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는 문학과 예술에 무엇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우리 삶이 어떤 얼개로 되어 있는가를 가르쳐줍니다. 이건 대단한 것이지요.

 - 조셉 캠벨, 『신화의 힘』중에서


 * *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따라가자면 그 곁가지가 너무나 많아 매번 곤욕을 치른다. 하르퓌아이 이야기만 해도 그렇다. 이 마녀새 이야기를 하자면 제법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들을 두루 거쳐야만 '이야기의 얼개'가 완성된다. 나는 꽤 오래 전에 이 마녀새에 얽힌 신화를 몇몇 책을 통해서 읽고 나서 그 강렬한 인상을 좀처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러고는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러다가 문득 니체의 작품 『선악의 저편』에서 정말 뜬금없이 이 마녀새를 다시 만났다.(http://blog.aladin.co.kr/oren/8597307) 그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나는 이 마녀새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찾아 읽었고, 글을 하나 지어볼 요량으로 신나게 자판을 두드려 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못 가서 포기하고 말았다. 고작 이 마녀새 이야기를 하자고 내가 이렇게나 '수많은 곁가지 이야기'를 다 펼쳐야 하나 싶은 마음이 자꾸만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이 '마녀새' 이야기를 최근에 '기가 막힌 장소'에서 다시 발견했다. 무대는 이탈리아 나폴리 앞바다의 어느 '무인도'였다. 좀더 쉽게 풀어서 말하자면, 그 마녀새는 셰익스피어의 희극 『태풍』속에서 갑자기 다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이번엔 그 마녀새를 도저히 그냥 돌려보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힘을 냈다. 까마득한 옛날에 쓰다 만 '하르퓌아이' 이야기를 마저 쓸 힘을 말이다. 그래서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는 절반쯤은 '과거에 써 놓았던' 글이고, 나머지 절반쯤은 이번에 '다시금 이어 쓴' 글이다. '신화'는 몇 년 사이에 쉽게 바뀔 얘기가 결코 아니다. 어쩌면 수천 년이 지나도 조금도 변치 않을지 모른다. 그러니 내가 쓴 글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쓰여졌다고 '변질'이나 '변색'을 걱정할 일은 조금도 없다. 다소 먼 여정이지만, 어쨌든 이제 다시 떠나 보자.


이 마녀새를 다루기 위해 맨 처음으로 우리가 찾아가야 할 장소는 '파가사이 항'이다. 파가사이는 텟살리아 지방의 해안도시다. 거기엔 고대의 수많은 영웅들이 '황금 양모피'를 찾기 위해 '지상 최대의 모험'을 떠날 채비를 갖춘지 오래다. 그 배에 타고 있는 인물들만 하더라도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가 벅찰 정도다.

 

원정대장은 이아손이 맡았다. '원정대원'으로는 고대 그리스의 최고의 영웅 헤라클레스도 있었다. 고대 최고의 명가수 오르페우스도 그 배에 타고 있었다. 죽어서 하늘의 별이 되어 '쌍둥이자리'에 오른 카스토르폴뤼데우케스도 동참했다. 이 두 쌍둥이는 제우스가 백조로 둔갑하여 스파르타 왕비 레다와 사랑을 나눈 후 낳은 두 개의 알에서 깨어나온 인물들이다. 하나의 알에서는 카스토르와 헬레네 남매가 나왔는데, 이 헬레네는 트로이아 전쟁의 원인이 되었던 바로 그 헬레네다. 다른 알에서는 폴뤼데우케스와 클뤼타임네스트라 남매가 태어났는데, 클뤼타임네스트라는 물론 트로이아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군 사령관을 떠맡았던 아가멤논의 아내이자, 자신의 정부(情夫)와 짜고 귀환하는 승전사령관이자 남편인 아가멤논을 독살한 바로 그 여자다.

