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황홀 - 성석제의 음식 이야기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칼과 황홀







멸치 중에서 최상품은 " 죽방멸치 " 이다. 죽방(렴)은 대나무로 만든 부채꼴 모양의 말뚝으로 밀물 때 물의 흐름에 따라 문이 열렸다가 썰물 때 문이 닫히면서 잡힌 멸치를 죽방멸치라고 부른다. 맛이 뛰어나서 멸치 떼를 대형 그물에 가둬 잡는 일반 멸치보다 그 가격이 10배 더 비싸다.  산문집 << 칼과 황홀 >> 에서 성석제는 죽방멸치 한 마리 가격이 어림잡아 200원꼴이라고 계산하기도 한다. 그만큼 귀한 멸치인 것이다. 처음에는 멸치가 거기서 거기라고 생각하겠지만 먹어본 사람은 죽방멸치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무엇보다도 죽방멸치는 비린내가 거의 없다. 


또한 멸치 똥은 일반 멸치처럼 검지 않고 주황색을 띤다. 그렇다면 무엇이 맛의 차이를 결정하는 것일까 ?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맛의 차이를 결정한다. 촘촘한 그물코에 머리가 꽂힌 멸치는 어두컴컴한 바닷속에서 다가올 죽음을 직감한다. 움직여야지만 살 수 있는 세계에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은 공포이다. 멸치는 이 과정에서 속이 까맣게 썩는다. 우리가 멸치를 씹을 때 느끼게 되는 멸치의 쌉싸래한 비린내는 공포의 결과인 셈이다. 반면, 죽방림에서 잡힌 멸치는 자신이 죽방림에 갇혔다는 사실도 모르다가 죽기 직전에 가서야 알게 된다. 그래서 성석제는 죽방림을 멸치의 천국이라고 말한다. 


어부는 죽방에 갇힌 멸치를 뜰채로 건져내자마자 곧바로 끓는 물에 넣어 삶기 때문에 죽방에 갇힌 멸치는 그물에 잡힌 멸치에 비해 죽음에 대한 공포가 거의 없다. 놀다가 죽은 멸치가 죽방멸치인 것이다. 무엇보다도 죽방멸치는 맑은 광택이 나며 투명하다. 그리고 예쁘고 날씬하다. 뒤틀려서 비명을 지르는 표정을 한 일반 멸치와 사뭇 다른 것이다. 먹다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 하는데 멸치도 그렇다. 신나게 놀다 죽은 멸치는 때깔도 좋다. 내가 김난도와 혜민을 싫어하는 이유는 그들이 젊어서 하는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하기 때문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 ?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고 ?! 아니다. 


그것은 성장통이 아니라 속이 까맣게 썩는 과정일 뿐이다. 청춘 멘토라는 사람이 고작 가난한 청춘에게 한다는 소리가 고생 타령이라니 한심할 뿐이다. 고생이 돈 주고 살 정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면 내 고생을 당신에게 팔겠다. 그의 철학이 그토록 확고하다면 당신 자식새끼도 멸치잡이 그물에 머리가 꽂혀서 캄캄한 바닷속에서 두려움에 속이 까맣게 썩는 마음고생을 경험해보라고 권유하고 싶다. 꼬리는 힘차게 움직이는데 몸은 그물코에 꽂혀 앞으로 나아가지 않을 때의 공포가 성장의 밑거름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나는 그런 너님이 역겹다. 




+

은갈치와 먹갈치는 가격이 2배 차이가 난다. 당연히 은갈치가 맛이 좋다. 은갈치는 낚시로 잡은 갈치이고 먹갈치는 대형 그물로 잡는다. 먹갈치의 속이 먹처럼 까맣게 썩는 과정은 그물에 잡힌 멸치와 동일하다. 일반 멸치를 유심히 본 적 있다. 눈알은 짙은 색을 내며 움푹 들어가 있고 항상 고통스럽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벌리고 있다. 저 속을 뒤집어 보지 않아도 속이 새카맣게 탔으리라는 것은 짐작 가능하다. 가끔 멸치 똥을 떼다 보면 미안한 생각이 들곤 한다. 도대체 얼마나 두려웠기에 이렇게 까맣게 태웠을까......



