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오도시우스는 콘스탄티누스 사후 거의 20년 가까이 중단되었던 신성ㅎ나 노역을 정력적으로 재개하여 결국 완성했다. (…) 신앙심 깊은 황제는 이교에 대한 최초의 실험이 성공한 데 고무되어 금지령을 거듭 선포함으로써 이교도에 대한 탄압을 강화해 나갔다. 처음에는 동로마의 속주를 대상으로 공포되었던 법률이 막시무스가 패배한 이후 서로마 제국 전체에까지 적용되었다. 테오도시우스가 거둔 승리 하나하나가 그리스도교와 가톨릭 신앙의 승리에 기여했다. 그는 희생 제의를 수치스러울 뿐 아니라 범죄 행위라고 선언하여 금지함으로써 이교 신앙의 급소를 공격했으며, 희생 제물의 창자를 살펴보는 일은 더욱 엄격하게 비난했다. 이후 부속 칙령들은 이교 신앙의 핵심인 제물을 바치는 행위 전체를 동일한 범죄 행위로 규정하였다. 신전들은 희생 제의를 바칠 목적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국민들이 위험한 유혹에 넘어가 황제가 입안한 법을 어기지 않도록 해 주는 것이 자비로운 군주의 의무였다. (…) 그들은 신전을 폐쇄하고, 우상 숭배에 쓰이는 도구들을 압수하거나 파괴하고, 신관들의 특권을 폐지하고, 신전에 헌납된 재산을 황제나 교회, 군대가 쓰도록 몰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쯤에서 신전의 파괴를 중지했더라면 더 이상 우상을 섬기는 데 쓰이지 않고 버려진 신전 건물들을 광신이 몰고온 파괴적인 분노로부터 보호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 신전들은 그리스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기념물이었고, 황제도 자기 도시의 아름다움을 손상시키거나 그 가치를 떨어뜨릴 생각은 없었다. 그 장려한 건축물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기념하는 영구불멸의 전리품으로 남겨 두어도 좋았을 것이다. 예술이 쇠퇴한 시대에 이 건물들은 창고, 공장, 공공 집회 장소 등으로 유용하게 쓰이거나 신전 벽을 성스러운 의식으로 충분히 정화한 뒤 참된 신을 섬기는 장소로 바꾸어 우상을 숭배한 과거를 속죄하게 할 수도 있엌ㅆ다. 그러나 신전들이 존재하는 한 이교도들은 제2의 율리아누스가 나타나 신들의 제단을 다시 일으켜 세우리라는 어리석고ㅗ 비밀스러운 소망을 버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효과도 없는 탄원을 황제에게 진지하게 바치는 모습은 가차 없이 미신을 뿌리째 뽑아 없애고 말겠다는 그리스도교도 개혁자들의 열정을 더욱 붇돋웠다. 황제가 내놓은 법은 좀 더 온건한 편이었으나, 법 집행 과정에서 보여 준 냉담하고 무성의한 태도는 교회의 영적 지도자들이 앞장서거나 뒤에서 부추긴 광신과 약탈 행위를 막기에 역부족이었다. 갈리에엇 투르의 주교였던 성 마르티누스는 충성스러운 수도사 무리를 이끌고 그의 광대한 교구에 있는 우상들과 신전들, 봉헌수(봉헌수)들을 모조리 파괴했다. 마르티누스가 이 고된 작업에 기적의 힘을 빌렸는지 인간의 무기를 썼는지는 독자의 신중한 판단에 맡긴다. 시리아에서는 테오도레투스에 의해 '거룩하고 훌륭한 마르켈루스'라고 불렸던 주교 마르켈루스가 사도로서의 열정에 넘쳐 아파메아 교구에 있는 장려한 신전들을 초토화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유피테르 신전은 워낙 뛰어난 기술로 단단하게 건축되어 있어서 그의 공격에 끄떡도 하지 않았다. 건물은 높은 언덕 위에 세워져 있었다. 사면에 걸쳐 둘레 16피트에 달하는 열다섯 개의 큰 기둥이 높이 솟은 지붕을 떠받치고 있었고, 이 기둥을 이루는 큰 돌들은 납과 쇠로 단단히 고종되어 있었다. 온갖 강하고 날카로운 도구도 여기에는 소용이 없었다. 결국 기둥의 토대를 부수기로 하고 나무로 된 지주를 불태우자, 기둥은 이내 무너져 내렸다. (…) 승리감에 도취한 마르켈루스는 어둠의 세력을 물리치고자 자신이 직접 나섰다. 교회의 깃발 아래 수많은 병사들과 검투사들이 진군하여 아파메아 교구의 마을과 지방 신전들을 잇달아 공격했다. 