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 빠지다





정말 오랫동안 기다려온 공연이었다.

평소에 실황 연주를 자주 찾는 편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올해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예당을 자주 찾았다. 이 시대의 거장 지휘자들이 음악을 통해 공감하려고 하는 게 진정 어떤 것일까 하는 탐구심이 과도하게 작용한 탓도 있었으리라.

따스한 봄이 채 오기도 전인 금년 2월부터 로열 콘세르트 헤보우(RCO)를 찾았고, 봄과 여름을 거치며 발레리 게르기예프, 로린 마젤, 파보 예르비 등등이 지휘했던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 프랑크푸르트 방송교향악단,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더필즈, 마린스키 오케스트라 등의 실황연주를 두루 온몸으로 느꼈다. 협연자로 나섰던 바이올리니스트 재닌 얀센, 힐러리 한, 사라 장, 피아니스트 손열음, 임동혁 등의 연주 모습도 아직까지 눈에 아른거린다. 그리고 그들이 연주했던 차이코프스키, 말러, 드보르작, 바르톡, 라흐마니노프와 쇼스타코비치의 음악들도 내 몸 속 어디엔가 깊이 박혀 언제든지 '재생'시킬 준비를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내가 올해 봄부터 손꼽아 기다려온 공연은 그 무엇보다 베토벤의 2번과 3번, 5번과 6번을 들려줄 마리스 얀손스의 바이에른 방송 교향악단(BRSO) 연주였다. 베토벤의 음악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비할 데 없는 삶의 깊이, 좌절과 고난과 고통을 거쳐 승화된 삶의 기쁨을 드러내는 형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은 다른 음악가들의 그것과는 좀처럼 비교하기 어려운 점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루트비히 판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출처: 위키피디아] >

베토벤의 교향곡은 실황연주에서는 좀처럼 감동을 주기 어려운 레퍼토리로 알려져 있다. 그건 오케스트라 단원들과 지휘자와의 오래 갈고 닦은 앙상블은 물론이고 지휘자와 단원들의 '삶의 깊이와 철학'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작곡가 베토벤이 온몸으로 느끼며 창조했던 그런 음악의 놀라운 경지를 재생해 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베토벤의 작품은 연주자의 개인기나 잔기교가 통할 여지조차 허락하지 않고 그 밑천을 송두리째 모두 드러낼 수밖에 없는 레퍼토리인 셈이다.

그런데 얀손스는 어떤 인물인가.


(사진제공 : 빈체로)


1943년에 라트비아에서 태어난 그는 1996년 4월에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푸치니의 <라 보엠>을 지휘하다가 심장마비로 쓰러졌었다. 그의 심장에는 차가운 금속 제세동기(심장 박동을 회복하는 장치)가 심어져 있다. (그의 부친 아르비드 얀손스도 유명한 지휘자였고, 지휘도중 쓰러져 사망했다.) 그래서 그는 분명 죽음에 대해 남달리 숙고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베토벤 역시 귓병이 날로 악화돼 아예 '치유불능'이라는 판정을 받은 이후 병마와 창작의 고통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린 끝에 차라리 죽음을 떠올리고 그 유명한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를 쓴 적이 있었다. "이대로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다. 죽음이 나를 끝없는 고뇌에서 해방시켜 줄 테니."

다행히 베토벤도 그때 죽지 않았고, 얀손스도 아직 죽지 않았다. 그래서 베토벤은 죽음 대신에 불후의 걸작들을 만들 수 있었고, 마리스 얀손스 또한 베토벤 음악을 연주할 때면 우리에게 더욱 특별한 감동을 안겨주는 것 같다.

그가 이번 내한공연을 앞두고 가진 어느 인터뷰는 이렇다.

“근래 베토벤에 끌려 악보를 파고들면서 깊이 공부하고 있다. 베토벤의 극적인 삶을 더 깊이 이해하게 돼서일까? 작곡가가 하려는 말과 내 감정을 어우러지게 하는 작업이 중요하다. 에너지가 넘쳐나는 한국 관객들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었다.”

그가 작년에 바이에른 방송이 제작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해서 한 얘기도 인상적이다.

"전에는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러시아음악 스페셜리스트라고 말했습니다. 지금은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하이든 연주로 칭찬받고 있지요. 그러나 요즘 제일 관심이 가는 작곡가는 베토벤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그에게 끌립니다. 베토벤은 특별합니다. 철학적이고 매우 깊이가 있습니다."