++

산문집 << 칼과 황홀 >> 에 대한 리뷰에서 이 책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는 이유는 마땅히 칭찬할 만한 구석이 없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들어간 삽화는 오히려 읽기를 방해하고 성석제의 글은 심심하다. 또한 음식 에세이이면서 음식에 대한 애정도 찾아볼 수 없다. 이 정도 애정이라면 황홀이 아니라 소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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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9-11-28 1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맛의 본질은 기억이다. 예를 들면 군대 생활이나 교도소 생활‘을 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요리 1순위는 자장면이라고 한다. 생각해 보니 내가 군 생활을 할 때, 휴가 나와서 제일 먼저 간 곳은 집이 아니라 중국집이었다. 왜 많고 많은 맛있는 요리가 많은데 하필 자장면인가 ? 맛에 대한 기억은 7살에 고착되어 있다고 한다. 7살 때 먹은 음식을 기억하는 것이다. 자장면은 특별한 요리였다. 주로 입학식이나 졸업식 때 온가족이 모여서 즐겁게 외식을 할 때 단골 메뉴가 자장면이어서 자장면에 특별히 맛있는 요리가 아니지만 외부와 단절한 우울한 생활을 하다 보면 자장면이 생각나는 것이다. 맛의 본질은 맛이 아니라 기억이다.

수다맨 2019-11-28 15: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진정으로 고생만 죽도록 하고, 권세와 재물과 무관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 고생 예찬론을 언급한다면 최소한의 진실성은 있지요. 그리고 막상 그런 사람들일수록 고생이나 노동은 그냥 통증에 지나지 않는다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김난도는 물론이거니와 조국(장관 되기 전)이나 신형철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모종의 불편함도 곰곰발님께서 쓰신 글의 내용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9-11-28 16:20   좋아요 0 | URL
그래도 조국은 아프니깐 청춘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잖습니까. ㅎ 김난도는 가난한 청년을 상대로 ˝ 가난-코인 ˝ 벌이를 한 거죠.
 









간결한 죽음



                        8월 여름이었다. 내가 사는 빌라 현관 입구를 지나치려다가 계단 밑에서 몸을 웅크린 참새를 발견했다. 참새 중에서도 몸집이 작은 것으로 보아 새끼가 분명했다. 참새는 내가 가까이 다가갔는 데도 몸을 웅크린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더위 먹은 참새였다.

자세히 보니 깃털도 여기저기 뽑힌 것으로 보아 들짐승의 공격도 받은 모양이었다. 나는 손 감옥을 만들어 새를 가둔 후에 집으로 데려갔다. 우선, 베란다에 물을 흥건히 뿌려 온도를 낮추고, 잎이 넓어서 짙은 그늘이 지는 파초 화분에도 물을 흥건히 뿌려서 환경을 조성한 후에 참새를 그 화분 속에 넣어 두었다. 서서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늘에서 쉬면서 기운을 차리면 곧 하늘로 날아가리라. 쌀과 함께 물그릇도 화분 속에 두었다. 나는 화분 속 참새가 궁금하여 자주 베란다를 향했다. 참새는 그때마다 인기척을 알아차리고는 숨는 시늉을 하곤 했다. 쉽게 죽을 것 같진 않았다. 부릅뜬 눈이 제법 초롱초롱했다.

10분이 흘렀을까 ?  내가 다시 그 참새를 보러 갔을 때 참새는 그새 죽어 있었다. 그때 내가 발견한 것은 " 참새의 간결한 죽음 " 이었다. 참새는 죽기 전까지 두 눈 부릅뜨고 서서 버티다가 동정同情도 없이, 애도哀悼 도 없이, 그리고 자기 연민도 없이 홀로 죽는 것이다. 나는 이 작은 짐승의 죽음 앞에서 어떤 숭고한 힘을 느꼈다. 불현듯 D.H 로랜스의 Self Pity / 자기 연민'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I never saw a wild thing sorry 

for itself.

A small bird will drop frozen dead from a bough 

without ever having felt sorry for itself.


자기 연민에 빠진 짐승을 본 적 없네

얼어 죽어 가지에서 떨어지기 전까지

작은 새, 결코 자신을 동정하지 않네


죽은 참새를 크리넥스 티슈로 감싼 후에 산에 묻었다. 들짐승이 무덤을 파헤치지 않도록 그 위에 제법 큰 돌을 얹었다. 최은영 소설집 << 쇼코의 미소 >> 에 수록된 단편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에서도 " 곰 " 이라는 이름을 가진 개는 홀로 죽기 위해 평생을 살았던 보금자리 집을 떠나, 어두컴컴한 어느 곳에서 죽는다. 


