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랫동안 아름다운 문장을 탐했다




 



                                                                                                     소리-성애자 입장에서 보자면 소리내어 풀네임을 부를 때 음성학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이름은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다. 나는 이보다 아름다운 이름을 본 적이 없다.

그의 이름에는 음악적 요소와 함께 회화적 이미지가 내포되어 있어서 파울 클란이나 칸딘스키 그림을 감상했을 때 느끼게 되는 공감각적 경험을 하게 된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워낙 시인다운 이름이어서 그에게 시인이라는 직업은 마치 숙명처럼 보인다. 그는 << 두이노의 비가 1 >> 에서 " 우리가 아름다움을 그토록 찬미함은 파멸하리만큼 / 아름다움이 우리를 멸시하기 때문이다. 천사는 무서운 존재 " 라고 말한다. 릴케는 비가 연작 장시(비가 10으로 끝난다) 내내 천사는 무섭다고 말한다. 그래서 << 두이노의 비가 >> 를 처음 접하다 보면 천사가 무섭다는 말에 당황하게 된다.

내가 이 자리를 빌려 릴케를 분석한다는 것은 같잖은 일이다. 하이데거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 두이노의 비가 >> 와 <<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 를 해석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적하고 싶은 것 하나는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천사에 대한 시인의 심상은 두려움이 아니라 경외라는 데 있다는 점이다. 우리가 아름다운 대상을 동경하는 마음은 이중적이다. 그것을 찬미하지만 동시에 두렵기도 하다. 그렇기에 천사로 대표되는 아름다움은 양가적이다. 나는 오랫동안 아름다운 문장을 탐했다. 하지만 < 美 > 가 아름다울 때는 자신이 " 넘버 3 " 라는 사실을 자각할 때이다.

쉽게 말해서 송충이는 자기 분수에 맞게 솔잎을 먹어야 하는데 자기 분수에 어울리지 않게 땅에 내려와 떨어진 갈잎을 먹으면 죽게 된다는 소리이다. 진선미라는 거역할 수 없는 서열의 세계를 무시하고 美가 상위 개념인 眞과 善의 영역을 넘볼 때 美는 추해진다. 아름다운 문장도 마찬가지다. 眞과 善이 없는 미문은 아름답다기보다는 추하며 폭력적이다. 그렇기에 아름답고 따스한 말로 타인을 위로하는 문장(예를 들면 이기주의 << 언어의 온도 >> 같은)은 추하다. 가짜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진짜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좋은 글이다. 다음은 김영민이 <<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감복하면 지배당한다 >> 라는 제목으로 한겨레 신문 토요판에 올린 에세이다.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에세이다.

좋은 글은 널리 읽혀야 한다는 마음 때문에 무례하지만 전문을 올린다. 미안한 마음에 그의 << 집중과 영혼 >> 이라는 책을 구매했다.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감복하면 지배당한다



 

 

 


김영민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의 권위자 와타나베 히로시 교수에 따르면, 일본 에도시대 도쿠가와 정권은 초월자에 대한 믿음을 정치적으로 위험하다고 간주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넘어서는 초월자를 인정하게 되면, 그 초월자에 의지해서 자신의 권위를 넘보려는 사람이 나타날지 모른다. 그래서 도쿠가와 정권은 초월적 존재에 호소해서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대신, 그저 무력으로 자신들의 지배를 관철해 나갔다. 그런데 전쟁에 이겨 정작 평화시대가 도래하자, 도쿠가와 정권은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우월한 무력을 증명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되었다. 마치 군사정권이 몰락하고 민주화가 되자, 문민정부가 자신의 도덕적 우위를 증명할 기회를 잃어버리게 된 것처럼. 실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도쿠가와 정권 지배자들은 대신 단지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데 신경을 집중하게 된다. 이제 이미지가 관건이다. 그들은 점점 더 격식에 의존한 화려한 이미지를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강하고 우월한 지배자인지 강조하고 확인했다. 어위광(御威光)이라고 불리는 이런 연극적인 이미지 창출 말고는 별다른 권력 정당화 작업에 신경 쓰지 않던 도쿠가와 정권은, 서양 제국주의라는 다른 강한 힘이 일본에 도래하자 정당화의 공백에 처하게 된다. 그런데 도쿠가와 정권이 사용한 이미지는 단지 무력의 표시였을까? 피지배층이 감복한 것은 무력 혹은 무력의 이미지라기보다, 그 이미지가 동반한 아름다움은 혹시 아니었을까? 때로 아름다움은 초월자의 존재나 논리적인 언술만큼이나 강력한 정당화 기제이다. 평소에 진정한 미인을 만나볼 기회가 없던 젊은이를 상상해보자. 그런 사람이 갑자기 대단한 미인을 마주치게 되면, 거의 정신줄을 놓게 되지 않을까? 아름다운 배우 강동원을 복도에서 마주치자, 느닷없이 자기도 모르게 울음이 터졌다는 체험담을 나는 들은 적이 있다. 울음까지는 터지지 않더라도, 적어도 미인이 하는 행동은 다 정당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저 아름다운 이목구비의, 너무 가늘지도 굵지도 않으면서 영덕대게처럼 길게 뻗은 저 사지(四肢)의 스펙터클을 보라. 저 정도의 아름다움이라면 느닷없이 지나가는 행인의 목덜미를 물어뜯고 흡혈을 해도 정당해 보일 거야. 느닷없이 내 따귀를 때리고 침을 뱉어도 정당할 거 같아….

