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포방터 돈가스집 앞에서 :
1일1식 4년차를 마무리
올해를 끝으로 일일일식을 한 지 4년을 마무리한다. 내년이면 5년 차이다. 체중 감소는 일일일식 1년 차에 집중했을 뿐이니(나머지 해는 체중을 유지했다) 1식이 내 일상을 변화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먹는 습관을 바꿨을 뿐인데 바뀐 것은 체중 변화가 아니라 사고방식이었다.
쥐와 인간은 음식에 대한 < 새것공포증 neophobia > 을 가지고 있다. 처음 보는 낯선 음식에 대한 거부 반응이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처음 보는 음식은 모두 혐오 음식인 셈이다. 그 이유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해도 그 사람의 체질과 기저 질병에 따라 어떤 음식은 약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현미와 시금치는 병실 환자의 대표적인 식단이지만 신장이 나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여 장기 복용할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인생 경험이 짧은 아이들에게 낯선 먹거리는 위험한 것이다. 쥐도 마찬가지'다. 쥐는 처음 보는 낯선 먹이가 아무리 맛있는 냄새를 풍긴다 해도 극소량만 맛을 보고 대신 맛없는 음식을 배 터지게 먹는다고 한다.
설령, 자신이 먹은 낯선 음식 속에 쥐약이 숨겨 있다 해도 쥐는 극소량만 섭취했기에 몸속에서 독소를 해독할 수 있다. 만약에 이 낯선 음식을 먹었는데도 다음날 배탈이 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어제 먹다 남긴 낯선 먹이를 안심하고 먹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인의 밥상은 다양한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이 올바른 식사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골고루 먹는다. 우리는 뷔페식당에 가면 허리띠를 풀어 놓고는 배가 터지도록 이것저것 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양한 음식을 한꺼번에 섭취하게 되면 자기 몸에 맞지 않는 독소가 든 음식을 섭취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배탈이 나기 일쑤다. 하지만 섭취한 종류가 많다 보니 어떤 식재료가 배탈을 유발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식단을 간소화해서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오이가 내 몸에 독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김치와 오이만으로 구성된 식단을 차려서 먹었는데 다음날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한 적이 있다. 내게는 오이 성분이 독소로 작용한 탓이다. 음식 종류를 간소하게 차려서 먹다 보니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 다양 " 하다는 것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다. 그동안 나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문학은 물론이고 사회, 자연, 과학, 정치와 관련된 책도 꾸준히 읽었다. 1년에 평균 100권 정도 읽었다. 1년에 100권 ?! 우레와 같은 박수를......
하지만 여기에는 꼼수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서 거의 대부분을 속독과 다독으로 건성건성 읽어치웠다. 하루에 책 여러 권을 1 / 3, 1 / 4, 1 / 5씩 읽는 방식이다. 주말에는 대여섯 권을 신용불량자가 카드돌려막기하는 것처럼 < 텍스트 돌려 막기 방식 > 으로 읽곤 했다. 이 방식은 책 읽는 지루함을 상쇄시킬 수 있다. 지루하다 싶으면 다른 책을 읽고 지루하다 싶으면 다른 책으로 건너뛰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내용이 섞이게 된다. " 라스콜리니코프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로 알제리에서 해수욕을 즐기다가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였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과 함께 ! " 이런 식 ?! 응, 그런 식 ! 지금은 한 가지 책을 매우 느리게 읽는다.
김영민의 << 차마, 깨칠 뻔하였다 >> 라는 에세이는 한 달째 읽고 있다. 문장은 짧으나 사유가 깊어서 가끔 그의 한 문장에서 책 한 권의 사유를 훔치게 된다. 간소하게 차린 식단으로 식사하는 기분이 든다. 저자인 김영민도 1일1식을 한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다양한 음식을 고루고루 먹는 것이 건강식이 될 수 없듯이 다독이 사유를 넓히는 것도 아니듯이 다양한 경험이 그 사람이 살아온 서사를 풍요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여행과 경험의 다양성이 그 사람의 인성을 풍부하게 만든다면 세계 곳곳을 누빈 김우중과 이명박은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칸트는 오로지 산책을 통해서만 거대한 사고를 확장했고 몽테뉴의 << 수상록 >> 은 다락방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먹는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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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 부류는 백종원'이다. 의도적으로 오타를 남발하자면 골목 상권을 파괴하는 주체가 가난한 골목 자영업자 앞에서 눈알을 불알이며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자지우지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그리고 포방터 돈가스집 돈가스를 처먹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 좆같은 대중 취향의 광기도 혐오하는 쪽이다. 소확행을 위해서 돈가스 하나 처먹겠다고 새벽 5시에 가게 앞에서 기다릴 시간에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과 뜨거운 섹스를 해라. 섹스가 돈가스보다 맛이 좋아. < 소확행 > 의 핵심은 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좌절과 절망을 교묘한 방식으로 자위하려는 자기 방어 기제'이자 경제 불황과 미래 불안으로 인해 위축된 소비자의 호주머니를 다른 방식으로 털기 위한 먹거리 자본제의 속성이다. 찐따 새끼들, 맛있는 음식이 너희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아.
