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이 오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가르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전하의 성품은 덕의 원리에 따라 고양될 것이며, 어둡고 어지러운 세상에서 질서를 바로잡는 가장 숭고한 본보기가 되실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전하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에게 위대한 행복을 안겨줄 수 있습니다. 지금 국민들은 왕권의 강요로 어쩔 수 없이 복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위와 같이 하신다면 국민들은 전하의 정의와 사랑에 감동해, 마음에서 우러나는 기쁨으로써 전하를 아버지처럼 우러르게 될 것입니다."

 

 - 플루타르코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 , <디온 편>

 

 * * *

 

 

『로마 제국 쇠망사』 제2권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대부분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문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콘스탄티누스만 하더라도 무려 31년 동안 로마 제국을 다스렸던 데다가, 그의 둘째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황제 또한 '가문의 대학살' 이후 탄탄하게 구축된 자신의 통치 기반 위에서 무려 24년 동안 황제의 지위를 누렸고, 이 두 황제의 치세 동안 그리스도교를 둘러싸고 많은 일들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황제가 기독교를 옹호한 방식은 적잖은 차이가 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일찌감치 밀라노 칙령을 통해 '그리스도교를 믿을 자유'를 사상 최초로 공인했고, 차츰 그리스도교를 옹호하는 종교 정책을 꾸준히 확산시켰던 반면에, 콘스탄티우스는 기독교 가운데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내몰린) 아리우스파를 옹호하는 반면 정통파인 아타나시우스파는 끈질기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이 두 황제의 기나긴 치세가 막을 내리자 그들의 뒤를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율리아누스였다. 전임 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하고 나자 콘스탄티누스 가문에 남아 있는 혈육이라고는 오직 율리아누스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촌 형인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로마의 동쪽을 책임지고 있는 동안 그가 일찌감치 부황제로서 로마의 서쪽을 떠맡아 이미 훌륭한 무공과 명성을 쌓은 덕분이기도 했다.

 

에드워드 기번은 특이하게도 이 인물에 대해서는 지면을 조금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재위기간이 불과 2년을 넘지 못했고, 황제로 부임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페르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고작 32세에 전사하고 만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로마 제국 쇠망사』 전체를 둘러보더라도 그 어떤 인물에 못지 않게 자못 감동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그에 대해 유난히 공을 들여 언급하는 이유를 콕 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나의 판단으로는 그가 좀 더 오래도록 살았더라면 인류 역사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나은 방향으로 뒤바뀔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은 느낌이 든다. 아무튼 그에 얽힌 몇몇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해 볼까 한다.(그에 대한 이야기가 『로마 제국 쇠망사』 제2권의 곳곳에 골고루 담겨 있는 데다가, 그의 행적 가운데 여러 대목들이 눈길을 끌기 때문에 이 인물의 활약상을 짧게 요약하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그는 할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가 두 번째 부인을 맞아 생산한 3남 3녀의 자식들 가운데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331년에 태어난 율리아누스는 큰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사망(337년)할 때만 하더라도 겨우 여섯 살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는 콘스탄티누스가 죽고 사촌 형님인 콘스탄티우스가 황제로 즉위할 무렵에 자행된 저 끔찍한 '대학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이복형인 갈루스도 간신히 죽음을 면했는데 그는 당시 열두 살이었다. 두 형제는 콘스탄티우스 황제를 제외하고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황족이었다.

 

 

 

그는 가문의 대학살이 진행되는 내내 목숨이 간당간당했을 뿐만 아니라, 용케 살아남은 이후에도 늘 불안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었다. 이복형인 갈루스와 그는 어릴 때부터 유폐되다시피 지내는 동안 언제나 특별관리되었으며 성년으로 자라나자 마지 못해 콘스탄티우스 황제에 의해 '부황제'로 잠깐 등용되었을 뿐이다. 아무런 준비도 없다가 갑작스럽게 왕위에 오른 갈루스는 재능도 적응력도 유연성도 없었고 침울하고 난폭한 성격 때문에 이내 콘스탄티우스의 노여움을 샀고, 끝내 살해되고 만다. 갈루스는 황제의 시종장으로부터 범죄 행위에 대한 심문을 받을 때 모든 것이 황후인 콘스탄티나가 사주했다고 변명했고(자신의 잘못을 배우자 탓으로 돌리는 못난이는 로마에도 있었다!), 이 때문에 더욱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노여움을 샀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조카이자 율리아누스의 형은 결국 흉악범처럼 두 손이 등 뒤로 묶인 채 감옥 안에서 목이 잘렸다. 

 

 

이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 황제의 많은 자손들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황제를 제외하고는 율리아누스 한 명뿐이었다. 황제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는 불운 때문에 율리아누스도 갈루스 몰락의 소용돌이 속으로 또다시 휩쓸려 들어갔다. 평화로운 이오니아 지방에서 은거 생활 중이던 율리아누스는 엄중한 경호를 받으며 밀라노의 궁정으로 호송되었다. 율리아누스는 그곳에서 7개월 이상을 날마다 그의 몰락한 가문의 친구나 지지자들의 죽음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 자신에게도 이와 같은 불명예스러운 죽음이 찾아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보내야 했다. (…)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수많은 역경을 겪으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강건함과 신중함이라는 미덕을 배웠다. (…) 율리아누스는 자신이 기적적으로 죽음을 모면한 것은 신의 가호 덕분이었다고 굳게 믿었다. 신들은 불경한 콘스탄티누스 가문에 응당 받아야 할 파멸을 선언했지만, 무고한 율리아누스만은 면제해 주었다는 것이다. 신들의 섭리가 이루어지도록 도와 준 가장 든든한 매개는 황후인 에우세비아였다.(11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는 황후의 중재 덕분에 밀라노에 소환된 후 황제를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거기서 자신의 입장이 받아들여졌다. 신하들이 '갈루스의 피'를 복수할 자를 살려두는 건 위험하다고 역설했으나 황후의 온정론이 그를 살렸다. 그 후에 그는 황제의 명령에 따라 유배지인 아테네로 거처를 옮겼다. 어려서부터 그리스의 언어와 풍습과 학문과 종교에 이끌렸던 율리아누스로서는 너무나도 기쁜 명예로운 유배지였다. 아카데메이아 동산에서 당대 철학자들과 교류하며 지낸 세월은 아마도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들이었음에 틀림없다.