 

 

단조로움과 화려함의 대조가 빚는 간극

 

이 땅에도 이러한 심미적 스펙터클의 연원이 깊다. 실로 이 땅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미(美)의 장관을 구경하고 누리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조선 후기의 문인 윤기(尹?, 1741~1826)의 ‘간완욕’(看玩欲)이라는 글을 보자. 그 글에서 윤기는 조선 사람들의 “보고 즐기려는 욕망”(看玩之欲)이 엄청난 수준에 달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모든 흥미롭고 아름다운 것은 다 보고 즐길 대상이다. 그러나 그 욕망을 가장 활활 불타오르게 한 것은 바로 임금의 “거동”(제사를 지내러 가는 행렬)이었다. 그 아름다운 장관을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얼마나 강렬했던지, 거동을 구경하러 나왔다가 길에서 애를 낳는 사람이나 누각에서 실족해서 떨어지는 사람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至或有在途解娩者, 有從樓跌墜者) 임금의 거동을 구경하러 나왔던 이들은 자신들이 지배층의 권력 정당화 과정에 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 19세기 말 고종 때 한국을 방문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방문기에 따르면, 거동의 구경꾼들은 스펙터클에 담긴 권력의 동학을 몰랐던 것 같다. 비숍이 화려하고 극적인 과시라고 평한 임금의 “거동”에 대한 묘사를 살펴보자. “거동의 행로에는 수만 명의 사람들이 경건한 정적 속에서 자발적으로 모여든다. 그들의 태도는 이 훌륭한 연중행사가 최대한 빛나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것 같았다. 이 같은 사람들의 태도를 이해하려면 서울의 단조로움을 말해야 할 것 같다. (…) 이 모든 단조로움과 특색 없음에 대조되어 거동은 태양처럼 빛을 발한다.” 적어도 비숍이 보기에, 모여든 사람들은 이 연중행사의 성공을 진심으로 빌었다. 그리고 거동이 아름다울 수 있는 이유는 거동 이외의 세상이 아름답지 않은 데 있다. 마치 모든 사람이 흑백티브이를 볼 때야 비로소 컬러티브이의 색상이 태양처럼 빛나는 것처럼, 보통 사람들이 단조로운 외관을 하고 있어야 비로소 거동의 스펙터클이 가진 화려함이 빛났던 것이다.

 

단조로움과 화려함의 대조가 빚는 간극이야말로 피지배층과 지배층의 간격이다. 지배층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화려함이 두드러지도록, 피지배층은 초라하고 단조로운 상태에 머물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아름다움을 동경하는 순간, 그 피지배층은 지배층의 지배와 사회의 위계질서를 감수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마치 아름다운 사람이 뱉는 침과 그가 때리는 따귀라면 감수할 용의가 있는 것처럼. 부러우면 지는 거다. 아니, 부러우면 지배당하는 거다.

 

 

조선시대 ‘처벌의 스펙터클’ 군주제를 벗어난 오늘날 한국에서도 조선 임금 거동의 위력은 계속된다. 임금의 거동이나 그 밖의 행렬의 화려한 모습은 조선왕조의 의궤(儀軌)에 남아서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그리고 이른바 민족문화의 정화로서 종종 칭송된다. 프랑스군에 약탈되어 프랑스국립도서관으로 이관된 외규장각 의궤를 돌려받기 위한 각계의 떠들썩한 노력과 언론의 보도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런데 미인이 사용하는 고운 화장품과 화려한 의상이 비싼 것처럼, 모든 스펙터클에는 돈이 들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거동과 같은 전례 행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얼마나 되었을까? 비숍의 추정에 따르면, “이 성대한 행사를 위해 왕국의 작은 재원에 2만5천 실링의 무거운 부담이 지워지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제국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의식해 급격히 군비를 증강했던 고종 시대에서조차도, 황실 전례에 관계된 비용은 군비에 버금갈 정도로 막대했다. 그런데 지배를 위한 스펙터클은 임금의 거동만 있는 것은 아니다. 형벌의 집행조차도 예전에는 스펙터클이었다. 이를테면 푸코의 <감시와 처벌>은 루이 15세를 시해하고자 한 죄인의 처형이 얼마나 거창한 스펙터클의 예식이었는지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푸코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예식은 “권력의 과도하면서도 규칙적인 과시를 만들어내는 일”이자, “호사스러운 세력 과시였으며, 권력이 원기를 회복할 수 있는 과장되면서도 동시에 규범화한 ‘소비행위’였다.” 푸코가 보기에, 유럽에 본격적인 근대가 도래하기 이전 권력이 자신을 행사하고 재확인하는 방식의 특징은 과잉과 과시로 가득 찬 ‘소비행위’였던 것이다. 조선에서도 처벌의 스펙터클이 존재했다. 갑신정변의 주인공 김옥균의 시신이 강화도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모반(謀反) 대역부도(大逆不道) 죄인 옥균(玉均) 당일 양화진두(楊花津頭) 능지처참”이라고 쓰인 천을 걸고 저잣거리에 효시되었을 때, 그것은 처벌의 스펙터클이었다. 그뿐 아니다. 다른 중죄인들도 의금부에 투옥되었다가 추국청(推鞫廳)에서 물고를 당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1987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용히 진행되는 고문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그 나름의 스펙터클이기도 했다. 지방관청도 마찬가지다. 비숍은 부산 관청에서의 상황을 “포졸들은 거기서 야수적인 채찍질로 범인을 때려죽이며, 그 고통에 찬 울부짖음은 인접한 영국 선교소의 방까지 마구 파고든다”고 묘사한 적이 있다. 채찍질은 바라보는 사람들을 전율케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소리를 통해 보다 넓은 곳까지 스펙터클의 효과를 전한다.

