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와 우울.
편지는 반드시 수신인'에게 도착한다. 라캉의 말이다. 하지만 우체부의 실수나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늦게 도착하거나 유실된다면 어떻게 될까 ? 혹은 수취인불명이라면 ?! 지연, 유실, 부재'에 따른 전송 실패는 상흔을 남긴다. 우울은 이러한 상흔의 결과이다. 정신분석이란 본질적으로 잃어버린 편지를 찾아주려는 과정'이다. 유실된 편지를 찾아서 편지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수신인의 행방을 찾아서 주소를 알아오는 것이 정신과 의사의 역할'이다. 그러고 보면.... 프로이트는 우편배달부'에 가깝다. 지나치게 낭만적인 접근인가 ? 후훗.. 하지만 프로이드'는 좋아할 것 같다.
1. 날림 막 자막으로 영화 보던 시절
이와이슈운지의< 러브레터 > 는 영화관에서 정식으로 개봉되기 전’에 이미많은 사람들이 보았던 영화다. 삐자 테이프로만 30만 개가 유통되었다고 한다. 평단은 외면했고, 대중은 열광했다. 나 또한 이 영화를 시네마떼끄 삐자 막 자막 버전으로 보았는데, 나는 이 영화가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뒤에 앉은 사람은 날 보고 키는 작지만 머리가 커서 화면이 보이지 않는다고 짜증을 냈고, 나는 앞 사람에게 얼굴은 작지만 키가 커서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투덜댔다. 사실 이 영화를 이해하지 못했던 원인으로삐자에, 날림 자막에, 앞 사람 머리가 스크린전체의 1/3를 차지하는 열악한 관람 환경 탓도 있었지만 사실은 영화 자체’가 상당히 어려웠다. 이 영화가 정식적으로 극장에서 상영할 때, 조조할인’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보았으나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세 번째’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야 영화가 무엇을 이야기하려고 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와이슌지 감독, 꽤 좋은 감독인걸 !우리는 그를 “ 러브스토리 “ 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감독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의 영화들은 대부분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끝나거나 사랑이 끝난 후의 풍경’을 담는 감독이다. 정작 영화 속에서는 < 사랑 진행 중 > 인 이야기는 찾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붕어빵에 붕어’는 없는 경우와 동일하다.
2. 하룻밤에 세 번씩이나 ?!
여자 와타나베히로코’는 2년 전에 산에서 불의의 사고로 죽은 애인 남자 후지이이츠키’를 잊지 못한다.히로코’는 우울하다. 그녀는 죽은 지 2년이 지난 애인의 추도식에 참석한다. 그녀는 우울증을 앓고 있는 듯하다. 때가 되면 죽은 사람’을 잊고 정상적인 생활 속으로 돌아와야 하는데 여자는 남자가 죽은 지 2년이 지나도록 그를 잊지 못해서 죽고 싶다. 눈 속에 누워서 호흡을 멈추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한다. 하지만 숨이란 참는다고 멈추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
여자는 남자가 옛날에 살던 주소’로 편지’를 쓴다. 물론 죽은 자에게 보내는 편지이니 답장이 올 리’가 없다. 답답해서 그냥 보내는 편지이다. 우리가 산타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듯이 말이다. 그런데히로코’에게 답장이 도착한다. 더군다나 여자 히로코에게 편지를 보낸 사람의 이름은 후지이이츠키’다. 어라?! 정말 죽은 애인’에게서 편지가 왔네 ! 우리는 이 영화가 판타지 멜로’가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과거에서 온 편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곧이어 밝혀지는 제2의 후지이’는 놀랍게도 히로코’와 생김새가 똑같은 여자 후지이’다. 더군다나 죽은 남자 후지이와 여자 후지이’는 학교 동기동창이었다. ( 히로코’를 연기한 나카야마 미호’가 여자 후지이’를 동시에 연기한다. 일인 이역’이다. )
여자 히로코와 여자 후지이’는 서로 편지 왕래’를 통해서 죽은 남자 후지이’를 회상한다. 서로 둘이 좋아했나요 ? 어머, 아니에요. 우린 그냥 그렇고 그런 칠성 사이다 예요. 호호. 그렇군요. 흐흐. 후지이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 글쎄요. 좀 독특했어요. 호호. 그래요 ? 흐흐. 이것도 인연이니 우리 언제 한 번 만나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셔요. 어때요 ?좋아요 ! 그런데... 혹시 둘이 손만 잡고 자는 그런 사이다는 아니죠 ?호호. 그 사람은....하루에 세 번 했어요. 어머나, 하루에 세 번이나 한 사이다’네요 ?칠성 사이다’가 아니라 삼성/三性 사이다죠. 그러네요. 호호. 그렇군요. 흐흐.
