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결한 죽음



                        8월 여름이었다. 내가 사는 빌라 현관 입구를 지나치려다가 계단 밑에서 몸을 웅크린 참새를 발견했다. 참새 중에서도 몸집이 작은 것으로 보아 새끼가 분명했다. 참새는 내가 가까이 다가갔는 데도 몸을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더위 먹은 참새였다.

​

자세히 보니 깃털도 여기저기 뽑힌 것으로 보아 들짐승의 공격도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손 감옥을 만들어 새를 가둔 후에 집으로 데려갔다. 우선, 베란다에 물을 흥건히 뿌려 온도를 낮추고, 잎이 넓어서 짙은 그늘이 지는 파초 화분에도 물을 흥건히 뿌려서 환경을 조성한 후에 참새를 그 화분 속에 넣어 두었다. 서서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늘에서 쉬면서 기운을 차리면 곧 하늘로 날아가리라. 쌀과 함께 물그릇도 화분 속에 두었다. 나는 화분 속 참새가 궁금하여 자주 베란다를 향했다. 참새는 그때마다 인기척을 알아차리고는 숨는 시늉을 하곤 했다. 쉽게 죽을 것 같진 않았다. 부릅뜬 눈이 제법 초롱초롱했다.

​

10분이 흘렀을까 ?  내가 다시 그 참새를 보러 갔을 때 참새는 그새 죽어 있었다. 그때 내가 발견한 것은 " 참새의 간결한 죽음 " 이었다. 참새는 죽기 전까지 두 눈 부릅뜨고 서서 버티다가 동정同情도 없이, 애도哀悼 도 없이, 그리고 자기 연민도 없이 홀로 죽는 것이다. 나는 이 작은 짐승의 죽음 앞에서 어떤 숭고한 힘을 느꼈다. 불현듯 D.H 로랜스의 Self Pity / 자기 연민'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자기 연민에 빠진 짐승을 본 적 없네

얼어 죽어 가지에서 떨어지기 전까지

작은 새, 결코 자신을 동정하지 않네


죽은 참새를 크리넥스 티슈로 감싼 후에 산에 묻었다. 들짐승이 무덤을 파헤치지 않도록 그 위에 제법 큰 돌을 얹었다. 최은영 소설집 << 쇼코의 미소 >> 에 수록된 단편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에서도 " 곰 " 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는 홀로 죽기 위해 평생을 살았던 보금자리 집을 떠나, 어두컴컴한 어느 곳에서 죽는다. 


곰은 마지막 며칠 동안 너무 아파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 그런데도 곰아, 부르면 애써서 고개를 들고 꼬리를 치는 거야. 곰아, 밥 먹어, 말하면 곰은 안 아픈 척 밥에 코를 대고 먹는 시늉을 했어. 그런 곰 앞에서 울었어. 곰이 단순히 아픈 게 아니라 죽어간다는 걸 느꼈거든. 한 밤을 자고 나서 개집에 가니 곰이 사라졌더라. 그애가 사라지고 한 달 내내 울면서 학교를 다녔어. 울고 또 울었지. 내가 괜히 곰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 곰이 집을 나갔다고 생각했어. 자기가 아픈 걸 보고 내가 마음 아파하니까 죽으러 나간 거라고 생각하며 자책했지. 아무리 슬프더라도 내색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울지 말았어야 했는데. 




- 최은영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곰은 죽을자리를 찾기 위해 보금자리를 떠난다. 곰은 자신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는다. 내가 키우던 개도 그랬다. 죽기 10분 전까지 고개 빳빳이 들었다. 내일 다시 올게 _ 라는 내 말에 개는 힘차게 꼬리를 흔들었다. 일련의 죽음들과 마주하면서 깨닫게 된다. 내 죽음 앞에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자고. 살고 싶다고 애원하지 말자고. 죽을 때는 간결하게 죽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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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월드










                                                                                               퍼펙트 월드'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영화치고 평단의 평가도 야박하고 대중 인지도도 낮은 영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탈옥수와 꼬마 인질의 관계는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전이되면서 영화는 새드엔딩을 향해 치닫는데, 그 연출 솜씨가 만만치 않은 영화'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보았기에 이 영화도 극장에서 보았는데 박연폭포 같은 눈물을 흘리는 관객이 꽤 있었다. 


