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쇠망사』 제2권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제1권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숱한 황제들의 제위 찬탈과 온갖 악행들이 제1권을 두루 점철했다면 제2권에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후계자들의 정치 체제를 집약적으로 다룬다. 제2권의 대부분은 사실상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고 봐도 좋다.

 

로마의 숱한 황제들 가운데서도 유독 우뚝한 인물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였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삼았으며, 저 유명한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로마 최초로 공인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이래 4분할 통치로 나뉘어 있던 로마 제국을 단일 통치 체제로 재통일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오랜 제위 기간(31년) 동안에 쌓은 탁월한 치적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과오들도 결코 적지 않았다. 그는 출중한 재능을 갖춘 아들조차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고 보고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독살하는 우를 범했다.

 

많은 사람들이 제국의 수도를 옮기고 행정 및 종교 제도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온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성격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해 왔다. 감사의 열의로 가득찬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를 교회의 구원자라고 부르고 영웅과 성인의 자질들을 지녔다고 찬양했다. 반면 불만을 품은 패배자 측은 그를 악행과 결점으로 황제의 명예를 더럽힌 전제 군주 가운데서도 가장 혐오스러운 폭군에 견주었다. 이렇게 양측의 상반된 감정은 어느 정도 후대에까지 이어졌기 때문에, 오늘날에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품성은 풍자 또는 찬양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가장 열렬한 찬미자들조차 인정하는 그의 결점과 가장 무자비한 적들조차 인정하는 그의 미덕, 이 두 가지를 공평하게 종합해 보면, 이 버범한 인물의 올바른 모습을 그려낼 수 있을 것이며 이는 진실하고 공정한 역사적인 평가로 주저 없이 승인할 만하다.(5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콘스탄티누스 대제(출처:위키 백과)

 

오랜 세월 동안 통치했던 그가 죽자 로마 제국은 이내 세 명의 아들에 의해서 다시 분할되었고, 세 아들 사이의 권력 다툼이 최종적으로 단 한 명의 황제인 콘스탄티우스로 귀결되는 과정 동안 숱한 황족들이 잔인하게 살해되었다. 이 가문의 비극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번의 생생한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도 없다. 오죽했으면 그가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비극을 두고 저 유명한 그리스 비극의 가장 음울한 이야기였던 펠롭스 가(家)의 저주를 떠올렸겠는가.

 

콘스탄티누스 가문은 좀 복잡하기는 하지만 한번쯤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그들 가문에서 숱한 황제가 출현해서 유럽인들의 삶을 통쨰로 뒤흔들었고, 그리스도교의 흥망까지도 좌우했으니 말이다.

 

 

콘스탄티누스의 군기를 항상 따라다녔던 행운의 여신은 그의 가정 생활에서도 희망과 안락을 보장해 주었던 것 같다. 역대 황제들 가운데 가장 오랫동안 번성기를 누렸던 몇몇 황제들, 즉 아우구스투스, 트라야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조차도 이 점에서만큼은 후세에 실망을 안겨 주었다. 잦은 반란으로 재위 기간 중에 황실 가문을 확장시킬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트족 출신의 클라우디우스가 시조인 플라비우스 황실 가문만은 여러 세대에 걸쳐 제위를 이어갔다. 이 가문 출신인 콘스탄티누스 황제도 부황에게 물려받은 영예로운 지위를 그대로 자식들에게 넘겨줄 수 있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두 번 결혼했다. 젊은 시절의 연인으로 출신은 미천하지만 정실 부인이었던 미네르비나는 아들 크리스푸스만을 남기고 죽었다. 뒤이어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인 파우스타와 결혼하여 세 딸과 서로 비슷한 이름을 가진 콘스탄티누스, 콘스탄티우스, 콘스탄스라는 세 아들을 두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형제들, 즉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는 모두 야심이 없어서 일반 평민으로 바랄 수 있는 한도에서는 가장 영예로운 지위와 풍족한 부를 누리도록 허용받았다. 이들 가운데 막내 한니발리아누스는 명성이 높지 않았으며 또한 자손도 남기지 않고 죽었다. 그러나 두 형은 부유한 원로원 의원의 딸들과 결혼하여 황실 혈통을 이은 새로운 분가를 형성했다. 귀족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자식들 가운데 가장 이름을 떨친 사람들은 갈루스와 율리아누스였다. 달마티우스의 두 아들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는 감찰관이라는 명예직만을 얻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두 누이동생 아나스타시아와 에우트로피아는 각각 명문가 출신의 원로원 의원으로 집정관 신분이던 옵타누스 및 네포티아누스와 결혼했다. 막내 여동생 콘스탄티아는 영광과 불행이 뒤섞인 삶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녀는 처형당한 리키니우스 황제의 미망인이었다. 그녀의 간청으로 목숨을 구한 무고한 아들은 한때나마 자신의 생명과 부황제라는 칭호, 나아가 장래 황제의 지위를 계승할 수 있으리라는 불안정한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플라비우스 집안의 여자들과 친척들을 제외하고도, 오늘날의 궁정 용어로 표현하자면 황족이라 불리는 남자만도 열 명 내지 열두 명이 있었는데, 이들은 출생 순서에 따라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뒤를 잇든지 아니면 황제를 보좌할 운명이었다. 그러나 30년도 채 못 되는 시간이 흐른 뒤에 이 번창하던 가문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콘스탄티우스와 율리아누스 단 두 사람뿐이었다. 즉 이들 두 사람만이 비극 시인들이 탄식했던 펠롭스와 카드무스의 저주받은 생애와 유사한 연이은 죄악과 재난의 한복판에서 목숨을 부지한 것이다.(59∼6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나의 생각)

