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질문에 대답할 것.

 

 

 

 

 

 

 

 

 

 

 

 

 

 

대한민국의 주류는 꼰대'다. 꼰대의 형성이란 곧 쪽수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50대 경상도 남자'가 꼰대의 표준이라 할 만하다. 경상도'라는 지역감정을 건드리려는 의도는 없다. 꼰대의 분포 중 50대 경상도 남자'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렇다. 꼰대'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 갑 > 이다. 그리고 그 변방은 < 을 > 이다. 우석훈, 박권일의 공저 < 88만원세대 > 는 암울한 을의 디스토피아'를 다룬다. 21세기 을의 인생 그래프'는 정해져 있다. 대한민국은 갑돌이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승자독식의 사회'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문학판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강준만, 권성우 공저의 < 문학권력 > 은 몇몇 최상위 갑돌이들은 시인과 교수와 비평가 그리고 문학계의 심사위원을 겸직하는 사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1타 4피'다. 가진 놈이 다 가지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사회의 갑 중의 갑'은 당연히 삼성이다. 삼성은 국가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콤한 인생.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기자의 인터뷰는 경찰서로 연행되는 연쇄살인범에게 던진 < 소감 한 마디 ? > 라는 요청이다. 지금 이 순간에 드는 느낌이 무엇이냐는 질문인데 살인범 입장에서는 “ 정신없다 ! ” 가 정답일 것이다. 앞날은 캄캄하지, 경찰서 앞에 진을 친 카메라의 후레쉬벌브는 대낮처럼 펑펑 쏘아대지, 질문은 속사포처럼 쏟아지지 ! 그렇다고 “ 정신이 하나도 없군요. ” 라고 말하면 그놈 또한 정신없는 놈‘이다. 질문이 거지같으니 답변도 거지같을 수밖에 없다. 우문에는 우답이 정답이다. 물론 이런 우문에 현답이 나오기도 하지만 어지간한 달변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그따구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수상 소감도 아니고 수감 소감에 대한 한 마디라니 !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질문이 거지같으면 답변도 거지같이 말하면 되지만, 세상이란 심하게 불평등한 사회가 아니었던가 ? 질문자가 갑‘이고 답변자가 을‘인 경우는 상황이 다르게 전개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문에 현답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논술고사’처럼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다. 주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은 바로 면접’이다. 면접관은 갑이요, 응시자는 을‘이다.

 

사실은 가장 어처구니없고, 황당하며, 거지같은 인터뷰이지만,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한 인터뷰‘가 바로 < 입사지원동기 > 를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다. 그냥 < 먹고 살기 위해서다. > 특수 분야의 특성화 직업군이라면 모를까, 단순 사무직과 서비스업 그리고 제조업이 전부인 마당에 무슨 거창한 포부가 있을 리 없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이력서‘를 제출한다. 번듯한 직업이라도 있어야 결혼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


그런데 입사 지원 동기‘를 묻는 면접관은 마치 자기네 회사가 지구를 지키기 위한 < 마징가 제트 복원 프로젝트 주식회사 > 인 줄 착각한다. 꼴랑 만드는 거라고는 오고가는말대답 서비스 제공으로 중계료나 받아먹는 손전화기 제조 공장 공장장이면서 말이다. 손전화기가 지구를 지키던가 ?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진지하게 지원 동기’를 묻는다. 만약에 정직한 지원자가 < 입에 풀칠이나 하려고 > 라고 했다가는 100 % 그 사람은 탈락된다. 어쩌면 당신은 손 전화기 제조 공장 사장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할 지도 모른다.


울화통이 치미지만 갑과 을의 관계이니 어쩔 수 없다. 을은 갑을 위해서 거창한 지원 동기‘를 말해야 한다.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중흥을 위해서 손 전화 톡톡 공장에서 청춘을 바치겠노라고 말한다. 나아가 안으로는 자주 독립을 확립하고 밖으로는 민주 번영을 위해서 연봉 3400에 올인 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솔직하게 말하자. 면접관도 지원자도 이 말이 모두 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지원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일 확률이 100% 다. 우리는 그냥 빌어먹지 않고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다. 면접관들은 그 사실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

 

김지운 감독의 < 달콤한 인생 > 은 바로 질문과 답변에 대한 이야기다. 보스와 부하의 관계에서 질문은 오직 보스‘ 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종종 느와르 영화 속 보스들은 하나같이 같은 대사를 친다. “ 질문은 내가 한다 ! ” 그리고 묻는 질문에 부하는 답변을 해야 한다. 만약에 보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부하의 목숨은 위태로워진다. 그러니깐 영화 < 달콤한 인생 > 에서 보스와 부하의 관계는 질문하는 스핑크스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나그네의 관계와 유사하다.

 

답변이 궁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게 바로 장르의 법칙이다. 부하인 이병헌‘은 보스인 이영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거된다. 억울하지만 갑은 을을 뽑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 사실 권리’라고 말했으나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권력’이다. 질문이란 본질적으로 권력행사인 셈이다. 질문이 아무리 병신 같고, 거지같고, 거지발싸개 같고, 개미 똥구멍 같아도 갑의 질문‘은 당신을 < fire ! / 해고 > 할 수 있다. 잘 빠진 권총은 보스가 가지고 있다. 탕, 탕, 탕

 

하지만 당하고만 있을 이병헌이 아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부하‘는 절치부심, 복수의 칼날을 간다. 그리고는 아버지 / 보스 / 상사 / 면접관’을 찾아간다. 시나리오가 그렇게 진행되었으므로 1 대 100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병헌의 놀라운 생명력‘을 욕하지 마라. 캐릭터의 운명이란 감독에게 달려있으니깐 말이다. 이젠 상황이 역전이 되었다. 단 하나의 권총은 이병헌 몫이다. 갑과 을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갑이란 권총을 가진 자'다.