내가 서울역 후암동에 둥지를 튼 계기는 바로 이 영화 때문이었다. " 퍼펙트 월드 " 라는 이름의 영화감상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이 결정은 순전히 퍼펙트 월드'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퍼펙트 월드라는 이름과는 달리 후암동 뒷골목은 로맹 가리의 비숑 거리(자기 앞의 생)와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와 비견할 만한 빈곤과 비참의 세계'였다.  늙은 성매매 여성과 앵벌이 그리고 돼지엄마(포주)와 기둥서방들이 모여 살았는데, 후암동 뒷골목은 서울에서 가장 위험한 우범지대'로 뽑혔다.  앵벌이들은 구걸을 하기 전에 반드시 영화감상실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들은 감상실 안에서 푸른 알약(이라는 감기약)을 다량으로 복용했다. 이 알약에는 마약과 같은 환각 작용을 일으켰는데 그 환상이 최고조에 다다를 때 일을 하기 위해 전철역을 향하곤 했다. 이 알약은 평형 감각을 마비시키기에 걸을 때 비틀거리고 나중에는 바닥을 기어 다니게 된다. 흡사 중증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보인다. 앵벌이들은 하반신 마비 환자처럼 지하철 안에서 기어 다니면서 쪽지를 돌리며 구걸을 했다. 이 쪽지의 글씨체와 문장은 오롯이 내가 썼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여의고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내가 그들에게 맨정신으로 구걸을 해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 쪽팔리잖아요. 어떻게 맨정신으로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구걸을 해요. 우리도 사람이어서 쪽팔린 감정은 있어요. "  구걸해서 번 돈은 거의 대부분 돼지엄마'라고 불리는 포주에게 돌아간다. 돼지엄마는 쪽방을 운영하면서 앵벌이들의 숙식을 제공했는데 열악한 시설과는 달리 지나치게 비싼 숙박비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푸른 알약을 제공하는 딜러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의사의 처방전이 없으면 푸른 알약을 다량으로 살 수 없었는데  돼지엄마는 다른 루트를 통해서 대량으로 구매하여 매우 비싼 가격에 되팔았다. 


백 원 하던 알약은 천 원으로 둔갑하기 일쑤였고, 가격 흥정은 돼지엄마 마음대로였다. 앵벌이들은 이 알약을 사는데 그들이 하루 구걸해서 벌었던 돈의 대부분을 사용했다. 그들은 더 많은 알약을 사기 위해 더 많은 알약을 입에 털어 넣어야 했다. 환각 속에서 그들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강인했고 매력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수많은 앵벌이를 만났다. " 까불이 " 란 녀석도 있었고 하모니카를 잘 불어서 " 하모니카 " 라는 녀석도 있었다. 그리고 " 스마일 타이슨 " 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얼궁은 험악하고 덩치는 큰데 항상 웃는 녀석이었다. 그는 아마추어 복싱 선수 출신이었다. 


이 친구는 앵벌이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며 정장 차림으로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복지 재단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그를 위해 비용을 지불한 모양이었다. 정장 입은 모습이 꽤 근사해 보였다. 이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경찰이 아니라 적십자(녹십자였나 ?!)였다. 푸른 알약을 장기적으로 과다 복용하면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는데 그중에서 연골을 파괴하여 심한 경우는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는데 그런 경우 적십자는 이들을 강제 입원시켜서 절단 수술을 진행했기에 앵벌이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다. 


그런가 하면 이곳에서 12살에 임신한 여자아이를 본 적도 있다. 늙은 성매매 여성의 딸이었는데 누군가가 못된 짓을 한 모양이었다. 이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비참했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폭력적이었으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비정상적이었다. 하모니카를 잘 불어서 하모니카라고 불리는 아이(내가 지어준 별명이다)는 환각 상태에서 싸움을 하다가 까불이가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은 죽거나 교도소에 가거나 행불되어 하나둘 사라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하곤 했다. : 우리 병 들어 죽을지언정 행불(행방불명)은 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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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11-26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른 알약, 러미널이라고 예전에 이 서재에서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클린트 이스드우드는 참 신기한 게, 내용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세월 동안 매번 비슷한 얘기(유사가족)만 하는 것 같은데 이게 질리지가 않더라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11-26 12:29   좋아요 0 | URL
러미널은 사실 하얀색 알약이죠. 사람들이 이 알약 열 개씩 , 물 없이 씹어서 아작아작 먹곤 했습니다.