곰은 마지막 며칠 동안 너무 아파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 그런데도 곰아, 부르면 애써서 고개를 들고 꼬리를 치는 거야. 곰아, 밥 먹어, 말하면 곰은 안 아픈 척 밥에 코를 대고 먹는 시늉을 했어. 그런 곰 앞에서 울었어. 곰이 단순히 아픈 게 아니라 죽어간다는 걸 느꼈거든. 한 밤을 자고 나서 개집에 가니 곰이 사라졌더라. 그애가 사라지고 한 달 내내 울면서 학교를 다녔어. 울고 또 울었지. 내가 괜히 곰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 곰이 집을 나갔다고 생각했어. 자기가 아픈 걸 보고 내가 마음 아파하니까 죽으러 나간 거라고 생각하며 자책했지. 아무리 슬프더라도 내색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울지 말았어야 했는데. 




- 최은영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곰은 죽을자리를 찾기 위해 보금자리를 떠난다. 곰은 자신의 죽음을 동정하지 않는다. 내가 키우던 개도 그랬다. 죽기 10분 전까지 고개 빳빳이 들었다. 내일 다시 올게 _ 라는 내 말에 개는 힘차게 꼬리를 흔들었다. 일련의 죽음들과 마주하면서 깨닫게 된다. 내 죽음 앞에서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자고. 살고 싶다고 애원하지 말자고. 죽을 때는 간결하게 죽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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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월드










                                                                                               퍼펙트 월드'라는 할리우드 영화가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영화치고 평단의 평가도 야박하고 대중 인지도도 낮은 영화'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를 무척 좋아했다.  탈옥수와 꼬마 인질의 관계는 결국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전이되면서 영화는 새드엔딩을 향해 치닫는데, 그 연출 솜씨가 만만치 않은 영화'였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연출한 영화라면 빼놓지 않고 보았기에 이 영화도 극장에서 보았는데 박연폭포 같은 눈물을 흘리는 관객이 꽤 있었다. 


내가 서울역 후암동에 둥지를 튼 계기는 바로 이 영화 때문이었다. " 퍼펙트 월드 " 라는 이름의 영화감상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는데 이 결정은 순전히 퍼펙트 월드'라는 이름 때문이었다.  퍼펙트 월드라는 이름과는 달리 후암동 뒷골목은 로맹 가리의 비숑 거리(자기 앞의 생)와 조지 오웰의 위건 부두와 비견할 만한 빈곤과 비참의 세계'였다.  늙은 성매매 여성과 앵벌이 그리고 돼지엄마(포주)와 기둥서방들이 모여 살았는데, 후암동 뒷골목은 서울에서 가장 위험한 우범지대'로 뽑혔다.  앵벌이들은 구걸을 하기 전에 반드시 영화감상실에서 영화를 보았다. 


그들은 감상실 안에서 푸른 알약(이라는 감기약)을 다량으로 복용했다. 이 알약에는 마약과 같은 환각 작용을 일으켰는데 그 환상이 최고조에 다다를 때 일을 하기 위해 전철역을 향하곤 했다. 이 알약은 평형 감각을 마비시키기에 걸을 때 비틀거리고 나중에는 바닥을 기어 다니게 된다. 흡사 중증 광우병에 걸린 소처럼 보인다. 앵벌이들은 하반신 마비 환자처럼 지하철 안에서 기어 다니면서 쪽지를 돌리며 구걸을 했다. 이 쪽지의 글씨체와 문장은 오롯이 내가 썼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부모를 여의고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내가 그들에게 맨정신으로 구걸을 해도 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 쪽팔리잖아요. 어떻게 맨정신으로 바닥을 기어다니면서 구걸을 해요. 우리도 사람이어서 쪽팔린 감정은 있어요. "  구걸해서 번 돈은 거의 대부분 돼지엄마'라고 불리는 포주에게 돌아간다. 돼지엄마는 쪽방을 운영하면서 앵벌이들의 숙식을 제공했는데 열악한 시설과는 달리 지나치게 비싼 숙박비를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푸른 알약을 제공하는 딜러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의사의 처방전이 없으면 푸른 알약을 다량으로 살 수 없었는데  돼지엄마는 다른 루트를 통해서 대량으로 구매하여 매우 비싼 가격에 되팔았다. 