 

이제 질문은 이병헌이 하고, 답변은 보스가 한다. 이로서 보스만이 질문을 던진다는 룰은 깨졌다. 부하가 질문한다. “ 왜 그랬나요 ? ” 보스는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갑은 부하이고, 을은 보스다. 갑은 응시자고, 을은 면접관이다. 사실 “ 왜 그랬나요 ? ” 는 그전에 보스가 부하에게 던진 질문 “ 왜 그랬어 ? ” 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부하는 똑같은 질문을 보스에게 던지는 것이다. 응시자가 면접관에서 입사 지원 동기‘를 묻는다. 보스가 잠시 망설인다. "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중흥을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가 ? " 아니면 " 안으로는 자주 독립을 그리고 밖으로는 민주 번영’을 ! " 이라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가. 머뭇거리는 사이 이병헌은 fire 라고 말한다. 탕, 탕, 탕 !

 

보스와 부하 두 사람의 질문은 모두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질문은 무기'가 아니라 대화/소통하기 위한 전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상대방에게 윽박지른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보스에게 부하가 진지하게 묻는다. " 말해봐요. 정말 날 죽이려고 했나요 ? " 하지만 이 질문 /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말한다고 해서 목숨을 구할 방법은 없다. 보스는 예스'라고 답해도 죽고, 노'라고 말해도 죽는다. 그리고 말을 안 해도 죽는다.

 

yes 라고 말하는 순간 보스는 자신을 죽이려한 사람이 되기에 죽어 마땅하고, no라고 말하는 순간 보스는 거짓말쟁이가 되며, 침묵은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음으로 살 자격이 없다. 부하는 보스에게 이미 결정이 난 상태에서 질문을 던진 것 뿐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보스가 부하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는 더이상 부하의 답변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형 절차를 진행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이들의 질문은 이렇듯 일방통행이다.

 

균형 잡힌 사회‘는 질문과 답변이 5 대 5인 사회이다. 이 비율이 7 대 3'이 되는 사회는 불통의 사회이며, 3 대 7 사회'는 분열된 사회이다. 그리고 질문은 갑이 을에게 하달하는 방식보다는 을이 갑에게 질문하는 방식이 민주적인 것이다. 소통이란 < 갑이 을에게 > 가 아니라 < 을이 갑에게 > 할 때 건강해지는 법이깐 말이다. 그러므로 질문을 갑이 독점하는 사회’는 폭력적인 사회이다.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계급이라는 이름의 총을 버려야 한다.

 

권위 있는 대학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 있느냐, 고 물을 때 청중이 답변하지 않는 이유는 멍청해서가 아니라 질문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질문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도 않은 채 질문 있느냐고 말한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재치있게 답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드럽게 질문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지 않은 사회' 다. 이런 사회에서 소통이란 있을 수 없다. 명심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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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orte 2013-06-10 0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통의 사회와 불통의 사회, 분열의 사회를 나누는 정의가 절묘하군요. 진하게 공감하여 공감버튼 꾸욱 누르고 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4:53   좋아요 0 | URL
소통과 불통과 분열이라... 오히려 포르테 님 정의가 간결하니 좋습니다. 방긋.
 

 

 

 

 

더러운 초록색 담즙(들)

 

 

 

 

 

 

 

 

 

 

 

 

 

 

 

 

드라큘라는 본질적으로 < 여성 >이다. 창백한 피부, 곱상한 외모, 가녀린 몸, 하늘거리는 실크 망토, 더군다나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드라큘라는 황새의 우아한 걸음을 닮았다. 니체의 입장에서 보면 드라큘라는 " 정직하지 않은 사람 " 이다. 니체는 말했다. " 걸을 때 소리가 나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 정직한 사람에게는 소리가 난다. "  그래서 나는 드라큘라를 검은 망토를 입은 여성이거나 여성이 되고 싶은 게이 정도로 생각한다.  황당한 주장 같지만 그리 황당한 것도 아니다. 브람스토커 소설 < 드라큘라 >에서 실제 모델은 백작이 아니라 트란실바니아의 백작 부인 엘리자베스 바토리. 이처럼 드라큘라 남작을 드라큘라 부인으로 치환하면, 부인이 왜 보름달이 뜨는 밤에 그토록 피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월경으로 인해 유실된 피를 타인을 통해서 보충하고자 하는 행동이 아니었을까 ? 누군가는 이 해석을 지나친 비약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 드라큘라는 여자였다 > 라는 가설은 오히려 상큼하다. 우선 드라큘라의 은신처인 관을 보자. 관은 누가 보아도 여성 자궁에 대한 은유이다. 어디 그뿐인가 ?드랴큘라가 흡혈하는 부위인 목/neck이라는 단어는 자궁/neck’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 더군다나 드라큘라를 영원히 제거할 수 있는 방식은 심장에 말뚝을 박거나 목을 베어버리는 것인데, 여기서의 말뚝박기는 말 그대로 강간에 대한 은유이다. 또한 목을 베는 행위는 자궁을 적출한다는 의미로도 읽힌다.결국 드라큘라의 신체 기관 중 자궁을 적출한다는 것은 여성의 생산성을 차단하는 효과가 있다.

그녀의 전염성은 강력하기 때문이다. 드라큘라는 무시무시한 원초적 어머니. 이빨 달린 < 바기나 덴타타> . 그는 평소에는 매력있는 백작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어딘지 모르게 기괴하다. " 괴물 " 은 대부분 주류 사회의 편견이 반영된 결과'이다. 그들은 무시무시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 공포와 숭배 " 가 혼합되어 있지만 사실 주류 사회가 요구하는 것은 접촉 금지'다. 괴물은 불가촉천민'이다. 비주류인 불가촉천민들은 늘 복수를 꿈꾼다. 원인 없는 결과가 있을 수 있을까 ? 괴물은 주류 사회의 편견과 차별이 낳은 사생아다.

 

프로이트는 1919년에 언캐니에 대해 기록한다. unheimlich’의 사전적 뜻은 < 내 집처럼 편안하지 않은 > 의 뜻을 가지고 있다. 이 뜻은 확장되어서 기괴한, 두려우면서 동시에 낯선, 악마적이면서 소름끼치는 것 의 뜻을 가진다. unheimlich’에서 –heim’ 이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 heimlich’이라는 단어는 < 내 집처럼 편안한 > 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러므로 이 두 단어는 서로 극과 극이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heimlich’의 부수적 뜻에는 숨기다, 알 수 없는, 위험한 이라는 뜻도 포함된다. 결국 이 두 단어는 반대어가 아니라 서로 뜻이 통한다.