+
맞습니다. 클옹 영화는 모두 다 유사 가족의 복원 욕망을 다루죠. 똑같은 얘기인데 변주 솜씨가 좋다 보니 질리지가 않죠. 가족이라는 주제는 사실 무궁무진한 소재이니깐 말입니다..
 















나의 살던 고양이











                                                                                                 옛날 옛날 일'이다. 그해 나는 지하 벙커에서 어마어마한 일감을 해치워야 했다. 야근은 필수였고 때로는 자정 넘어서도 일을 해야 했다. 나중에는 출퇴근하는 일도 버거워서 회사 근처 모텔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새벽 4,5시에 일을 끝내고 아침 7,8시에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너무 아파서 조퇴 신청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디선가 고양이 우는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살펴보니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몇 걸음 걷기 시작하면 다시 고양이 우는소리가 들렸고 걸음을 멈추면 소리도 사라졌다. 괴이하도다, 괴이하도다, 아아 괴이하도다 !  서서 주변을 샅샅이 훑다가 그 문제의 고양이가 지붕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누구냐옹 ?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집들이 촘촘하게 붙어서 지붕을 타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고양이가 야옹 _ 울었다. 


나도 화답했다. " 이리 내려와. 아저씨가 집에 가서 밥 줄게 ! "  놀랍게도 고양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지붕에서 내려와 내게로 다가왔다. 쭉정이 같은 빈말이었는데 아이고 참말로......        하는 수 없이 고양이를 집으로 초대했다.  당시,  내가 세 들어 살았던 곳은 대문 옆 곁방으로 거실은 없고 마당만 있는 구조였다.  흰 쌀밥에 술 안주로 먹다 남겼던 멸치와 참치를 섞어 주었더니 고양이는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나는 잠시 고양이와 놀다가 피곤이 몰려와서 이불을 깔지도 못한 채 쪽잠에 빠졌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고양이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고양이는 닫힌 방문 앞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나가고 싶은 게로구나 ?                 내가 방문을 열어주자 고양이는 마당으로 나가 나무를 타고 올라 담벼락을 따라 이웃집 지붕 위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하루를 쉬었으니 일감은 배로 늘어나서 다음날부터 새벽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해서 일주일 동안 모텔에서 생활해야 했다. 일주일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주인집 아주머니가 마당으로 나오시더니 내게 물었다. " 혹시 고양이 키우시오 ? "  내가 영문도 모른 채 멀뚱멀뚱 아주머니를 쳐다보자 


아주머니가 말했다  :  일주일 전부터 고양이 한 마리가 총각네 방 앞에 서서 울던데요. 내가 쫓아내도 다음날에도 찾아오고, 다음날에도 찾아오고, 다음날에도 찾아오고......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변변치 않은 한 끼를 대접했을 뿐인데 잊지 않고 찾아온 고양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가난했고 외롭고 쓸쓸했으며 몸이 아팠고 서글펐고 막, 막막했다. 그때 그 고양이와 함께 한 시간은 30분 남짓이었으나 세월이 오래오래 흐른 지금도 여전히 오래오래 그 고양이 생각을 한다. 


닫힌 방문 앞에서 상처 받고 돌아갔을 그 고양이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


https://blog.naver.com/unheimlich1/220524718774     :    벼락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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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사랑이 



