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포방터 돈가스집 앞에서  :

 


 

 

 

 

 


1일1식 4년차를 마무리


 


                                                                                                                   올해를 끝으로 일일일식을 한 지 4년을 마무리한다. 내년이면 5년 차이다. 체중 감소는 일일일식 1년 차에 집중했을 뿐이니(나머지 해는 체중을 유지했다) 1식이 내 일상을 변화시켰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다. 먹는 습관을 바꿨을 뿐인데 바뀐 것은 체중 변화가 아니라 사고방식이었다.

쥐와 인간은 음식에 대한 < 새것공포증 neophobia > 을 가지고 있다. 처음 보는 낯선 음식에 대한 거부 반응이다. 어린아이에게 있어서 처음 보는 음식은 모두 혐오 음식인 셈이다. 그 이유는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 해도 그 사람의 체질과 기저 질병에 따라 어떤 음식은 약이 되기도 하지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데 있다. 예를 들면 현미와 시금치는 병실 환자의 대표적인 식단이지만 신장이 나쁜 사람에게는 치명적인 독으로 작용하여 장기 복용할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인생 경험이 짧은 아이들에게 낯선 먹거리는 위험한 것이다. 쥐도 마찬가지'다. 쥐는 처음 보는 낯선 먹이가 아무리 맛있는 냄새를 풍긴다 해도 극소량만 맛을 보고 대신 맛없는 음식을 배 터지게 먹는다고 한다.

설령, 자신이 먹은 낯선 음식 속에 쥐약이 숨겨 있다 해도 쥐는 극소량만 섭취했기에 몸속에서 독소를 해독할 수 있다. 만약에 이 낯선 음식을 먹었는데도 다음날 배탈이 나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어제 먹다 남긴 낯선 먹이를 안심하고 먹기 시작한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인의 밥상은 다양한 음식을 골고루 먹는 것이 올바른 식사법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어서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골고루 먹는다. 우리는 뷔페식당에 가면 허리띠를 풀어 놓고는 배가 터지도록 이것저것 먹기 시작한다. 그런데 다양한 음식을 한꺼번에 섭취하게 되면 자기 몸에 맞지 않는 독소가 든 음식을 섭취할 가능성이 높아지고 배탈이 나기 일쑤다. 하지만 섭취한 종류가 많다 보니 어떤 식재료가 배탈을 유발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기에 식단을 간소화해서 먹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내가 오이가 내 몸에 독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김치와 오이만으로 구성된 식단을 차려서 먹었는데 다음날 배탈이 나서 고생을 한 적이 있다. 내게는 오이 성분이 독소로 작용한 탓이다. 음식 종류를 간소하게 차려서 먹다 보니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가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은 " 다양 " 하다는 것이 가지고 있는 함정이다. 그동안 나는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었다. 문학은 물론이고 사회, 자연, 과학, 정치와 관련된 책도 꾸준히 읽었다. 1년에 평균 100권 정도 읽었다. 1년에 100권 ?!  우레와 같은 박수를......

하지만 여기에는 꼼수가 도사리고 있었으니,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서 거의 대부분을 속독과 다독으로 건성건성 읽어치웠다. 하루에 책 여러 권을 1 / 3, 1 / 4, 1 / 5씩 읽는 방식이다.  주말에는 대여섯 권을 신용불량자가 카드돌려막기하는 것처럼 < 텍스트 돌려 막기 방식 > 으로 읽곤 했다. 이 방식은 책 읽는 지루함을 상쇄시킬 수 있다. 지루하다 싶으면 다른 책을 읽고 지루하다 싶으면 다른 책으로 건너뛰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내용이 섞이게 된다. " 라스콜리니코프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로 알제리에서 해수욕을 즐기다가 아랍인을 권총으로 쏴 죽였지,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는 말과 함께 ! "  이런 식 ?! 응, 그런 식 ! 지금은 한 가지 책을 매우 느리게 읽는다.

김영민의 << 차마, 깨칠 뻔하였다 >> 라는 에세이는 한 달째 읽고 있다. 문장은 짧으나 사유가 깊어서 가끔 그의 한 문장에서 책 한 권의 사유를 훔치게 된다. 간소하게 차린 식단으로 식사하는 기분이 든다. 저자인 김영민도 1일1식을 한 지 오래되었다고 한다. 다양한 음식을 고루고루 먹는 것이 건강식이 될 수 없듯이 다독이 사유를 넓히는 것도 아니듯이 다양한 경험이 그 사람이 살아온 서사를 풍요하게 만드는 것도 아니다. 여행과 경험의 다양성이 그 사람의 인성을 풍부하게 만든다면 세계 곳곳을 누빈 김우중과 이명박은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칸트는 오로지 산책을 통해서만 거대한 사고를 확장했고 몽테뉴의 << 수상록 >> 은 다락방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먹는다는 것은 곧 생각한다는 것이다.




+

내가 제일 싫어하는 인간 부류는 백종원'이다. 의도적으로 오타를 남발하자면 골목 상권을 파괴하는 주체가 가난한 골목 자영업자 앞에서 눈알을 불알이며 그들의 생사여탈권을 자지우지하는 것을 보면 화가 난다. 그리고 포방터 돈가스집 돈가스를 처먹기 위해 새벽 5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는, 그 좆같은 대중 취향의 광기도 혐오하는 쪽이다. 소확행을 위해서 돈가스 하나 처먹겠다고 새벽 5시에 가게 앞에서 기다릴 시간에 차라리 사랑하는 사람과 뜨거운 섹스를 해라. 섹스가 돈가스보다 맛이 좋아. < 소확행 > 의 핵심은 경제적 불평등이 낳은 좌절과 절망을 교묘한 방식으로 자위하려는 자기 방어 기제'이자 경제 불황과 미래 불안으로 인해 위축된 소비자의 호주머니를 다른 방식으로 털기 위한 먹거리 자본제의 속성이다. 찐따 새끼들, 맛있는 음식이 너희들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않아.



+

요즘은 < 몸의 장소성 > 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예수는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 라고 말씀하셨는데  예수는 무거운 짐을 진 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그들에게 실내(室內)라는 장소'로 내준 것이다. 타인을 < 안 > 으로 들이는 방식은 환대이고 사랑의 행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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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bomi 2018-12-29 12: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와 생각이 비슷한 부분이 많네요. 저는 골고루 먹으라는 말이 듣기 싫어요ㅜㅜ 매 끼니 단백질(고기) 챙겨 먹으라는 말도 참 듣기 싫고요. 꼬박꼬박 골고루 챙겨 먹었을 때 더 힘들던데... 그리고 그렇게 먹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아무거나 막 먹거나, 하루종일 먹고 있는 것만 같고... 여튼 공감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9 12:39   좋아요 0 | URL
각자 몸에 맞는 음식은 다 다릅니다. 위에서 예를 들었듯이 말입니다. 누구에게는 현미가 건강식이지만 누구에게는 현미가 독이죠. 모든 식재료는 약이자 독으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종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몸에서 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은 음식을 섭취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안전한 먹거리는 자신이 먹었을 때 무탈했던 것을 가려내는 능력이 아닌가 싶습니다..

syo 2018-12-29 1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먹는 걸 돼지처럼 좋아하다 보니 1일 1식은 정말 일종의 경지로 보일 지경이네요..... 4년 씩이나, 멋있으세요.