요즘은 < 몸의 장소성 > 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는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는 무거운 짐을 진 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실내(室內)라는 장소'로 내준 것이다. 타인을 < 안 > 으로 들이는 방식은 환대이고 사랑의 행위'이다.
신경숙의 << 외딴 방 >> 에서 보여지는 퇴행적 역사 인식과 오류
눈을 감으세요 / 모두 눈을 감으세요
ㅡ 징병검사장에서, 윤희상
버지니아 울프는 << 자기만의 방 >> 에서 여성 예술가는 독립적 공간을 위한 < 자기만의 방 > 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 500파운드의 돈 > 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 남성 " 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장소로 " 자기만의 방 " 을 선정한 셈이다. < 방 > 이 버지니아 울프를 대표하는 장소성'이라면 < 부엌 > 은 신경숙 문학을 대표하는 장소성'이다. 하지만 신경숙이 집착하는 부엌이라는 장소성은 버지니아 울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기만의 방이 남성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잰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면 신경숙의 부엌은 남성들과 결탁하여 스스로 그 욕망에 부역하고자 하는 장소로 퇴행한다.
부엌에서 만들어진 밥은 남성(욕망)을 위해 바치는 보시布施 이다.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 외딴방 >> 에서 1인칭 여성 화자인 < 나 > 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랑하는 오빠를 위해 저녁을 차리는 것을 최고의 행복이라 믿는다. " 나는 정치 같은 건 몰라, 그냥 오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는 행복만을 느끼고 싶어 ! " 신경숙은 < 나 > 를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를 다니며 집에 와서는 오빠의 저녁밥을 책임지는 부엌데기'로 취급한다. 내가 이 소설이 굉장히 악질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과 구로공단에 위치한 동남전기주식회사의 열악한 노동 현장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정조준한 소설이면서도 애써 탈정치적 노스텔지어만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주인공 < 나 > 가 노조를 배신하면서 말했던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희망은 소모전이었던 것이다 " , 외딴방 )는 변명은 7,80년대 노동 운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신경숙의 퇴행적 사회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신경숙이 보기에 7,80년대 노동 운동은 쓸모 없는 소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는 줄기차게 주인공 < 나 > 의 입을 빌려서 노동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데, 이 행위 자체가 정확하게 강경 자본가 우파의 " 정치색 " 을 띤다는 점에서 < 나 > 가 강박적으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고백하는 언술은 이율 배반에 해당된다.
노동 운동을 단순하게 해도 해도 안 되는 무용한 일로 치부하는 것은 자본가가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협박하거나 회유할 때 자주 사용하는 언술이라는 점에서 << 외딴 방 >> 에서 주인공 나는 < 외피는 구로공단 여공 작업복을 둘렀지만 내피는 자본가 / 기득권 / 수구 보수의 남성 실크 넥타이를 맸다는 점에서 속내를 숨긴 캐릭터 > 로 읽힌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가면극인가. 그리고 광주 시민을 학살했던 학살자(대통령)의 얼굴보다 싫은 것이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는 가난1)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화자의 논리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지지하기 위해 내세웠던 태극기 집회 무리의 산업화 논리와 다를 것 하나 없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 외딴 방 >> 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탈정치적 존재라고 강조하지만 유감스럽게도 < 나 > 는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 입장을 당당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말하는 존재'이다. 이 소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고 조선일보가 남진우를 앞세워서 조선일보 지면에서 대대적인 작품 홍보에 열을 올렸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문학동네가 조선일보의 비호 아래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문학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한국 문학사에서 1970-80년대 문학을 정치색에 함몰된 저질 프로파간다 문학으로 평가절하하면서 문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하여 탈정치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신경숙 작가이고 신경숙 문학의 최고봉이 << 외딴 방 >> 이다. 이 소설 또한 1970-80년대 노동 운동을 평가절하하면서 탈정치화를 선언한 구로공단 여공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문학동네와 신경숙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탈정치화를 주장하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인간은 정치적이다. 이 전제를 바탕으로 하자면 인간을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탈정치화를 선언한 신경숙 소설뿐만 아니라 그를 옹호한 문학동네 또한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이익집단이다. 비극은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신경숙은 외부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눈을 감고 내면의 이야기를 하자고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