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사건을 다룬 르포만큼 재미있는 장르'도 없다. 더군다나 연쇄살인범을 쫒는 르포'는 < 갑 > 이라 할 만하다. 연쇄살인사건'은 주로 자본주의가 발달한 나라'에서 자주 발생한다. 이들 나라의 공통점은 또 하나 있다. 추리소설'이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는 나라라는 공통점도 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연쇄살인범의 팔 할'은 백인이라는 점이다. 그러니깐 연쇄살인'은 백인 범죄'에 가깝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서 화성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가 본격적으로 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승균의 < 화성은.. > 은 사건 담당 형사의 회고록이다. 표창원 교수의 < 한국의 연쇄살인 > 과 함께 읽으면 도움이 된다.

살인자들과의 인터뷰와 마인드 헌터'는 프로파일링 관련 서적 가운데 가장 흥미진진한 책이다. 반면 파리가 잡은 범인'은 곤충 법의학자의 시선으로 범죄'를 다룬다. 흥미진진하다. 끝으로 양들의 침묵은 스릴러 분야에서의 최고 걸작이라 할 만하다. 자세한 내용은 링크를 걸어둔다.

 http://myperu.blog.me/20148661402

 

 


 

 

 

1.

나쁜 영화

누가 나에게 영화 <디워> 는 나쁜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 나쁜 영화는 아니다 > 라고 말할 것이다. 또 누가 나에게 영화 <디워> 는 좋은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 좋은 영화는 아니다 > 라고 말할 것이다. 한 입 가지고 두 말 한다는 비난이 쏟아질지는 모르겠지만, 디워는 나쁜 영화도 아니고 좋은 영화도 아니다. 영화적 완성도 면에서는 좋은 영화는 아니지만 이 영화가 윤리적으로 나쁜 시각을 제공하지는 않기에 나쁜 영화도 아니다. 그런데 누가 나에게 영화 < 악마를 보았다 > 는 나쁜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나쁜 영화라고 답할 것이다. 또 누가 이 영화는 좋은 영화인가 라고 물으면 나쁜 영화라고 대답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짜 나쁜 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영화적 완성도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불온한 작품이다.

내가 본 최악의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 악마를 보았다 > 이다. 이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스너프 필름이나 아동 포르노를 보았을 때의 그런 혐오감과 비슷했다. 감독이 지나치게 세게 나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던 김지운 감독고어 장르에 도전장을 내민다. 제대로 된 피범벅 영화 한 편 만들어 보겠다는 야심찬 출발. 영화의 작품성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이 작품은 감독의 윤리적 문제에 중대한 하자가 있는 작품이다.

 

 

 

복수는 나의 것

연쇄살인마인 최민식을 고양이 쥐 다루듯 통제하는 국가 비밀 정보 요원 이병헌은 최민식의 처형을 단계적으로 미룬다. 보다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기 위해서이다. 이병헌은 덫에 걸린 최민식을 흠씬 팬 후에 덫을 풀어준다. 풀려난 최민식은 또다시 다른 먹잇감을 노리다가 결정적 순간에 다시 덫에 걸린다. 그는 이유 없이 맞고, 풀려나고, 맞고, 풀려나고를 반복한다. 이 문장을 이병헌의 1인칭 시점으로 풀면 < 나는 그를 때리고, 풀어주고, 때리고, 풀어주었다. > 가 될 것이다. 한쪽은 풀려나고, 한쪽은 풀어준다. 구속과 석방이 반복된다는 사실은 결국 연쇄살인마의 먹잇감인 여성 희생자의 수가 그만큼 늘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물론 여성 희생자들이 최민식에 의해 살해당하려는 순간, 이병헌이 등장해서 희생자를 구하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목숨을 구한 것뿐이지 몹쓸 짓을 사전에 예방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김지운 감독에 의해 화면 밖으로 떨어져 나간 영화 속 여성 캐릭터들은 죽음보다도 더 무서운 두려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이병헌의 개인적 복수심 때문에 애궂은 여성 희생자들의 벌거벗은 젖가슴만 실컷 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개인의 복수심을 위해서 말이다.