 

 

예의 의미가 확장되고 변천하는 과정 윤기의 문학적 묘사에 따르면, 이런 조선 땅에서 임금의 거동을 보러 나온 어떤 만삭의 여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출산이 임박했지만 화려한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아 기어이 거리로 나왔다고 한다. 거리에서 해산을 하게 된 지경에 이른 것을 보면, 아마 양반가의 여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여인의 몸에서 태어나 고고(呱呱)의 성(聲)을 지를 아기의 관점에서 조선 사회를 바라보기로 하자. 마치 귄터 그라스가 <양철북>에서 난쟁이 오스카의 관점에서 혼란에 찬 독일 사회를 바라보았듯이. 폴커 슐뢴도르프 감독은 <양철북>을 영화화하면서, 태어나기 직전의 오스카가 엄마의 뱃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장면을 실제로 삽입한 적이 있다. 양수가 터진 엄마의 체모 너머로 보이는 너덜너덜한 당시 독일 사회. 이제 우리도 임금의 거동 구경꾼들 한가운데서 태어난 신생아의 관점에서 조선시대를 그린 영화를 만들 필요가 있다. <양철북>에서 오스카가 생일 선물로 받은 양철북을 두드리고 고성을 지르며 독일 사회의 모순을 고발했다면, 이 조선의 반영웅(anti-hero)은 계룡산의 요다에게 수련을 받은 뒤, 검은 갓을 턱 밑까지 푹 눌러쓴 다스베이더가 되어 조선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는 것이다. 빈자(貧者)들의 신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의 스펙터클에 골몰하고 있는 양반들을 광선검으로 베면서 조선의 다스베이더는 말하는 거다, “나는 너의 (아비가 아니라) 노비다.”(I am your nobi.) 쓰러지는 조선 양반들이 받들어 모셨던 공자 역시 지배의 스펙터클에 대해 고민한 사람들 중 하나였다. 공자가 깊은 관심을 둔 예라는 것은 그 기원을 적어도 상(商)나라 시대에 성행한 제사로 소급할 수 있다. 중국 고대에 이루어진 신에 대한 제사에 스펙터클의 요소가 강했다는 것은, 그 당시 쓰인 청동 제기들의 크기와 무게로부터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상나라 때 청동 제기 중 무거운 것은 875킬로그램에 달한다. 그리고 그 정도로 큰 규모의 청동기 생산은, 그만한 자원을 동원할 수 있을 만큼 정치권력이 집중화돼야 가능하다. 그리고 그 크고 화려한 청동기들은 집중화된 정치권력의 정당화를 위해 사용됐다. 요컨대, 상나라의 예는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신과의 교통을 자임한 스펙터클이었다. 그런데 <논어> ‘안연’(顔淵) 편에 나오는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와 같은 구절은, 예가 더 이상 신에게 제사지내는 스펙터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논어>에 나오는 예에 관련된 여러 구절은, 예의 의미가 인간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몸짓까지 미시적으로 규율하게끔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즉 신에게 바치는 제사에서 인간관계를 규율하는 행동거지로 예의 의미가 확장되고 변천하는 과정에서, 예의 “규모”에 관한 한, 거시에서 미시로의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과거의 많은 학자들은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창의적인 공헌이라고 종종 주장해왔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 전환이 공자의 창의적인 발상이었을까?

- 출처, 한겨레 토요판 기사

 

원문보기 :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27621.html#csidxdd344acbbf5c9b78b23ffa0e44ad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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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볶이가 고급 요리는 아니지 : 

 


 


 




신경숙 소설에 대하여

 




                                                                                                        소는 갈비뼈가 13개이다.  갈비뼈는 순서에 따라 번호가 매겨지는데 1-5번 갈비뼈는 본갈비,  6-8번 갈비뼈는 꽃갈비,  9-13번 갈비뼈는 참갈비라는 이름이 붙는다. 이중에서 최상급 갈비 부위는 꽃갈비(6, 7, 8번 갈비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예뻐보인다고 했던가.

비실비실한 갈비씨 중에서도 원빈처럼 멋진 꽃갈비 씨는 있는 모양이다. 외식 프랜차이즈 기업 " 강호동 육칠팔 " 도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이 부위가 가장 맛이 좋다 보니 꽃갈비는 100% 구이용으로 쓰인다.  반면에 꽃갈비보다는 품질이 떨어지는 본갈비는 찜 요리(or구이용)에 사용되고, 본갈비보다 품질이 떨어지는 참갈비는 탕 요리로 쓰인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맛이 뛰어난 부위의 활용이다. 비싼 꽃갈비를 찜이나 탕으로 요리하는 요리사는 없다. 왜냐하면 맛이 뛰어난 부위는 양념의 도움 없이도 육미 자체가 뛰어나기 때문이다. 비싼 부위는 대부분 구이용으로 소비되고 싼 부위는 찜이나 탕으로 소비된다.