 

내전의 상흔을 가까스로 수습했던 콘스탄티우스는 외적들의 침입에 또다시 시달리자 어쩔 수 없이 율리아누스를 부황제로 임명해서 갈리아 지방으로 파견한다. 부황제 임명에 대한 환관들의 집요한 반대가 있었지만 황제는 또다시 황후의 영향력에 굴복했고, 여동생인 헬레나를 그와 결혼시킨 다음 부황제 칭호를 내렸다. 부황제 즉위식이 열리던 날은 그의 스물다섯 번째 생일이었다. 즉위식을 마친 후 황제와 부황제가 같은 전차에 타고 궁정으로 귀환하는 동안, 율리아누스는 마음 속으로 자신이 가장 좋아한 호메로스의 시를 반복해서 암송했다고 한다. 행운과 두려움이 수시로 교차하는 자신의 운명을 대입시켜 볼 싯구들이 『일리아스』에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갈리아 속주 지방은 비옥한 영토 맛을 본 야만족 동맹군들이 온통 휘젓고 다니는 형편이었다. 통그르, 콜로뉴(오늘날의 쾰른), 트레브(오늘날의 트리어), 보름스, 슈파이어, 스트라스부르크를 비롯한 마흔다섯 개 도시와 그보다 훨씬 많은 마을과 촌락들이 야만족에게 약탈당해서 대부분 잿더미로 변한 상태였다. 로마 군단은 급여나 보급품도 받지 못했고, 전력이나 기강도 형편없이 약해져 있었다.

 

(4세기 경 갈리아 지방의 국경 지도)

 

이런 비관적인 상황에서 경험도 없는 젊은이가 갈리아 속주를 구원하고 통치하도록, 혹은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제국의 위대성이라는 공허한 이미지를 과시하도록 임명된 것이다. 은거하면서 현학적인 교육만 받아 온 율리아누스는 무기보다는 책과, 산 자보다는 죽은 자들과 더 가까웠으며, 전쟁이나 통치의 실제적인 기술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그는 이제 새롭게 배워야만 하는 군사 훈련을 어색하게 반복하면서 한쉼을 쉬며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오, 플라톤이여, 플라톤이여, 철학자에게 이 무슨 고역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실무자라면 경멸해 마지 않을 이런 사색적인 철학은 율리아누스의 정신을 고귀한 교훈과 빛나는 모범들로 채워 주었고, 미덕에 대한 사랑, 명예에 대한 욕망, 죽음에 대한 경멸 등의 덕목을 그에게 고취시켜 주었다. 아카데메이아에서 배운 절제의 습관은 군대의 엄격한 규율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천성적으로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침식도 절도 있게 조절했다. 율리아누스는 식탁에 올라오는 산해진미들을 경멸하며 물리치고는 말단 병사들에게 제공되는 거칠고 평범한 식사로 만족했다.(135∼136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전쟁 경험이 거의 없었던 율리아누스의 명성을 빛나게 만든 첫 전투는 스트라스부르크 전투였다.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누스의 용맹과 기백으로 이끈 승리였기 때문이다. 율리아누스는 이 눈부신 승리의 전리품인 알레만니 왕 크노도마르를 공손하게 황제에게 진상했다.알레만니족을 몰아낸 율리아누스는 잇따라 프랑크족을 몰아냈고, 라인강 너머로도 세 차례나 진군했다. 특히 세번째 원정에서는 무려 2만 명의 로마인 포로들을 야만족들의 사슬에서 구했는데, 이 전쟁에서 거둔 승리를 기번은 예전의 포에니 전쟁이나 킴브리 전쟁의 승리에 견줄 만큼 높이 평가했다.

 

갈리아의 여러 도시를 복구한 율리아누스는 동계 막사에서 지내는 여유로운 시간 동안에는 민정에 전념하여 장군보다는 행정관의 업무에 더 큰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때의 흥미로운 일화 한가지는 이렇다.