백 원 하던 알약은 천 원으로 둔갑하기 일쑤였고, 가격 흥정은 돼지엄마 마음대로였다. 앵벌이들은 이 알약을 사는데 그들이 하루 구걸해서 벌었던 돈의 대부분을 사용했다. 그들은 더 많은 알약을 사기 위해 더 많은 알약을 입에 털어 넣어야 했다. 환각 속에서 그들은 영화 속 주인공처럼 강인했고 매력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수많은 앵벌이를 만났다. " 까불이 " 란 녀석도 있었고 하모니카를 잘 불어서 " 하모니카 " 라는 녀석도 있었다. 그리고 " 스마일 타이슨 " 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얼궁은 험악하고 덩치는 큰데 항상 웃는 녀석이었다. 그는 아마추어 복싱 선수 출신이었다. 


이 친구는 앵벌이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간다며 정장 차림으로 나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복지 재단에서 다시 시작하려는 그를 위해 비용을 지불한 모양이었다. 정장 입은 모습이 꽤 근사해 보였다. 이들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경찰이 아니라 적십자(녹십자였나 ?!)였다. 푸른 알약을 장기적으로 과다 복용하면 심각한 부작용이 발생하는데 그중에서 연골을 파괴하여 심한 경우는 팔이나 다리를 절단해야 하는 경우도 발생하는데 그런 경우 적십자는 이들을 강제 입원시켜서 절단 수술을 진행했기에 앵벌이에게는 저승사자와 같았다. 


그런가 하면 이곳에서 12살에 임신한 여자아이를 본 적도 있다. 늙은 성매매 여성의 딸이었는데 누군가가 못된 짓을 한 모양이었다. 이 세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비참했고,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폭력적이었으며,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비정상적이었다. 하모니카를 잘 불어서 하모니카라고 불리는 아이(내가 지어준 별명이다)는 환각 상태에서 싸움을 하다가 까불이가 휘두른 칼에 찔려 죽었다. 이 동네에 사는 사람은 죽거나 교도소에 가거나 행불되어 하나둘 사라졌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하곤 했다. : 우리 병 들어 죽을지언정 행불(행방불명)은 되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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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19-11-26 11: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푸른 알약, 러미널이라고 예전에 이 서재에서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클린트 이스드우드는 참 신기한 게, 내용의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오랜세월 동안 매번 비슷한 얘기(유사가족)만 하는 것 같은데 이게 질리지가 않더라구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11-26 12:29   좋아요 0 | URL
러미널은 사실 하얀색 알약이죠. 사람들이 이 알약 열 개씩 , 물 없이 씹어서 아작아작 먹곤 했습니다.

+
맞습니다. 클옹 영화는 모두 다 유사 가족의 복원 욕망을 다루죠. 똑같은 얘기인데 변주 솜씨가 좋다 보니 질리지가 않죠. 가족이라는 주제는 사실 무궁무진한 소재이니깐 말입니다..
 















나의 살던 고양이











                                                                                                 옛날 옛날 일'이다. 그해 나는 지하 벙커에서 어마어마한 일감을 해치워야 했다. 야근은 필수였고 때로는 자정 넘어서도 일을 해야 했다. 나중에는 출퇴근하는 일도 버거워서 회사 근처 모텔에서 생활을 해야 했다. 새벽 4,5시에 일을 끝내고 아침 7,8시에 일을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이 너무 아파서 조퇴 신청을 하고 집에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디선가 고양이 우는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살펴보니 고양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내가 몇 걸음 걷기 시작하면 다시 고양이 우는소리가 들렸고 걸음을 멈추면 소리도 사라졌다. 괴이하도다, 괴이하도다, 아아 괴이하도다 !  서서 주변을 샅샅이 훑다가 그 문제의 고양이가 지붕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누구냐옹 ?  당시 내가 살던 동네는 집들이 촘촘하게 붙어서 지붕을 타고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겨 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서로 눈이 마주치자 고양이가 야옹 _ 울었다. 