문장도 마찬가지다. 기본 문장이 뼈대라면 수식은 양념인 셈이다.  갈비뼈에 붙은 고기가 맛이 좋으면 굳이 자극적인 양념이 필요 없듯이,  뼈대가 튼튼한 문장(정곡을 찌르는 문장)은 그 자체로 훌륭해서 화려한 수식이 필요 없다. 김수영 산문이 좋은 경우다.  김수영은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뼈대에 붙은 기본 문장의 맛이 좋으니 현란한 조사와 과장된 부사 같은 양념을 과하게 사용할 필요가 없다. 읽고 나면 개운하다.  반면에 신경숙 문장은 알맹이 없는 쭉정이 같다. 그는 결핍을 숨기기 위해서 양념을 많이 친다. 신경숙 문장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 머뭇거리는 문체 " 다.  중심을 꿰뚫지 못한 채 변방을 서성거리거나 쭈뼛쭈뼛 망설인다.

그러다 보니 자신있게 문장을 끝맺지 못하고 마침표 대신 쉼표를 사용해서 문장을 미완성으로 남긴다. 그가 지나치게 남발하는 문장 부호들, 예를 들면 말줄임표(......)나 쉼표(,)의 사용은 육미가 나쁜 식재료를 보완하기 위해서 강한 양념으로 맛을 내려는 요리사의 술책처럼 보인다. 문장 하나 자신있게 완성하지 못해서 쩔쩔매는 작가의 작문 실력을 두고 신경숙 고유의 문체라고 포장하기에는 지나치게 민망한 구석이 있다.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맛은  청승이라는 이름의 양념 범벅 요리'이다. 달고, 짜고, 맵다. 청승맞고 궁상스러운 신파 떡볶이라고나 할까 ?   

워워, 떡볶이를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떡볶이는 맛있다 !  다만, 대중적인 음식을 고급 음식으로 포장하는 짓은 하지 말자. 나는 당신이 떡볶이가 맛있다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나 떡볶이가 고급 요리라고 말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신경숙 문학은 순문학이 아니라 싸구려 펄프픽션일 뿐이다. 그렇기에 나는 신형철이 엄지손가락 세 개를 추켜세우며 신경숙을 순문학의 여왕으로 찬양할 때마다 졸라 의구심이 든다. 신경숙은 한국 문학에서 지나치게 과대 평가된 대표적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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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13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추켜세운 엄지손가락 세 개라.. 혹시 나머지 한 개는 밑에 달린 ‘그것‘인가요..? 저는 섹드립으로 이해했습니다. ^^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3 12:34   좋아요 0 | URL
섹드립, 훌륭한데요.. ㅋㅋ
 
[블루레이] 올드보이 : 스틸북 넘버링 한정판 - 쿼터슬립 (3disc) - 60P 소책자+접지 포스터+아트웍 카드+미니영화카드
박찬욱 감독, 최민식 외 출연 / 플레인아카이브(Plain Archive) / 2016년 11월
평점 :
품절


 

 

 





7530세대 : 올드보이와 최저 임금 제도



                                                                                                                                                                                               남산 아래 일터에서 일할 때에는 점심시간에 3명이 모이면 한식을 파는 식당을 찾곤 했지만 4명이 모이면 밖에 나가지 않고 일터에서 중화요리를 주문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군만두 서비스는 4인 이상일 때에만 나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군만두는 8개인데 주문자는 5인이라는 데 있었다. 8 나누기 5 = ?!  누군가는 군만두를 한 개 먹고( = 2사람) 누군가는 군만두를 두 개 먹게( = 3사람) 된다.  하지만 군만두 딜레마를 심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군만두를 먼저 집는 놈이 임자이기 때문에 젓가락질에 주저함은 없었다. 그런데 주문자가 4인일 때는 양상이 달랐다. 얼핏 보면 군만두 8개를 주문자 4인이 나누니 군만두 딜레마는 발생할 것 같지 않지만 중국집 주인은 4인이 주문하면 군만두를 6개를 주었다. 그러니까 2명은 군만두 2개를 먹고 2명은 군만두 1개를 먹게 되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이 상황에서 젓가락은 주저하게 된다. 군만두 2개를 먹는 사람이 다수일 때와 아닐 때, 차이나 런치 누들 타임의 헝가리 서정이 미묘하게 차이나 는 것이다. 혹시 그것은 중국집 주인이 공짜 좋아하는 손님에게 가하는 꼼꼼한 복수가 아니었을까 ?  만약에 군만두 서비스의 기준이 3인 이상이었다면 나는 그가 3인이 주문 시에는 군만두 4개를 플레이팅했으리라 확신한다.  4 나누기 3 은 ?  이 경우, 딱 한 사람만 군만두를 2개 먹을 수 있다. 이 상황은 젓가락질을 할 때 더 많은 용기가 필요한 상황이다. 과연 누가 염치없는 조 발막 : 조가 성을 가진 사람이 궁궐에 들어가면서 신발이 없어 아내의 발막신을 신고도 부끄러운 줄을 몰랐다는 데서, 체면과 부끄러움을 전혀 모르는 파렴치한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이 될까 ?  군만두 하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바로 << 올드 보이 >> 이다. 이 영화에서 오대수(최민식 분)은 15년 동안, 365일 동안, 아아 !  시바.  삼시 세 끼 내내 군만두만 먹는다. 만두 한 개 단가가 100원이라고 했을 때 오대수는 1000원짜리 원 푸드 다이어트 식단'에 반기를 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이는 믿지 못하겠지만    :     내가 이 영화에서 몰입한 장면은 이우진(유지태 분)의 정체가 아니라 군만두의 개수였다. 아니, 다 필요 없고요. 군만두가 몇 개냐고요 ~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오대수는 아침에 군만두를 열 개 먹고, 점심에도 군만두를 열 개 먹고, 저녁에도 군만두를, 아아 !  열 개 먹는다. 이때부터 나는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심오한 철학적 세계를 벗어나서 지하 사설 감옥에서 일하는 직원이 몇 명일까를 추론하기 시작했다.  5인이 주문하면 서비스로 나오는 군만두를 8개, 4인이 주문하면 군만두를 6개 배치했던 그 중국집 주인의 셈법을 적용하자면,