한쪽 다리가 불편한 마르켈루스는 이교도의 저항에 직면하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경우에 싸우거나 도망칠 수가 없었기 때문에 화살이 닿지 않을 곳까지 멀리 피해 있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중함이 오히려 그의 죽음을 초래했다. 갑자기 격분한 한 떼의 농부들이 그를 덮쳐 살해한 것이다. 속주의 종교 회의는 지체 없이 마르켈루스가 신의 대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고 선언했다. 분노한 수도사들이 이 대의를 지지하기 위해 사막에서 노도처럼 몰려와 자신들의 신앙심과 열성을 과시했다. 이교도들이 그들에게 원한을 품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 중 상당수는 탐욕스럽고 무절제하다는 비난을 받아 마땅한 자들이었다. 그들은 약탈로 탐욕을 채우고 자기들의 너덜거리는 의복, 고래고래 부르는 찬송가 소리, 창백하게 꾸민 얼굴 따위를 찬미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주머니에서 우려낸 돈으로 실컷 먹고 마셔댔다. 몇몇 신전들만이 민정 관리나 성직자들의 공포심 ㅓㄱ에, 혹은 그들이 매수된 탓에, 아니면 그들의 취향이나 신중함 덕에 보호되었다. 카르타고에서 반경 2마일에 걸쳐 성역을 형성하고 있던 거룩한 베누스 신전은 현명하게도 그리스도교 교회로 바뀌었다. 장엄한 로마의 판테온도 비슷한 조치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내의 대부분 지역에서 광신도 무리들은 권한도 규율도 없이 평화로운 주민들을 침략했다. 이때 파괴된 건축물들의 폐허는 아직까지도 남아 야만인들이 열성적으로 자행한 파괴 행위를 보여 주고 있다.
이 광범위하고 다양한 유린 행위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세라피스 신전의 파괴는 특히 눈길을 끈다. 세라피스는 미신이 번창했던 이집트의 토착신이나 괴물들 중 하나는 아니었던 것 같다. 프톨레마이오스 가의 첫 번째 왕은 어느 날 꿈속에서 폰투스 해안에서 오랫동안 시노페 주민들의 숭배를 받아 온 신비스러운 이방의 신을 맞으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 신의 셩격과 권세는 애매했으므로, 그가 태양을 상징하는가 아니면 어두운 지하 세계를 다스리는 군주인가의 여부를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조상들의 종교르 ㄹ고수해 온 이집트인들은 이 이방의 신을 자기들 도시의 성벽 안에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아첨꾼인 신관들은 프톨레마이오스 가의 왕들이 준 뇌물에 넘어가 폰투스에서 온 신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토착신으로서의 영예로운 계보를 꿈 주었다. 그리하여 이 찬탈자는 운 좋게 이시스이 남편으로서 이집트의 거룩한 군주인 오시리스의 왕좌와 침대를 차지했다. 알렉산드리아는 특별히 그의 보호를 청하여 세라피스의 도시라는 이름으로 영광을 누렸다. 이 신의 신전은 위풍당당한 유피테르 신전과 겨루기 위해 도시의 다른 부분보다 백 단 정도 높게 인공으로 쌓아 올린 산의 널따란 정상에 세워졌다. 내부의 벽이 없는 부분은 아치로 단단히 지탱했고 지하에는 납골당과 다른 지하 공간으로 분리해 놓았다. 사각형의 주랑이 신전 건물을 둘러쌌으며, 웅장하고 화려한 홀과 정교한 동상들이 예술의 극치를 과시했다. 잿더미에서 새롭게 재던된 유명한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는 고대 학문의 보배들이 보관되었다. 테오도시우스의 칙령으로 엄격히 금지된 이교의 희생 제의가 세라피스의 도시와 신전에서만은 여전히 용인되었다. 이렇게 유일한 예외가 인정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교인들이 미신적인 공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두려움 때문에 나일 강의 범람과 이집트의 풍작, 그로 인한 콘스탄티노플의 생존을 보장해 준다는 고대 의식을 감히 폐지하지 못했던 것이다.