 

펠롭스 가문의 저주는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아가멤논 3부작>에 잘 나타나 있다.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온 아가멤논은 부정한 아내에게 살해되고, 졸지에 아버지를 잃은 오레스테스와 엘렉트라는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해 어머니를 살해한다. 이 모든 비극의 연쇄는 펠롭스 가문의 오랜 저주 때문이었다.

 

카드무스는 테바이의 설립자인데, 그의 손자뻘인 랍다코스는 저 유명한 오이디푸스의 할아버지였다. 그의 아들 라이오스는 이오카스테와 결혼해서 오이디푸스를 낳았고, 신탁의 저주를 피해 어릴 때 일찌감치 왕가에서 버림받았던 오이디푸스는 떠돌이로 세상을 전전하다가 우연히 스핑크스의 비밀을 푼 덕에 테바이의 왕이 된다. 그는 왕비 이오카스테와 결혼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였고, 그가 떠돌이 시절에 삼거리에서 우연히 저지른 살인 사건의 피해자는 자신의 아버지였다. 

 

에드워드 기번은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문의 얽히고 설킨 '혈연 살해 사건'들을 이처럼 유명한 고대 비극의 주인공들에 빗댐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역사적인 사실 또한 신화와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음을 새삼 상기시킨다. 

 

 

에드워드 기번은 콘스탄티누스 가문에 대해 어느 한 인물이라도 빠짐없이 세세히 분석했던 탓에 이 정도로 너무 간략하게(?) 소개하는 게 도리어 마뜩찮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은 이토록 한꺼번에 수많은 인물들을 소개받으면 누가 누구인지 갈피를 잡기 힘들 지도 모른다. 그래서 (비록 품이 많이 들긴 하지만) 도표로 정리해 봤다. 그림이 글보다는 훨씬 더 명쾌하다는 사실은 누구나 인정할 테니 말이다.

 

 

위의 그림 하나만 살펴보더라도 '콘스탄티누스 가문'이 얼마나 많은 황제들을 배출했는지 알 수 있다. 정식 황제로 등극했던 인물만 따지더라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장인과 매형까지 포함하면) 무려 여덟 명이다.  여기서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은 단연 콘스탄티누스 대제이지만, 재위 기간이 25년에 가까웠던 그의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 황제나 조카인 율리아누스 황제의 행적도 각별히 주목할 만하다.

 

<성녀 헬레나> 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헬레나> (출처 : 위키 백과)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낳은 모후. 그녀와 관련해서는 수많은 전설과 전승이 존재한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는 로마를 재통일할 때 로마 군대의 병력을 둘로 나누어 최후의 경쟁자인 리키니우스 황제를 쓰러뜨린다. 그때 난공불락의 적군 함대가 버티던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돌파한 건 자신의 첫째 아들인 청년 크리스푸스였다. 그토록 용맹하고 탁월한 무공을 발휘한 아들을 두고 콘스탄티누스는 점차 자신의 경쟁자로 의식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첫째 아들을 무참하게 살해한다. 대중적인 인기가 하루가 다르게 그에게 쏟아지는 걸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동방 국민들은 콘스탄티누스와 크리스푸스 두 사람, 즉 모든 덕성을 겸비한 황제와 신의 총아이자 부황을 꼭 빼닮은 훌륭한 아들이 세계를 함께 제압하여 다스리게 되었다며 열렬하게 환호했다. 노년인 황제가 차지하기는 어려웠을 대중적인 인기가 젊은 크리스푸스에게 쏟아졌다. 크리스푸스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었으며 실제로 궁정과 군대, 그리고 국민의 애정을 한몸에 받았다. 국민들은 황제의 노련한 통치를 마지못해 인정하거나 때로는 불만과 불평으로 거부하기도 했다. 반면에 그들은 황태자의 막 피어나는 미덕에 대해서는 국가의 경사일 뿐 아니라 개인의 경사라고 기뻐하며 무한한 희망을 나타냈다.(6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이자 황제로서 자신과 대등한 자의 존재를 용납할 수 없없다. 그리고 아들의 충족되지 않은 야심에서 비롯될지도 모를 해악을 미연에 방지하기로 결심했다. 눈부신 치적으로 빛나는 황제의 또다른 이면에는 이토록 권력 앞에서 한없이 비정하고 잔인한 모습이 숨어 있었다. 기번의 빈틈없는 역사 서술은 늘 균형이 잡혀 있는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치적은 그리스도교 옹호자들의 붓에 의해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많았다고 판단한다.