 

전시냐 평시냐에 관계없이 국가의 통치에서 군주의 이해는 대부분의 경우 일반 국민들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자신이 피폐해지고 억압받는 나라에서 착취한 공물의 일부를 율리아누스의 선정으로 빼앗겼다고 여기며 손해를 많이 보았다고 생각했다. 부황제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던 율리아누스로서는 하급 대리인들의 건방진 약탈 행위를 시정하고 그들의 부패를 파헤친 후 보다 공평하고 관대한 조세 체계를 도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재정 업무는 갈리아의 민정 통독인 플로렌티우스에게 완전히 맡겨져 있었다. 이 민정 총독은 동정심이나 자비심을 모르는 소심한 독재자로서, 자신에 대한 반대는 아무리 정당하고 온건한 것이라고 해도 불평불만을 늘어놓는 오만불손한 자였다. 율리아누스는 이런 경우를 당하고 오히려 자신의 허약함을 탓해야 했다. 율리아누스는 임시 조세를 징수하려는 명령서에 서명해 달라는 민정 총독의 요청을 분연히 거절한 적이 있는데, 이 거절을 정당화하기 위해 쓴 국민들의 비참상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가 콘스탄티우스의 궁정을 크게 화나게 했다. 율리아누스는 가까운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때의 심정을 허심탄회하게 토로했는데 이 편지는 지금도 읽어볼 수 있다. 그는 우선 자신이 취한 생동을 설명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제자가 어떻게 내가 한 행동 이외의 행동을 할 수 있겠나? 어떻게 내게 맡겨진 불행한 국민들을 저버릴 수 있겠나? 이 무자비한 도적떼들의 거듭된 약탈에서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나의 임무가 아니었던가? 자기 임지를 버린 지휘관은 처형당하고 매장의 영예를 누릴 권리조차 박탈당한다. 위기 상황을 맞아 내가 맡은 훨씬 막중하고 신성한 의무를 게을리한다면 무슨 명목으로 내가 그에게 처형을 명할 수 있단 말인가? 신께서 나를 이렇게 높은 지위에 올려 주셨으니, 그의 섭리로 나를 이끌고 도와 주실 것이다. 만약 내가 처벌을 받게 된다면 순수하고 공정한 양심의 증거라고 생각하며 위안으로 삼겠다. (…) 그들이 나를 파면하려고 하면 나는 아무 불만 없이 따르겠다. 오랫동안 죄를 눈감아 주며 지위를 누리느니 짧은 기간이나마 선을 행할 수 있는 기회를 잘 활용하는 것이 낫지 않겠나?(148∼14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로마인들이 환관들과 사제들의 폭정 아래서 고통받고 있을 동안에도 율리아누스에 대한 찬사는 제국의 방방곡곡으로 계속 퍼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부상에 반감을 지닌 궁정의 총신들에게는 그러한 소문들이 귀에 거슬릴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민중의 벗이란 곧 궁정의 적을 뜻할 따름이었다.

 

어느새 율리아누스를 견제하기 위한 교묘한 계획들이 궁정의 대신들에 의해 짜여졌다. 그들은 율리아누스의 신변과 위엄을 지켜주는 충성스러운 군대를 소환하여 그를 무장 해제 시킨 다음, 라인 강변에서 가장 사나운 게르만족을 물리쳤던 이들 강인한 정예 부대를 멀리 페르시아 군주와의 전장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파리의 겨울 병영에서 선정을 베풀면서 바쁜 시간을 보내던 중에 황제의 명령을 받은 율리아누스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황제의 명령에 순순히 따른다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애정으로 보살펴야 할 부하들의 파멸까지 동의하는 셈이었고, 대놓고 거부한다면 반역 행위나 전쟁 선포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황제의 무자비한 질투심과 음흉하고 단호한 명령의 성격상, 그가 정당하게 변명하거나 솔직하게 해명할 여지는 없었다.

 

고통스러운 갈등 끝에 율리아누스는 어쩔 수 없이 '군주에 대한 복종'을 선택했다. 곧바로 황제의 칙령을 실행에 옮기는 데 필요한 명령들을 선포하고 군대의 일부를 알프스로 출정시키고 일부 병력들은 집결지로 이동시켰다. 파리에 운집한 병사들을 격려하고 훈계하기 위해 도시의 성문 앞 평원에 세워진 단상에 오른 그는 '강력하고 관대한 군주에게 봉사하는 영광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격려와 함께 황제의 명이니만큼 지체없이 기쁘게 복종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병사들은 고집스럽게 침묵으로 버텼다. 막사로 물러난 병사들은 고달픈 운명을 한탄하기 바빴다.

 

그러던 끝에 그들은 대담하게도 떠나지 않아도 될 유일한 방책을 논의하여 뜻을 모았다. 이미 극에 달한 분노가 이 음모를 은밀하게 부채질 했고, 이유 있는 불만은 격정에 의해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술까지 여기에 불을 붙이니, 출발하기 전날 밤 군대는 통제 불능의 혼돈 상태로 빠져들어 갔다. 깊은 밤중에 흥분한 병사들은 검과 술잔, 횃불을 손에 쥐고 밖으로 몰려나와 부황제의 궁을 에워싸고, 닥쳐올 위험은 아랑곳없이 되돌릴 수 없는 치명적인 한 마디 말, '율리아누스 황제 만세!'를 소리 높이 외쳤다. (…) 동이 틀 무렵이 되자, 이러한 저항에 더욱 흥분한 병사들은 급기야는 힘으로 궁 안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들은 자신들이 선택한 율리아누스를 정중하지만 강압적으로 끌어다가, 검을 빼어들고 파리 시내를 통과해 호위해 와서는 단상 위에 올려놓고 환호성으로 그들의 황제를 추대했다. 율리아누스는 군주에 대한 충성심뿐 아니라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라도 병사들의 대역 무도한 기도에 저항해야만 했다. (…) 그러나 이미 자신들이 중죄를 저질렀음을 잘 알고 있는 병사들은 황제의 관용보다는 차라리 율리아누스의 후의에 기대기를 택했다. 그들의 흥분은 서서히 초조함으로, 초조함은 격분으로 바뀌었다. 마음을 바꿀 의사가 전혀 없는 율리아누스는 그들의 탄원과 질책, 협박에도 꿋꿋이 버티었으나, 살아남고 싶다면 왕좌에 오르는 데 동의하는 길밖에 없다는 거듭된 주장에 결국 굽히고 말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전군의 갈채와 환호를 받으며 방패 위에 들어올려져, 우선은 왕관 대신 즉석에서 바친 화려한 군복 기장을 받고 적당한 하사금을 내리겠다는 약속으로 예식을 마무리지었다.(271∼27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위키 백과에서 율리아누스를 검색해 보면 그 당시의 정황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그림을 볼 수 있다.

