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줄긋기)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기대와 명성이 높아진 갈레리우스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함께 그해 겨울을 니코메디아 궁정에서 지냈는데, 그리스도교의 운명이 두 황제의 비밀 회담의 대상이었다. 경험 많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관용 정책을 계속 시행하고 싶어했다. 그는 궁정이나 군대에서 그리스도교인에게는 직책을 주지 않는다는 정책에 기꺼이 동의했지만, 저 현혹된 광신자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잔인할뿐더러 위험하다고 매우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마침내 갈레리우스 황제는 그로부터 행정과 군사의 소수 고위 관리들이 참석하는 회의를 소집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회의가 소집되어 주요 문제가 제기되었고, 야심 많은 신하들은 갈레리우스가 끈질기게 요구하는 폭력 시행을 열변으로 지지하는 것이 자신들의 의무라는 것을 쉽사리 감지했다. 아마도 신하들은 그리스도교 파멸이라는 안건에 대해 황제의 자부심, 신앙, 두려움에 영합하는 모든 주제를 강조했으리라 추정된다. 아마도 그리스도교라는 독립적 집단이 속주 중심부에서 존속하고 확장하는 한, 제국을 구하는 위대한 사업은 달성될 수 없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로마의 신들과 제도를 부정하는 그리스도교인은 별개의 공화국을 형성하여, 아직 군사적 힘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이미 자체의 법률과 행정관에 의해 통치되고 공공 재산을 확보하고 있다고 그럴듯하게 단정지었다. 또한 모든 구역들이 주교들의 빈번한 회합을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주교들의 칙령에 대해서는 수많은 부유한 신자들도 맹목적으로 복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같은 논의가, 내켜하지 않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새로운 박해 방침을 결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671∼672쪽)

 

(나의 생각)

 

인류 최대의 종교로 발전한 그리스도교가 한때는 몇몇 로마 황제들의 손아귀에서 풍전등화처럼 흔들렸다는 사실을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만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기록한 역사책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 * *

 

황제들의 의향은 마침내 그리스도교인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침울한 겨울 내내 수없이 열렸던 비밀 회의의 결과를 근심스레 기다리고 있었다. 테르미날리아 축제일인 2월 23일이 그리스도교 발전에서 경계선을 긋는 날로 지정되었다. 이날 동이 틀 무렵, 여러 명의 장군, 군 장교, 징세관 들을 거느린 민정 총독이 시내에서 가장 번화하고 아름다운 곳에 있는 니코메디아 중앙 교회로 갔다. 그들은 교회 출입문을 순식간에 파괴하고는 성소로 돌진했다. 예배에 쓰이는 성물을 찾지 못한 그들은 성서 몇 권을 불태우는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행정관들은 수많은 근위병과 선발 부대를 거느리고 요새 도시를 파괴할 온갖 무기들을 갖추고 전투 태세로 준비하고 있었다. 이들의 그칠 새 없는 공격으로 인해, 궁정을 넘어 우뚝 솟아서 오랫동안 이교도들의 분노와 질투를 자극했던 신성한 교회가 삽시간에 폐허가 되고 말았다.

 

바로 다음 날 전면적인 박해 칙령이 공포되었다. 여전히 유혈 박해에 반대 입장을 취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갈레리우스 황제의 격노를 누그러뜨리려고 했지만, 그는 희생 제물 공양을 거부하는 자는 모조리 불태워 죽이도록 명했는데, 관강하게 거부한 그리스도교인에게 가해진 처벌은 충분히 가혹하고도 효과적이었다. 제국 내 전 지역의 교회를 뿌리까지 파괴하고, 예배 목적으로 비밀 집회를 여는 자는 모조리 사형에 처하라는 칙령이 내려졌다. 이제 맹목적인 박해 열풍을 이끄는 비열한 역할을 맡게 된 철학자들은 그리스도교의 본질과 특성을 부지런히 연구했다.(672∼673쪽)

 

 