나도 화답했다. " 이리 내려와. 아저씨가 집에 가서 밥 줄게 ! "  놀랍게도 고양이는 내 말을 듣자마자 지붕에서 내려와 내게로 다가왔다. 쭉정이 같은 빈말이었는데 아이고 참말로......        하는 수 없이 고양이를 집으로 초대했다.  당시,  내가 세 들어 살았던 곳은 대문 옆 곁방으로 거실은 없고 마당만 있는 구조였다.  흰 쌀밥에 술 안주로 먹다 남겼던 멸치와 참치를 섞어 주었더니 고양이는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나는 잠시 고양이와 놀다가 피곤이 몰려와서 이불을 깔지도 못한 채 쪽잠에 빠졌다.  내가 다시 눈을 뜬 것은 고양이 울음소리 때문이었다.  


고양이는 닫힌 방문 앞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나가고 싶은 게로구나 ?                 내가 방문을 열어주자 고양이는 마당으로 나가 나무를 타고 올라 담벼락을 따라 이웃집 지붕 위로 사라졌다. 그리고 나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하루를 쉬었으니 일감은 배로 늘어나서 다음날부터 새벽 늦게까지 일을 해야 해서 일주일 동안 모텔에서 생활해야 했다. 일주일 후,  집에 돌아왔을 때 주인집 아주머니가 마당으로 나오시더니 내게 물었다. " 혹시 고양이 키우시오 ? "  내가 영문도 모른 채 멀뚱멀뚱 아주머니를 쳐다보자 


아주머니가 말했다  :  일주일 전부터 고양이 한 마리가 총각네 방 앞에 서서 울던데요. 내가 쫓아내도 다음날에도 찾아오고, 다음날에도 찾아오고, 다음날에도 찾아오고......                         그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변변치 않은 한 끼를 대접했을 뿐인데 잊지 않고 찾아온 고양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가난했고 외롭고 쓸쓸했으며 몸이 아팠고 서글펐고 막, 막막했다. 그때 그 고양이와 함께 한 시간은 30분 남짓이었으나 세월이 오래오래 흐른 지금도 여전히 오래오래 그 고양이 생각을 한다. 


닫힌 방문 앞에서 상처 받고 돌아갔을 그 고양이를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든다. 














+


https://blog.naver.com/unheimlich1/220524718774     :    벼락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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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와 사랑이 