 

이들 쌍둥이 장수에 얽힌 이야기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한 사람 있다. 그는 당대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헬레네 납치 사건' 해결의 결정적인 실마리를 제공한 인물이었다. 이 인물을 얘기하자면 우리는 아무리 바쁘더라도 '크레테 섬'을 한 번 다녀와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 그리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도 그 섬에 갇혀 지내던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모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그 나라의 왕비 파시파에가 황소에 반해 '교접'을 하고 얻은 괴물이 바로 미노타우로스였고, 그녀가 암소로 분장할 수 있었던 건 물론 당대 최고의 장인(匠人)이었던 다이달로스가 기가 막힌 솜씨로 빚은 '나무 암소' 덕분이었다. 사람 잡아먹는 괴물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를 가둘 필요가 있을 때 왕비는 다시 한번 다이달로스를 불렀다. 한번 들어가면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迷宮)을 지어달라고 말이다. 그 미궁에서 첫 번째로 빠져나온 인물이 바로 테세우스였고, 그가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홀딱 반한 '아리아드네 공주'가 '실'로 그를 묶어 준 덕분이었다.

 

어쨌든 해마다 아테나이의 젊은 처녀와 총각들을 공물로 바치게 해서 꿀떡꿀떡 삼켜 넘기던 공포의 괴물이 미노타우로스였고, 그 괴몰을 처치하기 위해 자진해서 미궁 속으로 뛰어들어갔던 인물이 테세우스였으니, 그가 임무를 마치고 아테나이로 무사히 귀환했을 때 받았을 환영행사가 얼마나 거창했을 것인지는 달리 물어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왕자가 젊어서 한 때 자신의 친구와 공모하여 '카스토르와 폴뤼네이케스 형제'의 누이인 헬레네를 납치한 적이 있었다. 쌍둥이 장수가 어느 날 느닷없이 사라진 자신들의 누이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메고 다닐 무렵 그녀의 행방에 관해 '결정적인 제보'를 해 준 인물이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아카데모스였다. 누이를 찾은 쌍둥이 형제는 제보자의 공을 기려 그의 고향을 '아카데메이아'라고 부르게 했고, 아테나이 근교에 있는 그 마을은 훗날 플라톤이 철학을 가르키는 '학문의 전당'을 세움으로써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 학원 이름이 바로 '아카데메이아'였다. 그 이름은 오늘날 숱한 학원과 학교뿐 아니라 심지어는 영화에 주어지는 최고 권위의 상에도 쓰일 정도가 되었다.

 

이야기가 순식간에 너무 곁가지로 흘렀다. 다시 고대의 항구로 되돌아 와서 그 배에 탄 영웅들을 다시금 살펴보자.

 

아르고스는, 원정대가 50명으로 짜일 것이나 그 대원 하나하나가 일당 백의 범 같은 장수들이어서 그 크기와 무게 또한 엄장할 것인즉 유념하고 배를 지으라는 이아손의 말에 따라 배를 지어놓고도, 모여든 장수들의 면면을 보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50명의 원정대는 하나의 '미크로코스모스(소우주)'를 상기시킨다. 아이손이 이 미크로코스모스를 짜고, 배 지을 뜻을 세운 선견자(先見者)라면, 이르고스는 그 뜻에 따라 미크로코스모스가 깃들 그릇을 마련한, 천궁으로 말하면 헤파이스토스에 견줄 수 있는 섭리의 집행자다. 날개가 달려 있어서 하루에 천 리를 날 수 있고 하루에 500리를 걸을 수 있는 저 보레아스(북풍)의 두 아들 칼라이스와 제토스는 이 선견자가 보고 집행자가 빚은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다리이고, 아틀라스를 대신해서 하늘 축을 들고 서 있을 수 있는 천하장사 헤라클레스와, 말을 타고 걷는 것보다 둘러메고 걷는 쪽이 편하다는 스파르타의 역사(力士) 폴뤼데우케스는 이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팔이며, 새 우는 소리에서 모이라이(운명)의 발소리를 듣는 예언자 몹소스와 뱃전을 때리는 파도 소리로 뱃길을 짐작하는 암피아라오스는 이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귀고, 90리 밖에 있는 작대기가 참나무 작대기인지 소나무 작대기인지 알아보는 천리안(千里眼)의 망꾼 륀케우스와 밤에 보아둔 별자리로 낮의 뱃길을 짐작하는 천부적인 뱃사람 나우폴리오스는 이 미크로코스모스의 두 눈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여기에는 노래와 수금 가락으로 저승 왕 하데스를 울리고, 영원히 도는 익시온의 불바퀴를 멈추게 했던 트라키아의 명가수 오르페우스도 있고, 배를 몰고 산모룽이을 돌아가되 노수(櫓手)로 하여금 노 끝으로 산자락 꽃을 어루만지게 할 수 있는 보이오티아 최고의 키잡이 티퓌스도 있으며, 포세이돈의 아들이자 둔갑의 도사인 페리클뤼메노스도 있고 물고기를 잡아먹으면서 헤엄친다는 수영의 명수 에우페모스도 있었다.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신인이나 영웅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기에는 신들에게 비는 인간을 썩어가는 인간이라고 믿는 참람한 인간 이다스도 있었고, 남자의 사랑을 받는 일을 세상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로 여기는 여걸 아탈란타도 있었으며, 신들에게 빌지 않는 인간을 오만한 짐승이라고 믿는 이피토스도 있었고, 동성인 헤라클레스를 하늘로 알고 떠받드는 나약한 미소년 휠라스도 있었다.