나는 이제껏 마리스 얀손스가 지휘하는 연주를 방송에서 가끔씩 보거나 아니면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몇 차례 본 게 전부였다. 그러나 그는 이미 '우리시대 최고의 지휘자'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닌다. 2008년에 영국의 그라모폰은 그가 수석지휘자를 맡고 있는 네덜란드의 로열 콘세르트 헤보우 오케스트라(RCO)를 ‘세계 1위’ 악단으로 꼽았고, 그가 이끄는 또다른 악단인 BRSO는 6위에 올랐다. 세계 10대 오케스트라 중 두 곳을 '두 아들'로 두고 있는 지휘자인 셈이다. 그는 훌륭한 지휘자였던 자신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예브게니 므라빈스키와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라는 두 거장으로부터 오랜 기간 지휘자 수업을 받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리고 그는 해마다 신년 음악회가 열리는 빈의 무지크페라인에서 무려 두 번이나 연주회를 가졌다. 2012년 1월 1일의 공연도 그의 몫이었다.


(사진제공 : 빈체로)

이 거장의 지휘를 이틀이나 꼬박 그것도 베토벤의 교향곡만으로 즐길 수 있다니 얼마나 가슴벅찬 일인가. 그가 이끄는 BRSO 또한 독일 예술의 중심지인 뮌헨에 자리잡고 있고 베토벤 연주에서만큼은 확실한 차별성을 지닌 것으로 유명하다고 들었다.

첫날 첫 연주에서 들려준 교향곡 2번은 미리 공부하지도 못했고 평소에 자주 듣는 곡도 아니어서 제대로 몰입하기는 다소 어려웠다. 생각보다는 소규모 편성이었지만 독일 악단 특유의 명쾌함과 정교한 짜임새가 느껴졌고 후반부로 갈수록 매끈하고 찰지게 다져진 관현악의 호흡은 얀손스의 춤추는 듯한 몸사위와 한데 어우려져 금새 베토벤의 세계로 빠져들게 했다.

인터미션이 끝난 후 학수고대하던 3번 교향곡 '영웅'은 분위기가 확실히 달랐다. 단원들도 좀 더 가세했을 뿐만 아니라 곡의 주제만큼이나 템포가 씩씩하고 거침없는 호방함이 무대위를 휩싸고 돌기 시작했다. 바이올린 주자들의 일사분란하면서도 유려한 음색뿐만 아니라 중저음의 영역을 맡은 비올라와 더블베이스 연주자들의 활약이 특히 돋보였고 그들이 온몸을 뒤흔들며 줄이 끊어질 듯 힘차게 연주하는 모습은 귀로 들리는 청각과 눈으로 보는 시각의 시너지 효과 때문에 훨씬 더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2악장의 장송행진곡은 죽음의 비통함이 느껴지기 보다는 영웅의 삶의 족적을 통해 인류의 삶을 더욱 높은 경지로 끌어올린 그런 노고와 분투와 희생을 떠올리게 만드는 '거대한 발자취'를 연상시키는 것에 가까웠다.

교향곡 3번 ‘에로이카’는 원래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을 위해 작곡했던 것으로 유명한데, 작곡 도중 나폴레옹이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에 베토벤이 분노하게 되고, 미리 표제로 써두었던 '보나파르트'를 마구 지워냈던 흔적이 아직까지도 남아 있다고 한다. 그래서 영웅은 신화속의 인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준 프로메테우스나 트로이의 전쟁 영웅 아킬레우스를 형상화한 것으로 해석되고 있지만, 인류를 위해 고난을 뚫고 전진해온 수많은 '숨은 영웅들' 모두를 위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듯싶다.

얀손스의 지휘는 그의 온화하면서도 겸손한 내면의 인격이 그대로 표출되는 것으로도 인상적이다. 행진곡풍의 장대한 음악이 울려퍼질 땐 그는 마치 수십만 군대를 지휘하는 장수처럼 지휘봉을 격정적으로 무찔러댄다. 그러다가 한없이 부드럽고 잔잔한 선율이 흐를땐 바삐 움직이던 몸짓을 멈추고 두 손을 아예 허리춤에 가지런히 갖다 놓은 채 보일듯 말듯한 미세한 움직임과 함께 음악 속으로 아예 잠겨버린다. 연주는 너희들이 알아서 하라는 듯이.

 
(사진제공 : 빈체로)