서비스 군만두가 10개일 때 사설 감옥에서 일하는 직원은 6인이 된다.  또한 이 사설 감옥은 24시 풀가동 시스템'이라는 점에서(2교대 내지는 3교대 근무 환경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최대 18명의 노동자가 발생한다.   내 생각은 적중했다.  그 유명한 장도리 장면'에서 오대수는 좆밥들과 18대 1로 싸운다, 대략 !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오로지 군만두 생각했다. 군만두, 군만두, 군만두, 군만두, 군만두, 군만두.......  왜, 군만두는 공짜 서비스 요리의 대명사가 되었을까 ?  단가가 가장 쌀뿐만 아니라 요리하기에도 가장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다시 묻자. 왜, 오대수는 복수의 화신이 되었을까 ? 

답은 군만두다. 철웅(오달수 분)과 그 좆밥들마저 질려서 먹지 않는, 급식 단가가 1000원짜리인, 기껏 서비스로 나오는 공짜 음식을 15년 동안 365일 삼시 세 끼 먹는다고 상상해 보라.

- 영화 올드보이에서 최종 편집 과정에서 삭제된 장면. 군만두는 10개다

 

만두 먹다 속 터지지 않을 인간 있을까 ?   여기까지는 스끼다시'다.  내가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지금부터'다. 문재인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친하고 있는 최저 임금 인상은 오대수에게도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자는 정부 입법안이다. 얼큰한 동태탕도 시켜 먹고, 순두부찌개도 먹고, 때론 몽골레 파스타 요리도 시켜 먹을 수 있는 최저 임금이 7530원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군만두만 먹고 살 수는 없으니까. 군만두만 먹고살다 보면 오대수처럼 복수의 화신이 되어 장도리를 높이 들 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조중동은 날마다 " 최저 임금 망국론 " 을 주장하고 있다.

이 정도면 " 악의적인 보도 " 가 아니라 " 악마적인 보도 " 이다. 이 논조가 왜 악마적인 기만전술인가에 대한 해석은 내가 굳이 이 자리를 빌려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최저 임금 제도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진보 지식인의 글은 많다). 조중동 기자들에게 영화 << 올드 보이 >> 를 추천한다. 지금까지 적용되었던 최저 임금으로는 기껏해야 1000원짜리 군만두만 사 먹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은 군만두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가끔은 딤섬도 먹어야 한다는 주장은 가난뱅이의 배부른 소리가 아니다. 일행은 네 명인데 간장 종지는 두 개여서 화요일에 불같이 화를 냈던,

접대만 받다 보니 대접이 소홀하면 상 엎는 조선일보답다. 그 나물에 그 밥이듯이 그 나물에 그 좆밥이다.

 

                                                                                                

■ 더 읽기


 

 

http://blog.aladin.co.kr/myperu/6468481       올드보이와 군만두

http://blog.aladin.co.kr/myperu/6465125       짬뽕과 딤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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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1-12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벅 커피, 좀 비싼 가격의 음식을 먹은 진보주의자를 ‘강남 좌파‘, ‘캐비어 좌파‘라고 비아냥대는 사람들은 진보주의자가 다양한 음식을 먹고 다니는 게 배 아픈가 봅니다.. ㅎㅎㅎ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2 12:51   좋아요 1 | URL
최저 임금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면 그런 나라는 망하는 게 낫죠. 그게 무슨 나라입니까. 명색이 경제대국 중 하나인데 최저임금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 ????!!!!!!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입니다.. 어따대고 시발놈들이 약을 치는지...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2 12:53   좋아요 1 | URL
군만두만 먹으면 사람 미칩니다.. 제 친구가 중국집을 운영해요. 군만두 튀기는 기름은 따로 있다고 하더군요. 어디 가서 군만두 서비스로 달라고 하지 말라고...

cyrus 2018-01-12 13:07   좋아요 2 | URL
군만두 만들 때 쓰는 기름을 계속 맡으면 속이 니글거릴 거예요. 예전에 중국집에서 군만두 서비스를 주문했다가 물만두로 변경했어요. 주인장이 사정이 있다면서 물만두를 권하더군요. 지금 생각해보니 주인장이 왜 그런 말씀을 했는지 알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2 13:17   좋아요 1 | URL
그 친구 말이 군만두 하고 볶음밥을 시켜 먹지 말라고 하더군요..

겨울호랑이 2018-01-12 13:0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최근 최저임금과 관련한 ‘편의점주‘ 기사를 보면서 10여년전 종합부동산세와 관련한 ‘아파트만 가진 노부부‘ 기사 생각이 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2 13:20   좋아요 2 | URL
삼성 망하면 대한민국 망한다는 삼성망국론과 최저임금망국론은 똑같죠.
한 나라가 삼성이라는 기업 하나 망한다고 나라 망하거나 최저임금 몇 푼 올렸다고 망한다고 나라 망하면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그런 나라는 망하는 게 낫죠. 한국인 자본 유동성 세계 7위입니다.
동전 몇 개 가지고 이런 식으로 공포 조장하면 안 되죠..