영화 <엑소시스트>에서 귀신들린 딸로 나오는 리건이라는 이름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 에 나오는 둘째딸 이름이다. 늙은 리어왕은 심성 고운 셋째 딸 코델리아를 왕국에서 추방한 후 첫째와 둘째에게 왕국을 넘겼는데, 알고 보니 이 둘은 뱀처럼 사악해서 늙은 아버지를 버렸어라. 그런, 울화통이 터지는 이야기.리어 왕의 말년 운이 더럽게 꼬인 까닭은 그가 세 번째 딸을 선택하지 않고 추방했기 때문이다. 금도끼 은도끼 이야기처럼 금이나 은을 선택하는 자는 반드시 실패한다.

리건은 둘째 딸이므로 < > 의 영역에 속한 인물이다. 그러므로 리건은 달의 지배를 받는다. 달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이 바로 물과 여자. 영화 속에서 리건을 묘사할 때 색의 이미지가 차가운 블루인 이유는 달과 깊은 관계가 있다. ( 리건은 초경을 시작되는 시점에 있다. 리어왕에서의 리건이 아버지를 버렸듯이, 영화 속 리건은 아버지를 원하지 않는 소녀에 가깝다. 그녀의 욕망은 전적으로 어머니를 향한다.

 

 

+

더러운 몸에 대한 논의는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와 줄리아크리스테바의 아브젝션 개념을 확인할 수 있는 < 공포의 권력을 참고하길 바란다.

 


 

 

엑소시스트.

 

 

 

 

공포영화를 좋아한다면 월리엄프리드킨의<엑소시스트>는 반드시 봐야 할 필사의 목록이 될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티븨에서도 보았고, 감독판 극장 상영으로도 보았고, 삐짜 시디로도 보았으며 엘피, 디븨디로도 보았다. 결국 모든 경로를 통해서 다 본 꼴이다.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 오물 범벅인, 12살 소녀의 지랄발광 > 이라고 할 수 있다. 소녀는 오줌을 싸고, 십자가로 자위를 하며, 피범벅이 되며, 초록색 담즙을 쉴 새 없이 배설한다. 정말 쌀 수 있는 모든 기능을 동원해서 < 싼다. >

 

, 리건은 너무 더럽다 ! 더러운 것은 분비물만이 아니다. 입에서 쏟아지는 욕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리건은 사랑하는 어머니에게 자신의 그곳을 핥으라고 윽박지르며, 한 번 하자고도 한다. 그리고 예수에게는 “&*$%^&… #$%#@@# !“ 이라고 욕을 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감독이 <리건에게 오물을 뒤집어씌우기> 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리건의몸은 점액, 담즙, 고름, 토사물, 오줌, , 피부 발진, 심지어는 몸에 help me’라는 낙서로더럽혀져 있다. 그것은 마치 성서 속의 나병 환자를 연상시킨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사회화 되지 않은 신체이다. 더러우면 더러울수록 리건은 사악하며 동시에 강력한 아우라를 갖는다. 리건의 몸과 드라큘라와의 공통점은 접촉에 의한 강력한 전염성이다. 만지는 순간 전염된다. 그리고 또 하나 ! 그들은 모두 남성 목소리를 흉내 내는 여성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 !리건의 불안과 공포는 부부의 이혼 때문일까 라는 의문. 많은 평론가들이 아버지의 부재가 그 원인이라고 잠정적으로 판단했지만 내가 보기엔 아이는 아버지와의 분리를 기회로 받아들인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남편/남성의 부재로 인해 곤경에 빠진 사람은 어머니이지 리건이 아니다. 오히려 리건은 아버지 대리자들을 가차없이 살해한다. 어머니의 남자친구인 버크와 말 그대로 인 신부 2명은 리건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당한다.

리건이 원하는 것은 말 그대로 엄마와의 황홀한 섹스를 하는 것이다. 많은 평론가들이 악령에 깃든 리건의 목소리가 남성이라는 이유는 이 근친상간적 욕망을 악령의 것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남성 목소리는 맥캔브릿지라는 여배우가 연기한 것이다. 그러니깐 리건 속에 들어가 있는 악령은 남자가 아니라 여자. 더군다나 영화 속에서는 이 목소리를 녹음해서 거꾸로 틀었더니 리건의 목소리더라, 라는 서사적 장치도 마련한다. 리건의 몸 속에 있는 악령은 리건 자신이다. 그러므로 이 목소리를 빌어 내뱉는 근친상간적 욕망은 전적으로 리건의근친 욕망이다.

위의 사실이 맞는다면, 리건의 행동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리건이 엄마를 유혹하기 위해서는 엄마의 환심을 사야 하는데 오히려 자신의 몸을 더럽게 만듦으로써 타자의 접근을 봉쇄한다. 하지만 아동 심리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아이의 나쁜 행동은 쉽게 간파된다. 아이는 엄마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엄마가 가장 싫어하는 행동을 하는 것이다. 리건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오줌을 싸는 이유는 반항이 아니라 어머니의 관심을 유도하기 위한 전략이다.