 

 

)

<파리에서 황제로 추대되는 율리아누스, 360년 2월> (출처:위키 백과)

 

하루 아침에 부하들에게 떠밀리다시피 황제에 오른 율리아누스에게는 '콘스탄티우스 황제'와의 우호적인 협상이라는 지난한 과제가 맡겨졌다. 그는 콘스탄티우스가 공정한 조약에 서명한다면 갈리아 속주를 평화롭게 차지하는 것으로 만족하겟다는 서신을 작성하여 특사로 임명한 인물들에게 맡겼다. 율리아누스의 사절들은 친서의 낭독을 듣는 콘스탄티우스의 무성의한 태도를 보고 분노와 모욕감에 몸을 떨었다. 더군다나 둘 사이를 능히 중재해 줄 만한 인물이었던 헬레나(콘스탄티우스의 여동생이자 율리아누스의 아내)와 에우세비아 황후마저도 이때는 이미 죽고 난 뒤였다. 협상은 지지부진했고 마침내 전쟁이 선포되었다.

 

협상이 결렬되는 과정에서 콘스탄티우스의 친서가 율리아누스 진영의 군중들에게 공개 낭독된 일이 있었다. 콘스탄티우스의 친서가 얼마나 오만방자했는지는 다음 대목으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율리아누스는 아첨조르 한껏 경의를 표하면서, 그를 즉위시킨 자들의 동의를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버리겠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소극적인 제안은 단숨에 묵살되었다. "율리아누스 황제시여, 그대가 구하신 군대와 백성과 공화국의 권위로 계속 집권하소서." 라는 외침이 광장 구석구석에서 일제히 천둥처럼 울려 퍼지자 콘스탄티우스의 사절은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편지의 일부는 나중에 낭독되었는데, 그것은 황제가 의지할 데 없는 고아였던 율리아누스를 유년 시절부터 돌보면서 그토록 정성껏 애정으로 교육해 주고 부황제의 특권까지 내려 주었는데 배은망덕하게도 은혜를 저버렸다고 책망하는 내용이었다.

 

고아라고!

 

율리아누스가 낭독 중간에 분노를 토했다.

 

내 가족을 암살한 장본인이 내가 고아로 남겨졌다고 말하다니? 내가 오랫동안 잊으려 애써 왔던 피해에 복수하도록 만든 건 바로 그자란 말이다! (278∼279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는 마침내 군대를 몰아 동쪽으로 빠르게 진군했고, 지나는 곳마다 로마 시민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콘스탄티우스는 페르시아 전쟁 중 샤푸르의 퇴각으로 한숨 돌리고 있던 중 율리아누스의 행군과 빠른 진전을 알리는 첩보를 받았다. 병력들과 무기와 군수품들은 빠르게 내전용으로 전환되었다. 머잖아 두 황제 사이의 참혹한 내전이 권력의 향배를 결정지을 터였으나, 급작스럽게 콘스탄티우스가 사망함으로써 로마 제국은 내전의 참화를 피할 수 있었다. 황제는 극도의 정신적 흥분 상태에서 생긴 것으로 보이는 가벼운 열병에 걸렸고 결국 타르수스에서 12마일 정도 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숨을 거뒀다. 45년간의 삶과 24년간의 통치가 거기서 마감된 셈이었다.

 