 * * *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처음 공인되었던 박해를 전반적으로 검토하면서, 필자는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구체적인 수난과 죽음을 기술하는 일을 의도적으로 삼갔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나 락탄티우스의 규탄서(『박해자들의 죽음』)나 고대 순교자전에서 무시무시하고 진저리나는 장면들을 수집하여, 고문대와 채찍, 쇠갈고리와 불로 달궈진 침대, 화염과 강철, 잔인한 야수들과 더더욱 잔인한 사형 집행인 등이 인체에 고통을 가하는 온갖 고문 장면들로 지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처참한 장면들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순교한 성자들의 죽음을 지연시키거나 승리를 기리고 유물을 찾아내는 수많은 광경과 기적들을 더한다면 더욱 활기가 넘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런 것들이 과연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지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글로 옮겨야 할지를 결정 내릴 수가 없었다. 교회 역사가들 중 가장 신중한 에우세비우스도 교회의 영광과 연결되는 것은 기술하고 치욕스러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감추었다고 간접적으로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자백은 한 가지 의문, 즉 역사의 근본 법칙들 중 하나를 공공연히 어긴 역사가가 다른 원칙들은 엄격히 준수했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자연스럽게 제기한다. 그리고 당대의 역사가들 중 경솔한 면은 적었지만 궁정에서의 처세술은 누구보다 능숙했던 에우세비우스의 인물됨을 고려하면, 이런 의심은 더욱 근거가 있다 하겠다. 몇몇 특별한 경우, 이를테면 행정관들이 이해관계나 원한 같은 사사로운 동기로 격노하거나, 순교자들이 열정에 휩싸여 신중함과 품위를 잊은 채 제단을 엎어 버리거나 황제에게 저주를 퍼붓고 법정에서 재판관을 때린 경우에, 온갖 잔인무도한 고문들이 일편단심인 희생자들에게 가해졌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687∼688쪽)

 

 

 * * *

 

추방과 투옥, 고통과 고문에 관한 애매모호한 서술은 교묘한 웅변가들의 붓놀림으로 너무도 손쉽게 과장되거나 부드러워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로서는 당연히 더 명확하고 확실한 종류의 사실들을 조사하고 싶어진다. 예를 들어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동료들과 후대 황제들의 칙령의 결과로 죽음을 맞게 된 순교자가 정확히 몇 명인가 하는 사실이 궁금해진다. 최근의 순교담들은 무차별적인 박해로 전체 군대와 도시가 단 한 번에 스러졌다는 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더 이전 작가들은 복음 신앙을 피로써 지킨 정확한 신자 수를 확인하지도 않고, 단지 산만하게 비극적 어조로 비난과 욕설을 쏟아내는 것에 만족했다.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에는 단 아홉 명의 주교만이 사형에 처해졌다고 집계되어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의 순교자에 대한 그의 상세한 계산에 따르면, 겨우 아흔두 명의 그리스도교인만이 순교자의 영예를 얻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 당시 주교들의 신앙적 열성과 용기의 정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전자인 아홉 명으로부터 유용한 추정을 내릴 수는 없다. 하지만 후자는 대단히 중요하고 타당한 결론을 입증하는 데 도움을 준다. 로마 속주들의 분포에 따르면, 팔레스타인은 동방 제국의 16분의 1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진심이었든지 아니면 위장된 자비심이었든지 간에 신자들의 피로 손을 더럽히지 않은 총독들이 있었으므로, 그리스도교의 발상지인 팔레스타인에서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의 통치하에 놓여 있던 동방 세계의 전체 순교자 중 적어도 16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가 배출되었다고 믿는 것이 합당하다. 그러면 전체 순교자수는 대략 1500명 정도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이 숫자를 10년의 박해 기간으로 나누면, 매년 150명의 순교자가 나오는 셈이다. 이탈리아, 아프리카, 아마도 에스파냐의 속주들에 동일한 비율을 적용해 보면, 그곳에서는 박해 시작 2∼3년 후부터 박해 법률의 엄중한 시행이 유보되거나 폐지되었기 때문에, 로마 제국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처형당한 그리스도교인의 수는 대략 2000명 이하로 줄어들 것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이전의 어느 박해 시기보다 더 그리스도교인의 수가 많았고 적들도 더욱 격분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아니므로, 이 온당하고도 개연성 있는 수치 계산은 그리스도교를 세상에 전도하려는 목적으로 목숨을 바친 초기 성인과 순교자의 수를 어느 정도 추정 가능하게 한다.(689∼690쪽)