2018년도 이렇게 착착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곰발님.
올해도 이래저래 감사했구요, 2019년도 잘 부탁드립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9 13:52   좋아요 0 | URL
알라딘계의 슈퍼스타 쇼 님도 내년에는 장원급제하여 이 나라를 평정하여 주시옵소서 ~

syo 2018-12-29 17:07   좋아요 0 | URL
네?? 슈퍼스타요?? 말도 안 됗ㅎㅎㅎ
그렇지만 저에 대해 뭔가를 기억하시고 계신 것 같아서 살짝 감동......ㅠ

1일 1식에 입문하게 되면, 꼭 곰발님의 자문을 구하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9 18:18   좋아요 0 | URL
진단은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1식은 곰곰발에게 ~

카알벨루치 2018-12-29 13: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곰님 1일1식...4년...우아! 감탄사 백개 찍고 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 늘 건강하십시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9 13:59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2018-12-31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31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신경숙의 << 외딴 방 >> 에서 보여지는 퇴행적 역사 인식과 오류





​눈을 감으세요 / 모두 눈을 감으세요


ㅡ 징병검사장에서, 윤희상




                                                                                                                                          지니아 울프는 << 자기만의 방 >> 에서 여성 예술가는 독립적 공간을 위한 < 자기만의 방 > 과 경제적 자립을 위해 < 500파운드의 돈 > 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 남성 " 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한 장소로 " 자기만의 방 " 을 선정한 셈이다. < 방 > 이 버지니아 울프를 대표하는 장소성'이라면 < 부엌 > 은 신경숙 문학을 대표하는 장소성'이다. 하지만 신경숙이 집착하는 부엌이라는 장소성은 버지니아 울프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자기만의 방이 남성으로부터 독립하고자 하는 잰더 인식에서 비롯되었다면 신경숙의 부엌은 남성들과 결탁하여 스스로 그 욕망에 부역하고자 하는 장소로 퇴행한다.

부엌에서 만들어진 밥은 남성(욕망)을 위해 바치는 보시이다.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 외딴방 >> 에서 1인칭 여성 화자인 < 나 > 는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사랑하는 오빠를 위해 저녁을 차리는 것을 최고의 행복이라 믿는다. " 나는 정치 같은 건 몰라, 그냥 오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는 행복만을 느끼고 싶어 ! " 신경숙은 < 나 > 를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학교를 다니며 집에 와서는 오빠의 저녁밥을 책임지는 부엌데기'로 취급한다. 내가 이 소설이 굉장히 악질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70년대 말에서 80년대를 관통하는 시대적 배경과 구로공단에 위치한 동남전기주식회사의 열악한 노동 현장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정조준한 소설이면서도 애써 탈정치적 노스텔지어만을 강조한다는 점이다.

주인공 < 나 > 가 노조를 배신하면서 말했던 해도 해도 안 되는 일이 있다( "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희망은 소모전이었던 것이다 " , 외딴방 )는 변명은 7,80년대 노동 운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신경숙의 퇴행적 사회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신경숙이 보기에 7,80년대 노동 운동은 쓸모 없는 소모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녀는 줄기차게 주인공 < 나 > 의 입을 빌려서 노동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데, 이 행위 자체가 정확하게 강경 자본가 우파의 " 정치색 " 을 띤다는 점에서 < 나 > 가 강박적으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고백하는 언술은 이율 배반에 해당된다.

노동 운동을 단순하게 해도 해도 안 되는 무용한 일로 치부하는 것은 자본가가 노조를 무력화하기 위해서 노동자를 협박하거나 회유할 때 자주 사용하는 언술이라는 점에서 << 외딴 방 >> 에서 주인공 나는 < 외피는 구로공단 여공 작업복을 둘렀지만 내피는 자본가 / 기득권 / 수구 보수의 남성 실크 넥타이를 맸다는 점에서 속내를 숨긴 캐릭터 > 로 읽힌다. 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가면극인가. 그리고 광주 시민을 학살했던 학살자(대통령)의 얼굴보다 싫은 것이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는 가난1)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화자의 논리는 박정희 정권의 독재를 지지하기 위해 내세웠던 태극기 집회 무리의 산업화 논리와 다를 것 하나 없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 외딴 방 >> 에서 주인공은 자신을 탈정치적 존재라고 강조하지만 유감스럽게도 < 나 > 는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 입장을 당당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말하는 존재'이다. 이 소설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고 조선일보가 남진우를 앞세워서 조선일보 지면에서 대대적인 작품 홍보에 열을 올렸다는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문학동네가 조선일보의 비호 아래 짧은 시간 안에 거대한 공룡으로 성장했다는 사실은 문학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출판사 문학동네는 한국 문학사에서 1970-80년대 문학을 정치색에 함몰된 저질 프로파간다 문학으로 평가절하하면서 문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로부터 독립하여 탈정치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신경숙 작가이고 신경숙 문학의 최고봉이 << 외딴 방 >> 이다. 이 소설 또한 1970-80년대 노동 운동을 평가절하하면서 탈정치화를 선언한 구로공단 여공이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문학동네와 신경숙은 동일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탈정치화를 주장하는 행위 자체가 정치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인간은 정치적이다. 이 전제를 바탕으로 하자면 인간을 다루는 문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탈정치화를 선언한 신경숙 소설뿐만 아니라 그를 옹호한 문학동네 또한 정치적인, 너무나 정치적인 이익집단이다. 비극은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데 있다. 신경숙은 외부의 일에 간섭하지 말고 눈을 감고 내면의 이야기를 하자고 속삭인다. 눈을 감으세요. 모두 눈을 감으세요.

그럴수록 우리는 더욱 두 눈 부릅뜨고 외부를 바라보아야 한다. 컨베이어 벨트에 목이 잘리는 노동자가 있고 지금도 철탑 위에서 408일 동안 농성을 하는 노동자가 있다.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을 하는 것은 쓸모 없는 소모가 아니라  숭고한 일이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한때 해도 해도 안되는 일이었다. 신경숙 문학에 침을 뱉는다.