둘째날인 어제 공연은 객석의 분위기부터 사뭇 달랐다. 첫날 공연에서 눈에 띄었던 빈자리를 찾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왠지 모를 열기가 객석을 후끈 달궈놓은 느낌마저 들었다. 제1부에서 연주된 곡은 6번 교향곡 '전원'. 평소에 가끔 들었던 그 교향곡이 맞나 싶을 정도로 감미로운 선율이 한 순간 음악당을 가득 메웠다. RSO의 벨벳처럼 부드러운 현과는 비교하기 어려웠지만 분명 연주가 시작되자말자 순식간에 관객 모두를 어느 평온하고 아름다운 전원 속으로 마법처럼 데려다놓는 놀라운 일이 펼쳐졌다. 비그친 뒤의 청명하기 그지없는 맑은 공기와 푸른 들판, 한가로이 떠다니는 구름들과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정경들이 마구 눈앞에 펼쳐졌다. 시냇물은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면서 흥겹게 재잘거리는 듯 흐르고, 종달새들은 공기를 가르며 이리저리 솟구치다 떨어져 내리는 풍경이 기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어느 순간엔 이름모를 꽃들과 풀꽃의 향기마저 폴폴 떠다니는 듯했다. 아~ 전원교향곡이 이토록 아름다웠던가 싶다. 순간 너무나 감미로운 음악에 빠져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정신없이 1악장과 2악장에 몰입되어 정신이 혼미해져 있는데 어느 순간 음악은 다시 거센 폭풍우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이 우르렁거리고 비바람이 세차게 불면서 폭풍이 온 대지를 거침없이 휩쓸고 지나가는 게 두려울 정도였다. 그런 대자연의 변화무쌍함과 거기에 순종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나약함을 이토록 실감나게 음악 연주로 표현한다는 것이 그저 경이롭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윽고 폭풍우가 잦아들고 숨죽이며 도망치듯 몸을 숨겼던 온갖 생명들이 다시 안도의 숨을 내쉬는 순간 저 멀리서 어둠을 밀어내는 태양이 솟아오를 기미가 보였다. 이윽고 해는 자신의 온몸을 태워 온갖 생명들을 품어안듯 따사롭게 그러나 힘차게 떠올랐다. 다시 광명이 찾아온 것이다. 풀들이 일어나고 새들이 노래하고 농부가 다시 잠에서 깨어나는 듯했다. 온 세상이 온기로 가득했다. 놀라운 연주가 끝난 뒤 관객들은 저마다 흡족한 느낌을 어찌할 줄 모르고 뜨거운 박수를 쏟아냈다. 정말 감동이 온 몸을 휩싸고 돌았다.

휴식후 마지막 연주는 7번 교향곡. 마치 흥겨운 축제가 방금 시작된 듯 힘차게 도약하는 춤과 노래가 거침없이 쏟아져나온다. 지휘자인 얀손스의 몸짓은 어느덧 전신을 들썩거리기 시작하고 현악주자들의 연주는 더욱 격렬해진다. 이어지는 악장에서 트럼펫과 클라리넷과 오보에 등이 현악파트와 절묘하게 합주하는 부분도 인상적이지만, 이 곡은 무엇보다 엔딩으로 치닫는 마지막 4악장의 미친듯한 가속과 흥분과 환희에 가득찬 피날레가 단연 압권이다. 마지막 절정으로 격하게 휘몰아가는 지휘자 얀손스와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어느새 공간의 구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한덩어리가 되어 함께 덩실덩실 춤을 추는 듯한 몽환적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끝없이 고조시키면서 숨가쁘게 몰아가던 음악이 마침내 멈추는 순간, 감격에 겨운 함성들이 여기저기서 동시다발로 마구 쏟아져나왔다. 그 순간, 가슴이 터질 듯이 쿵쾅거리던 내 심장의 거센 박동도 마침내 견디기 힘든 스스로의 압박으로부터 조금씩 천천히 풀려날 수 있게 되었다.


(사진제공 : 빈체로)

베토벤은 낭만적인 사람이었지만에로이카」가 초연될 무렵 청력 손상이 시작되어 나중에는 아예 청력을 잃었다. 그래서 그는 점점 내면으로 향했다. ······ 「에로이카」와 9번 교향곡의 공통점이자 새로운 점, 예컨대 모차르트의 음악과 크게 다른 점은 베토벤이 무엇보다도 자신의 내적인 상태에 집중했다는 데 있다. 그 두 곡에는 자기표현의 충동과 영혼의 극적인 강렬함이 베어 있었다. "베토벤의 음악은 정중하지 않다. 그가 보여주는 극적인 정신, 갈등과 결단의 감정은 이전과 이후의 어느 작곡가에게서도 찾을 수 없다. ······ 9번 교향곡은 예쁘거나 매력적이지 않다. 다만 숭고할 따름이다. ······ 내면을 향한 음악, 정신의 음악, 극단적 주관성의 음악이다." 9번 교향곡은 베를리오즈와 바그너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으며, 브람스, 브루크너, 말러에게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이 되었다. 드뷔시는 그 곡의 악보가 작곡가들에게 '끔찍한 악몽'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만큼 베토벤에 필적할 만한 작곡가는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있다면 바그너뿐이다.
- 피터 왓슨, 『생각의 역사Ⅰ』中에서





댓글(5)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2012-11-22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아고...연주할 때 사진 찍으시면 안 됩니다. 까칠한 연주자의 경우에는 사진 찍은 사람 찾아낼 때까지 연주 못 하겠다고 하는 수도 있어요. 해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oren 2012-11-22 22:01   좋아요 0 | URL
아고... 설마 제가 저 사진들을 다 찍었다고 오해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사진의 출처를 미처 밝히지 못했는데, 뒤늦게나마 님의 댓글을 읽고 오해의 소지를 없앴습니다.)

2012-11-23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3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3 12:2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