 

(나의 생각)

 

『로마제국 쇠망사』 에 담긴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기독교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불러일으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온갖 세심한 사료들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그지없이 꼼꼼하게 검토했을 게 분명한 이 불세출의 역사가가 일부러 기독교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킬 목적으로 역사를 축소하거나 과장했다고는 판단하기 어렵다.

 

 

 * * *

 

마음에 내키지는 않지만 우울한 진상을 밝히는 것으로 이 장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즉 순교의 주제에 관해 역사가 기록해 두었거나 종교적 목적으로 위장된 이야기들을 아무런 주저나 의심 없이 받아들인다 해도, 그리스도교인들이 교회 내부의 불화 과정에서 서로에게 가한 고통이 광신적인 이교도에게 당한 박해보다 훨씬 더 가혹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한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뒤에 이어진 '무지의 시대' 동안, 로마 시의 주교들은 라틴 교회(서방 교회)의 성직자뿐만 아니라 평신도에게까지 지배력을 확장시켜 나갔다. 이들이 설립했고, 오랫동안 이성의 미약한 노력을 무시해 온 미신 조직은 마침내 12·∼16세기에 종교 개혁가라는 대중적 성격을 취한 용감한 광신자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로마 교회는 사기 행위를 획득했던 제국을 그때부터는 무력으로 지켜 나갔다. 즉 평화와 자비의 조직이 추방, 전쟁, 대량 학살, 이단 심문소의 건설 등으로 순식간에 오욕을 입은 것이다. 그리고 종교 개혁가들이 신앙의 자유와 시민의 사랑으로 기운을 얻자, 가톨릭 황제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성직자의 이해관계와 연결시키고 화염과 무력으로써 영적 감시의 공포를 강화시켜 갔다. 네덜란드에서만 카를 5세의 지배하에 1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처형당했다고 전해지는데, 이 엄청난 숫자는 그로티우스가 증언하고 있다. 천재이자 학자인 그는 종파들이 다투는 광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중용을 지켰고, 인쇄술의 발명으로 정보의 교류가 손쉬워지고 검열의 위험도 증대된 때에, 시대와 조국에 관한 연대기를 써서 남겼다. 그로티우스의 권위를 믿는다면, 단일 속주 단일 통치 기간에 처형된 신교도의 수가 로마 제국 전역에서 3세기의 통치 기간 중 발생한 초기 순교자의 수를 훨씬 능가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일 리 없다는 가정이 증거의 가치보다 우세하거나, 그로티우스가 종교 개혁가들의 공적과 수난을 과장했다는 과오가 입증된다면, 우리는 자연히, 그렇다면 쉽사리 믿는 고대인들이 남긴 미심쩍고 불완전한 기록들은 과연 어떻게 믿을 수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또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보호 아래에서, 그들의 자비로운 군주에게 패한 동료 황제들이나 무시할 만한 선대 황제들이 그리스도교인에게 가했던 박해를 기록하는 독점적 특권을 누린 궁정 주교(에우세비우스)와 격렬한 웅변가(락탄티우스)를 과연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690∼691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 쇠망사_1권』 

 

(나의 생각) 

 

이토록 단순한 수치 하나만으로도 에드워드 기번은 '일반 사람들의 그릇된 상식 혹은 통념'을 얼마나 통렬하게 무너뜨리고 마는가. 버지니아 울프의 말대로, 기번과 함께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

 