 

 

 

                                    


 

1)

, 오빠. 나는 그런 것들보다 그때 연탄불은 잘 타고 있었는지, 가방을 챙겨들고 방을 나간 오빠가 어디 길바닥에서나 자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져. 그때 왜 그렇게 추웠는지 말야. 오빠, 그때 내가 정말 싫었던 건 (전두환) 대통령의 얼굴이 아니라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었어.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었을 때 말야. 물이 얼지 않고 시원스럽게 나와주면 너무 좋았고, 안 그러고 얼어 나오지 않으면 너무 싫고 그랬어. 내가 문학을 하려고 했던 건 문학이 뭔가를 변화시켜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어. 그냥 좋았어.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 금지된 것들을 꿈꿀 수가 있었지. 대체 그 꿈은 어디에서 흘러온 것일까. 나는 내가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문학으로 인해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면 사회도 꿈을 꿀 수 있는 거 아니야?


-​신경숙, 외딴방』, 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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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 신경숙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9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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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아 다 리    짝 짝 꿍   :




 



저녁(밥)이 있는 풍경




 


                                                                                                                                                                                                           우리 집 곁방에 세 든 총각 아저씨는 젊은 문학도'였다. 우편함에는 정기적으로 그에게 발송되는 우편물이 있었는데 하나는 발신처'가 한국문인협회였고 다른 하나는 명문대 동문 회보'였다.

그 우편물로 미루어 볼 때    :    나는 그가 등단은 했으나 책은 아직 출판하지 못한 미생의 작가'가 아니었을까 추측했지만, 그것을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그는 명문대 출신으로 알랑 드롱 뺨치게 잘생긴 사람이었다( 요즘 젊은 세대들은 알랑들롱을 알랑가몰랑, 됐고 ! ).  그래서 어머니는 곁방 총각에게 항상 넉넉한 음식을 제공했다.  나는 문단의 최신 경향을 파악하기 위해서 음식을 싸 들고 곁방 문을 자주 두드렸고 그는 답례로 언제든지 와서 읽고 싶은 책을 마음대로 빌려 가라고 권했다.  먹거리와 책거리를 교환하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나는 그곳에서 한국 문학의 최신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우리 집 곁방에 세 든 알랑 드롱은 장정일, 공지영, 신경숙이 문단의 스타로 우뚝 발기하기 전부터 그네 - 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장정일의 청년작과 공지영의 처녀작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알랑 드롱 덕분이었다. 신경숙의 << 풍금이 있던 자리 >> 가 수록된 단편 소설집도 알랑 드롱이 추천한 책이었다. 이 책을 읽었을 때 느꼈던 내 첫경험은 " 쇼크 " 였다. 그동안 실천 문학이니 참여 문학이니 하며 딱딱한 문장과 서사만 읽다가 ASMR 에 가까운 작게 소곤거리는 예쁜 문장을 접하다 보니 귀르가즘이라는 신천지를 경험하게 되었다.  소녀 감성 충만한 할리퀸의 문학 버전 ?!  하지만 그것은 < 새것 > 이 주는 잠시 즐거운 아우라'였을 뿐  문학적 완성도'에서 오는 웅숭깊은 즐거움은 아니었다.

신경숙의 " 뽀록 " 은 오래가지 못했다.  쉼표( , ) 와 말줄임표 ( ...... ) 를 남발하는 문장을 보면서 점점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신경숙 특유의 < 스타일 > 로 발전하지 못하고 < 웅엥웅 > 으로 몰락한 느낌을 받았다.  음향과 녹음 상태가 형편없어서 자막 없이는 등장인물의 대사를 알아들을 수 없는 80년대 싸구려 국내 방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  웅 ~~~~~ 엥 ~~~~~~~~~~  웅 ~~~~~~~~~~~~~~    신경숙 소설에서 여성이 스스로 말하기를 주저하게 만드는 기저(基底)는  남성 억압에 의한 결과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성 체제에 쥐새끼처럼 순응한 결과처럼 보여서 신경숙이 창조하시었던 보수적이며 수동적인 여성-들에게 삭힌 홍어로 그네 목구멍을 뻥 뚫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소리 질러 , 시바.

예를 들면 소설 << 외딴 방 >> 에는 전경들이 휘두르는 곤봉에 맞아 친오빠가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한 1인칭 화자인 < 나 > 는 " 나는 정치 같은 건 몰라, 그냥 오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려주는 행복만을 느끼고 싶어 ! " 라고 혼자 독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나는 조선시대 여인네 같은 말투에 크게 당황했다.  국가 폭력 앞에서 갑자기 앞치마 두른 새색시가 되어 뜬금없이 밥 타령을 말하니 어리둥절했다. 그대가 단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빠의 저녁상을 차리는 것도 모자라 그 행위에서 행복을 느낀다고 ??!! 이 소설은 매우 퇴행적인데 민중을 배부르게 먹여만 준다면 독재 따위는 눈 감아 줄 수 있다는 태도를 보인다.

, 오빠. 나는 그런 것들보다 그때 연탄불은 잘 타고 있었는지, 가방을 챙겨들고 방을 나간 오빠가 어디 길바닥에서나 자지 않았는지, 그런 것들이 더 중요하게 느껴져. 그때 왜 그렇게 추웠는지 말야. 오빠, 그때 내가 정말 싫었던 건 (전두환) 대통령의 얼굴이 아니라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 놓은 무우가 꽝꽝 얼어버려가지고 칼이 들어가지 않은 것 그런 것들이었어.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었을 때 말야. 물이 얼지 않고 시원스럽게 나와주면 너무 좋았고, 안 그러고 얼어 나오지 않으면 너무 싫고 그랬어. 내가 문학을 하려고 했던 건 문학이 뭔가를 변화시켜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어. 그냥 좋았어. 문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현실에서 불가능한 것, 금지된 것들을 꿈꿀 수가 있었지. 대체 그 꿈은 어디에서 흘러온 것일까. 나는 내가 사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해. 문학으로 인해 내가 꿈을 꿀 수 있다면 사회도 꿈을 꿀 수 있는 거 아니야?


-​신경숙, 외딴방』, 245

 


 

​전두환이라는 인물이 상징하는 국가 독재와 국가 폭력에 대한 증오보다 " 무우국을 끓이려고 사다놓은 무우를 꽝꽝 얼어버려자기고 칼이 들어가지 않은 것 ㅡ " 과 "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었을 때...... 안 그러고 얼어 나오지 않 ㅡ " 는 것이 더 싫다고 고백하는 이 철딱서니 없는 < 퇴행적 고백 > 에 대하여 평론가들은 왜 < 포스트모던 > 하다고 평가했던 것일까 ?  퇴행적 증후와 포스트모던은 정반대의 애티튜드가 아닐까 ?  이 탈정치적 선언 고백은 신경숙 문학의 핵심이다. " 정치의 백치(성) " 야말로 신경숙 문학의 정체성이다. 그녀는 80년대 구로공단 노동 현장을 배경으로 한 소설에서 변화보다는 불변(체제 유지)를 갈망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문학을 하려고 했던 건 문학이 뭔가를 변화시켜주리라고 생각해서가 아니었어.