                               내가 " 여우 " 라고 부르는 동네 개가 있다. 반려견 주인이 부지런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산책을 시키는 모양인데 내가 머물고 있는 빌라를 지날 때에만 짖는다. 캉캉캉 !  카랑카랑해서 듣기 좋은 음색이다. 그들의 언어를 모르지만 펄럭이의 반응으로 보아 여우의 언어 번역은 유추 가능하다. " 야, 이 덩치 큰 놈아 ! 자신 있으면 나와봐라. 달랑거리는 불알을 확, 물어뜯어버릴 테니...... " 이런 메시지였던 모양이다. 여우가 짖으면 펄럭이는 온몸의 털을 곧추세우고는 베란다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그리고는 담벼락에 앞발을 걸치고는 바깥에서 짖고 있는 여우를 향해 컹컹컹 짖는다. 순간, 마을은 " 캉캉캉 " 과 " 컹컹컹 " 이 엉켜서 잠시 소동이 벌어진다.  펄럭이의 메시지도 유추 가능하다. " 야 이 쪼맨한 여우 새끼, 너 나한테 걸리면 그땐 진짜 죽는다잉 ? " 이 정도 앙숙 관계라면 견원지간 저리 가라, 이다. 그들은 결국 화해하지 못했다. 펄럭이는 세상을 떠났으니까. 오늘 아침( 이 글을 쓰기 바로 전)에 여우가 밖에서 짖는 소리가 났다. 캉캉캉 !  캉캉캉 다음에는 반드시 컹컹컹 이라는 소리가 들려야 하나 고요했다. 울컥 한 마음, 잠시 흔들렸다. 창문 너머 여우를 보니 여우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서 맞짱을 뜨자고 허세를 부리니 말이다. 이 자리를 통해 고백하자면 펄럭이는 성정이 좋은 녀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걸린 태극기처럼 도도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베란다 담벼락에 발을 올려놓고는 산책하는 개와 아이들에게 여길 지나가려면 통행세를 내라며 지랄하는 일을 낙으로 살았다. 아마도 펄럭이는 집앞 길도 동거인의 나와바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주인의 경제력을 과신한 경우다. 특히, 아이들을 보면 큰소리로 짖으니 민폐였다. 그중에서 한 아이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이름 모를 동네 개에게 " 여우 "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듯이, 그 아이는 펄럭이를 " 사랑이 " 라고 불렀다. 펄럭이는 지나가는 아이들만 보면 윽박지르는데 그 아이는 사랑이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을 지어 준 것이다. 가끔 이 아이도 " 여우 " 처럼 담벼락 아래에서 사랑이를 부르곤 한다. 나는 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고요할 때마다 펄럭이가 생각난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여우가 캉캉 짖었을 때, 아이가 담벼락 아래에서 사랑아, 라고 애타게 부를 때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타자의 죽음은 부재 때문이 아니라 응답할 수 없는 침묵 때문에 힘든 것이다. 귀빠진 날 아침에 청승맞게 이적의 < 거짓말 > 이란 노래를 듣는다. 그때 나는 응급실에서 산소 호흡에 의지하는 펄럭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꼭 고쳐줄게. 내일 다시 올게 ! " 개는 살짝 꼬리를 흔들었다. 내가 응급실을 나선 지 10분 후에 펄럭이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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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9-11-23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조그만 갈색 암컷이 동네 사람들을 자주 물었어요. 부모님이 얘 좀 잡아라 했을 때 신경질이 나서 그만 발로 걷어찼죠. 이웃집에 불 났을 때 짖어대서 큰 화재를 막았던 영민한 개였어요. 학교 다니느라 서울에 나와 살 때 그 개는 집에서 나가 한갓진 곳에서 몰래 혼자서 죽었대요. 그러고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 붉은 여우처럼 될 것만 같은 암컷 강아지가 또 생겨서 집에 데려오려고 합니다. 딸내미 소원이라서 어쩔 수 없어요. 이 강아지를 키울 생각을 하니 그 때 그 암컷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그 때 그 아이를 발로 찼던 게 이내 마음에 남았던 거 같아요. 개는 쓰다듬을 때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사람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는 모습이 저는 좋아요. 펄럭이는 아직도 곰곰 님 손길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기운내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11-24 12:56   좋아요 0 | URL
붉은 여우 같은 강아지 식구가 늘어나니 좋군요. 잘 키우시기 바랍니다. 저의 집 개도(옛날에 키우던...) 13살 노견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원래,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개들은 죽을 때가 되면 집을 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는다고 하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11-26 12:57   좋아요 1 | URL
˝ 곰은 마지막 며칠 동안 너무 아파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 그런데도 곰아, 부르면 애써서 고개를 들고 꼬리를 치는 거야. 곰아, 밥 먹어, 말하면 곰은 안 아픈 척 밥에 코를 대고 먹는 시늉을 했어. 그런 곰 앞에서 울었어. 곰이 단순히 아픈 게 아니라 죽어간다는 걸 느꼈거든. 한 밤을 자고 나서 개집에 가니 곰이 사라졌더라. 그애가 사라지고 한 달 내내 울면서 학교를 다녔어. 울고 또 울었지. 내가 괜히 곰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 곰이 집을 나갔다고 생각했어. 자기가 아픈 걸 보고 내가 마음 아파하니까 죽으러 나간 거라고 생각하며 자책했지. 아무리 슬프더라도 내색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울지 말았어야 했는데. ˝