엄마란 본질적으로 아이의 청결을 담당하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아이가 언어를 배우기 전까지 계속된다. 엄마는 아이에게 똥 누는 법을 가르치고, 휴지로 닦는 법을 가르치며, 밥을 먹을 때에도 음식을 흘리지 않도록 훈계하는 역을 담당한다. 아이의 청결은 고스란히 엄마의 몫이다. 리건이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토하고, 배설하는 것은 자신이 < 아기 > 라는 사실을 엄마에게 각인시키기 위한 것이다. 똥 누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사실은 앞으로도 계속 엄마의 배변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렇듯 리건의 병은 빙의가 아니라 구순기로 퇴화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녀는 어머니와 분리된다는 것에 대하여 심한 공포와 불안을 느낀다. 리건의 퇴행 욕망은 결국 분리 공포가 그 원인이었다. 그녀는 자궁 속 태아를 욕망함으로써 어머니와의 영원한 합일을 원한다. ( 리건의 나이가 12살이라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12살이라는 상징성은 아이에서 소녀로 가는 길목이며, 초경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 오물을 뒤집어쓴 리건 > 이미지가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양수 속에 갇힌 태아의 모습인 것이다. 리건이 뒤집어쓴 오물은 마치 아이가 엄마의 자궁에서 빠져나왔을 때의 그 모습과 일치하는 것이다. 관객인 우리가 더러운 리건을 보며 공포에 떠는 이유는 그 모습이 매우 낯설기 때문이 아니라억압에 의해서 지워져 있던 모습을 다시 발견했기 때문이다. 자궁의 다른 이름은 < 아기집 > 이다. 우리는 모두 엄마의 자궁 속에서 뒹굴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다만 억압에 의해 지워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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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애니비평 2013-03-19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모 사케르 지금 읽는데 어렵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3-03-19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 최초의 댓글러'네요...ㅎㅎㅎㅎㅎ
호모 사케르' 읽기 만만치 않습니다.
원전이 어려운 건지 번역에 문제가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아감벤 자체가 좀 어려운 편이잖아요. 정치경제학'도 뚫어야 하고...ㅎㅎㅎ 저는 그냥 아브젝션 개념으로서의 호모사케르'라는 대충의 감만 잡고 나중에 함 파고들 생각입니다.
 

 

 

 

 

 

다크 나이트 : 가면으로 말하기

 

 

 

 

 

 

 

 

 

 

 

 

 

 

 

 

골딩은 소년 랠프와 잭을 통해서 선과 악'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소년 잭'이 자신의 얼굴에 칠을 해서 가면을 만들고는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장면이었다. 바로 이 지점부터 잭은 문명을 버리고 야만'을 선택한다. 으르렁거리며, 짐승의 목에 칼을 찌르고, 랠프 무리를 위협한다. 그러니깐 잭은 얼굴에 분장을 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짐승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골딩은 잭의 가면 뒤에 숨기 - 행위'을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전달하려고 했던 것일까 ?

 

필립 짐바르도의 < 루시퍼 이펙트 > 에서는 익명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그는 문화인류학자 왓슨이 수집한 사례를 들어 익명성과 폭력성의 상관관계'를 지적한다. 왓슨은 전쟁에 나가기 전에 분장을 한 부족과 분장을 하지 않은 부족'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두 개의 대조군을 통해서 밝히려고 했던 것은 익명성'과 폭력의 관계에 대한 것이었다. 분장을 한 부족 중 80%는 적에게 매우 파괴적이었고, 분장을 하지 않는 부족은 적에게 파괴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전투 희생자들이 살해당하거나 고문당하거나 불구가 된 사례 중 90%는 얼굴에 분장을 한 사람들로 나타났다. 가면 뒤로 얼굴을 가리는 행위'가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골딩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카드게임에서 <조커> 패는 소속이 없다. 스페이드킹’에 속한 집단도 아니고, 클로버, 하트, 다이아몬드 집단’도 아니다. 조커는 그 누구의 소속도 아니지만 동시에 그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다. 이 패는 nothing이면서 동시에 everything’이다. 아라비아 숫자 0이다. 각 집단의 패들은 자신의 병법을 위해서 <조커> 패를 이용해서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유도한다. 이렇듯 조커는 패 자체로는 점수 합산에서 값 제로’에 해당하는 무용지물이지만, 게임에서의 승리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는 영원한 리베로’다!

 

 

다들 알다시피 조커’는 광대다, 깍두기다, 찰리채플린이다, 이주일이다. 책사이다. 그리고 내시의 오랜 친구이다. 조커에게는<페니스>가 없다. 있더라도 발기하지는 않는다. 의심 많은 왕들이 광대’를 가까이 하는 이유는 그들에게는 페니스가 없기 때문이다. 조커 패’가 경계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듯이, 광대 또한 nothing과 everything’사이에 걸쳐 있다. 그는굉장히 우스운 놈이지만 동시에 무서운 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얼굴을 단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광대를 통해 보게 되는 것은 분장한 얼굴이 아니라 분장한 가면’이다. 그는 오로지 가면으로 말하고, 가면으로 말하고, 가면으로 말해서, 가면 자체가 얼굴이 된 사람이다.

 

 

영화 <다크나이트( 이하배트맨 )> 는 가면/假面과 가명/假名에 대한 이야기다. 브루스 웨인’은 자신의 얼굴을 가린 채 “박쥐사나이” 라는 가면으로 살아간다. 명분은 악에 대한 응징’이지만 사실은 초월적 영역’에서 제왕이 되는 것’이다. 반면 <조커> 는 선에 대한 응징’이 목적이지만 최종적 목적은 박쥐 사나이와 마찬가지로 절대권력’을 손에 쥐는 것’이다. 여기서 <악> 에 대한 응징은 비정상적인 대상에 대한 응징을 뜻하고, <선> 에 대한 응징은 정상적인 대상에 대한 응징을 뜻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서로의 대척점에 있는 두 영역’은 모두 <비정상적인> 기형’이다. 조커가 얼굴을 가린 채 가면으로 말하는 프릭스’라면, 배트맨또한 얼굴을 가린 채 가면으로 말하는 프릭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른 존재가 아니라 같은 존재’다. 쌍생아다.

 

 

그렇다면 얼굴을 가린 채 가면으로 말하는 행위의 심리’는 무엇일까 ? 그것은 바로 시늉과 흉내 그리고 모방과 척하기 혹은 과시 욕망 때문에 그렇다. 브루스 웨인’이 <박쥐>를 흉내 내는 이유는 고담 시의 토템 동물을모방하기 위해서’이다. 여기서 영화 속 도시 이름인 goth-am’은 속어로 뉴욕 시’ 를 뜻하지만 goth-ic과의 유사성과도 연결된다. ( 고담과 고딕의 어근/goth은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것이다. ) 고딕은 중세시대의 미술 양식 중 하나로 뱀파이어 영화나 뱀파이어 패션, 피어싱 문화는 모두 고딕의 영향이다. 그러므로 고담 시티’의 이름이 고딕’에서 비롯되었다면 이 도시의 토템은 당연히 흡혈 동물인 <박쥐>가 될 것이다. 브루스 웨인’은 도시의 토템’을 이용해서 스스로 이미지’를 조작한 것이다. 고담 시’는곧 배트맨’이다 ! 그는 도시의 수호신이다.