자만심과 나약함, 미신적인 사고와 잔인함으로 가득 찬 그의 성품은 앞서 기술된 내정과 교회 정책에도 잘 드러나 있다. 그는 오랜 기간 권력을 휘둘렀으므로 동시대인들이 보기에는 중요한 인물이었겠지만, 개인의 가치만이 주목의 대상이 되는 후세인의 눈으로 본다면, 이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아들은 아버지의 능력은 이어받지 못하고 결점만 이어받은 자라는 평가밖에는 받지 못할 것 같다. 콘스탄티우스는 사망하기 전 후계자로 율리아누스를 지명했다고 전해진다.(28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이리하여 율리아누스는 30세의 나이에 명실상부한 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되었다. 그는 철학자로서의 은둔 생활을 더 좋아했을 수도 있었지만, 고귀한 출생과 운명의 장난으로 그런 삶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는 아마도 아카데메이아의 숲에 파묻혀 아테네 시민들과 사교를 즐기는 삶을 진정으로 더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좋든 싫든 콘스탄티우스의 행위에 따라 일신의 명예를 황제의 지위에 따른 위험에 내맡기지 않을 수 없었다. 군주의 자리에 오르는 그의 마음 자세는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율리아누스는 무리를 다스리는 일은 항상 더 우월한 종족에게 맡겨져야 하듯이, 국가를 통치하는 행위는 신과 맞먹는 권능을 요한다는 그의 스승 플라톤의 말을 두려운 마음으로 되새겼다. 이 원칙으로부터 그는 통치하고자 하는 인간은 무릇 신성이 갖는 완전무결성을 지향하여 자신의 영혼에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면을 정화해야 할 뿐 아니라, 탐욕을 억제하며 지력을 기르고 열정을 다스림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의 생생한 비유에 따르자면 반드시 폭군의 자리로 끌어가게 될 야수적인 거친 본성을 억눌러야 한다는 결론을 이끌어 냈다. 콘스탄티우스의 죽음으로 확고해진 율리아누스의 왕좌는 이성과 미덕의 자리였다. 그는 명성을 멸시하고 쾌락을 거부했으며, 끊임없는 성실성으로 고귀한 직책의 의무를 다했다. 이 철학적인 황제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엄격한 법을 따르는데 자신들의 시간과 노력을 바쳐야 한다면, 그의 신하들 중 그가 지고 있는 무거운 왕관의 부담을 덜어 주겠다고 나설 만한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종종 황제의 검약한 식사를 함께 하곤 했던 그의 가장 가까운 벗 중 하나는 황제가 먹는 빈약하고 가벼운 음식 덕에 그의 심신이 저술가로서, 제사장으로서, 행정관으로서, 장군으로서, 황제로서의 갖가지 책무들을 힘들이지 않고 활기차게 수행할 수 있다고 말했다.(290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새로운 황제가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얼마나 부지런히 일했는가는 기번의 역사서에 충분히 실려 있으며, 그의 설명을 일일이 옮기기에는 이 공간이 너무 비좁다. 기번의 설명에 따르면, 그는 글씨를 쓰면서도 귀로는 경청하고 입으로는 구술하는 일을 동시에 할 수가 있었으며, 망설이거나 실수하는 일없이 여러 갈래의 생각의 흐름을 금세 좇아갈 수도 있었다고 한다. 또한 율리아누스는 애정 때문이라기보다는 정략적으로 했던 짧은 결혼 기간을 제외하고는 한 번도 여성과 동침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전임 황제들이 그토록 즐겼던 원형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기들도 그에게는 한낱 시간 낭비로만 생각되었다. 그가 취임 초기에 있었던 일화 하나만 살펴 보더라고 그가 얼마나 개혁적인 인물이었는지 금세 파악된다.

 

율리아누스의 통치 과제 중 가장 급선무였던 것 하나는 궁정의 개혁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에 들어온 후 얼마 안 되어 이발사를 부른 일이 있었다. 그러자 화려하게 차려입은 관리가 나타났다.

 

내가 부른 건 이발사지 세금 걷는 관리가 아니다.

 

황제는 짐짓 놀란 척 외쳤다. 그리고 그 관리의 급료에 대해 묻자, 많은 급료와 제법 되는 부수입을 제하고도 약 스무 명의 하인들과 그만한 수의 말들을 유지해 나갈 수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1000명의 이발사들, 1000명의 급사들, 1000명의 요리사들이 호화롭게 꾸며진 여러 부처에 배치되어 있었으며, 환관의 수는 여름날 창궐하는 벌레들만큼이나 많았다. 콘스탄티우스는 공적이나 미덕으로 신하들을 앞설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고 고작해야 의복, 식탁, 건물, 행차의 위압적인 화려함으로 자신을 과시하려 했다. 콘스탄티누스와 그 아들들이 세웠던 웅장한 궁정들은 다양한 색의 대리석과 엄청난 양의 황금 장식들로 꾸며졌다. 또한 먼 지역애서 가져온 새들, 먼 바다에서 잡아온 물고기, 제철이 아닌 과일들, 겨울에 핀 장미, 한여름의 눈 등 미각보다는 자만심만을 채워 줄 최고로 희귀한 진미들이 바쳐졌다. 궁정의 종복들에게 들어가는 비용은 군단에 들어가는 비용을 초과했으나, 이 돈 많이 드는 무리들 중 쓸모는 고사하고 하다못해 왕좌의 위용을 세우는 데에라도 도움이 될 인간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 율리아누스는 이 폐해를 모두 일소하여 골칫거리를 덜고 국민들의 불만을 하루빨리 진정시키고 싶었다. 국민들은 자신들이 근면하게 노동한 결실이 실제로 국가에 도움이 되기만 한다면 세금 부담도 덜 불만스럽게 받아들이는 법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업은 유익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리아누스는 그 과업을 수행하는 데 있어 지나치게 성급하고 가혹하게 진행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는 단 한 차례의 훈령으로 콘스탄티노플의 궁정을 허허발판으로 바꾸어 버렸으며 나이와 공로, 재산의 소유 정도, 황족에 대한 충성스러운 봉사 여부 등을 타당성 있게 따져 보거나 인정상의 예의를 두는 일도 없이 노예들과 하인들을 남김 없이 굴욕적으로 내쫓아 버렸다. 율리아누스의 기질이 이러했으니, 진정한 덕성은 양극단에 위치한 악덕의 중간에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격언에는 아랑곳하지도 않았다.(292∼29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새로운 황제가 전임 황제가 통치하는 동안에 켜켜이 쌓였던 적폐들을 어떻게 청산했는지, 어떤 경우에는 자비를 베풀었고, 어떤 경우에는 단호하게 단죄했는지를 일일이 설명하기 위해 너무 많은 문장들을 끌어올 필요는 없다. 다만 그가 배웠던 인문학적 소양들이 그 과정에서 어떻게 발휘되었는지는 다시금 짚어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콘스탄티우스가 원로원의 집회에 나가기를 피한 반면, 율리아누스는 원로원을 공화주의자로서의 신조와 웅변가로서의 재능을 과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장으로 여겼다. 그는 마치 웅변도장에서 하듯이 찬사와 비판, 권고 등 여러 가지 화법을 번갈아 가며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의 친구 리바니우스의 말에 따르면, 그는 호메로스의 연구를 통해 메넬라우스의 단순하고 간결한 화법, 겨울의 싸락눈처럼 쏟아져 나오는 네스토르의 달변, 오디세우스의 감상적이면서도 호소력 있는 웅변을 모방하는 법을 배웠다고 한다. 판관으로서의 직분이 황제로서의 직분과 충돌을 빚는 경우도 종종 있었으나, 율리아누스는 의무감에서뿐만이 아니라 재미있는 도락으로 이를 수행했다. 그래서 그는 민정 총독의 성실성과 통찰력을 신뢰하는 경우에도 종종 판관석에 배석하곤 했다. 예리한 통찰력을 지닌 그의 정신은 진실을 은폐하고 법을 왜곡하는 변호인들의 궤변을 찾아내 꺽는 데서 기쁨을 느꼈다.(302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는 설사 평민으로 태어났더라도 혼자 힘으로 능히 장군의 지위까지 올랐을 것이라고 기번은 그의 인물됨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율리아누스의 초상을 아주 꼼꼼하게, 작은 흠이라도 잡아낼 셈으로 살펴본다면, 전체 인물상이 완전무결함과 기품을 얻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는 충고도 잊지 않는다. 기번 특유의 날카롭고 재기 넘치는 예리한 평가를 조금 더 들어 보자.

