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혈병이 재발되어 2012년 7월 18일 새벽에 홀연히 떠나간 '친구에게 바치는 글'을 쓰면서......)

 

기껏해야 고작 "그 자리에" 있을 뿐

고인의 더 이상 거기에 있지 않음이 현상적으로 더 적합하게 파악되면 될수록 그만큼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그러한 식의 죽은 자와의 더불어 있음은 바로 그 고인의 본래적인 종말에 이르렀음을 경험하지는 못한다는 점이다. 죽음은 분명히 상실로서 드러나지만, 그 상실은 남아 있는 자들이 경험하는 상실 그 이상이다. 어쨌거나 상실의 감수 속에서도 죽는 자가 "감수하는" 존재의 상실 그 자체에는 접근할 수 없다. 우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타인의 죽음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고 기껏해야 고작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다.(321쪽)

 

 

 

모두 다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니야.

일상적인 '서로 함께'라는 공공성은 죽음을 부단히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즉 "사망사건"으로서 "알고" 있다. 가깝거나 먼 이 사람 또는 저 사람이 "죽는다." 모르는 사람들이 매일 매시간 "죽는다." "죽음"은 세계내부적으로 일어나는 주지의 사건으로 만나고 있다. 죽음은 그러한 사건으로서 일상적으로 만나는 것의 성격인 눈에 안 띔 속에 남아 있다. '그들'은 또한 이런 사건을 위해서 이미 하나의 해석을 확보해 놓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해서 밖으로 말하거나 대개는 조심스럽게 "재빨리" 하는 이야기는, '사람은 결국 다 한 번은 죽는다. 그러나 우선은 이것이 나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남의 일일 뿐이다]'라고 말하려고 한다.
······
"사람은 죽는다"는 말은 죽음이 [내가 아니라] '그들'을 적중시킨다는 의견을 퍼뜨린다. 공공의 현존재 해석은 "사람은 죽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함으로써 모두 다른 사람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꾸며댈 수 있기 때문이다 : 모두 다이기는 하지만 나는 아니야. 왜냐하면 여기서의 '그들'이란 아무도 아니기 때문이다. "죽음"은 하나의 [다반사적] 사건으로 평준화되어버린다. 분명히 현존재에게 해당은 되지만 고유하게는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는 그런 사건으로 평준화되어버린다.
······
죽음을 은폐하며 회피하는 태도가 워낙 질기게 일상성을 지배하고 있어서, 서로 함께 있으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 종종 이렇게 꾸며댄다 : 당신은 이제 금세 괜찮아져[죽음을 모면하여] 다시 당신의 잘 배려된 세계의 안정된 일상으로 되돌아갈 것이다. 그런 식의 "심려"는 심지어 그렇게 말함으로써 "죽어가고 있는 사람"을 "위로한다"고 생각한다. 이 심려는 그가 자신의 가장 고유한, 무연관적 존재가능을 완전히 덮어버리도록 도와주어, 그를 현존재 속으로 다시 데려오려고 한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죽음에 대한 부단한 안정감을 배려해준다. 그러나 이 안정감은 근본적으로는 "죽어가고 있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마찬가지로 "위로하는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338쪽∼340쪽)

 

 

 

죽음의 확실성과 죽음의 [들이닥침의] '언제'의 무규정성은 같이 간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 죽음은 확실히 온다 ; 하지만 아직 당장은 아니다. "하지만"이라는 이 말로써 '그들'은 죽음에서 확실성을 부인한다. "당장은 아직 아니다"는 단순한 부정적 발언이 아니라, 오히려 일종의 '그들'의 자기해석이다. '그들'은 이 자기해석으로써 자신에게 우선 현존재에게 접근 가능하고 배려 가능한 것으로 남아 있는 그것을 지시해준다. 일상성은 배려와 긴급성에 쫓겨서 나른한, "행위 없는 죽음에 대한 상념"의 사슬로부터 도망친다, 죽음은 "언젠가 나중에"로 미루어지는데 그것도 이른바 "일반적 추측"을 끌어들이면서 그렇다. 이렇게 '그들'은 죽음이 어느 순간에건 가능하다라는 이 죽음의 확실성의 고유함을 은폐한다. 죽음의 확실성과 죽음의 [들이닥침의] '언제'의 무규정성은 같이 간다. 일상적 죽음을 향한 존재는 이 뮤규정성에 규정성을 부여함으로써 그 무규정성을 피해간다. 그러나 그런 규정이 삶을 다하게 되는 순간을 계산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는 없다. 현존재는 도리어 그런 규정성 앞에서 도망한다. 일상적 배려는 확실한 죽음의 무규정성 앞에 가까운 일상의 내다볼 수 있는 긴급함과 가능성을 끼워넣는 식으로 그 무규정성을 자신을 위해서 규정한다.(345쪽)

 

 

 

모든 타인과의 더불어 있음이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가장 고유한 가능성은 무연관적 가능성이다. 미리 달려가봄은 현존재로 하여금 그 안에서 단적으로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 문제가 되고 있는 바로 그 존재가능을 유일하게 그 자신으로부터 떠맡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한다. 죽음은 그저 고유한 현존재에게 무차별하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현존재로 하여금 개별 현존재일 것을 요구한다. 미리 달려가봄에서 이해된 죽음의 무연관성은 현존재를 그 자신에게로 개별화시킨다. 이러한 개별화는 실존을 위해서 "거기에"를 열어밝히는 한 방식이다. 이 개별화는,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이 문제가 되면, 모든 배려되고 있는 것 곁에 있음과 모든 타인과의 더불어 있음이 소용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준다. 현존재는 오직 그 자신이 스스로 가능하게 만들 때에만 본래적으로 그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을 뿐이다. (352쪽)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실존론적으로 기획투사된 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에 대한 성격규정을 다음과 같이 종합할 수 있다 : 미리 달려가봄은 현존재에게 '그들' - 자신에 상실되어 있음을 드러내보이며 현존재를, 배려하는 심려에 일차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채,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가능성 앞으로 데려온다. 이때의 자기 자신이란, '그들'의 환상에서부터 해방된 정열적이고 현사실적인, 자기 자신을 확신하고 불안해하는 죽음을 향한 자유속에 있는 자신이다. (355쪽)

 


 

근시안적 시야

"삶"을 문제삼고 그리고 나서 또한 가끔씩 죽음을 고려에 넣는다면, 그 시야는 너무 근시안적이다.(419쪽)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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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3 17: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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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7 14: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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