 

 

마침내 콘스탄티누스 황제 집권 20주년을 경축하는 행사가 열리게 되었다. 황제는 궁전을 니코메디아에서 로마로 옮겼고, 그곳에서는 황제를 맞이하는 준비가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모든 사람들의 언행이 로마 국민들의 행복을 표현하는 듯했고, 축제라는 위선의 베일이 한동안 복수와 살인 계획을 덮어 주고 있었다. 그러나 축제가 한창일 때 불운한 크리스푸스는 황제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 황제는 아버지로서의 다정함도 저버렸을 뿐만 아니라 재판자로서의 공정성마저 잃어 버렸다. 심문은 간결하고도 비밀스럽게 이루어졌다. 젊은 황태자의 최후를 로마 시민의 눈에서 감추는 것이 좋다는 생각에서, 황태자는 엄중한 감시하에 이스트리아의 폴라로 압송되었고, 처형되었는지 아니면 그보다는 너그럽게 독살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순식간에 처형되었다. 한편 사랑스러운 젊은이 리키니우스 부황제도 크리스푸스의 죽음에 휘말리게 되었다. 아들의 목숨을 애원하는 누이동생의 기도와 눈물도 완고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의심을 없애 주지는 못했다. 리키니우스의 죄목이라면 그의 신분밖에 없었다. 그가 처형되자 이를 견디지 못한 어머니도 오래 살지 못했다. 이들의 불운한 이야기와 그들 죄의 성질과 증거, 재판의 형식, 처형 상황 등은 비밀의 어둠 속에 묻혀 버렸다. 황제의 영웅적인 미덕과 신앙을 찬양하는 작품을 남긴 궁정 주교조차도 이 비극적인 사건들에 대해서는 신중한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처럼 여론을 무시하는 거만한 행동을 함으로써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성에도 씻을 수 없는 오점이 남게 되었는데, 이는 현대의 대제국 군주가 취한 매우 다른 태도를 상기시킨다. (…)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푸스의 결백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의 그리스인들은 그리스 정교의 창시자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을 기리면서, 아울러 인간의 보편적 정서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이 존속 살인죄를 가볍게 보이도록 애썼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변론하고 있다. 즉 이미 고통스러워하고 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자신이 허위 고발을 믿고 경솔하게도 치명적인 과오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온 세상에 널리 자신이 후회하고 있음을 공표했다는 것이다. 또 40일 동안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목욕과 모든 일상의 안락을 멀리 하고, 후세에 교훈을 남기기 위해 크리스푸스의 황금 조각상을 세우고

 

내가 부당하게 처형한 나의 아들을 위하여

 

라는 유명한 비문을 새겨 넣었다. 매우 교훈적이고 흥미로운 일화이지만 좀 더 권위 있는 자료가 뒷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좀 더 오래 되고 신뢰성 높은 작가들에 따르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후회는 오히려 또 다른 유혈과 복수 행위를 통해서만 표명되었다. 다시 말해 무고한 아들을 살해한 보상으로 무고죄를 저지른 아내를 처형한 것이었다. 즉 크리스푸스의 불운은 계모 파우스타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는데, 그녀는 무자비한 증오 때문인지 또는 좌절된 사랑 때문인지 콘스탄티누스의 궁정에서 히폴리투스와 파이드라의 고대 비극을 재현한 것이다.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 파우스타는 미노스의 딸과 마찬가지로, 의붓아들 크리스푸스가 아버지의 아내인 자신을 범하여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르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서, 질투심에 불타는 황제가 자신이 낳은 자식들의 가장 무서운 경쟁자인 젊은 황태자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기 쉬운 상황을 만든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노모인 헬레나는 손자 크리스푸스가 젊은 나이에 죽은 것을 몹시 슬퍼했고 이에 복수했다. 즉 얼마 지나지 않아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알 수 없으나 파우스타가 황실 마구간 소속의 노예와 내통을 했다는 폭로가 나왔다. 그녀는 즉각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이 선고되었는데, 간통을 저지른 이 여인은 온도를 엄청나게 높인 욕탕에서 증기에 질식사했다고 한다. (…) 로마 국민들은 황제의 아들과 조카의 죽음, 그리고 이들의 죽음에 연루된 수많은 무고한 명문가 출신 친구들의 처형에 불만을 품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번성기였지만 동시에 피비린내 나는 시대였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네로 황제의 통치기를 비교하는 풍자시를 궁정 정문에 붙였다는 사실은 당시 어떤 소문이 퍼져 있었는지를 알려주기에 충분할 것이다.((63∼6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나의 생각)