 

그의 천재성은 카이사르의 것보다는 강렬함과 장엄함에서 좀 떨어지며, 아우구스투스의 완벽한 신중함도 갖추지 못했다. 덕행으로 평가하자면 트라야누스의 진지함과 자연스러움에는 미치지 못하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철학에 비하면 간결성과 일관성에서 떨어진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역경을 맞을 때는 굳은 의지로 견디어 냈고, 성공을 누릴 때는 중용의 태도를 견지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사후 120년이 지나서야, 로마인들은 오로지 자신의 의무를 실천하는 데에서 즐거움을 찾으며, 국민들의 고통을 덜어 주고 사기를 되살리고자 힘쓸 뿐 아니라, 뛰어난 인물에게 권한을 부여하고 덕 있는 자가 행복해지도록 노력하는 황제를 만날 수 있었다. 정치적으로 다른 당파, 심지어 종교적으로 다른 파벌조차도 전시에나 평화시에나 그의 우월한 천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배교자 율리아누스야말로 조국을 사랑하는 자이며 세계의 황제가 될 만한 자라고 탄식 섞인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30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의 종교에 대해서 얘기하자면 이야기가 너무나 길어질 게 뻔하다. 그러나 '배교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까지 찍혀 있는 이 황제를 이야기할 때 그의 종교관이나 종교 정책을 완전히 제쳐둘 수는 없다. 에드워드 기번은 자신의 역사서에서 그 부분을 매우 상세히 다룬다. <로마 제국 쇠망사> 제23장은 율리아누스의 종교(이교 숭배의 부활, 예수살렘 신전의 재건, 그리스도교도에 대한 교묘한 박해 등)에 대한 설명으로 가득 차 있다. 이 글에서는 기번의 개괄적인 설명을 인용하는 것으로 넘어가는 게 좋을 듯하다.

 

배교자라는 낙인은 율리아누스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으며, 그의 미덕을 훼손한 종교적 열정은 그의 과오를 실제 이상으로 과장해 놓았다. 무지와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가 제국 내의 종교적으로 다른 당파들을 동등하게 보호하려고 노력했으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칙령을 내린 시기부터 아타나시우스가 추방당한 시기까지 대중을 혼란에 빠뜨렸던 신학적 열광을 진정시킨 철학적인 군주였다고 묘사한다. 그러나 율리아누스의 실제 성격과 행동을 더 정확한 관점에서 본다면 호의적인 선입견은 사라지고, 결국 황제도 시대를 휩쓸었던 광풍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알게 된다. 다만 우리는 후세인으로서 그의 열렬한 찬미자들이 그린 율리아누스의 모습과 무자비한 적들이 그린 그의 모습을 비교해 보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305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율리아누스의 행적 가운데 가장 눈길을 끄는 대목은 단연 페르시아 원정이었다. 그는 게르만 전쟁의 성공을 통해 얻은 경험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좀 더 영광스럽고 기억될 만한 업적을 거두어 자신의 치세를 드높이고 싶었다. 그가 무력을 겨룰 유일한 경쟁자는 키루스의 후계자인 사산 왕조의 샤푸르였다. 율리아누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행군을 시작하여 소아시아의 속주들을 거쳐 그의 전임자가 죽은 지 약 8개월 만에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거기서 로마 군단을 재정비하면서 겨울을 보낸 황제는 363년 3월에 드디어 출정했다. 황제를 배웅하겠다는 안티오크 원로원들을 경멸과 질책으로 쫓아 버렸고, 다시는 안티오크로 돌아오지 않겠다고도 결심했다. 동방 로마의 수도였던 그곳은 그의 취향과는 너무 다른 도시였기 때문이었다.