 

 

배트맨’이 고담의 토템’을 흉내 냈다면, 조커’가 흉내 내는 것’은 삐에로가 아니라 죽음을 상징하는 해골’에 가깝다. 하지만 우리가 그의 분장을 광대’로 착각한 이유는 그의 <찢어진 입> 때문이다. 그의 트라우마는 그를 해골에서 광대’로 보이게 한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 이 숙명이란 내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이명박을 욕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 그는 자신의 영원한 트라우마인 입 가장자리의 상처’를 감추기 위해서 새빨간 립스틱’으로 상처’를 감춘다. 트라우마’란 누구나 감추고 싶은 상처이니 말이다. 더군다나 그 상처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남긴 유물이 아닌가 ? 폭력적 아버지’는 아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로 입을 잘라서 <조커>로 만든 것이다.

 

 

내시가 남성 성기를 잘라서 왕의 곁에 머무는 인물이라면, 삐에로는 여성 성기’와 흡사한 입’이 잘려서 왕의 곁에 머물게 되는 비운의 인물이다. 삐에로 분장에서 입술을 과장되게 길게 칠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입이 길게 찢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거세된 인물이면서 동시에 여성화된 남성이며 혹은 여성이다. 히스 레져’가 연기한 <조커>는 남근이 거세된 여성화된 남성이 아니라 여성 성기’가 길게 찢어져서 거세된 남성화된 여성’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조커의 <찢어진 입>은 여성 성기’를 이미지化하는데, 붉은 립스틱의 색과 상처가 봉합된 흔적이 겹치면서 남성 폭력에 의해 찢겨진 여성 성기가 불행한 출산’을 투영시킨다. 그녀의 입은 피 흘리는 바기나 덴타타’다. 나는 이 영화에서의 조커’를 여성으로 이해한다.

 

 

결과적으로 이 싸움은 아버지의 법과 억압된 원초적 어머니와의 대결’이다. 우리는 조커가 배트맨에게 던진 의미심장한 대사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악당이 출몰하기 때문에 영웅’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가짜 영웅’이 존재하기 때문에 악당이 생겨나는 것이다. 어쩌면 원초적 어머니인 조커’는 자신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서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폭력적인 아버지가 고담의 토템 흉내’를 내기 때문에, 그 꼴을 볼 수 가 없어서, 그와 한판승부’를 내기위해서 지상에 나타난 것’은 아니었을까 ?

 

 

( 프로이트 할아버지가 오래오래오래 사셔서 이 영화’를 보셨다면 틀림없이 브루스 웨인’을 지나치게 거대한 페니스에 집착하는 마초’라고 비아냥거렸을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bat man’을 그대로 해석하자면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는 남자”가 아니던가 ? 조커를 페니스 없는 광대’로 해석하면 결국 페니스를 휘두르는 남자와 페니스가 잘린 여성’의 한판승부’라고도 볼 수 있다. )

 

 

거대자본’으로 상징되는 배트맨’은 정의를 위해서 악당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자본’을 위해서 악당과 싸우는 것’이다. 배트맨’이 외치는 <정의’를 위한 싸움> 은 마치 전쟁광인 미친 부시가 말하는 <평화를위한전쟁>과 같은 구호처럼 들린다. ‘goth’는‘bad man’이다. Batman은 사실 badman’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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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사건을 다룬 르포만큼 재미있는 장르'도 없다. 더군다나 연쇄살인범을 쫒는 르포'는 < 갑 > 이라 할 만하다. 연쇄살인사건'은 주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 자주 발생한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추리소설'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나라라는 공통점도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연쇄살인범의 팔 할'은 백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깐 연쇄살인'은 백인 범죄'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승균의 < 화성은.. > 은 사건 담당 형사의 회고록이다. 표창원 교수의 < 한국의 연쇄살인 > 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된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와 마인드 헌터'는 프로파일링 관련 서적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한 책이다. 반면 파리가 잡은 범인'은 곤충 법의학자의 시선으로 범죄'를 다룬다. 흥미진진하다. 끝으로 양들의 침묵은 스릴러 분야에서의 최고 걸작이라 할 만하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걸어둔다.

 http://myperu.blog.me/20148661402

 

 


 

 

 

1.

나쁜 영화

누가 나에게 영화 <디워> 는 나쁜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 나쁜 영화는 아니다 > 라고 말할 것이다. 또 누가 나에게 영화 <디워> 는 좋은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 좋은 영화는 아니다 > 라고 말할 것이다. 한 입 가지고 두 말 한다는 비난이 쏟아질지는 모르겠지만, 디워는 나쁜 영화도 아니고 좋은 영화도 아니다. 영화적 완성도 면에서는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가 윤리적으로 나쁜 시각을 제공하지는 않기에 나쁜 영화도 아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영화 < 악마를 보았다 > 는 나쁜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나쁜 영화라고 답할 것이다. 또 누가 이 영화는 좋은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나쁜 영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나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영화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불온한 작품이다.

내가 본 최악의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 악마를 보았다 > 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스너프 필름이나 아동 포르노를 보았을 때의 그런 혐오감과 비슷했다. 감독이 지나치게 세게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던 김지운 감독고어 장르에 도전장을 내민다. 제대로 된 피범벅 영화 한 편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찬 출발. 영화의 작품성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작품은 감독의 윤리적 문제에 중대한 하자가 있는 작품이다.