"기번은 우리가 보아야 하는 것들을 균형 감각을 잘 갖추어 가며 볼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서는 압축하고 저기서는 확장한다. 그는 순서와 사건을 바꾸어 놓고, 강조하고, 생략하기도 한다…… 우리는 부드럽게 위아래로 흔들리는 목마에 올라타 몇 시간이고 로마 제국 쇠망사를 읽다가 어느 순간 목마가 땅을 떠났음을, 날개 달린 준마를 타고 있음을 알고 퍼뜩 놀란다. 큰 원을 그리며 하늘을 나니 아래로 유럽이 펼쳐진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간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 버지니아 울프

 

 

*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305)

 

비천()한 데서부터 승진하여, 황제 누메리아누스의 친위 대장()이 되고, 황제가 암살된 후, 284년에 군대의 추대로 제위()에 올랐다. 제국을 동서로 구분하여 다스리고, 286년 자기는 동방의 정제로 취임, 갈레리우스를 부제로 한 후, 또 서방에는 정제 막시미아누스, 부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두어 통치케 했는데, 이로써 제국의 4분치제도()가 성립되었다. 수도를 니코메디아에 두고, 군사() 경제상 중요한 동방을 직할하면서, 전 제국을 통치했다. 동양풍의 의례를 채용하여 군주의 존엄()을 높이고, 전제 군주 정치의 실현을 계획, 황제 예배를 성행케 함과 동시에 갈레리우스의 권면을 수납하여, 303년 기독교의 최후적인 박해를 했다. 그 해 처음으로 로마를 방문하여 치정 20년 기념제()를 개최하고, 305년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퇴위, 제국을 부제에게 물려준 후, 달마티아의 살로네(Salonae)에서 여생을 보냈다.(출처:네이버 백과)

 

 

 * 갈레리우스(재위 305∼311년)

 

29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로부터 로마제국의 동부를 다스리는 카이사르에 임명되었으며, 도나우강변에 웅거하던 야만족을 격퇴하여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였다. 298년 페르시아와 우세한 전투를 함으로써 유리한 강화()를 맺을 수 있었다.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헌책()하여 그리스도교의 대박해를 시행하도록 하였으며, 305년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위에서 물러난 뒤 서부의 통치자인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즈와 함께 정식 황제가 되어 동부를 통치하였다. 309년 병을 얻은 후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를 완화하게 되었다.(출처:네이버 백과)

 

 

* 에우세비우스

 

팔레스티나의 비자유인으로 출생. 313년 이래 카이사레아의 주교였다. 스승 팜필로스의 이름을 따서 에우세비우스 팜필리라고도 부른다. 젊어서부터 팜필로스가 세운 신학교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되었는데, 같은 이름의 니코메디아의 주교와 함께 콘스탄티누스 1세의 궁정에 출입하며,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에서 크게 활약하였다. 오리게네스의 영향을 많이 받고 아리우스설()에 공명하는 등 교회의 정통적 교리와 다른 견해도 가졌지만 성서학() ·호교학() ·교회사() ·교의신학() 등 당시 신학의 전 영역에 걸친 많은 저작을 남겼다.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자료를 참고하여 사도(使)시대부터의 교회 역사를 쓴 대표작 《교회사 Ekklesiastike Historia》(10권)가 있다. 또 그의 《연대기 Chronicon》는 율리우스 아프리카누스의 저작에 기초를 두어, 초대 교회 때부터 325년까지에 이르는 세계사 개요와 연표를 다루었는데, 그리스어 원본은 단편()밖에 전하지 않으나 히에로니무스의 라틴어역 및 아르메니아어역이 있다. 이 밖에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의 박해사실을 쓴 《팔레스타인의 순교자들》과 호교론서인 《히에로클레스 반박문》 등 다수가 있다.(출처:네이버 백과)

 

 

락탄티우스(240?∼320?)