아침밥을 차려주는 아내를 현모양처의 제 1 덕목으로 여기는 한국 문단의 어르신들에게 주인공 < 나 > 는 완벽하며 아련하고 가녀린 여성이다. 버지니아 울프는 글을 쓸 수 있는 자기만의 방을 소망했다면 신경숙은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자기만의 부엌에 집착한다. 신경숙은 이 소설에서 맛있는 저녁, 꽝꽝 얼어버린 무우, 수돗가 따위의 문장을 통해서 주로 음식을 만들 수 있는 쾌적한 장소에 대한 집착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 소설을 " 키친아트(부엌소설) 문학 " 이라 부를 만하다. 많은 평론가들이 이 소설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말줄임표(......)나 말없음표(ㅡㅡㅡㅡ)에 대해 " 고백적 진술 자체가 매우 힘든 것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주는 효과적 서술 방식 " 이라며 호, 호호호호들갑을 떨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제대로 된 문장 하나 완성할 만한 필력이 모자라서 말줄임표와 말없음표로 문장을 매조지하는 것처럼 보였다.

역량이 부족하다면 불철주야 < 글 짓기 > 에 문장 연습에 정진하여 실력을 키우기에도 시간이 모자를 판인데 사랑하는 < 밥 짓기 > 로 작가 인생을 낭비하게 되었으니 신경숙 표절 사태는 예측 가능한 참사'가 아닐 수 있다 말 할 수 있는 이 뉘 있으리오 ?  그렇다면 이 모든 게 다 신경숙 잘못일까 ?  90년대 평론은 문단과 출판이 유착된 시기로 장점만 말하고 단점은 말하지 않는 주례사 비평(정실 비평)이 책을 파는 데 도움을 준다는 사실을 평론가들이 쥐새끼처럼 알아차리게 된 시기였다. 이때부터 책 뒷부분을 장악한 것은 평론가가 영혼을 팔아 쓴 작품 해설이었다. 읽다 보면 장광설이 하늘을 찔러 이 논조대로라면 한국 문학은 노벨문학상 1000개 정도는 수상했어야 마땅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좋은 사례가 문학동네 작가상을 수상한 << 동정 없는 세상 >> 에 대한 평론가들의 매문이다. 이토록 형편없는 소설에 대해 " 탈근대적 성장소설 " 이라고 하거나 " 신인답지 않은 작가의 탄생 " 이라고 설레발을 치니 그 수준을 의심하게 된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닥치고 빨아주다 보면 발생하게 되는 참사'다. 화장실 벽 낙서'에나 볼 수 있는 < 졸라 하고 싶어서 불알이 터져버릴 것 같은 고3 남학생 이야기 > 를 두고 탈근대적 ?! 차라리 " 남근대적 성장소설 " 이라고 하거나 " 신인답지 않는 작가 " 가 아니라 신인답지 않은 짜가  " 라고 해라.  응응 한번 했더니 어른이 됐다 ?!  그렇다면 응응 천 번을 한 나는 세계 인류 3대 성인 중 한 명이더냐 ?  성경험과 성장통'을 하나로 엮어서 퉁치는 클리쉐는 이제 지겹다.

섹스는 당신을 어른으로 만들지도 않고 성숙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이런 식의 오럴섹스에 가까운 주례사 비평과 신경숙 문학의 대중성이 맞물리면서 신경숙 문학은 한국 문학을 대표하는 대모'로 우뚝 서게 된다. 신경숙이 한국 문학을 평정하고 있을 때 김정란 시인이 신경숙 문학을 매섭게 비판한 적이 있다. 그때 비평가 일군이 발군을 뽐내며 무차별적으로 김정란을 융단폭격했다. 가히, 그 수준이 눈 뜨고는 차마 볼 수 없어서 눈 감고 커트코베인 수준에 이르렀다. 그 무리의 수장이 바로 남진우였다. 그렇다, 경숙 씨 남편 남진우.  김정란과 남진우는 2000년에도 대차게 싸운 적 있다. 그는 김정란을 두고 " 가장 타락한 형태의 페미니즘이란 구호 " 라고 비판했다.

김정란은 남진우가 자신을 " 남근 달린 여성 " 이라고 표현하자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응수했다.


그(남진우)는 지성과 이론이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 어떻게 지성과 이론을 갖추었다고 여성비평가를 남근 달린 여성이라고 야유할 수 있는 걸까 ? 그러면, 별로 지성적인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이론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는 남진우는 자궁 달린 남성인가 ? 더더욱 놀라운 것은, 여성비평가가 여성작가를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면서 여성의 적은 여성이다 라는 야비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하일지, 장정일, 이인화, 박일문을 공격했던 남진우를 보고 우리는 남성의 적은 남성이다 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남진우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명박 정권 때 젊은 작가 137인이 정권 교체를 바라며 비상시국 선언 성명을 발표하고 한국 작가회의가 지지 성명에 동참했던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 한두 명도 아니고 137명...... 요즘 시인이나 작가들의 책 서문을 보면 앞뒤 맥락 없이 노동과 혁명을 이야기해요. 그런 단어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뜬금없다는 생각을 합니다. " 이 고백은 신경숙이 << 외딴방 >> 에서 1인칭 화자의 말을 빌려 " 나는 정치 같은 건 몰라, 그냥 오빠에게 맛있는 저녁을 차리는 것이 행복해 " 라고 했던 세련된 키친아트적 고백과 일치한다. 이런 것을 두고 " 아다리가 짝짝꿍 " 이라고 말한다. 두 사람은 서로 운명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아다리 짝궁인 셈이다.

표절 논란 이후, 신경숙은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을까. 눈이 내린 아침에 수돗물을 틀어을 때 물이 얼지 않고 시원스레 나와주는 따스한 키친아트에서 시원한 무우국을 끓이며 저녁(밥)상을 차리면서 마냥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삼시세끼 제때제때 밥은..... 먹고 다니는지 궁금하다. 하여, 나는 존경 없이 당신-들1)에게 묻는다.  밥은 먹고 다니냐 ?