 

 

 

복수는 나의 것

연쇄살인마인 최민식을 고양이 쥐 다루듯 통제하는 국가 비밀 정보 요원 이병헌은 최민식의 처형을 단계적으로 미룬다. 보다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기 위해서이다. 이병헌은 덫에 걸린 최민식을 흠씬 팬 후에 덫을 풀어준다. 풀려난 최민식은 또다시 다른 먹잇감을 노리다가 결정적 순간에 다시 덫에 걸린다. 그는 이유 없이 맞고, 풀려나고, 맞고, 풀려나고를 반복한다. 이 문장을 이병헌의 1인칭 시점으로 풀면 < 나는 그를 때리고, 풀어주고, 때리고, 풀어주었다. > 가 될 것이다. 한쪽은 풀려나고, 한쪽은 풀어준다. 구속과 석방이 반복된다는 사실은 결국 연쇄살인마의 먹잇감인 여성 희생자의 수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여성 희생자들이 최민식에 의해 살해당하려는 순간, 이병헌이 등장해서 희생자를 구하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목숨을 구한 것뿐이지 몹쓸 짓을 사전에 예방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김지운 감독에 의해 화면 밖으로 떨어져 나간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병헌의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애궂은 여성 희생자들의 벌거벗은 젖가슴만 실컷 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개인의 복수심을 위해서 말이다.

이렇듯 영화 속 최민식보다 더 병적인 인간은 이병헌이다. 그는 여성 희생자의 죽음을 저지하기 위해서 최민식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살인 현장을 훔쳐보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행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할 윤리적 인간은 없다. 감독이 이 영화의 주제를 악마와 대결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악마보다 더 악마가 된 평범한 남자의 윤리적 파멸을 다룬 이야기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용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관객들이 바라는 것은 통쾌한 복수극이기 때문이다. 결정적 문제는 최민식보다 더 병적인 이병헌보다 더 병적인 사람은 감독 자신이라는 점이다. 과연 이 영화는 예술적 창조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질 만한 영화인가 ?

 

 

초대받은 사람들

이 영화의 결정적 오류는 최민식의 처형 장면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이병헌은 최민식의 사형식이 거행될 장소에 최민식의 늙은 부모와 자식을 초대한다. 초청장을 받은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형 장소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들이 목격하게 되는 것은 머리가 잘린 아들이자 아버지의 목과 몸뚱이. 감독이 생각하기에 이 방식이야말로 악마를 가장 잔인하게 처단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오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왜 감독은 그들을 그곳으로 초대했을까 ? 최민식의 처형은 사람을 죽인 죗값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부모는 살인자 아들을 두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죗값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 아들의 죄는 곧 부모의 죄인가 ?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듯이, 자식의 죄는 부모의 죄요, 자식의 죄인가 ? 죄는 연대보증인가 ? 웃기는 짓이다. 김지운 감독은 한 마디로 웃기는 짓을 한 것이다. 그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리스적 서사의 비극을 재현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파시즘적 증오만을 보여준 채 끝났다. 죄 없는 선량한 늙은 부부의 손으로 죄 많은 자식을 죽게 만드는 행위를 보며 감독은 카타르시스를 느낀 모양이다. 혼자서 말이다. 그건 마스터베이션일 뿐이다. 이런영화는 가차없이 침을 뱉어도 좋다.

 

 

 

2.

 

덕과 탓

대한민국는 자식의 죄는 곧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모 탓이라는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강력 사건이 발생하면 기자들은 어김없이 부모의 인터뷰를 따낸다. 못난 자식을 둔 부모의 답변은 늘 동일하다. 부모는 못난 자식을 대신해서 국민 앞에 사죄를 한다. 죽을 죄는 부모의 몫이고, 죽인 죄는 자식의 몫이다. 화면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음성은 변조된다. 심지어 어느 가해자 부모는 이제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인터뷰에 익숙한 시청자는 늘 이런 소리를 한다. “ 부모 입장에서 오죽하면 저런 말을 하겠어 ! "

나는 이런 식의 죄의 전이와 죄의식을 이해할 수 없다. 아들의 죄가 왜 부모의 죄인가 ? 아들이 저지른 죄를 왜 부모가 사죄를하는가 ? 죄란 연대보증적 성격을 띤것일까 ? 그 핏줄이 그 핏줄인가 ?이러한 가족 공범 의식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 발현되는 이유는 자식은 부모 잘 둔 덕을 보려고 하고, 부모는 잘난 자식 덕을 보려고 하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태도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마지막에서의 부모의 등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관객은 그것을 통쾌한 복수극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범죄자라고 해도 부모 앞에서 자신의 목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피를 나눈 가족일 뿐이지, 죄를 나눈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부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당신처럼 말이다.

 

 

 

기생과 숙주

지나친 가족 연대 서사는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의 피해가 더 많다. 우리는 이재용이 잘난 아버지 덕때문에 승승장구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불법인데도 말이다. 기러기 아빠서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희생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뒤집으면 늙어서 잘난 자식 덕을 보려고 하는 욕망과도 겹친다. 등록금 1000만 원 시대는 이러한 숙주와 기생 정신이 탄생시킨 기형적 풍토이다. 이러한 상부상조를 확대하면 족벌은 재벌로 뭉치고, 고향 선후배는유사 가족으로 뭉치고, 회사 직원과 조직은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친다. 깡패는 동향으로 뭉친다. 그리고명박은 상득이와 뭉치지, 절대 완득이와는 뭉치지 않는다.꼴에 닭 벼슬도 벼슬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버지니아 총기 난사 사건에서 보인 자발적 굴신은 조선을 침탈한 중국의 장수에게 고개를 세 번 땅바닥에 조아린 조선 왕의 굴신과 비슷하다.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본토에서 보여준 자발적 사죄는 우리가 얼마나 백인에게 쫄고 있었나를 여실히 보여준 꼴불견이 아니었을까 ?( 이와 같은 일이 푸에르토리코나 과테말라에서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열광적 사죄일까 ? 아니면 모르쇠일까 ? ) 그 모습은 마치 꼬리를 뒷다리 사이로 감춘 개의 꼴이다. 한마디로 꼴불犬 이다. 한 개인의 잘못을 나라 전체의 백성이 사죄하는 꼴은 전체주의적 시각과 다르지 않다. 자식의 죄는 부모 탓이라고 생각하고 초청장을 보낸 영화 속 주인공이나 미국 국적의 한국인의 범죄에 대해 머리 숙여 사죄하는 대한민국 어버이들이나 모두 똑같다. 젓가락 두 짝은 똑같은 법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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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와 우울.