 

안티오크를 출발한 로마 군단은 베로이아(오늘날의 알레포)와 히에라폴리스를 거쳐 메소포타미아의 아주 오래된 도시인 카레로 향했다. 거기서 황제는 군대를 두 갈래로 나눴다. 친족인 프로코피우스와 이집트인 지휘관 세바스티아누스에게는 3만 명의 병사를 딸려 티그리스 강쪽으로 진군하도록 했고, 자신은 유프라테스 강변을 따라 행군하여 페르시아 왕국의 수도를 포위할 즈음이면 크테시폰 성벽 아래에서 합류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율리아누스의 군대는 안티오크에서 출발한 지 한 달 만에 로마 영토의 동쪽 끝인 키르케시움의 탑에 도착했다, 그의 군대는 페르시아 원정에 동원한 군대 중에서 최대 규모인 6만 5천 명의 정예 부대였다.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

 

율리아누스의 군대가 어떤 행군 대열을 갖췄으며, 보병대와 기병대는 어떤 지휘관이 맡았는지를 여기서 다시 반복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다만 이들이 행군했던 경로는 그들보다 훨씬 더 오래 전에 어느 영웅이 1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불굴의 용기와 함께 그 지역을 통과했던 유서깊은 지역이라는 점만은 기억해둘 필요가 있다. 만인대(萬人隊)를 이끌었던 그 영웅은 소크라테스의 친구였던 크세노폰이었다.

 

카보라스에서 아시리아의 농경 지대까지 가면서 통과한 지역은 인간이 가진 어떤 기술로도 개간이 불가능하여 버려진 거칠고 메마른 황무지로, 아라비아 사막의 일부로 간주되는 곳이었다. 율리아누스는 700년 전 젊은 키루스가 밟았으며, 그의 원정에 동반했던 지혜롭고 영웅적인 인물 크세노폰이 묘사했던 바로 그 땅 위를 행군했다.

 

이 지역은 바다처럼 평평하게 펼쳐져 다북쑥류의 풀이 무성히 자라는 평원 지대이다. 여기에서 자라는 관목이나 잡풀은 어떤 종류든지 강한 향내를 풍긴다. 그러나 나무는 한 그루도 볼 수가 업삳. 느시와 타조, 영양과 야생 당나귀들만이 이 사막 지대의 유일한 주민인 것 같다. 이들을 사냥하는 일을 오락 삼아 행군의 피로를 풀었다.

 

사막의 모래는 종종 먼지구름과 함께 모래바람을 일으키곤 했으므로, 수많은 병사들이 예기치 않은 폭풍의 습격에 갑자기 천막째 땅 위에 내동댕이쳐지곤 했다.(37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Route of Xenophon and the Ten Thousand> (출처:위키백과)

 

율리아누스의 군대가 이 황량한 지역을 벗어나 어떤 도시를 수중에 넣었고, 어떤 요새를 포위공격하는데 고전했으며,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오던 1100척의 로마 함대들을 어떤 방식으로 티그리스 강으로 무사히 옮겼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생략하겠다. 어쨌든 그들은 불굴의 의지로 모든 난관을 뛰어넘어 페르시아의 수도인 크테시폰의 성벽 아래까지 도달했다. 그러나 율리아누스는 거기서 합류하기로 예정된 3만 명의 로마 군대와 합류하는데 실패하고 만다. 결국 황제는 작전 회의를 열어 충분한 토론을 거친 끝에 크테시폰 공격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용감하고 노련한 장군의 지휘와 충분한 수의 배와 군량, 대포, 군수품의 지원을 갖춘 6만여 명의 로마군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이 도시를 공략하는 일을 포기했는지는 의문이지만, 명예욕과 용기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율리아누스였던 만큼 공격을 포기할 만한 합당한 이유는 충분했으리라는 게 기번의 판단이다.

 

율리아누스는 이때 샤푸르가 제안한 평화 협상마저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데 이때 일어난 우연한 사건 하나가 모든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다. 페르시아의 한 귀족이 자신의 조국을 배반하고 황제의 막사로 탈주해 왔고, 로마군의 인질이 되어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고 제안했던 것이다. 노련하고 현명한 호르미스다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 귀족의 말을 믿었던 율리아누스는 누가 보더라도 비난할 만큼 경솔한 명령을 내리고 만다. 수많은 노고와 희생을 치러 500여 마일이 넘는 거리를 이동해 온 전 해군의 함대를 파괴해 버린 것이다. 병사들을 위해서는 겨우 20일 정도 버틸 식량만 남겨 놓고 나머지 군수품은 티그리스 강에 정박되어 있던 1100여 척의 함대와 함께 황제의 엄명에 따라 모조리 불태워졌다. 로마 군이 내륙 지역으로 전진해 들어갈 경우 크테시폰의 성문에서 갑자기 쏟아져 나올지도 모를 엄청난 수의 군대에게 귀중한 전리품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계책이었다. 그들은 이내 식량 부족 문제에 직면하고 만다. 식량 조달을 위해 인근 도시와 마을을 찾아 나섰지만 그들은 가축류는 끌고 갔고 곡식과 풀은 불태워버린 뒤였다.

 

뒤늦게 함정에 빠진 사실을 알아챈 로마 군대는 티그리스 강변으로 퇴각해 코르두에네 국경까지 서둘러 행군하여 군대를 구하는 길만이 유일한 수단이라 판단했다. 페르시아를 타도할 부푼 꿈으로 카보라스를 건넌지 겨우 70일 만에 로마군은 낙담한 채 퇴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페르시아군과 간헐적인 교전을 벌이면서도 행군을 이어가던 어느 날, 새벽 일찍 진군 나팔을 울리고 험준한 지역을 통과해서 행군 중이던 로마 군대는 그 지역의 언덕마다에 매복하고 있던 페르시아군으로부터 기습을 당한다. 무더운 날씨 때문에 흉갑을 벗은 상태였음에도 병사들을 구하러 후방과 전방으로 분주히 질주하던 황제는 도주하는 야만족들을 추격하던 중 갑자기 패주하던 기병대로부터 비처럼 쏘아대는 화살과 투창 공격을 받는다. 그때 날아온 투창 하나가 황제의 팔을 스치고 지나가 갈비뼈를 꿰뚫고 간장 아래쪽에 꽂혔다. 황제는 의식을 잃고 말등에서 떨어졌고, 대량 출혈로 실신 상태에 빠졌던 율리아누스는 그날밤 늦게 가까스로 정신을 회복하지만 기력은 거의 소진된 상태였다. 그는 영웅이자 현인다은 간결한 태도로 임종의 순간을 맞았다.