자영업자가 알바비 때문에 힘드나요. 치솟는 가게 월세와 터무니없는 카드수수료 때문입니다. 이것만 잡아도 최저임금 인상분은 충분히 커버 가능합니다. 최저 임금이 올라야 군만두 먹던 친구가 딤성 먹을 거 아닙니까..

2018-01-12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2 13:27   좋아요 1 | URL
그러니까요. 알바비 1000원 올랐다고 나라가 망하면 살인적인 가게 임대료 상승률에 대해서는 조중동은 왜 침묵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반 드 시    잡 는 다  :


 

 

 

 

 

 


 

트랙터가 아우토반을 달려야 할 때


 

 

 

 

 


 


 

                                                                                                          설경구의 반대말은 백윤식이다. 설경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과장된 연기를 펼칠 때 백윤식은 대부분 무표정한 얼굴로 목석처럼 서 있다(나는 설경구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것은 비겁한 변명입니다 !!!!!! _ 라고 외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곤 한다. 누군가는 그것을 메소드 연기의 정석이라고 칭찬하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느끼하다. 연기 그따구로 하면 안된다).

연기 스타일만 놓고 보자면    :    < 백윤식 > 은 이타적이기보다는 이기적인 연기를 하는 배우이다.  액션(연기는 액션이다)이란 리액션이 받쳐 줘야 훌륭한 연기를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그러니까 리액션이 뛰어난 배우와 연기를 한다는 것은 훌륭한 페이스메이커와 함께 달리는 마라톤 선수와 같다는 점에서, 송강호와 함께 연기하는 배우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연기 꿈나무에게 백윤식은 꽤 훌륭한 페이스메이커는 아니다.   그는 한국판 포커 페이스이자 스톤 페이스(버스터 키튼의 별칭이다) 이다.  설경구가 매소드 연기(물론 나는 여기에 동의하지 않지만)를 한다면 백윤식은 맹맹한 연기를 펼친다. 하지만 그게 매력이다.

반면에 < 성동일 > 은 익살스러운 몸짓과 얼굴 표정으로 광대 연기를 펼치는 스타일이다.  정색을 한다기보다는 약방에 감초 역할을 한다.  그는 한국판 조커 페이스이다. 그런데 그가 선보이는 익살에는 매우 독특한 측면이 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자의 얼굴에서만 볼 수 있는 " 칼 " 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성동일은 스치듯 지나치는 찰나의 표정을 섬세하게 혹은 섬뜩하게 연기할 줄 아는 배우이다. 이런 배우들은 범죄 영화 끝자락에 나타나서 관객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배신자 역할이 금상첨화이다. 만약에 투 페이스, 그러니까 포커 페이스(백윤식)와 조커 페이스(성동일)가 짝패로 등장하는 영화가 있다면 두 사람은 환상의 커플이 될 수 있을까, 아니면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도는 커플이 될까 ? 

 

 

 

영화 << 반드시 잡는다, 2017 >> 는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에 충분한 영화'다. 백윤식이 돈만 밝히는 구두쇠 영감을 연기한다면 성동일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은퇴한 형사 영감을 연기한다. 시작은 참담하다. 초반 30분 동안 나는 이 영화를 계속 볼 것인가, 아니면 여기서 끝낼 것인가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노스페이스 노땅페이스의 조합이 그닥 불꽃 투혼으로 타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영화를 끝까지 본 것은 추격 스릴러 장르에서 감독이 두 어르신 캐릭터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대한 궁금증 때문이었다. 

 

쉽게 말해서   :    권장 속도 시속 130km 이상'이라는 간판이 세워져 있는 아우토반을 최고 시속 10km인 트랙터가 달려야 할 때, 감독은 어떤 전략을 취할까 ?   모름지기 추격 스릴러라면 시속 200km를 달리는 듯한 속도감   :   속도의 쾌감은 반드시 스피드를 높일 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모짜르트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 무조건 볼륨을 높여야 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중요한 것은 속도가 아니라 박자다. 조르주 앙리 클루조의 << 공포의 보수, 1953 >> 과 리콜라스 윈딩 레프의 << 드라이브,2011 >> 은 박자가 느려도 박자를 제대로 맞추면 훌륭한 속도감을 생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영화다                        을 활용해야 할 터인데

 

감독이 과연 달리다가 시동이 꺼지기 일쑤인 고물 트랙터 두 대를 가지고 그런 속도감을 낼 수 있을까 ?  조금만 달려도 폐병 환자처럼 가래 끓는 소리를 내는 고물 트랙터, 백윤식과 성동일은 < 본 아이덴티티 - 시리즈 > 처럼 싱싱이와 생생이의 아우토반 활주로 액션 율동극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놀랍게도 이 영화는 단점을 장점으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감독은 낡은 트랙터 두 대를 가지고 속도감 있는 추격전을 재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일찌감치 속도전에 대한 욕심은 버리고 이 단점을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고령화 사회에 따른 노인 문제(고독사, 노인 차별, 노인 혐오 따위)에 집중해서 사회적 어젠다를 도출하는 데 성공한다. 영리한 셈법이다. 

