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새끼로 살다 씹새끼로 죽다 :
못 잊어 개새끼
젊었을 때 흰색 무지 웃옷(라운드 티셔츠)에 모나미 유성 매직으로 글을 써서 입고 다녔다. 일종의 셀프 레터링(lettering) 패션인 셈이다. 지금도 몇몇 문장은 또렷이 기억한다. "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
이성복의 < 그해 가을 > 이라는 시의 한 구절인데 옷에 출처를 밝히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아버지를 저주하는 패륜아'로 나를 오해했을 것이다. 내가 이 싯구에 매료되었던 까닭은 " 씹새끼 " 라는 욕 때문이었다. 문학에서 시라는 장르는 소설보다 한 단계 위인 형이상학(미학)일 터인데 美와 學의 영역에서 쌍욕이 중요한 시어로 쓰이다 보니 관심을 끌지 않을 수 없었다. 아아, 씹새끼도 미학이 될 수 있구나 ! 이 옷을 입고 지하철을 타면 어느 순간 갑분싸'가 되는 타이밍이 온다. 충과 효를 중시하는 사회에서 아버지에게 씹새끼라니.....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_ 라니...... 도대체 저주와 패륜의 언어를 쏟아내는 저 새끼가 과연 사람 새끼란 말인가 ?
사람들은 그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곤 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나는 " 아버지 " 라는 존재는 죽어야 할 운명이라 믿는다. 길을 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아라한을 만나면 아라한을 죽이고, 권속을 만나면 권속을 죽이라 했으니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이는 것도 당연한 소리'이다. 그리고 나무가 죽어야 나무가 산다. 산불은 숲의 재앙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건강한 숲 생태계를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재앙이다. 키 크고 넓은 아름의 거목은 빛을 독점한다. 식물에게 있어서 빛이 생명이라는 점을 감안하면(어린 나무 입장에서 보면) 산불은 어린 나무에게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한국 사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된 이유는 아버지 살해를 주저했다는 데 있다. 아버지 살해는커녕 죽은 아버지를 숭배하는 사회가 되었다. 박정희는 죽었으나 여전히 박정희는 살아 있다. 거목이 쓰러지지 않고는 어린 나무가 자랄 수가 없듯이 아버지를 살해하지 못하면 아들(세대)는 건강하게 자라지 못한다. 우리는 용서와 화해라는 명목으로 아버지를 살해하지 못하다 보니 아들은 빛을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아버지 씹새끼, 너는 입이 열이라도 말 못해 _ 라고 말할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성복이 씹새끼라는 시어를 끌어왔다면 최승자는 < Y 를 위하여 > 라는 시에서 개새끼라는 시어를 사용했다. 최승자의 개새끼는 이성복의 씹새끼만큼 강렬하다.
아니, 오히려 더 아름답다.
너는 날 버렸지,
이젠 헤어지자고
너는 날 버렸지,
산 속에서 바닷가에서
나는 날 버렸지
수술대 위에 다리를 벌리고 누웠을 때
시멘트 지붕을 뚫고 하늘이 보이고
날아가는 새들의 폐벽에 가득찬 공기도 보였어.
하나 둘 셋 넷 다섯도 못 넘기고
지붕도 하늘도 새도 보이잖고
그러나 난 죽으면서 보았어.
나와 내 아이가 이 도시의 시궁창 속으로
세월의 자궁 속으로 한없이 흘러가던 것을.
그때부터야.
나는 이 지상에 한 무덤으로 누워 하늘을 바라고
나의 아이는 하늘을 날아다닌다.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나쁜 놈, 난 널 죽여버리고 말 거야
널 내 속에서 다시 낳고야 말 거야
내 아이는 드센 바람에 불려 지상에 떨어지면
내 무덤 속에서 몇 달간 따스하게 지내다
또 다시 떠나가지 저 차가운 하늘바다로,
올챙이꼬리 같은 지느러미를 달고.
오 개새끼
못 잊어!
- <Y를 위하여> 전문
이성복의 < 그해 가을 > 이라는 시에서 " 아버지 " 와 " 씹새끼 " 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구조이다. 이것은 한국 사회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배치'이다. 하지만 이성복은 아버지와 씹새끼를 병렬로 배치시킴으로써 시적 의미를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최승자는 " 개새끼 " 와 " 못 잊어 " 를 연결한다. 이 또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감정의 배열이지만 그렇기에 시적 서정을 획득한다. 만약에 " 오 개새끼 미워죽겠어 ! " 라고 했다면 이 싯구가 시로써 작동할 수 있었을까 ? 유성 매직으로 옷에 문장을 쓰던 시절에 최승자를 알았다면, 나는 사랑하는 애인에게 오 개새끼 못 잊어 _ 라는 레터링을 한 옷을 입게 하고 나는 아버지 씹새끼 _ 라는 옷을 입고 나란히 길거리를 걸었을 것이다.
개새끼와 씹새끼가 나란히 걷는 모습을 연상하니 그 상상만으로도 이토록 짜릿하구나. 나는 아버지 씹새끼라는 모멸 속에서 죽는 것에 대해 동의하는 것이 다음 세대를 위한 어른의 태도라 생각한다. 또한 옛 애인에게는 개새끼로 호명 받고 싶은 마음도 있다. 개새끼인데 못 잊는다면 그 사람은 훌륭한 연애를 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