당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는 테오필루스였다. 그는 평화와 미덕과는 거리가 먼 인물로, 피와 금으로 번갈아 가며 손을 더럽힌 대담하고 부패한 악한이었다. 그는 세라피스가 누리는 영예에 분개했다. 테오필루스가 바쿠스의 신전에 가한 모욕을 기억하는 이교도들은 그가 훨씬 더 중대하고 위험한 일을 꾸미는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소란스러운 이집트 수도에서는 극히 사소한 도발조차도 내전의 도화선이 되기에 충분했다. 세라피스의 신도들은 힘으로 보나 수로 보나 그리스도교인들의 적수가 못 되었지만, 신들의 제단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철학자 올림피우스의 선동에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광신적인 이교도들은 세라피스 신전을 요새화하고 대담한 반격과 단호한 방어로 포위군을 격퇴했으며, 그리스도교인 포로들에게 비인간적인 가혹 행위를 가하면서 절망감을 달랬다. 신중한 속주 총독의 노력 덕에 테오도시우스의 답변으로 세라피스의 운명이 결정 날 때까지 두 세력이 휴전하자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양측이 비무장 상태로 대광장에 모인 자리에서 황제의 칙서가 공개 낭독되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우상들에 대한 파괴 명령이 선포되자, 그리스도교인들은 기쁨의 환호를 올렸다. 반면 불운한 이교도들은 분노가 경악으로 바귀면서 적들의 분노를 피해 황급히 자리를 물러나 도망치거나 은둔했다. 이제 세라피스 신전을 파괴하러 나선 테오필루스를 막는 것은 신전 자재의 무게와 견교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이 장애를 도저히 극복할 수 없었으므로, 그는 토대는 그대로 남겨 두고 건물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잔해를 치운 자리에는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을 기리는 교회가 세워졌다. 알렉산드리아의 귀중한 도서관도 약탈당하거나 파괴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뒤 텅 빈 서가의 모습은 종교적 편견에 완전히 물들지 않은 구경꾼들로부터 비탄과 분노를 자아냈다. 영영 회복할 수 업시 소멸되어 버린 고대 천재들의 저작은 후세의 즐거움과 교육을 위해서라도 우상 숭배의 파괴 대상에서 제외시켰어야 했다. 값진 전리품들만으로도 대주교의 신앙열과 탐욕을 충분히 채울 수 있었을 것이다. 테오필루스는 금은으로 만든 동상과 항아리들은 셋ㅁ하게 녹였고, 값이 덜 나가는 금속 제품들은 망가뜨려 거리에 내동낻이쳤다. 그는 우상을 모시는 신관들의 기만과 악덕, 즉 자석을 이용한 교묘한 속임수, 속이 빈 조각상 속에 사람을 넣는 비밀스러운 수법들, 신앙심 깊은 남편들과 의심할 줄 모르는 여자들의 신뢰를 악용해서 저지른 비행 등을 폭로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와 같은 비난들은 교활하고 불순한 이교의 정신과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전혀 터무니없지는 않을 것이가. 그러나 이미 쓰러진 적을 모욕하고 비방하는 비열한 소행도 그보다 낫다고 는 할 수 없다. 또한 실제로 기만 행위를 입증하는 것보다느 ㄴ가공의 이야기를 꾸며 내는 편이 훨씬 쉽다느 ㅈ점을 생각하면 그러한 비난들을 선뜻 빋기도 어렵다. 세라피스의 거대한 조각상은 자기의 신전과 조요과 함꼐 폐허 속에 묻혔다.(74쪽)
- 에드워드 기번, 『로마 제국 쇠망사_제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