 

 

무엇보다도 반가운 점은 뒤로 갈수룩 백윤식, 성동일, 천호진의 불꽃 튀는 어르신 연기가 좋다. 특히 천호진의 칼 같은 연기는 명불허전이다. 다 아는 우화이지만 토끼와 거북이 경주에서 최후 승자는 거북이다. 어찌 되었든 거북이는 달린다 ■

 

 

-

 

 

덧대기        ㅣ       영화제 때 GV(감독과의 대화 시간)를 몇 번 참가했다가 질문 수준에 경악해서 그 다음부터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감독님, 이 영화 흥행할까요 ? _ 라는 질문은 그래도 양호한 편이었다. 다음 질문은 나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감독님, 혹시 좋아하시는 한국 음식이 있나요 ?                    맙소사 !   이러다가는 캔 로치 감독에게 두유노싸이 ? 라고 물을 판이다.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에서 조선일보 기자는 " 댓글이 무서워서 기사를 못 쓰겠다, 특정 지지자의 악성 댓글에 대한 대통령의 생각은 ? " 이라는 질문을 던졌다. 품격을 갖춰 문학적 표현을 해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표현 방법이 없다. 그 기자에 대한 내 생각은 < 좆밥 > 이다. 댓글이 무서워서 기사를 못 쓰겠다는 기자의 고백은 < 기레기 > 라는 프레임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다. 구더기 무서워서 된장 못 담든다는 소리가 아닌가. 이러다가는 검은색이 무서워서 간장 못 담근다는 소리도 할 판이다. 기자는 권력자를 두려워 말고 진실을 보도해야 하는데 댓글 따위가 무섭다고 하니 그동안 제대로 된 기사는 썼을까 _ 라는 의문이 든다. 하여튼, 너는 좆밥이다. 좆밥아, 좆밥아, 사랑하는 나의 좆밥아..... 왜 사니 ? 다음날, 대통령 기자 회견에서 댓글 발언을 했던 기자가 후기 기사를 작성한 모양이다. 그 기사의 피날레는 다음과 같다. " 이 짧은 기사를 쓰는 동안 주요 단어마다 수십번씩 썼다 지우면서 망설였다. 이후에 쏟아질 악성 댓글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 댓글이 무서워서 이 짧은 기사를 쓰는 동안 주요 단어를 수십번씩 썼다 지우면서 망설일 정도였다면, 네티즌보다는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배는 무서운 이명박근혜라는 거악 앞에서는 얼마나 많이 썼다 지웠다를 반복했을까 ?  < 썼다 > 라는 기자의 직업 윤리보다 < 지웠다 > 라는 비윤리적 기자 정신을 가진 자의 자기 검열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 썼다 > 라는 욕망이 < 지웠다 > 라는 욕망을 덮을 때 좋은 기자는 탄생한다고 믿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23&aid=0003344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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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11 1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1 11:05   좋아요 2 | URL
제가 영화제 할 때 감독과의 대화(gv)를 아예 참석 안합니다. 시간이 남아돌아도 말입니다.
감독에게 한다는 소리가 한국 음식 먹어본 것 있으세요 ? 이런 질문이나 하고 있으니.... 이게 무슨 gv입니까
댓글 무서워요. 덜덜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게 질문입니까...

이영화봤어요 2018-01-11 1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반가운 마음에, 트랙터가 아우토반을 달릴 때라는 표현에 감탄하고 가요 ㅋㅋ
 


 



2018年, 1일1식 4년 차





                                                                                                      해가 바뀌었으니 < 1일1식 > 을 한 지 4년 차에 접어들었다. 평소 세 끼를 먹다가 한 끼로 줄인다는 것은 " 죽을 맛 " 이 아닐 수 없다. 처음 2개월은 허기를 이기지 못해서 하루에 2리터 생수를 1.5개씩 마셨다. 위에 가득 찬 수분은 아래(방광)로 흘렀고, 먹은 것은 없는데 화장실 가는 횟수가 늘어났다. 방광이 지랄을 하는 것이다. 뭘 그리 잘 먹어서 화장실에 자주 가 _ 라고 농담처럼 던진 진담을 들을 때는 지랄방광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곤 했다.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한 때가 바로 이 즈음이었다. 

누가 나에게 64색 크레파스를 주며 가을 하늘을 그리라고 하면 하늘을 파란색 대신 노란색 크레파스로 색칠했을 것이 분명하다. 별 볼 일 없던 놈이 이제는 대낮에도 별 볼 일이 생기는구나. 불쌍타, 시바...... 아따. 페루애는 참말로 불쌍타.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허기뿐만은 아니었다. 식사하셨어요 _ 가 인사말로 오고가는 대한민국 정서상 점심 굶는 남자에 대한 시선이 고울 리 없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 그렇게 3개월을 버티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진다. 지금은 허기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굶으면 힘을 못 쓴다고 하던데 지금은 농경 사회가 아니지 않은가.

힘을 얻기 위해서 먹어야 하는 사람은 운동선수다.  만약에 당신이 운동선수도 아니면서 힘을 얻기 위해 과식을 한다는 것은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경우다. ​ 한 끼를 굶으면 힘을 못 쓴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사람 몸은 비상 상태를 대비해서 체내에 30일치 식량을 저장한다. 그리고 권투선수는 살인적인 절식으로 경기에 나선다. 힘은 근육에서 나오는 것이지 포만감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1일1식 초기, 한 끼에 세 끼를 먹는 과식도 이제는 사라진 지 이미 오래이다.  위가 점점 쪼그라들더니 일반인의 한 끼 정량만 먹어도 포만감이 느껴진다.  몸무게는 1식을 시작한 첫해를 제외하고는 변화가 거의 없다.  