 

더 있었다. 칼뤼돈의 멧돼지를 잡은 호걸 멜레아그로스도 있었고, 후일 트로이아 전쟁의 명장 아킬레우스의 아버지가 되는 펠레우스도 있었고, 헤라클레스 덕분에 죽은 아내를 되살리는 아드메토스도 있었고, 테세우스와 함께 명계로 내려가 저승 왕에게 아내를 내어놓으라고 했던 페이리토스도 있었다.127∼128쪽)


 -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5』,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고대세계의 가장 유명한 모험은 이렇듯 숱한 영웅들을 태우고 항구를 떠나면서 돛을 가득 부풀렸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조차 없었지만, 흑해 연안 콜키스에 있다는 전설의 '황금양모피'를 구하기 위한 '굳은 결심'만은 단단했다.


항해가 시작된 이후에 그들이 겪은 '온갖 우여곡절들'을 여기서 모두 얘기할 수는 없다. 원정대가 맨 처음으로 도착한 렘노스에서 '냄새 나는 여자들'을 마침내 해방시켜 준 몽환적인 이야기, 사모트라케를 지나고 헬레스폰토스를 지나 퀴지코스라는 나라에 들렀을 때의 불행한 이야기, 헤라클레스가 아끼던 휠라스를 샘의 요정에게 빼앗기고 중도하차하게 되는 애석한 이야기 등은 아쉽지만 모두 생략해야 옳다. 우리가 기어이 만나 보고 싶은 그 '하르퓌아이'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만나기 위해서라면 우린 재빨리 목적지로 '날아가듯' 달려야 하니까.


여러 곡절을 겪은 끝에 아르고 원정대가 마침내 닿은 곳은 흑해 초입에 있는 트라키아의 어느 해안이었다. 그들이 그 땅에 상륙해서 맨처음 찾은 곳은 언덕 위에 보이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오두막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하도 늙고 하도 마르고 하도 그을려, 발밑에 엇비슷하게 누운 그림자와 별로 다르지 않은'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의 말은 이랬다.


"왔구나, 왔구나. 아르고나우타이가 이제야 왔구나. 왔구나, 왔구나, 보레아스의 아들 칼라이스와 제토스가 왔구나."


그 노인은 장님이었다.


"먹을 것을 좀 주어. 한 그릇의 보리죽, 한 모금의 물, 한 알의 실과 …… 모두 맛본 지 오래……. 하지만 지금 줄 것은 없어. 지금 주어도 나는 못 먹어. 아직은 먹을 때가 되지 않았어."