- 최은영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돌궐 2019-11-26 19:40   좋아요 1 | URL
슬픈 글, 죽어가면서도 주인의 말소리에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글,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불  안  불  알  하  다     :














신경숙 문학이 타락한 한국 문학을 대표한다고 ?!














외대 근처에서 식당을 하는 그는 시간 날 때마다 세계를 여행한다. 소식이 뜸하다 싶으면 여행 중이라 생각해서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한다. 언젠가는 자전거 한 대로 일본 열도를 여행하며 쓴 기록을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그가 스페인을 여행할 때였다고 한다. 우연히 한국인 여행자를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가 느닷없이 대화 도중에 페루애를 언급하며 열을 올리더란다. 처음에는 페루(에 사는) 애'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동방예의지국에서 입만 열었다 하면 불알후드를 남발했던 그 페루애'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머나먼 이국에서 자신이 알고 있는 페루애란 이름을 들어서 신기했다고 외대에서 식당을 하는 그는 말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자유롭게 글쓰기 창(플렛폼)을 통해서 글을 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서 서로의 취향이 비슷하다면 그것을 공유 혹은 체험하게 되는 경우는 드문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취향이 비슷하다면 끼리끼리 모여 알음알음 알게 되는 시대가 바로 뉴 미디어 시대이다. 이제는 특정 분야의 전문가만이 그 권위를 부여받아 글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시대는 지났다. 아니 끝났다. 깐 데 또 까는 일본 순사처럼 보다 잔인한 어조로 말하자면 그런 시대는 죽었다 ! 


그런데도 불구하고 레거시 미디어를 통해서 권위를 부여받아 특권을 누렸던 사람들은 이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에서만 존재하는 등단 제도는 그들의 나와바리를 공고하게 만드는 집단 이기주의를 대표하는 표본이지만 이 적폐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문인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죽은 아들 불알 만지듯이 미련을 못 버리고 이미 죽은 한국 문학의 불알을 만지며 한국 문학의 부활을 외치고 있으니 볼 때마다 불안불알하다.  그들을 보면 안쓰럽게보다는 미련하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문학이 세상을 구원하는 시대는 지났다. 


발가락 다쳤다고 낑낑대는데 정강이 냅다 걷어찬 꼴이라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 사실을 그들만 모른다. 신경숙 표절 사태에서 내가 정작 한심하게 생각했던 이는 신경숙이 아니라 신경숙 표절을 최초로 고발한 이들의 고결한 결의'였다. 이응준이 신경숙을 고발하면서 " 타락한 한국 문학에 맞 -  " 서야 한다고 말할 때, 내 눈에는 이 순정이 순결하다기보다는 미련하게 보였다. 왜냐하면 신경숙 때문에 한국 문학이 타락한 것이 아니라 등단 제도'라는 나와바리를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한국 문학 전체가 공모했기 때문이다. 한국 문학의 타락은 신경숙을 비롯해서 등단 제도의 혜택을 누린 문단 전체'에 있다. 


그렇기에 신경숙만 싸잡아서 적폐라고 주장하는 것은 죄를 은폐하기 위한 문단의 격동적인 수사이자 서둘러 종결하기 위해 에둘러 말하는 게으른 으름장이다. 신경숙 문학이 타락한 한국 문학을 대표한다고 ?! 아니다, 한국 문단이 타락한 한국 문학을 대표한다. 







덧대기

젊은 예비 작가들이 등단 제도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문단 어르신의 취향에 맞춰야 한다. 문단 어르신이 대부분 장년의 남성 엘리트 집단이라는 점에서 젊은 예비 작가들은 철저하기 늙은 남성의 욕망을 찬양할 수밖에 없다. 한국 문학이 늙어가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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