무엇보다도 의학 협회에서 제공하는 표준 몸무게 수치와 똑같다.  하루 한 끼'만으로도 일상 생활을 하면서 표준 몸무게를 유지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엇보다도 요요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다만, 나는 2년 차 - 3년 차 과정에서 " 고지방-저탄수화물 식단 " 을 1년 정도 유지했는데 그 부작용이 만만치 않다. 고지방저탄수화물 식단도 일종의 < 원푸드다이어트 식단 > 과 비슷하다. 지금은 채식주의자(라고 하기에는 애매모호한) 비스무리한 사람이 되었다. 1년 내내 삼겹살을 먹었는데 이제는 삼겹살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피냄새 때문에 입맛이 떨어진다. 

한 음식만 먹게 되면 나타나는 부작용이다.  다이어트 식단에 실패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요즘은 양배추에 꽂혔다.  처음에는 배추의 맛에 매료되어 열심히 먹었으나 수분이 많아서 양배추를 선택했다.  일주일에 한 통은 먹고 있다.  씹을 때 들리는 아삭거리는 소리가 좋아서 먹기 시작했다. 청량감이 끝내줘요 ~                         맛에 양배추를 씹는다. 1일1식이 체중 감량에만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고혈압을 정상 수치로 낮추는 효과도 있다. 또한 염분 섭취를 줄이는 효과도 있다. 당연한 소리이다.

음식을 싱겁게 먹는 사람이 하루에 10끼 식사를 하는 것과 음식을 매우 짜게 먹는 사람이 하루에 1끼를 먹었다고 했을 때 1일 염분 섭취량이 높은 쪽은 음식을 싱겁게 먹는 사람이 하루에 10끼를 먹는 경우다. 이처럼 1식은 염분을 줄이는 데에도 효과가 높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염분을 과다 섭취하는 과정은 음식을 짜게 먹기 때문이 아니라 세 끼를 먹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 상식은 세 끼가 건강을 유지하는 최적의 식습관이라고 선전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조까고 있네. 지상의 모든 동물은 " 공복과 만복의 무한한 반복 " 에 적응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인간만이 공복을 건강을 해치는 것으로 간주해서 만복을 지속하라고 충고한다. 아침 먹고 4시간 지나면 공복이 된다고 ? 웃기는 소리다. 만복인 상태에서 다시 점심을 채워서 만복을 유지하고 다시 만복인 상태에서 저녁을 채워서 만복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것이 세 끼의 진실이다. 한 가지 더 ! 다이어트에 가장 좋은 방법은 운동이 아니라 절식이다.





​덧대기

1.    1일1식이 모두에게 유익한 식습관이라고 말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신뢰일 뿐이다(성장 중인 청소년에게 1일1식을 권유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성장이 끝난 성인이라면 1식은 유익하다)

2.    모든 음식은 약이면서 동시에 독이다. 약을 많이 섭취하는 것보다는 독을 체내에 쌓이지 않도록 절식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다

3.    음식을 다룰 때 가장 경계해야 될 것은 원소 환원주의이다. 예를 들면 < 사과 = 비타민 c > 라는 식이다

4.    체중 감량을 위해 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미친 짓이다(운동은 균형 잡힌 체형을 위한 수단이다)

5.   1식을 하지 않을 때는 끼니를 굶으면 힘이 없다고 느꼈는데, 1식을 지속적으로 하다 보면 밥이 힘의 원천이라는 믿음이 허구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힘은 근육에서 나온다. 그리고 근육은 운동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밥이 만드는 것이 아니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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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8-01-10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일 3식‘을 해야한다는 것 역시 일종의 세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성장기 청소년과 단백질이 필요한 노년기를 제외하고는 절식이 더 건강에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드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0 18:41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1식도 그 환경에 적합한 사람에 한해서라는 조건이 붙어야 겠지요. 중요한 것은 절식은 확실히 좋다는 겁니다. 1식을 하지 않더라고요. 3식을 절식으로 꾸미는 것도 매우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대인은 의외로 많이 먹어요. 몰랐는데 저도 옛날에는 거실 나가면 항상 쇼파 테이블에 놓인 먹거리 하나씩 집어들고 방으로 들어오근 했거든요. 오징어를 씹는다진지 땅콩을 조금 먹는다든지.. 그런 식으로.. 그런데 지금은 아예 군것질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24시간 굶습니다..

라로 2018-01-10 17: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양학 수업을 들어서 그런지 곰발님과는 생각이 약간 달라요. 하지만 예전에 저도 일일 일식 했었는데,,,, 실패했어요. ㅎㅎㅎㅎ 언급하신 것처럼( 언급하셨다고 맘대로 해석 ~~^^;;) 개인에게 맞게 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듯요. 저는 일일 일식 했을때 고지혈증이 올 뻔 했었어요. 너무 안 먹으면 우리 몸에 있는 다른 부분이 작용을 하거든요. 암튼

곰곰생각하는발 2018-01-10 18:39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제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각자의 환경에 맞는 습관입니다. 저에게는 1식이 맞다고 해서 1식을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장기 때 1식을 권하지 않고 겨호 님 말씀처럼 영양이 필요한 노인과 환자분에게도 권하는 것은 위험하겠지요. 저도 처음 두 달은 어지럽고... 별이 보이고.. 막 그랬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