히로코의 편지’에 자극받은 여자 후지이’는 같은 반 동창 남자 후지이’를기억하기 위해 이것저것 기억 속의 잡동사니’를 꺼내본다. 그녀는 자신의 모교 도서관 독서 카드’를 통해서 동창 후지이’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남자 후지이’가 여자 히로코’를좋아하는 이유는 히로코’가 자신의 첫사랑인 여자 후지이’와 너무나 닮았기 때문이다(라는 결론을 유추할 수도 있지 않을까? 러브레터’는 사실 멜로’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히치콕의 현기증’을 닮았다! 이 영화의 성격을 굳이 구분하자면 순정 멜로’라기보다는 미스터리 멜로’라고 구별짓는 것이 더 합당하다.)
히로코 입장에서 보면 죽은 남자 후지이’는 히로코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릴 적 짝사랑의 대상이었던 여자 후지이를 닮은 히로코를 사랑한 것이 된다, 남자는 첫사랑이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두 번째 사랑이다, 넘버2다, 어쩌면 히로코는 남자 후지이가 사랑한 여자의 도플갱어’이다. 하지만 어쩌랴 ! 시간은 흘렀고, 세월도 흘렀고, 애인은 산 속 메아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우야둥둥...... 모든 것을 이제 다 잊기로 한다.
3. 애도와 우울증 : 순환과 정체’에 대해서
추도식’이란 < 애도 > 를 의미한다. 애도’란 다 함께 슬퍼함’을 뜻한다. 노무현이 죽던 날, 내가 속초 동명항포장마차 방파제에서 코가 삐뚤어지게 술을 마시고 펑펑 운 것은 그에 대한 애도 행위’ 때문이었다. 이처럼 우리는 죽은 자’를 위해서 어느 정도 애도 기간을 가진다. 그 기간 동안 죽은 자’를 추억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모든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문화인류학적 접근으로 살펴보면 애도는 죽은 자’에 대한 예우를 갖춤으로써 죽은 자’의 영혼이 자신을 해코지하는 것을 방지하려는 살풀이요, 액막이굿’이다.
http://myperu.blog.me/20152896891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영화 속 히로코’의 슬픔은 애도’가 아니라 우울증’이다. 애도란 슬픔을 나누는 행위이고, 우울증이란 슬픔을 간직하는 행위이다. 이쯤에서 당신은 슬픔을 나누는 행위와 간직하는 행위’가 뭐가 다르냐고 짜증을 낼지도 모르지만,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친절한 곰곰생각하는발 씨’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친절하게 이 말의 뜻을 당신에게 설명할 용의가 있다.
슬픔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눈다는 것은 똥을 싸는 것과 같다.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우리는 이 행위를 통해서 몸 속에 있는 독소를 배출한다. 반면 슬픔을 여러 사람들과 함께 나누지 못하고 혼자 간직하는 행동은 똥을 못 싸고 체내’에 쌓아두는 것과 같다. 애도’는 나눔과 순환이며, 우울은 소유와 정체’이다. 히로코’는 죽은 남자의 상실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자아의 상실’에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그것은 “우울증 환자들의 자기 비난이라는 것이 사실은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비난인데, 그것이 환자 자신의 자아로 돌려졌다는 것“이다. 술 취한 아내가 남편에게 나 같은 여자 만나서 당신에게 미안하다, 라고 말하는 자기 비하의 말투 이면에는 사실은 이런 여자 밖에 못 만나는 당신의 능력 부족에 대한 신랄한 조롱’으로 읽을 수도 있다. 이 말도 프로이트의 말이다. 히로코는그동안잃어버린 사랑 때문에 슬픈 것이 아니라 화가 난 것이다. 그녀는 지금까지 애인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계속 거부해 온 것이다.
4. 사랑과 감기는 속일 수 없다.
여자 후지이이츠키’는 어떤가 ?후지이’는 시종일관 독감을 앓고 있다. 카메라가 그녀의 사연을 훑으면 몇 년 전에 독감으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려준다. 지금 딸은 아버지가 앓던 독감을 앓고 있다. 정신과 의사’라면 후지이의 독감’을 < 강박 신경증 > 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그러니깐 후지이’가 앓고 있는 감기’의 원인은 독감 바이러스에 의한 감염이 아니라 죽은 아버지에 대한 죄의식에 따른 집착’이 원인이다. 후지이’는 아버지의 죽음을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꾸 “ 기침을 흉내낸다. ” 그녀는 기침을 흉내 냄으로써 죽은 아버지’를 계속 상기시킨다. 아버지의 몸 속에 있던 바이러스’는 고스란히 딸의 몸 속으로 침투한다.