그 노인은 이내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나는 아게노르의 아들 피네우스야. 내 이름, 귀에 설지 않지? 나는 세상이 접시같이 평평하지 않다는 걸 알고, 세상이 휘페르보레이아(極北)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 나는 헬리오스(태양)가 검은 너울을 쓰는 까닭도 알고, 셀레네(달)가 뜨고 지는 이치도 알아. 어떻게 아느냐고? 아폴론께서 가르쳐주셨지. 그런데 나는 포이보스 아폴론(빛나는 아폴론)이 모르는 것도 알아. 내 잘못인가? 나는 이걸 사람들에게 가르쳤어. 그랬더니 제우스 대신이 어째서 천기를 누설하느냐고 몹시 화를 내시면서 벼략을, 조그만 것으로 하나 던지시더라고. 그게 무슨 벼락이었는지, 한 대 맞았더니 살갗이 떡갈나무 껍질같이 늙고 눈이 보이지 않아. 내 눈에는 자네들이 보이지 않아. 하지만 나는 알아. 자네는 젊은 대장 이아손이고, 자네는 트라키아의 풍각쟁이 오르페우스, 자네는 개똥 점쟁이 몹소스, 자네는 술장수 팔레로스…… 주신(酒神)의 사생아지? 그리고 저기 주먹 쥐고 서 있는 것은 쇠주먹 폴뤼데우케스…… 주먹에 피가 묻었구나. 뱃길이 남았는데 해신(海神)의 아들을 죽여? 그리고 자네는 달거리(月經)하는 무사로구나. 그 옆에 있는 것은 눈 밝은 륀케우스…… 눈구녕만 밝으면 무얼해? 심안(心眼)이 있어야지. 나 장님이라도 장님이라는 걸 비참하게 생각하지 않아. 제우스 대신은, 장님이라는 걸 비참하게 생각하지 않는 장님이 또 보기 싫으셨던 게야. 그래서 하르퓌아이를 보내어 나를 괴롭히는데…… 하르퓌아이 알아? 새야 새. 크키가 독수리만 해. 새는 새인데 대가리는 곱기가 한량없는 계집 사람이야. 물론 계집의 등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 이게 하르퓌아이야. 너희들도 곧 이 '제우스의 사냥개들'을 보게 돼. 이것들, 꼭 세 마리씩 짝을 짓고 다니는데, 끼니 때마나 나타나 내 먹을 걸 대신 먹고는 접시에다 똥을 싸 갈기고 날아가 ……. 물을 먹으려 해도 날아오고, 보리죽을 먹으려 해도 날아오고, 실과를 하나 먹으려 해도 날아와. 저승에서 탄탈로스가 물을 마시려고 하면 멀쩡하게 있던 물이 달아나버린다더니 나는 살아서 이 꼴을 당하고 있어. 아, 한 그릇의 보리죽, 한 모금의 물, 한 알의 실과……. 맛본 지 오래야."


이아손이 곧 아르고선에서 술과 고기를 내려오게 한 뒤에 음식을 한상 잘 차려 대접했지만 피네우스는 먹지 못했다. '하르퓌아이'라고 하는 요괴가 어느새 하늘에서 구름을 헤치고 쏜살같이 내려와 덮쳤기 때문이다. 얼굴은 곱기가 한량없는 계집인데 나머지는 영락없이 새인, 참으로 요상한 괴물이었다. 그러나 모습보다 더 요상한 것은 그 버르장머리와 몸에서 풍기는 이상한 냄새였다. 피네우스 노인과 아르고호 원정대원들이 코를 싸고 있는 동안 요괴들이 음식을 말끔히 핥아 먹고 접시에는 똥을 싸 갈겨놓고 하늘로 날아올라갔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북풍의 아들 칼라이스와 제토스가 잽싸게 그들을 뒤쫓았다. 그들이 세 마리 하르퓌아이를 따라잡은 흑해에 떠 있는 조그만 섬 상공에서였다.


하르퓌아이는 섬을 돌다가 방향을 바꾸어 아마존의 나라가 있는 텔모돈 강 하구 쪽으로 날기 시작했다. 그러나 몸집이 유난히 커 보이는 하르퓌아이 하나는 여전히 뒤처지고 있었다.

칼라이스는 이 뒤처진 것을 노리고 꼬리 쪽을 겨누어 칼을 둘러메는 순간 뒤따라오던 제토스가 소리쳤다.

"보아요, 무지개가 아니오!"

언제 섰는지 무지개가 하나 텔모돈 강과 구름 사이에 걸려 있었다.