 

북아프리카 누미디아 지방 출생. 니코메디아(현재의 이즈미트)에서 수사학()을 배우고, 300년경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자 신학 저술에 전념하였다.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공인될 무렵 콘스탄티누스1세의 초빙을 받고 트리어로 가서 궁정신학자가 되어 황제의 종교정책수행을 돕고, 대제의 맏아들 크리스푸스도 지도하였다. 주요저서에는 《신학체계》 《하느님의 진노에 대하여》 등이 있다. (출처:네이버 백과)

 

 * 그로티우스(1583∼1645)

 

네덜란드의 법학자로서 국제법의 아버지라 불리운다. 네덜란드의 부르주아 혁명기의 사람으로서 라이든 대학에서 수학했다. 로테르담 시장으로 재직중 종교투쟁으로 인해 종신금고 및 재산몰수의 형을 받고(1618) 프랑스로 탈출(1620), 그후 스웨덴으로 건너가 스웨덴의 주프랑스대사가 되었다.

1645년 네덜란드에 귀국. 부르주아적 자연법 이론을 설명하고, 법과 국가는 지상적인 것이지 천상적인 기원에 의하지 않으며 사람들 사이의 의견의 일치에 의해 국가가 성립한다는 것을 주장했다. 중세의 신학 및 스콜라학으로부터 국가 및 법을 해방시키는 데 공헌하였으며, 그의 저작 『전쟁과 평화의 법』(De Jure Belli ac Pacis, 1625) 3권에서 자연법적 국제법을 체계화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출처:네이버 백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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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9-04-23 07: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외부의 적과 싸우는 것보다 내부의 적과 싸우는 내전이 더 치열한 양상을 보이는 것은 「갈리아 원정기」와 「내전기」를 비교하면 더 잘 다가온다 생각됩니다. 서로를 더 잘 알기에, 역사에 정통으로 남기 위해 그런 것이 아니었는가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의 발전사에서 외부의 적, 적그리스도의 존재는 반드시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초기에는 로마제국, 제국의 종교로 공인된 후에는 이교도라는 적이 필요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oren님 덕분에 초기 기독교회사에 대해 다시 생각하개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oren 2019-04-23 09:55   좋아요 1 | URL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그리스도교도들이 로마제국으로부터 온갖 핍박과 박해를 받은 이유 가운데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교가 다른 종교들에 대해 무척이나 배타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다신교를 수용하는 입장이었고, 광범위한 제국의 영토 내에서 무수한 신전들이 조상 대대로 다양한 신들을 모시고 경배해 왔었는데, 그걸 모조리 우상 숭배로 치부하고 한사코 부정했으니까 말이지요. 초기의 많은 그리스도교도들이 종교 문제로 붙잡혀 갔을 때 ‘제단에 향을 피우는 행위‘만 인정하더라도 풀려나고 방면되었다는 이야기는 요즘 사람들에겐 실소를 자아내는 일처럼 느껴지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탄압 대상‘이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매우 중요한 척도였던 것 같습니다.^^

겨울호랑이 2019-04-23 10:04   좋아요 1 | URL
oren님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한국 기독교사 초기 신해박해부터 병인박해에 이루어진 탄압의 이유가 제사였음을 떠올리게 됩니다. 지금 천주교에서는 제사를 조상공경이라 하여 허용하지만, 과거에는 이와 달라 대규모 순교자가 나왔다는 사건 속에서 내용과 형식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oren 2019-04-23 11:40   좋아요 1 | URL
초기 그리스도교가 박해를 받은 이유 중에는 ‘조상에 대한 제의 거부‘뿐만 아니라 온갖 다양한 ‘조상전래의 수호신‘에 대한 거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흥미로운 건 정권이 바뀔 때마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경우도 있었고, 그걸 끝끝내 참지 못하고 끈질기게 박해한 경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황제들의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졌던 셈이지요. 또한 황제들 주변 인물들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따라 ‘박해의 정도‘가 달라지기도 했고요. 그리스도교가 전세계로 전파되는 과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가 수도 없이 반복되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고요. 그런데 이웃나라 일본은 다신교에 대한 전통과 집착이 워낙 강한 탓인지 기독교의 교세가 아직까지도 너무 미미해서 놀랍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