치를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조영일의 이름은 덜 알려져 있지만 고수 독자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비평고원이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소조라는 닉네임으로 훨씬 더 유명하다. 독자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중적인 독자들에게는 김영하가 인문학에 대해 고민하는 독자들에게는 소조가 더 친근할 것이다.

 

논쟁의 시작은 작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김영하의 신춘문예 비판에서 발단이 되었다. 김영하는 작가란 '타인이 아닌 자기자신의 긍지'가 필요하다고 주장하지만 조영일은 작가세계의 현실을 이야기한다. 신춘문예에 목메기 보다 차라리 영민한 한 명의 독자가 되라고 권한다. 그리고 현 문학권력 제도내에서의 작가로써의 긍지는 불가능하다가 말한다. http://cafe.daum.net/9876/ExU/10234

 

이런 논쟁 와중에 최고은씨 사건이 불거지면서 둘의 논쟁은 조금 더 구체화된다. 본격적인 작가론, 작가와 세계와의 관계가 드러나게 된다. 김영하는 '작가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조영일은 예술가들의 실제적인 참여를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김영하는 조영일을 '예술을 사회변혁의 수단으로 삼으라고 선동하는 비평가'라고, 조영일은 김영하를 '낭만적 예술론에 빠져 배부른 소리'라고 비판한다.

http://cafe.daum.net/9876/ExU/10264

 

결국 김영하가 트위터와 블로그를 그만두고 집필에 전념하겠다며 이 논쟁은 끝났다. http://cafe.daum.net/9876/ExU/10265

 

 - 논쟁의 과정을 아주 잘 설명한 한국일보 기사 : http://news.hankooki.com/lpage/culture/201102/h2011021418362284210.htm  )

 - 트위터리안과 조영일의 인터뷰 : http://cafe.daum.net/9876/ExU/10271

 - 기타 기사 :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463516.html

 

이번 논쟁은 어떻게 애초부터 성립하기 힘들었다. 모호한 언어를 쓰는 작가와 구체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비평가의 싸움은 언제나 비평가가 논리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으로 작가와 비평가의 논쟁이라는 점에서 작가는 보편적이고 대중적인 고정팬을 확보하고 있다.  작가는 언제나 꿈을 먹고 산다고 생각하는 대중 독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논쟁의 주제이다. 기본적으로 보수적인 예술론에 입각했던 낭만주의 문학론과 한국문학권력 비판에서 시작한 현실주의 예술론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문학에 있어서 가장 근본적인 이 문제는 사실 많은 문인들이 달려들만한 논제였다. 그러나 문학논쟁은 곧 막을 내렸고 내노라 하는 작가, 비평가들은 그 논쟁의 주변에 머물러 있었다. 여기에는 21세기 소셜네트워트 사회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기존 문인(비평가 포함)들은 트위터나 블로그에 취약했을 테니까...

 

개인적으로 이번 논쟁은 의미가 있었다. 20세기 후반 불었던 문학권력 논쟁이후 처음 문학에 대한 논쟁 다운 논쟁이었으니까. 재미있는 사실은 문학권력 논쟁 당시 문학권력 비판이 문학 밖에서 이루어졌던 점이고(강준만에서 시작) 이후 비주류 비평가들의 참여(이명원 등)가 있었을 뿐이다. 주류 문단에서 김정란이 유일하게 참여했었는데 김정란에 대한 사이버폭력까지 이루어졌었다. 

 

비평가 조영일은 한국문학비판을 계속 해 오고 있다. 이번 논쟁을 계기로 그의 비평을 손에 들게 될 것이다. 그리고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게 될 것 같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개인적인 목표 중에 하나가 신인작가들의 소설집(혹은 시집)을 매월 한권씩 사는 것이었다. 이는 독서보다는 독자로써 한국문학의 발전에 힘을 보탤 수 있는 실천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지켜지지 못했다. 항상 몰려드는 독서목록 때문이었다.

한국문인들의 년간 평균 인세수입은 300만원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조영일의 분석을 빌리지만 문학으로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10명 내외라는 것이다. 하루키의 IQ84의 선인세가 10억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한국문학에 대한 한국출판사는 너무 인색하다.  이런 현실은 여전히 독자들에게 독서 이외의 것을 고민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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