 

 

 

 

 

 

 

 

 

 

 

 

 

 

 

 

 

 

 

 

 

 

 

                        

 

 

 

 

 

 

 

 

 

 

 

 

 

 

편지는 반드시 수신인'에게 도착한다. 라캉의 말이다. 하지만 우체부의 실수나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늦게 도착하거나 유실된다면 어떻게 될까 ? 혹은 수취인불명이라면 ?!  지연, 유실, 부재'에 따른 전송 실패는 상흔을 남긴다. 우울은 이러한 상흔의 결과이다. 정신분석이란 본질적으로 잃어버린 편지를 찾아주려는 과정'이다. 유실된 편지를 찾아서 편지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수신인의 행방을 찾아서 주소를 알아오는 것이 정신과 의사의 역할'이다. 그러고 보면.... 프로이트는 우편배달부'에 가깝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접근인가 ? 후훗.. 하지만 프로이드'는 좋아할 것 같다.

 

 


 

 

 

1. 날림 막 자막으로 영화 보던 시절

이와이슈운지의< 러브레터 > 는 영화관에서 정식으로 개봉되기 전에 이미많은 사람들이 보았던 영화다. 삐자 테이프로만 30만 개가 유통되었다고 한다. 평단은 외면했고, 대중은 열광했다. 나 또한 이 영화를 시네마떼끄 삐자 막 자막 버전으로 보았는데, 나는 이 영화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뒤에 앉은 사람은 날 보고 키는 작지만 머리가 커서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고 짜증을 냈고, 나는 앞 사람에게 얼굴은 작지만 키가 커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사실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원인으로삐자에, 날림 자막에, 앞 사람 머리가 스크린전체의 1/3를 차지하는 열악한 관람 환경 탓도 있었지만 사실은 영화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다. 이 영화가 정식적으로 극장에서 상영할 때, 조조할인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으나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세 번째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와이슌지 감독, 꽤 좋은 감독인걸 !우리는 그를 러브스토리 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끝나거나 사랑이 끝난 후의 풍경을 담는 감독이다. 정작 영화 속에서는 < 사랑 진행 중 > 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붕어빵에 붕어는 없는 경우와 동일하다.

 

 

2.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

여자 와타나베히로코 2년 전에 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애인 남자 후지이이츠키를 잊지 못한다.히로코는 우울하다. 그녀는 죽은 지 2년이 지난 애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 그녀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듯하다. 때가 되면 죽은 사람을 잊고 정상적인 생활 속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여자는 남자가 죽은 지 2년이 지나도록 그를 잊지 못해서 죽고 싶다. 눈 속에 누워서 호흡을 멈추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숨이란 참는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

 

 

여자는 남자가 옛날에 살던 주소로 편지를 쓴다. 물론 죽은 자에게 보내는 편지이니 답장이 올 리가 없다. 답답해서 그냥 보내는 편지이다. 우리가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듯이 말이다. 그런데히로코에게 답장이 도착한다. 더군다나 여자 히로코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후지이이츠키. 어라?! 정말 죽은 애인에게서 편지가 왔네 ! 우리는 이 영화가 판타지 멜로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서 온 편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곧이어 밝혀지는 제2의 후지이는 놀랍게도 히로코와 생김새가 똑같은 여자 후지이. 더군다나 죽은 남자 후지이와 여자 후지이는 학교 동기동창이었다. ( 히로코를 연기한 나카야마 미호가 여자 후지이를 동시에 연기한다. 일인 이역이다. )

 

여자 히로코와 여자 후지이는 서로 편지 왕래를 통해서 죽은 남자 후지이를 회상한다. 서로 둘이 좋아했나요 ? 어머, 아니에요. 우린 그냥 그렇고 그런 칠성 사이다 예요. 호호. 그렇군요. 흐흐. 후지이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 글쎄요. 좀 독특했어요. 호호. 그래요 ? 흐흐. 이것도 인연이니 우리 언제 한 번 만나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셔요. 어때요 ?좋아요 ! 그런데... 혹시 둘이 손만 잡고 자는 그런 사이다는 아니죠 ?호호. 그 사람은....하루에 세 번 했어요. 어머나, 하루에 세 번이나 한 사이다네요 ?칠성 사이다가 아니라 삼성/三性 사이다죠. 그러네요. 호호. 그렇군요. 흐흐.

 

히로코의 편지에 자극받은 여자 후지이는 같은 반 동창 남자 후지이를기억하기 위해 이것저것 기억 속의 잡동사니를 꺼내본다. 그녀는 자신의 모교 도서관 독서 카드를 통해서 동창 후지이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남자 후지이가 여자 히로코를좋아하는 이유는 히로코가 자신의 첫사랑인 여자 후지이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유추할 수도 있지 않을까? 러브레터는 사실 멜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히치콕의 현기증을 닮았다! 이 영화의 성격을 굳이 구분하자면 순정 멜로라기보다는 미스터리 멜로라고 구별짓는 것이 더 합당하다.)

 

히로코 입장에서 보면 죽은 남자 후지이는 히로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여자 후지이를 닮은 히로코를 사랑한 것이 된다, 남자는 첫사랑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두 번째 사랑이다, 넘버2, 어쩌면 히로코는 남자 후지이가 사랑한 여자의 도플갱어이다. 하지만 어쩌랴 ! 시간은 흘렀고, 세월도 흘렀고, 애인은 산 속 메아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우야둥둥...... 모든 것을 이제 다 잊기로 한다.

 

 

3. 애도와 우울증 : 순환과 정체에 대해서

추도식이란 < 애도 > 를 의미한다. 애도란 다 함께 슬퍼함을 뜻한다. 노무현이 죽던 날, 내가 속초 동명항포장마차 방파제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펑펑 운 것은 그에 대한 애도 행위때문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서 어느 정도 애도 기간을 가진다. 그 기간 동안 죽은 자를 추억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문화인류학적 접근으로 살펴보면 애도는 죽은 자에 대한 예우를 갖춤으로써 죽은 자의 영혼이 자신을 해코지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살풀이요, 액막이굿이다.