 

계모가 의붓아들에게 반해 벌어지는 비극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힙폴뤼토스』에 담겨 있다. 파이드라는 크레테 왕 미노스와 왕비 파시파에의 딸이자 아리아드네와 자매 사이였고, 테세우스의 두 번째 아내였다. 파이드라는 남편의 전처 소생 아들에게 반했지만 자신의 구애가 끝내 실패하자 도리어 힙폴뤼토스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편지를 남기고 자결한다. 이 유명한 고대의 신화를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살해 사건에 끌어들임으로써 독자들은 단번에 이 사건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자칫 지루하고 따분해지기 쉬운 고대의 역사가 거장의 손길 덕분에 순식간에 문학과 예술과 부드럽게 뒤섞이는 셈이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즉위 30주년이나 되는 성대한 축전이 열린 이후 열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병사였다. 예순네 살로 역사에 길이 남을 자신의 삶을 마감한 직후의 풍경 또한 역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그의 죽음을 비탄하거나 애도를 표하는 행사들이 로마 전역에 가득찼기 때문이었다. 그의 위대함을 상징하는 자의와 왕관으로 꾸며진 시신은 콘스탄티노플의 궁전 안에 화려하게 장식된 방의 황금 침상에 안치되었다. 그가 죽고 나서도 매일 정해진 시각에 민정, 군사, 황실에 관련된 여러 장관들이 무릎을 꿇고 엄숙한 표정으로 죽은 황제에게 다가가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정중하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이런 '연극 같은 절차'는 얼마 동안 지속되었고, 아첨꾼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야말로 신의 특별한 은혜 때문에 죽은 뒤에도 로마를 통치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고 한다.

 

그러나 대제의 죽음은 곧바로 '궁정의 파벌 싸움'으로 이어졌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직계인 3형제와 방계인 두 조카(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들의 운명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의 궁궐 도착 이후에 이내 판가름났다.

 

본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유언에서 자신의 장례 문제를 신앙심 깊은 콘스탄티우스에게 일임했다. 그는 인접한 동방을 통치하고 있어서 이탈리아와 갈리아 등 먼 곳에 있는 형제들보다 빨리 달려올 수 있었다. 콘스탄티노플 궁정을 장악하자마자 그가 시행한 첫 번째 조치는 인척들의 안전을 보장하겠다는 확실한 약속을 함으로써 그들의 불안을 해소시켜 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한 일은 경솔하게 행한 이 약속의 의무로부터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벗어나기 위한 그럴듯한 핑계를 찾는 일이었다. 잔인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교묘한 술책을 동원하였다. 가장 신앙심 깊은 인물이 명백한 위조 문서를 진짜라고 인정했던 것이다. 콘스탄티우스는 니코메디아의 주교에게 부황의 친필 유언장임이 확인된 한 권의 중요한 두루마리를 전달받았다. 이 유언장에서 죽은 황제는 동생이 자신을 독살한 것 같다는 의혹을 표명하면서 아들들에게 복수해 달라고 부탁하고 또한 범죄자를 처벌하여 안전을 도모하라고 충고하였다. 이처럼 믿을 수 없는 비난에 대해 불운한 황제들이 생명과 명예를 지키고자 갖가지 이유를 들어 변명해 보았지만, 즉각적으로 적들에게 판결을 내려 사형 집행을 선언한 군대의 격앙된 목소리 앞에서 침묵당하고 말았다. 무차별적인 학살로 법률 준수의 정신과 절차상의 형식은 모조리 묵살되었다. 학살당한 사람들은 콘스탄티우스의 두 숙부인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 일곱 명의 사촌, 부황의 누이와 결혼했던 귀족 옵타투스, 막대한 권력과 재산으로 재위를 노렸던 총독 아블라비우스 등이었다. 피비린내 나는 이 무시무시한 학살을 더욱 끔찍하게 만든 것은, 콘스탄티우스는 율리우스 숙부의 딸과 결혼했으며 자신의 여동생은 사촌 한니발리아누스와 결혼한 상태였다는 점이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국민들의 정서는 무시한 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정략적으로 황실 가문들을 연결시킨 것으로 가문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이번 일로 국민들 앞에 황실 사람들은 부부간의 애정에도 냉담하며, 혈족 관계나 무고한 젊은이들의 애원에조차 무관심하다는 점을 확인시켜주는 결과만 가져왔다. 황실 가문의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두 어린 아들인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뿐이었다. 어느 정도 학살자들의 분노도 가라앉아 진정 국면에 들어섰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형제들이 없는 사이 발생한 이 일로 모든 죄와 비난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언젠가 그는 자신이 미숙한 젊은이로서 고관들의 거짓 충언과 군부의 맹렬한 폭력에 휩싸여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며 언뜻 일시적인 회한을 드러낸 적이 있다고 한다.(77∼7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 기번의 주석