​                           


1) 아다리 짝짝꿍 맴버들은 신경숙과 남진우를 포함한 문학동네 편집위원들이다. 철철 브라더스(권희철과 신형철)의 변명을 듣고 있으면 요실금 환자처럼 웃음이 실실 흘러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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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8-12-24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랑 들롱 뺨치게 잘 생긴 명문대 출신의 작가라는 대목을 보니 김경욱 작가님이 번뜩 떠오릅니다.....
스무 살 즈음, 김경욱 작가님의 무슨 단편집이었던가 책 날개를 펼쳤는데 한 3~4가지 장르의 열등감이 동시에 들더라구요 ㅋ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0:25   좋아요 0 | URL
김경욱 작가 님 미남이시죠... ㅎㅎㅎㅎㅎ

akardo 2018-12-24 1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친오빠라 한다면 부모님 사랑을 둘러싼 경쟁자이자 친구 정도로 생각할 텐데. 친오빠에게 밥 차려주기 싫은 어린 여동생들이 더 많을걸요. 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3:59   좋아요 0 | URL
생각을 하면 얼마나 < 나 > 라는 소설 속 여자는 얼마나 남성에 순종적인가요. 여동생의 행복이 친오빠 저녁 차리는 게 행복이라니.. 이러니 한국 문단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는 듯...
이 얼마나 시대착오적이며 퇴행적인 판타지입니까... 어이가 없어씀..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은 단지 그대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오빠에게 저녁상을 차리는 것을 의무라고 말하는 것도 웃긴데
한술 더 떠 저녁상을 차리는 게 행복이라고 말하는 소설 속 화자인 여성은
내가 보기에 남성 욕망을 채우는 판타지의 재현이다.

이 소설이 얼마나 퇴행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것이야말로 신경숙 문학이 왜 그토록 보수적이며 퇴행적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아니.. 시바, 도대체 오빠 저녁상 차리는 게 행복이라고 지껄이는 저 아름다운 정체성은 무엇이란 말인가.

신경숙이 얼마나 한국 주류 남성 문단에게 잘 보일려고 애를 썼나를 단번에 알 수 있다.
이런 소설이 포스트모던하다고??!!!!!

이게 한국 문학의 위대한 결산‘이란 말이냐.
문학을 배워서 평론 짓으로 먹고사는 놈들이 퇴행적 증후와 포스트모던한 증후를 헷갈린다는 게
말이 되오 ? 응 ??


이 시밤바들아.. 내참.. 더러워서.. 읽다가 토하는 줄 알았다....



2018-12-24 16: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4 16:48   좋아요 1 | URL
주인공 나이가 16살입니다.... ㅎㅎㅎㅎㅎㅎ 16살부터 19살까지의 이야기인데... 전 도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진짜 그지같은 작품이에요. 제가 이 작품과 다른 작가의 작품을 혼동해서 그동안 읽지 않고 있다가 신경숙 최고 걸작이라길래 순수한 마음으로 읽다가 기절하는 줄 알았습니다. 정말 개같은 작품입니다...

수다맨 2018-12-27 15: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차라리 젊은 평론가들이야 (이명원이나 조영일 같은 강골이 아니라면) 출판사와 문예지의 눈치를 안 볼 수는 없으니 신경숙 문학에 대해서 ‘속 시원히‘ 말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어느 정도는 듭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외딴방˝에 대한 최악의 비평은 백낙청의 ‘외딴 방이 묻는 것과 이루는 것‘입니다.
예전에 곰곰발님께서도 제 서재에 들러서 이 글(http://blog.aladin.co.kr/719469195/7622927)을 보셨을 터인데 ˝외딴방˝의 성취를 논하고자 한국 문학사의 거성들인 염상섭, 홍명희, 조세희를 호출합니다. 여기서 백낙청은 조세희의 ˝난쏘공˝을 가리켜 문학에 대한 물음의 집요성이나 현실 탐구의 깊이가 ˝외딴방˝에 견주지 못한다고 폄하하고, 염상섭의 ˝삼대˝를 일러서 독자를 편하게 만드는 소설이라고 낮추보며, 홍명희의 ˝임꺽정˝에 대해선 창조적 모색의 긴장이 풀어진다고 비판하지요.
소장 비평가들이야 (신형철 같은 예외를 제외하면) 힘도 빽도 없는 경우가 많으니 시장과 출판사와 ‘어느 정도는‘ 타협하는 성향이 있다고 봅니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선 (당연히 비판을 포함한) 심도 깊은 얘기가 더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한국 문학의 원로라는 인물이 보다 진중한 안목과 독법으로 젊은 작가의 작품을 비평하지 못하고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을 폄훼하면서까지 ˝외딴방˝을 호평하려는 모습은 비판을 넘어서,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는 생각조차 듭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7 18:31   좋아요 0 | URL
읽은 기억은 나나 다시 읽어보았씁니다.
참 낯 뜨거운 매문이군요. 다시 읽어보아도..
이 양반은 남진우보다 한술 더 떴구려.. 참. 기도 안 찹니다.. ㅎㅎ

이거 하루빨리 수다맨 님이 문단을 접수해야 하는데....

나중에 술 한 잔 해요. 안 한 지 오래되었구려..
 

 

 

 

 

 

 

 

 

 

 

 

 

 

 

 

 

 

 

 

 

 

 

 

 

 

여자에게는 영혼이 없다





김명순은 21세(1917年) 때 동인지 『 청춘 』의 공모에 단편소설 「의심의 소녀」가 당선되어 등단한 근대 최초의 여성작가다. 여성작가로서는 최초로 작품집 『생명의 과실』과『 애인의 선물 』을 발간했다. 그녀가 남긴 작품은 소설 20편, 시 79편, 수필 15편, 평론 3편, 희곡 3편, 번역시와 번역소설 3편이었으니 실로 왕성한 필력이 아닐 수 없다.  또한 그는 일어에 능통한 것은 물론이고 프랑스어와 독일어도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하니 그 시대에서는 엘리트 문인'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녀는 불우한 생을 살았다. 그는 데이트 강간의 피해자였는데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한국 문단의 남성 문인들은 위로는커녕 조롱으로 피해자를 2차 가해했다. 혼인날 신랑이 세넷씩 달겨 들가봐, 독신생활을 하게 된 독신주의자” 라거나 “피임법 알려는 독신주의자”라는 비아냥이었다. 김명순을 모델로 타락한 여성으로 매도하는 소설이 등장하기도 했으니 김동인의 << 김연실전 >> 이다. 이 작품은 기생 출신의 어머니를 둔 김연실이라는 어릴 때부터 일본어 개인교사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어른이 돼서도 수많은 남성들과 육체관계를 맺으면서 그것을 자유연애라고 주장하다가 결국 파멸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에도 그는 김명순을 “남편 많은 처녀”라거나 “영업적 매녀(賣女)아닌 여인”이라고 비하하고 조롱한다. 김동인의 여성 혐오는 친일 행적과 함께 익히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 영혼 - 여자운동을 봄 > 이라는 글에서 " 여자에게는 영혼이 없다 " 고 주장한다.  읽다 보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명문이다. 하여, 전문을 올린다. 읽을 때마다 3초에 1번 쌍욕이 튀어나오니 혼자 있을 때 읽기를 권한다.