"하르퓌아이가 무지개 여신 이리스와 자매 간이라는 말 들어보았소?"

제토스의 말에 칼라이스가 칼을 거두고 뒤를 돌아다보았다. 그 사이에 하르퓌아이가 무지개 뒤로 그 모습을 감추었다.

"보레아스의 아들들아, 너희들이 나를 아느냐?"

하르퓌아이가 무지개 뒤로 숨자 헤라 여신의 사자(使者)인 이리스 여신이 쌍둥이 형제를 불러 세웠다. 형제의 눈에는 무지개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이리스 여신께서는 어디에 계십니까?"

칼라이스가 물었다.

"너희들 눈앞에 있다. 이제 제우스 대신의 뜻이 이루어졌으니 하르퓌아이를 더 쫓지 마라. 칼질하는 것은 더욱 안 될 일이다. 하르퓌아이는 대신께서 길들이신 대신의 사자들인즉 너희들은 칼을 거두고 돌아가거라."

"여신께서 하르퓌아이의 자매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돌아가야 합니까?"

"피네우스에게 내려졌던 제우스 대신의 진노가 거두어졌다는 말이다. 내가 이리스 여신이라는 것을 믿느냐?"

"무지개 안에 계시니 이리스(무지개) 여신이겠지요."

"그러면 내가 제우스 대신의 몸을 받아 스튁스 강에다 맹세를 친다. 금후로는 하르퓌아이가 피네우스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이로써 피네우스는 너희 은혜를 입었다."

"저희들이 무엇으로 징표를 삼으리까?"

"피네우스가 다 알고 있을 것이니 징표가 필요하지 않다. 칼라이스여, 네가 칼로 내려치려던 게 누구인지 알기나 하느냐? '포다르게(빠른 자)'다. 포다르게가 왜 뒤처졌는지 알기나 하느냐? 자식을 배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 자식인지 알기나 하느냐? 네 아비 보레아스(북풍)의 자식이다. 내가 칼질을 멈추게 하지 않았더라면 네가 포다르게의 복중에 든 형제를 죽였을 것이다. 쫓는 너희가 짐승이면 모르되, 인간이거든 뒤로 처진 것에다 칼질을 삼가라. 어린것, 늙은것, 아니면 새끼를 밴 것일 테니 ……."

쌍둥이 형제는 이리스 여신의 말을 믿고 피네우스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뒷 이야기지만, 하르퓌아이의 하나인 포다르게가 낳은 북풍의 자식은 두 마리의 말이었다. 트로이아 전쟁 때 명장 아킬레우스가 타던 두 마리의 말 '크산토스(밤색 털)'와 '발리오스(얼룩무늬)'가 바로 이 빠르기로 소문난 북풍과 포다르게의 자식들이다. 뛰는 것 중에 아킬레우스가 따라잡지 못할 것은 이 두 마리의 명마뿐이었다.(172∼174쪽)

 -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쌍둥이 형제가 돌아왔을 때 피네우스의 오두막 앞마당에는 마침 푸짐한 잔치상이 차려져 있었고, 피네우스는 먹은 위에 또 먹고, 마신 위에 또 마셨다. 그리곤 아르고호 원정대 팀원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줬다.


"이아손 대장이, '먹을 것을 누가 마련해주느냐'고 물었을 때 '희망이 마련해준다'고 한 내 말은 허사가 아니오. 에르피스(희망)가 내 옆에 없었더라면 나는 그들이 이 땅에 태어나기도 전에 하데스에 가 있었을 것이오. 나는 오래전에 그대들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오래전부터 나는 그대들을 만나고, 이렇게 먹고 마실 수 있게 될 줄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 술과 고기는 '희망'보다 내 '예지'보다 맛이 있구료. 제우스 대신께서는 그대들 만나는 자리를 꾸미려고 나를 연단(練鍛)하신 것이 아니라 참 술맛, 참 고기맛을 알게 하시려고 나를 굶긴 것만 같아요. 나는 이렇게 먹고 마시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러니 에욱세이노스, 저 적대하는 바다를 열 아르고나우타이여, 내 말을 잘 들으세요.