그런데 여자 후지이’의 상황은 묘하게 여자 히로코’와 겹친다. 히로코의남자친구는 죽은 후에도 히로코’에게 영향을 미친다.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강력한 감응력이다. 히로코의 몸 속에는,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지 못한, 2년 전에 죽은 후지이’가 있다. 내 안에 너 있다. 애도 행위’는 슬픔의 절차’를 통해서 타자’를 이승에서 저승으로 보내는 태도인데, 여자 후지이와히로코’는 애도’라는 절차 과정 없이 바로 우울증’에 빠져서 죽은 타자(들)은 그녀(들) 곁에서 떠나지 못하고 맴돈다.
그래서 죽은 자’는 산 자의 몸 속에서 산다. influenza/감기와 influence/감응력’의 공통점은 강력한 전염에 있다. 너무 상투적인 표현이어서 쓰지 않으려고 했으나 이 문장에서는 가장 적절한 표현인 것 같아서 인용한다. 사랑에 빠진 사람과 감기에 걸린 사람의 얼굴은 숨길 수가 없다. 그들은 심한 몸살을 앓는다!히로코와후지이는 같은 병’을 앓고 있다.
그들은 매우 강력한 하나’이다. 히로코는 우울증을 앓고 있고, 후지이’는 독감을 앓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날마다 훌쩍인다는 점이다. 영화는 히로코’가 죽은 남자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애도’로 돌아서서 그를 용서하는 것으로 끝난다. 동시에 오타루첩첩산중 얼음 골짜기 마을에 사는 여자 후지이’도 독감을 떨쳐버리고 건강을 찾는다. 감독은 이 장면을 교차편집으로 보여주면서 “주술의 동일화“를 강조한다. 드디어 그들은 사랑하는 남자를, 사랑하는 아버지’를보낸다.
5. 벽/mur은 사랑/amour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뽑으라고 하면 백이면 백, 메아리 장면과 독서 카드 장면을 뽑을 것이다. 히로코는 사랑하는 사람을 삼킨 설산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 잘 있나요 ?“ 이번에는 메아리가 된 죽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 잘 있나요 ?“ 여자는 답한다. “ 전 잘 있어요 !“ 남자도 답한다. “ 저도 잘...있습니다 !“ 워낙 유명한 장면이어서 잊혀지기 힘든 장면이다.
이 영화에서 메아리’는 매우 중요한 상징’으로 작용한다. 과학 시간’에 졸지 않고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라면 메아리의 원리’를 알고 있을 것이다. 소리가 산이나 벽’에 부딪혀서 되돌아오는 것이 바로 메아리’다. 히로코가 설산을 향해 잘 있나요 ? 라고 부를 때, 그녀의 소리는 설산의 벽에 부딪혀서 부메랑처럼 되돌아온 것이다. 설산의 벽’이 사랑하는 사람을 삼킨 주체’라는 점( 남자는 등반 중 사고로 죽는다. ) 을 감안한다면 이 메아리’는 사랑하는 남자의 목소리’이기도 하다.
히로코는 남자가 자신의 곁을 떠난 지 2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안부를 묻는다. 그것은 < 당신이 나만 남겨두고 내 곁을 떠날 수 있어 ? 어떻게 그럴 수 있어 ?> 라고 화를 내는 것과는 다르다. 그녀는 지금 애도’를 한다. 이처럼 사랑과 용서의 시작은 바로 발화’이다. 사랑이란 주고 받는 것이다.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있을 때에만 가능한 편지의 소통 기능’처럼 말이다. 사랑받기 위해서는 사랑한다고 외쳐야 한다. 그래야지 설산도 당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6. 그래도 당신을 사랑한다.
나는 그동안이 영화에 대한 당신의 아련한 순정’을 깨지 않기 위해서 하고 싶은 말을 미뤘지만 이쯤에서 폭로해야 한다. 미루고 미루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히로코’는 우울을 버리고 애도’로돌아섰을까 ? 죽어도 못 보내, 라며 울던 여자가 몇 번의 편지 왕래’를 하고 나서 죽은 자’를 보내주기로 결심을 한 것일까 ? 정답은 그남자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환상이 깨졌기 때문이었다. 히로코’는 남자 후지이’의 첫사랑이 아니다. 남자 후지이’가 히로코’를 사랑한 이유는 첫사랑 여자 후지이’를 닮았기 때문이다. 히로코가 보기에 자신은 그 남자의 두 번째 사랑이며, 대리 충족의 대상’이 아니던가 ! 환상이 확 깨진 것이다. 나...속았나봐 !그래서 놓아주기로 한다. 흥, 이젠 나도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해지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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