                               내가 " 여우 " 라고 부르는 동네 개가 있다. 반려견 주인이 부지런해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산책을 시키는 모양인데 내가 머물고 있는 빌라를 지날 때에만 짖는다. 캉캉캉 !  카랑카랑해서 듣기 좋은 음색이다. 그들의 언어를 모르지만 펄럭이의 반응으로 보아 여우의 언어 번역은 유추 가능하다. " 야, 이 덩치 큰 놈아 ! 자신 있으면 나와봐라. 달랑거리는 불알을 확, 물어뜯어버릴 테니...... " 이런 메시지였던 모양이다. 여우가 짖으면 펄럭이는 온몸의 털을 곧추세우고는 베란다를 향해 전속력으로 질주한다. 그리고는 담벼락에 앞발을 걸치고는 바깥에서 짖고 있는 여우를 향해 컹컹컹 짖는다. 순간, 마을은 " 캉캉캉 " 과 " 컹컹컹 " 이 엉켜서 잠시 소동이 벌어진다.  펄럭이의 메시지도 유추 가능하다. " 야 이 쪼맨한 여우 새끼, 너 나한테 걸리면 그땐 진짜 죽는다잉 ? " 이 정도 앙숙 관계라면 견원지간 저리 가라, 이다. 그들은 결국 화해하지 못했다. 펄럭이는 세상을 떠났으니까. 오늘 아침( 이 글을 쓰기 바로 전)에 여우가 밖에서 짖는 소리가 났다. 캉캉캉 !  캉캉캉 다음에는 반드시 컹컹컹 이라는 소리가 들려야 하나 고요했다. 울컥 한 마음, 잠시 흔들렸다. 창문 너머 여우를 보니 여우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누군가는 잊지 않고 이렇게 찾아와서 맞짱을 뜨자고 허세를 부리니 말이다. 이 자리를 통해 고백하자면 펄럭이는 성정이 좋은 녀석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운동장에 걸린 태극기처럼 도도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베란다 담벼락에 발을 올려놓고는 산책하는 개와 아이들에게 여길 지나가려면 통행세를 내라며 지랄하는 일을 낙으로 살았다. 아마도 펄럭이는 집앞 길도 동거인의 나와바리'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주인의 경제력을 과신한 경우다. 특히, 아이들을 보면 큰소리로 짖으니 민폐였다. 그중에서 한 아이가 기억에 남는다. 내가 이름 모를 동네 개에게 " 여우 " 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듯이, 그 아이는 펄럭이를 " 사랑이 " 라고 불렀다. 펄럭이는 지나가는 아이들만 보면 윽박지르는데 그 아이는 사랑이라는 사랑스러운 이름을 지어 준 것이다. 가끔 이 아이도 " 여우 " 처럼 담벼락 아래에서 사랑이를 부르곤 한다. 나는 이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모르겠다. 고요할 때마다 펄럭이가 생각난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여우가 캉캉 짖었을 때, 아이가 담벼락 아래에서 사랑아, 라고 애타게 부를 때 아무런 응답이 없다는 사실이 슬프다. 타자의 죽음은 부재 때문이 아니라 응답할 수 없는 침묵 때문에 힘든 것이다. 귀빠진 날 아침에 청승맞게 이적의 < 거짓말 > 이란 노래를 듣는다. 그때 나는 응급실에서 산소 호흡에 의지하는 펄럭이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내가 집을 팔아서라도 꼭 고쳐줄게. 내일 다시 올게 ! " 개는 살짝 꼬리를 흔들었다. 내가 응급실을 나선 지 10분 후에 펄럭이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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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2019-11-23 21: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렸을 때 조그만 갈색 암컷이 동네 사람들을 자주 물었어요. 부모님이 얘 좀 잡아라 했을 때 신경질이 나서 그만 발로 걷어찼죠. 이웃집에 불 났을 때 짖어대서 큰 화재를 막았던 영민한 개였어요. 학교 다니느라 서울에 나와 살 때 그 개는 집에서 나가 한갓진 곳에서 몰래 혼자서 죽었대요. 그러고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요즘 붉은 여우처럼 될 것만 같은 암컷 강아지가 또 생겨서 집에 데려오려고 합니다. 딸내미 소원이라서 어쩔 수 없어요. 이 강아지를 키울 생각을 하니 그 때 그 암컷이 자꾸 생각나는 거예요. 그 때 그 아이를 발로 찼던 게 이내 마음에 남았던 거 같아요. 개는 쓰다듬을 때 눈을 지그시 내리감고 사람 손길을 온몸으로 느끼는 모습이 저는 좋아요. 펄럭이는 아직도 곰곰 님 손길을 느끼고 있을 거예요. 기운내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11-24 12:56   좋아요 0 | URL
붉은 여우 같은 강아지 식구가 늘어나니 좋군요. 잘 키우시기 바랍니다. 저의 집 개도(옛날에 키우던...) 13살 노견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습니다. 원래, 주인에게 충성스러운 개들은 죽을 때가 되면 집을 나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는다고 하더군요..

곰곰생각하는발 2019-11-26 12:57   좋아요 1 | URL
˝ 곰은 마지막 며칠 동안 너무 아파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어. 그런데도 곰아, 부르면 애써서 고개를 들고 꼬리를 치는 거야. 곰아, 밥 먹어, 말하면 곰은 안 아픈 척 밥에 코를 대고 먹는 시늉을 했어. 그런 곰 앞에서 울었어. 곰이 단순히 아픈 게 아니라 죽어간다는 걸 느꼈거든. 한 밤을 자고 나서 개집에 가니 곰이 사라졌더라. 그애가 사라지고 한 달 내내 울면서 학교를 다녔어. 울고 또 울었지. 내가 괜히 곰 앞에서 눈물을 보여서 곰이 집을 나갔다고 생각했어. 자기가 아픈 걸 보고 내가 마음 아파하니까 죽으러 나간 거라고 생각하며 자책했지. 아무리 슬프더라도 내색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울지 말았어야 했는데. ˝



- 최은영 < 언니, 나의 작은, 순애 언니 >

돌궐 2019-11-26 19:40   좋아요 1 | URL
슬픈 글, 죽어가면서도 주인의 말소리에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은 글, 적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