 

율리아누스는 자신이 간신이 모면했던 이 학살이 전적으로 콘스탄티우스의 책임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 그의 주장은 매우 판이한 이유에서이긴 하지만 그 못지않은 콘스탄티우스의 적이었던 아타나시우스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조시무스도 이와 동일한 고발에 동참하고 있다.

 

(나의 생각) 

 

콘스탄티우스는 부황(父皇)이었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승인했던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그는 줄곧 '삼위일체설'을 부정했던 아리우스파 진영을 옹호하는 쪽이었고, 그 반대파인 아타나시우스파는 끈질기게 박해했다. 『로마 제국 쇠망사』 제2권에서는 기독교를 최초로 공인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치적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 정통파와 뿌리 깊은 악연을 맺었던 그의 후계자들(콘스탄티우스 황제, 율리아누스 황제) 사이에 얽힌 초기 기독교의 역사를 매우 상세히 다루고 있어서 흥미롭다. 그저 이름만 들었던 아리우스와 아타나시우스가 로마 황제들과의 싸움에서 실제로 어떤 활약을 보였는지를 살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생각하면 아직도 로마의 한복판에 우뚝 서 있는 그의 화려한 개선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기번의 설명을 듣고 나면 우리는 이 개선문에 대해서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가 엄청난 용맹을 발휘하여 막센티우스를 무찌르고 위대한 승리를 쟁취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명예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개선문에는 도리어 당대 예술의 쇠퇴를 보여주는 우울한 증거들이 여럿 발견된다는 것이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는 312년 10월 28일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와 막센티우스가  로마 근교의 밀비우스 다리에서 벌인 전투를 말한다. 이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승리하고 이후 사두정치체제를 끝내고 로마 제국의 단독 황제로 집권하는 길을 걷게 되고 상대편인 막센티우스는 결국 전사하였다.

 

기독교 전설로 이 다리의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라바룸을 처음 사용하여 기독교 신의 도움으로 이겼다는 전설이 있다. 이 전설은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는데 그 내용은 밀비우스 다리 전투의 전날 밤 콘스탄티누스의 꿈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내일의 전투에서 이긴다고 하였고 기독교도를 나타내는 문자 가운데 X와 P를 합친 문자 라바룸을 병사들의 방패에 그리게 하라고 조언하였다고 한다. (출처:네이버 백과)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출처 : 위키 백과)

 

 

지금도 남아 있는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은 당대 예술이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 주는 우울한 증거인 동시에 인간의 허영심이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보여 주는 보기 드문 증거이다. 이미 제국의 수도에서는 그런 기념 건조물을 꾸밀 만한 실력을 지닌 조각가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고인의 명성이나 그에 대한 예의 따위는 무시한 채 트라야누스 황제의 개선문의 우아한 조각품들을 마구 떼어다가 사용했던 것이다. 시대와 인물, 공적과 지위의 차이는 완전히 무시되어서, 유프라테스 강 너머로는 진군해 본 적이 없는 군주의 발밑에 파르티아인 포로들이 꿇어 엎드려 있다. 또 콘스탄티누스의 전승 기념비 위에 트라야누스의 두상이 올려져 있다는 사실은 호기심 강한 골동품 애호가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는 사실이다. 게다가 옛 조각들 사이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끼워 넣은 새로운 장식품들은 매우 조잡하고 서투른 솜씨로 만든 것이었다.(51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1권』, <14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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