옛적, 끄리시아(그리스) 학자 새에, ‘계집에게 영혼이 있느냐라는 문제가 토론되었다 한다. 그러고, 그들은, 다만 계집을 낮춰보는 곡심(曲心)으로, 계집에게 영혼이 없다 하였다. 그리스도교가 선전(宣傳)되면서, 너희들은 영()에 살으라고 부르짖을 때에, 계집에게도 영혼이 있다 하였다. 그러나, 이 존재 시인(是認)이 결코, 단정적 그것은 아니었었다. 근대에 이르러서, 아나톨 프랑스(Anatole France), 절대로 여자의 머리를 부인하였다. 계집은, 사내와 같지 못한 것이라 단정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우는 암탉들에게, 대단한 공격은 받았지만……. 여기 대하여서, 나도, 계집의 머리를 사내의 그것과 같이 말할 수가 없다 한다. 아니, 나는, 계집의 영혼의 존재를 (여러 가지 논거(論擧) 아래서) 절대로 부인한다. 장래에도 영혼이 못 생겨난다 함이 아니다, 현재에는 영혼의 씨가 있을 뿐, 영혼 그것은 없다고 단정한다.(참외 씨가 참외가 아닌 것 같이, 영혼의 씨는 영혼은 아니다)

 

대저, 사람의 영혼이라 함은 어떤 것을 가리켜서냐. 아직껏, ‘영혼이라는 것을 똑똑히 찾아내지 못한 그 큰 원인(原因)의 하나는, 그를 찾아낼, 제일 쉬운 근본적 방법을 몰각(沒覺)한 때문이다. 그럼, 그 첩경(捷經)은 무엇이냐.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 한다, 짐승에게는 없다 한다. 그러고, 사람이라 하는 것은, 계집의 인권(人權)을 멸시한 때부터 칭한 말이니까, 사내를 가리킨 것이라 한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의 사내게는 영혼이 있고, 짐승에게는 없다 한다. 그러면, 사람의 사내와, 짐승 사이에는, 어떤 구별이 있을까? 엎드려 걷는 것과, 서서 걷는 것, 그것을 구별한 것인가?, 만약 그렇다 하면, 영혼이라 하는 것은, 진실로 변변치 않는 것일 수밖에 없다. 걷는데, 서서와 엎드려서와, 그 구별에, 무슨 그리 큰 좋고 나쁜 차이가 있을까? 사람에게 서서 걷는 것이 좋아 보이면, 짐승에게는 엎드려 걷는 것이, 좋을 것이다. 영혼의 존무(存無) 구별은, 결코 이런 데는 안 있다.


사람이, 사내가, 짐승보다 다른 점은, 모든 재래(在來)의 물건이나 사조(思潮)에 반항하려는 반항심, 그 반항심이 낳은 창조력, 그것이 아닐까? 영혼은, 결코, 우리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내세에 천국지옥에를 간다는, 그런 신변불사의(神變不思議)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그 더러움과 불편함을 찾던 이 누리를, 차차 편리케 하여 놓고 차차 아름답게 하여 놓은, 그 힘이야말로, 사람의 영혼인 창조의 힘의 산물일 수밖에 없다. 온갖 짐승이, 자연대로 거기서 한 분()의 불편도 감()치 않고 살아올 때에, 다만 사람이, 재래의 것을 불편하다 생각하며, 더럽다 생각하여, 여기, 자기의 모양을 상징으로 한 다른 세계를 창조하려고 들이붓던, 그 힘이, 영혼의 힘이 아니고 무엇이랴? 사람의 영혼이라 하는 것은, 그의 창조력 그것에 다름이 없었다.

 

그러면, 계집에게는 창조력이 없는가? 옛적에도 없었던 것 같이, 지금도 없다. 그에게는 모방력이 있다. 그 모방력은, 원숭이보다 날카로운 것이다. 그들의 그 중 훌륭한 재간, 그들의 그 중 위인(偉人)이 하여 놓은 재간이 모두 모방에 지나지 못한다. 시인은 정서(情緖)가 날카롭지 않으면 안 된다 한다. 그러고 그들은 사내보다 정서에 날카롭다. 그러나 그들에게, 천재의 시인이 과연 있었던가? 워즈-워드(William Wordsworth?)가 있다 한다. 그러나, 그도, 계집이기에 천재라 하지, 만약 그가 사내였다면, 빈약한 우리 조선 문단에서도 낙오자가 되었으리라 나는 생각한다. 음악은 계집의 특재(特才)라 한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훌륭한 음악가가 과연 있었는가? 잠깐 미색으로 일시에, 천재라는 말을 들은 자는 많지만, 그의 특재라는 음악으로서 왁네르와 같이 만고(萬古)에 이름을 남긴 자가 과연 있었는가?


이것을, 이 현상을, “아직껏 너무 구속되어 있어서 그렇다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최근까지 구속되어 있다가, 십 년 전후 하여 겨우 놓여난 조선 사람의 사내와 몇 세기 전부터 해방되었다는 서양 계집을, 서로, “창조력이라는 안경으로 비길 때는, 그들이 얼마 더 우매(愚昧)한지 넉넉히 볼 수 있다. 이 현상을 어떻게 설명하여야 할까? 암만, 계집의 미력에 끌려서, 그들을 본다 하여도 그들에게, 창조력이 있달 수는 없다. 따라서 영혼도 있달 수 없다. 사내의 가장 무식한 자도 적으나마, 창조력이라는 것이 있으되, 계집에게서는 이것은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누구든 볼 수 있는 현상으로, 계집에게는, 영혼 씨가 있다. 다른 짐승들보다 좀 더 영리하고, 모방력이 날카로운데, 창조력의 씨를 볼 수 있다.