 

http://myperu.blog.me/20152896891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영화 속 히로코의 슬픔은 애도가 아니라 우울증이다. 애도란 슬픔을 나누는 행위이고, 우울증이란 슬픔을 간직하는 행위이다. 이쯤에서 당신은 슬픔을 나누는 행위와 간직하는 행위가 뭐가 다르냐고 짜증을 낼지도 모르지만,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친절한 곰곰생각하는발 씨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친절하게 이 말의 뜻을 당신에게 설명할 용의가 있다.

 

슬픔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똥을 싸는 것과 같다.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 행위를 통해서 몸 속에 있는 독소를 배출한다. 반면 슬픔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고 혼자 간직하는 행동은 똥을 못 싸고 체내에 쌓아두는 것과 같다. 애도는 나눔과 순환이며, 우울은 소유와 정체이다. 히로코는 죽은 남자의 상실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아의 상실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것은 우울증 환자들의 자기 비난이라는 것이 사실은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비난인데, 그것이 환자 자신의 자아로 돌려졌다는 것이다. 술 취한 아내가 남편에게 나 같은 여자 만나서 당신에게 미안하다, 라고 말하는 자기 비하의 말투 이면에는 사실은 이런 여자 밖에 못 만나는 당신의 능력 부족에 대한 신랄한 조롱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 말도 프로이트의 말이다. 히로코는그동안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화가 난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애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계속 거부해 온 것이다.

 

 

4. 사랑과 감기는 속일 수 없다.

여자 후지이이츠키는 어떤가 ?후지이는 시종일관 독감을 앓고 있다. 카메라가 그녀의 사연을 훑으면 몇 년 전에 독감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지금 딸은 아버지가 앓던 독감을 앓고 있다. 정신과 의사라면 후지이의 독감 < 강박 신경증 > 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니깐 후지이가 앓고 있는 감기의 원인은 독감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아니라 죽은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에 따른 집착이 원인이다. 후지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기침을 흉내낸다. ” 그녀는 기침을 흉내 냄으로써 죽은 아버지를 계속 상기시킨다. 아버지의 몸 속에 있던 바이러스는 고스란히 딸의 몸 속으로 침투한다.

 

그런데 여자 후지이의 상황은 묘하게 여자 히로코와 겹친다. 히로코의남자친구는 죽은 후에도 히로코에게 영향을 미친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한 감응력이다. 히로코의 몸 속에는,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지 못한, 2년 전에 죽은 후지이가 있다. 내 안에 너 있다. 애도 행위는 슬픔의 절차를 통해서 타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는 태도인데, 여자 후지이와히로코는 애도라는 절차 과정 없이 바로 우울증에 빠져서 죽은 타자()은 그녀() 곁에서 떠나지 못하고 맴돈다.

 

그래서 죽은 자는 산 자의 몸 속에서 산다. influenza/감기와 influence/감응력의 공통점은 강력한 전염에 있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어서 쓰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 문장에서는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서 인용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과 감기에 걸린 사람의 얼굴은 숨길 수가 없다. 그들은 심한 몸살을 앓는다!히로코와후지이는 같은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매우 강력한 하나이다. 히로코는 우울증을 앓고 있고, 후지이는 독감을 앓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날마다 훌쩍인다는 점이다. 영화는 히로코가 죽은 남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애도로 돌아서서 그를 용서하는 것으로 끝난다. 동시에 오타루첩첩산중 얼음 골짜기 마을에 사는 여자 후지이도 독감을 떨쳐버리고 건강을 찾는다. 감독은 이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면서 주술의 동일화를 강조한다. 드디어 그들은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아버지를보낸다.

 

 

5. /mur은 사랑/amour.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뽑으라고 하면 백이면 백, 메아리 장면과 독서 카드 장면을 뽑을 것이다. 히로코는 사랑하는 사람을 삼킨 설산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 잘 있나요 ?“ 이번에는 메아리가 된 죽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 잘 있나요 ?“ 여자는 답한다. “ 전 잘 있어요 !“ 남자도 답한다. “ 저도 잘...있습니다 !“ 워낙 유명한 장면이어서 잊혀지기 힘든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메아리는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과학 시간에 졸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라면 메아리의 원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소리가 산이나 벽에 부딪혀서 되돌아오는 것이 바로 메아리. 히로코가 설산을 향해 잘 있나요 ? 라고 부를 때, 그녀의 소리는 설산의 벽에 부딪혀서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것이다. 설산의 벽이 사랑하는 사람을 삼킨 주체라는 점( 남자는 등반 중 사고로 죽는다. ) 을 감안한다면 이 메아리는 사랑하는 남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히로코는 남자가 자신의 곁을 떠난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안부를 묻는다. 그것은 < 당신이 나만 남겨두고 내 곁을 떠날 수 있어 ? 어떻게 그럴 수 있어 ?> 라고 화를 내는 것과는 다르다. 그녀는 지금 애도를 한다. 이처럼 사랑과 용서의 시작은 바로 발화이다. 사랑이란 주고 받는 것이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편지의 소통 기능처럼 말이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한다고 외쳐야 한다. 그래야지 설산도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6. 그래도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그동안이 영화에 대한 당신의 아련한 순정을 깨지 않기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을 미뤘지만 이쯤에서 폭로해야 한다. 미루고 미루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히로코는 우울을 버리고 애도로돌아섰을까 ? 죽어도 못 보내, 라며 울던 여자가 몇 번의 편지 왕래를 하고 나서 죽은 자를 보내주기로 결심을 한 것일까 ? 정답은 그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환상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히로코는 남자 후지이의 첫사랑이 아니다. 남자 후지이가 히로코를 사랑한 이유는 첫사랑 여자 후지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히로코가 보기에 자신은 그 남자의 두 번째 사랑이며, 대리 충족의 대상이 아니던가 ! 환상이 확 깨진 것이다. ...속았나봐 !그래서 놓아주기로 한다. , 이젠 나도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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