 

이 불행한 여정에 동행했던 철학자들은 율리아누스의 막사를 소크라테스의 감옥에 비유했으며, 의무감 또는 우정 때문에 혹은 호기심 때문에 그의 침상 주위에 모여든 목격자들은 비탄에 잠겨 죽어가는 황제의 마지막 유언에 귀를 기을였다. 

 

벗들이여, 그리고 짐의 병사들이여, 이제 짐이 떠나야 할 때가 되었으니, 기꺼이 빚을 갚으러 가는 채무자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자연의 부름에 따르리다. 짐은 일찍이 철학을 통해 영혼이 육체보다 값진 것이니, 더 고귀한 실체가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은 고통스러워할 일이 아니라 마땅히 기뻐해야 할 일임을 배웠소. 또한 종교를 통해서는 때이른 죽음은 신의 보상을 받는다고 배웠소. 그러니 이 죽음의 일격을, 지금까지 덕과 인내로 지켜 온 짐의 인격을 더럽힐지도 모를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구해 주려는 신의 호의로 받아들이오. 짐은 생전에 죄 없이 살았으니 후회 없이 가오. 짐의 사생활이 순결했음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이며, 신들의 힘의 발화라 할 제왕으로서의 최고 권력이 짐의 손 안에서 순수하고 흠없이 유지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소. 짐은 전제 정치의 타락하고 파괴적인 원칙을 혐오했고, 국민의 행복을 정부가 취해야 할 목표라 여겨왔소. 짐이 취한 행동들은 신중함과 정의와 중용의 법을 따랐으며, 모든 것을 신의 섭리에 맡겨 왔소. 평화가 공공의 이익에 합치하는 한 짐의 목표는 평화였으나 조국이 짐에게 무기를 들라고 절박하게 청할 때는, 짐이 언젠가는 검을 맞고 쓰러질 운명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위험 앞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았소. 이제 잔인한 폭군이나 음모자의 단검, 혹은 질병의 느린 고통으로 죽은 괴로움을 면하게 해 주신 영원한 존재에게 감사를 바치고 싶소. 또한 신은 짐에게 명예로운 삶을 살던 가운데 이 세상을 영광스럽게 떠나도록 해주셨소. 운명의 일격을 간청하는 것도 그것을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리석고 비겁한 일일 것이오. 이상이 짐이 말하고자 한 것이오. 이제 짐의 힘이 다하여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끼고 있소. 다음 황제의 추대 문제에 관해 여러분의 선택에 영향을 미칠지도 모를 말은 삼가도록 하겠소. 짐의 선택은 신중하지 못하거나 현명하지 못할 수도 있소. 또한 군대의 동의를 얻지 못한다면, 이는 짐이 천거한 인물에게 치명타가 될 수도 있소. 짐은 한 사람의 선량한 시민으로서, 모쪼록 로마인들이 덕망 높은 군주를 얻는 축복을 누리게 되기만을 바랄 뿐이오.

 

(…) 그는 냉수를 청하여 조금 마시고는 곧 고통도 없이 숨을 거두었다. 때는 한밤중이었다. 이리하여 한 비범한 인간의 삶이 막을 내렸으니, 그의 나이 32세, 콘스탄티우스 사후 왕위에 오른 지 1년 8개월 만이었다. 어느 정도는 허세가 섞여 있을지도 모르나, 그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그의 삶 전체를 지배해 온 덕과 명예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었다.(396∼398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알렉산드로스를 꿈꾸었던 걸출한 황제의 급작스런 전사는 로마 군대를 더욱더 곤경으로 몰아넣었다. 급작스럽게 황제로 추대된 요비아누스는 황제로서의 미덕과 용기가 부족했다. 기근에 허덕이는 로마 군대를 제대로 통솔하지도 못한 채 아사 직전까지 내몰았고, 샤푸르에게 병사들의 목숨을 구걸하다시피 했다. 뿐만 아니라 샤푸르와의 협상에서 전임 로마 황제들이라면 상상하지도 못할 정도의 굴욕적인 화평 조약까지도 모조리 받아들였다. 이 치욕스런 화평은 당연히 로마 제국의 쇠망 과정에서 기억할 만한 전기가 된다.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 제국 쇠망사』의 제2권에서 이토록 길고도 상세하게 묘사한 율리아누스 황제에 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마무리된다.

 

율리아누스의 유해는 킬리키아의 타르수스에 매장되었으나, 서늘하고 평온한 키드누스 강변에 세워진 그의 장려한 묘소에 대해서는 이 비범한 인간의 기억을 아끼고 기리는 충실한 벗들의 불만이 많았다. 철학자들은 그가 플라톤의 사도로서 아카데메이아의 관목 숲 속에서 영면을 취했어야 한다며 아쉬워했다. 반면에 병사들은 율리아누스의 유골은 마르스 광장에 있는 로마의 미덕을 기리는 고대 기념비들 사이에 카이사르와 함께 매장했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사실 제왕들의 역사에서 이와 겨룰 만한 사례를 찾아 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412∼413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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