여기에서 뱃길로 이틀 거리 되는 곳에는 이 적대하는 바다의 문이 있어요. 그대들이 열어야 하는 이 문을 뱃사람들은 '쉼플레가데스'라고 부른답니다. '충돌하는 바위섬'인 것이지요. '에욱세이노스'라고 하는 저 검은 바다(흑해) 초입에 마주 보고 서 있는 섬이 바로 '쉼플레가데스'인데, 지금까지 이 두 섬 사이를 지나간 배는 한 척도 없어요. 왜냐, 이 두 바위섬은 뿌리를 땅에다 박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델로스(떠 있는 섬)'처럼 물 위에 가만히 떠 있다가 그 사이로 뭐가 지나갈 때마다 이렇게……."


피네우스는 두 주먹을 가슴 앞에서 탁 맞부딪치면서 말을 이었다.


"…… 꽝 부딪친답니다. 이러니 배가 지나갈 수 있겠어요? 그러니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합니다. (중략) 알겠소? 내 말을 명심하지 않으면 에욱세이노스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하데스의 땅으로 들어가는 꼴이 될 것이니 그리 아세요. 그대들이 내 말대로 해서 이 섬 사이를 뚫어내면 쉼플레가데스가 다시는 맞부딪치지 못할 것이오."


그것은 대체 무슨 말씀이시지요?"


점쟁이 몹소스가 물었다. 피네우스가 같은 예언자이자 점쟁이인 몹소스한테는 여전히 예를 갖추지 않고 꾸짖었다.


"너 같은 것은 천상 새점이나 칠 팔자구나. 세이레네스(사이렌 무리)가, 저희들 노래에 홀리지 않는 뱃사람을 만나면 자결하고 만다는 말도 못 들었느냐? 스핑크스가 제 수수께끼를 풀어버린 오이디푸스 앞에서 투신자살했다는 말도 못 들었느냐?"


"그러니까 쉼플레가데스도 세이레네스나 스핑크스같이 ……."


"너 같은 것을 데리고 천기를 누설하라는 말이냐? 그것은 그렇고…… 이아손 대장은 귀담아 들으세요. 적대하는 바다의 문을 열고 들어가더라도, 기쁘다고 너무 기뻐하지 말고, 슬프다고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기뻐하느라고 마음 빗장까지 열었다가 슬픈 일 당하고, 슬퍼하느라고 삼가다가 기쁜 일을 만나는 수가 있는 법이오. 늙은 아비의 이빨이 하나 빠지는 것은 어린 새끼의 이빨이 하나 날 때가 되었기 때문이니, 그대들이 겪을 앞날도 이와 같을 것이오. …… 하면, 지나는 뱃사람에게 콜키스 땅이 어디냐고 묻지 않아도 될 것이며, 콜키스 땅에 이르면 그대가 근심해야 할 일은 콜키스 땅이 마련하고 있을 것이오."(176∼178쪽)


 - 이윤기, 『그리스 로마 신화 5』, <아르고 원정대의 모험>


이렇게 해서 아르고 원정대가 '쉼플레가데스'를 무사히 통과하고 마침내 콜키스 땅에 이르러 황금양모피까지 얻게 된다. 무서운 용이 지키는 진귀한 보물인 '황금양모피'를 얻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처녀가 바로 메데아 공주였다. 오비디우스는 콜키스의 공주가 이아손에게 도움을 주게 된 사연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아손과 메데아 

 

그녀는 오랫동안 버텼지만 이성으로는 자신의 광기를 이길 수 없자

"메데아야, 싸워봤자 소용없어! 누군지는 몰라도 어떤 신이 너를

방해하고 있어." 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틀림없이 이런 것이거나 아니면 이와 비슷한 것일 거야.

그렇지 않다면 나는 왜 아버지의 명령이 너무 가혹해 보이는 거지?

그 명령은 사실 너무 끔찍해. 왜 나는 본 지 얼마 되지도 않는

그가 죽지나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는 거지? 내가 이토록

두려워하는 까닭이 뭐지? 불행한 소녀여, 타오르는 불길을

네 소녀의 가슴에서 떨쳐버리도록 해. 할 수만 있다면!