그 씨가, 언제 어음이 나서, 영혼이 될지, 그것은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들에게는, 날카로운 모방심이 있어서, 오히려 그 모방력으로 말미암아 창조의 씨의 발생을 방해한다. 그들은, 온갖새 사조를 맛보아서, 그것이 자기네에게 해가 없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조로는, 물불을 헤아리지 않고 막 진()하는 맹목적 용기가 있다. 가까운 예로 남녀평등이란 사조로(실로는, 이를, 그들은, 남녀동심지어 여체남성(女軆男性)으로 오해는 하였지만) 나아가며, 생리학상 자기네 신체구조는 생각지 않고, 참정권을 다고 어찌 하여라, 덤빈다. 그러고, 이런 것이, 그들의 영혼의 발아를 가장 방해하는 것이다. 그들의 영혼의 발아는, 참 자각(지금과 같은 오해한 자각은 결코 아니다)에 있다 한다.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딴데 있지 않다. 이즈음 소위 새여자라는 사람들이, 온전한 자각도 없이 남녀평등을 그릇 깨달아가지고 덤비는 것도, 아니꼽지만 소위 사내라는 사람들도, 그 사조를 오해하여가지고, 여자에게 참정권을 주어라 어쩌라 덤비는 것이 한심하여서 쓰는 바이다


- 「 영혼-여자운동을 봄 」 전문 , 『창조 9호』, 1921.6.



 


김동인이 이런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으니 평소 김명순을 곱게 볼 리 없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여성 혐오는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 광염소나타 >> 이다. 소설 속 주인공 작곡가 백성수는 방화, 여성 사체 모욕, 여성 시간(屍姦), 여성 살인 같은 범죄를 저지르는 행위를 통해 예술적 영감을 얻는다. 이와 관련해 음악비평가 케이(K)는 “천 년에 한번, 만 년에 한번 날지 못 날지 모르는 큰 천재를, 몇 개의 변변치 않은 범죄를 구실로 이 세상에서 없이 하여 버린다 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 라며 백성수의 행위를 예술을 구실로 옹호한다.

 

그러니까 여성을 살해하고 사체를 모욕하고 시간하는 행위를 예술을 위한 퍼포먼스 따위로 인식하는 것이다. 김동인은 2002년에 발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선정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 문학 부문에 포함되었다. 또한, 국가기관 친일진상규명위에서도 그의 이름이 포함돼 있다. 조선일보가 주관하는 동인문학상은 김동인을 기리는 문학상이다. 동인문학상 수상 작가 중에는 6명의 여성 작가가 포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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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ardo 2018-12-22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대 남성작가들은 국내외를 불문하고 어느 정도는 여성 혐오를 당시 시대 분위기상 깔고 있어서 어지간하지 않으면 당시는 다 그랬으니 하고 넘기는 편이지만 김동인은 아주 대놓고 조롱하는 글을 문학이랍시고 써갈겨서 싫어합니다. 광염소나타는 어릴 때 국어시간에 배웠지만 그때도 엽기적이라 생각했었죠. 역시나 여혐하는 작가답게 친일 짓거리도 가장 열심히 한 듯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3 23:31   좋아요 0 | URL
문단의 이러한 성향이 그 시대이니 발생할 법한 일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김명순 사태와 비슷한 일이 김정란 사태입니다.
노혜경, 김정란 시인을 두고 한국 문인들이 엄청 깠죠.... 변한 것은 없습니다.. 평론에 육두문자 써가며 지랄방광하는 거 보고.. 와, 평단도 진짜 시발 개판이구나 했습니다..

akardo 2018-12-24 01:00   좋아요 0 | URL
우리사회가 그런 문제에 관해선 발전이 없다는 걸 반증하는 거죠. 그 일들 이후로도 변화가 없어 미투 운동까지 가게 된 거니. 과연 바뀌긴 할까 암담합니다.

2018-12-22 2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3 23:32   좋아요 0 | URL
네에. 이런 폭력적 남성 사회에 만성적으로 노출된 여성의 분노가 폭발한 지점이 메갈, 워마드의 탄생인 것 같습니다..

cyrus 2018-12-23 1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성은 영혼이 있는 존재, 여성은 영혼이 없고 육체만 있는 존재. 이러한 생각에는 영혼(이성)을 육체보다 우월하게 보는 서양철학 인식이 반영되어 있어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철학이나 윤리를 전공한 남자들은 여성혐오 문제에 둔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3 23:33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이러한 인식은 비단 근대의 어리석음만은 아닐 겁니다... 현대도 크게 변한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드네요..ㅎㅎ

수다맨 2018-12-27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김동인은 잘해야 연구의 대상이 되어야지 찬양의 대상이 되어선 안 된다고 봅니다. 무엇보다 그의 글에 드러난 성향(여혐, 친일 등)이 이러한데 문학사적 업적으로서 기념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거든요.
예전에 이명원 평론가의 평론을 본 적이 있는데, 동인문학상은 상당히 정치적인 의도 하에서 만들어졌습니다. 1950년대 한국문단은 남한 출신이자 ˝현대문학˝의 주간인 조연현이 주도하고 있었고 이북 출신의 문인들은 (황순원 정도의 예외적인 존재를 빼면) 상대적으로 소외받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이북 출신이었던 백철, 최정희 등이 당시 ˝사상계˝의 주간이었던 장준하의 지원을 받아서 평안도 출신이었던 김동인을 기념하는 문학상을 만들게 되지요.
문제는 이 상의 초대 심사위원들의 절대 다수(백철, 최정희, 김팔봉, 이헌구, 정비석, 이무영 등등)가 친일 경력이 있던 문인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동인의 이름을 딴 상을 만들면서 문학적으로 비판 받아야 할 사안들을 상의 권위를 내세워서 윤색시켜 버렸고, 아울러 심사위원들의 친일 경력을 따지는 것도 문단에선 ‘상당히‘ 금기시되었지요.
이 상은 태생부터 지금까지 문제가 너무나 많다고 생각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7 18:27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전 전혀 몰랐던 사실인데 이렇게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수다맨 님...
글구 보니 수다맨 님 만난지도 꽤 오래이군요.
건강하시죠 ?

수다맨 2018-12-27 19:18   좋아요 1 | URL
네.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곰곰발님 서재에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조만간 한 잔 같이 하시지요
 

 

 

 

 

 

 

 

 

 

 

 

 

 

 

 

 

                                     

 

개새끼로  살다  씹새끼로  죽다   :

 


 

 

 

 

 



못 잊어 개새끼



 



                                                                                                                 젊었을 때 흰색 무지 웃옷(라운드 티셔츠)에 모나미 유성 매직으로 글을 써서 입고 다녔다. 일종의 셀프 레터링(lettering) 패션인 셈이다. 지금도 몇몇 문장은 또렷이 기억한다. "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

이성복의 < 그해 가을 > 이라는 시의 한 구절인데 옷에 출처를 밝히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아버지를 저주하는 패륜아'로 나를 오해했을 것이다. 내가 이 싯구에 매료되었던 까닭은 " 씹새끼 " 라는 욕 때문이었다. 문학에서 시라는 장르는 소설보다 한 단계 위인 형이상학(미학)일 터인데 美와 學의 영역에서 쌍욕이 중요한 시어로 쓰이다 보니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씹새끼도 미학이 될 수 있구나 !  이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타면 어느 순간 갑분싸'가 되는 타이밍이 온다. 충과 효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아버지에게 씹새끼라니.....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_ 라니...... 도대체 저주와 패륜의 언어를 쏟아내는 저 새끼가 과연 사람 새끼란 말인가 ?