나는 할 수만 있다면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어. 하나 어떤 이상한 힘이

싫다는 나를 끌어당기고 있어. 욕망은 이래라 하고, 이성은 저래라

하는구나. 더 나은 것을 보고 그렇다고 시인하면서도

나는 더 못한 것을 따르고 있어. 이 공주님아, 왜 너는 이방인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을 불태우며, 왜 낯선 세상과 결혼할 생각을 하는 거지?

이 나라도 네가 사랑할 만한 것을 줄 수 있어. 그가 사느냐 죽느냐

하는 것은 신들에게 달려 있어. 그래도 그가 살았으면 좋겠어!

이 정도는 사랑하지 않더라도 기원할 수 있는 거라고.

사실 이아손이 무슨 나쁜 짓을 저질렀지?

비정한 사람이 아니고서야 누가 이아손의 청춘과 가문과

용기에 반하지 않을 수 있어? 다른 것은 다 그만두고라도

준수한 그 용모에 누가 반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오비디우스, 『원전으로 읽는 변신 이야기』, 제7권 10∼28


[이아손과 메데이아], 귀스타브 모로, 1865년, 오르세 미술관


 

숱한 인물들이 얽혀 있는 신화 속에서 어쩌면 '하르퓌아이'는 단순한 괴물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르퓌아이'는 '세상의 비밀'을 탐구하다가 기어이 신의 노여움을 얻게 된 인물이 겪는 '먹지도 못하는 불행'만 들려주는 단순한 이야기가 결코 아니다. 배고픔과 배부름의 엄청난 차이뿐 아니라 오랜 간난신고와 기다림의 고통, 그 끝에 찾아오는 만족과 보람, 분노와 증오, 관용과 화해 등등의 요소가 아주 밀접하게 서로 연관을 맺고 있어서 여느 '마녀들'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를 들려주는 존재다. 그래서 나는 이 '마녀새'에 얽힌 이야기를 하는 수 없이 이토록 '길게'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옛날에 쓰다 만 글을 이렇게 다시 꺼내어 이어서 쓰고 나니 셰익스피어의 『태풍』이라는 작품이 새삼 경이롭게 느껴진다. 이 작품은 '하르퓌아이'가 등장하기 전까지도 이미 충분히 매혹적인 이야기로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주요 등장 인물들이 푸짐하게 차려놓은 식탁을 마주한 장면에서 셰익스피어가 절묘하게 등장시킨 하르퓌아이는 순식간에 나를 또다시 '새로운 경이로움'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이미 충분히 놀라운 이야기들로 가득한데, 이런 놀라운 이야기에 또다시 그토록 새롭게 더욱 놀라도록 '하르퓌아이'까지 등장시키다니. 그것도 어쩌면 그토록 알맞은 상황에 그토록 어울리는 마녀새를 그처럼 알맞은 때에 등장시킬 수 있단 말인가.


『태풍』은 셰익스피어가 만년에 쓴 최후의 낭만희극이지만, 그 작품이 담고 있는 신비로운 이야기만 놀라운 게 아니다. 등장인물들과 대사들이 두루 뜻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어서 심지어 일부 비평가들은 "신의 심판의 우의극(寓意劇)"으로 보기도 하는 모양이다. 뒤늦게 다시 생각해 보니, 동생의 쿠데타로 하루 아침에 밀라노의 군주에서 쫒겨나 무인도로 휩쓸려간 주인공 프로스페로는 '하르퓌아이'에게 시달린 피네우스를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피네우스 또한 왕년에 트라키아에서 임금 노릇을 할 때가 있었다.) 프로스페로 역시 피네우스처럼 '세상의 비밀'을 알기 위해 '통치'는 내팽개치고 '책'만 들여다봤던 인물이다. 프로스페로가 척박한 무인도에서 고난을 겪는 모습도 황량한 언덕 위 찌그러진 오두막에서 홀로 사는 피네우스를 닮았다. 그리고 프로스페로가 '12년'이라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복수할 기회'를 잡게 되는 모습도 '기다리는 피네우스'를 닮았다(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철천지 원수들이 태풍에 휩쓸린 끝에 무인도로 떠밀려 온다.). 프로스페로가 결국 그들을 '포용'하고 '증오' 대신 '관용'을 베풀어 '화해'를 이루는 모습조차 '하르퓌아이 이야기'와 닮았다. 심지어 세익스피어는 『태풍』에서 '하르퓌아이와 자매지간인' 이리스 여신까지 등장시켜 멋진 시를 읊조리게 만든다. 그러니 내가 '하르퓌아이'를 이럴 때조차 못본 체 외면하고 지나치기는 너무나 어려웠던 셈이다.


           알론소

앞으로 나가서 먹겠다,

이게 끝일지라도. 상관없다, 최고의 시절은

지나갔다 느끼니까. 자, 동생과 공작께선

나가서 짐처럼 하시게.


천둥과 번개, 아리엘, 하르푸이아처럼 등장,

식탁 위에서 날개를 퍼덕이고, 진기한 무대 장치에 의해

잔치 음식이 사라진다.


(중략)

     프로스페로

너는 이 하르푸이아의 형상을 멋지게

연출했다, 아리엘. 빼어난 흡인력이 있었어.

내 지시를 네가 꼭 해야 할 말에서

하나도 놓치지 않았다. 또, 넘치는 생동감과

놀라운 관찰로 급이 낮은 정령들도

본분을 다하였다. 최고급 마술이 통하여

나의 적들 모두가 정신 착란 상태에서

뒤엉켜 있구나. 그들이 내 손안에 있으니

한동안 발작하게 버려두고 난 어린

(그들이 익사했다 여기는) 페르디난드와

그의 애인, 내 사랑, 딸애를 보러 간다.    (퇴장)


 - 셰익스피어, 『태풍(Tempest)』, <4막 1장>


《폭풍우》의 미란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1849∼1917)

(앤터니 홀든/장경렬 옮김, 『윌리엄 셰익스피어』에 담긴 사진)



『그리스 로마 신화_아르고 원정대의 모험』을 쓰고, 『신화의 힘』, 『변신 이야기』,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등을 두루 번역한 분은 이윤기 선생님이다. 그 분도 셰익스피어의 희곡에 매료되어 작고하기 몇 해 전엔 손수『겨울 이야기』를 번역해 내놓은 적이 있었다. 그 분이『겨울 이야기』의 '앞과 뒤'에 잔뜩 펼쳐놓은 '해설'에는(무려 40여 쪽에 달하는데) 온통 흥미로운 신화들로 가득하다. 작품 해설 말미에 그 분이 남겨 놓은 다음 말은 지금 다시 읽어도 안타깝기만 하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특히 그리스와 로마 신화 및 민담과 관련이 있는 작품에는 이런 압축 파일이 밤하늘의 별처럼 점점이 박혀 있다. 나에게 셰익스피어를 읽는 일은 이 압축 파일을 푸는 일이다. 나에게 셰익스피어를 번역하는 일은 이렇게 풀어낸 압축 파일을 독자들에게 돌려주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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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7-05-29 22: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신화의 힘>에 이런 내용이 담겨 있었군요! 책을 소장하고 있지만 펼쳐 볼 일이 없어 무슨 내용이 있는지도 몰랐네요.^^;;
근데, 이상하게도 신화 관련 책은 손이 잘 안가네요. 오렌님은 여전히 ~ 두껍고 도전하기 힘든 책을 읽으시는 거 같아 부럽습니다. 간접적이나마 캠벨의 책을 접할 수 있으니 좋네요. 감사합니다!

oren 2017-05-30 11:10   좋아요 1 | URL
신화는 이상하게도 ‘진입 장벽‘이 있는 듯해요. 저도 그런 느낌을 꽤나 오래 경험했었으니까요.

제가 요즘에 읽는 책들은 <셰익스피어 전집>에 담긴 작품들이랍니다. 대략 37편의 작품 가운데 절반쯤 읽었는데, 앞으로도 꾸준히 읽으면 그리 멀지 않아 셰익스피어의 전 작품을 다 읽을 수 있을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