 

 

사람들은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 아버지 " 라는 존재는 죽어야 할 운명이라 믿는다. 길을 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권속을 만나면 권속을 죽이라 했으니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는 것도 당연한 소리'이다. 그리고 나무가 죽어야 나무가 산다. 산불은 숲의 재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건강한 숲 생태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재앙이다. 키 크고 넓은 아름의 거목은 빛을 독점한다. 식물에게 있어서 빛이 생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어린 나무 입장에서 보면) 산불은 어린 나무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이유는 아버지 살해를 주저했다는 데 있다.  아버지 살해는커녕 죽은 아버지를 숭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박정희는 죽었으나 여전히 박정희는 살아 있다.  거목이 쓰러지지 않고는 어린 나무가 자랄 수가 없듯이 아버지를 살해하지 못하면 아들(세대)는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라는 명목으로 아버지를 살해하지 못하다 보니 아들은 빛을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_ 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성복이 씹새끼라는 시어를 끌어왔다면 최승자는 < Y 를 위하여 > 라는 시에서 개새끼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최승자의 개새끼는 이성복의 씹새끼만큼 강렬하다.

아니, 오히려 더 아름답다.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 놈, 난 널 죽여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 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 <Y를 위하여> 전문

 



 

이성복의 < 그해 가을 > 이라는 시에서 " 아버지 " 와 " 씹새끼 " 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구조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배치'이다. 하지만 이성복은 아버지와 씹새끼를 병렬로 배치시킴으로써 시적 의미를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최승자는 " 개새끼 " 와 " 못 잊어 " 를 연결한다. 이 또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의 배열이지만 그렇기에 시적 서정을 획득한다. 만약에 " 오 개새끼 미워죽겠어 ! " 라고 했다면 이 싯구가 시로써 작동할 수 있었을까 ?  유성 매직으로 옷에 문장을 쓰던 시절에 최승자를 알았다면, 나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오 개새끼 못 잊어 _ 라는 레터링을 한 옷을 입게 하고  나는 아버지 씹새끼 _ 라는 옷을 입고 나란히 길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개새끼와 씹새끼가 나란히 걷는 모습을 연상하니 그 상상만으로도 이토록 짜릿하구나.  나는 아버지 씹새끼라는 모멸 속에서 죽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어른의 태도라 생각한다.  또한 옛 애인에게는 개새끼로 호명 받고 싶은 마음도 있다. 개새끼인데 못 잊는다면 그 사람은 훌륭한 연애를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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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22 07: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2 08:18   좋아요 0 | URL
어디서 읽었는데...


가족 범죄(예를 들어 아들에 아버지를 죽였다던지..)가 발생하면 한국인은 처음에는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고 하다가고 마지막에 가서는 처벌하지 않겠다는 탄원서를 쓴다고 합니다.
이런 경우가 거의 99%라고 하네요.

반대로 미국은 가족범죄가 발생하면 처음에는 범죄자 가족을 감싼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용서하지 않는 쪽으로 간다고 하네요...
재판 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지니 그것에 분노하는 것.. 이런 경우가 거의 99%라고 합니다.


결론은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가족이니 용서하자가 한국의 정서이고 미국은 반대죠...
한국은 가족주의이고 미국은 개인주의입니다..

2018-12-22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2 0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2-22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2 09:16   좋아요 0 | URL
저도 메갈과 워마드가 싸지르는 글에 절대 찬성 안 합니다.
개년들의 글이죠.
그것에 동의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죠.... ㅎㅎㅎㅎ
다만, 왜 저렇게 광기의 글을, 남성에 대한 저주를 퍼붓는가에 대해서
깊은 마음을 가지고 들여다보자는 거죠...
글이 개같기에 저 분노도 고려할 필요 없는 쓰레기다, 라고 무시하지는 말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저 분노에는 필경 한국 남자가 한국 여성에게 저지른 죄악의 근본이 있을 것이다.. 그런 생각입니다...


전 한국 남자들이 자기는 지금 너무 불쌍하다고 징징거리는 거에
정말 좀.. 뭐라 해야 하죠. 찌질하다고 생각이 듭니다.
왜 징징거려. 응..

syo 2018-12-22 10: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곰발님이 말씀하시는 그 ‘아버지‘와는 결이 완전히 맞아들어가지는 않지만, 저는 실제로 아버지 욕도 하고 제사도 쌩까는 패륜왕입니다.....

갑자기 분위기 고해성사
대체 곰발님 대댓글 어떻게 다시라고 이런 댓글을 남기고 있을까요 ㅋㅋㅋㅋ

그냥 말씀하신 티셔츠를 떠올리다 보니 그만....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2 10:09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그렇군요. 저는 의외로 아버지와 사이가 좋았습니다. 아버지도 항상 형제자매 중에서 저를 데리고 여행도 많이 다니셨고.... ㅎㅎㅎㅎ

저는 한국인이 좀 가족주의에서 벗어났으면 좋겠어요
결혼했으면 온전히 하나의 우주로 인정하고 간섭을 하지 말앗으면 좋겠다는 생각..
왜 시어머니들, 며느리 집에 가면 냉장고부터 열어보잖아요.
와, 전 이거 폭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짓 좀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예의가 없어요.. 예의가..

syo 2018-12-22 10:37   좋아요 1 | URL
아버지가 사이가 좋으셨던 곰발님은 아버지 씹새끼 티셔츠를 입고 다니셨고, 음지에서 아버지 욕하고 다닌 저는 남들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아들인 척 하고 살았으니, 아무래도 티셔츠는 제가 받아가야 ㅎㅎㅎㅎㅎㅎ

가족주의 말씀은 공감할 수밖에 없습니다. 꼭 며느리-시어머니처럼 사회적으로 형성된 가족이 아니라 유전자로 얽힌 가족 구성원들 간에도 그런 식의 폭력이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벌어지고 또 용인되기도 하잖아요.....

곰곰생각하는발 2018-12-22 10:51   좋아요 1 | URL
공감합니다. 저는 시어머니들이 무슨 권력으로 며느리집 가서 냉장고부터 열어보고는
숙제 검사하는 선생님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는지 궁금합니다.
아들이 결혼하면 남의 집 아닌가요 ? 열어보려면 며느리에게 열어봐도 되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오히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보더라고요.... 참, 신기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