이렇듯 영화 속 최민식보다 더 병적인 인간은 이병헌이다. 그는 여성 희생자의 죽음을 저지하기 위해서 최민식 앞에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살인 현장을 훔쳐보기 위해서 그곳에 있는 것이다. 과연 이런 행위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일까 ? 미치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할 윤리적 인간은 없다. 감독이 이 영화의 주제를 악마와 대결을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악마보다 더 악마가 된 평범한 남자의 윤리적 파멸을 다룬 이야기라고 말한다고 해도,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용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관객들이 바라는 것은 통쾌한 복수극이기 때문이다. 결정적 문제는 최민식보다 더 병적인 이병헌보다 더 병적인 사람은 감독 자신이라는 점이다. 과연 이 영화는 예술적 창조성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질 만한 영화인가 ?

 

 

초대받은 사람들

이 영화의 결정적 오류는 최민식의 처형 장면에서 절정에 다다른다. 이병헌은 최민식의 사형식이 거행될 장소에 최민식의 늙은 부모와 자식을 초대한다. 초청장을 받은 그들은 영문도 모른 채 사형 장소에 도착한다. 그리고 그들이 목격하게 되는 것은 머리가 잘린 아들이자 아버지의 목과 몸뚱이. 감독이 생각하기에 이 방식이야말로 악마를 가장 잔인하게 처단하는 방법이라고 판단한 모양이다.

오류는 바로 그 지점에서 발생한다. 왜 감독은 그들을 그곳으로 초대했을까 ? 최민식의 처형은 사람을 죽인 죗값이라는 데는 동의하지만, 부모는 살인자 아들을 두었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죗값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 아들의 죄는 곧 부모의 죄인가 ?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듯이, 자식의 죄는 부모의 죄요, 자식의 죄인가 ? 죄는 연대보증인가 ? 웃기는 짓이다. 김지운 감독은 한 마디로 웃기는 짓을 한 것이다. 그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은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그리스적 서사의 비극을 재현하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파시즘적 증오만을 보여준 채 끝났다. 죄 없는 선량한 늙은 부부의 손으로 죄 많은 자식을 죽게 만드는 행위를 보며 감독은 카타르시스를 느낀 모양이다. 혼자서 말이다. 그건 마스터베이션일 뿐이다. 이런영화는 가차없이 침을 뱉어도 좋다.

 

 

 

2.

 

덕과 탓

대한민국는 자식의 죄는 곧 자식 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한 부모 탓이라는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강력 사건이 발생하면 기자들은 어김없이 부모의 인터뷰를 따낸다. 못난 자식을 둔 부모의 답변은 늘 동일하다. 부모는 못난 자식을 대신해서 국민 앞에 사죄를 한다. 죽을 죄는 부모의 몫이고, 죽인 죄는 자식의 몫이다. 화면은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음성은 변조된다. 심지어 어느 가해자 부모는 이제 더 이상 내 자식이 아니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식의 인터뷰에 익숙한 시청자는 늘 이런 소리를 한다. “ 부모 입장에서 오죽하면 저런 말을 하겠어 ! "

나는 이런 식의 죄의 전이와 죄의식을 이해할 수 없다. 아들의 죄가 왜 부모의 죄인가 ? 아들이 저지른 죄를 왜 부모가 사죄를하는가 ? 죄란 연대보증적 성격을 띤것일까 ? 그 핏줄이 그 핏줄인가 ?이러한 가족 공범 의식이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 발현되는 이유는 자식은 부모 잘 둔 덕을 보려고 하고, 부모는 잘난 자식 덕을 보려고 하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착각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러한 태도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영화마지막에서의 부모의 등장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관객은 그것을 통쾌한 복수극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아무리 범죄자라고 해도 부모 앞에서 자신의 목이 잘려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들은 피를 나눈 가족일 뿐이지, 죄를 나눈 가족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부는 평범한 시민일 뿐이다. 당신처럼 말이다.

 

 

 

기생과 숙주

지나친 가족 연대 서사는 순기능보다는 역기능의 피해가 더 많다. 우리는 이재용이 잘난 아버지 덕때문에 승승장구하는 것을 너무나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불법인데도 말이다. 기러기 아빠서사는 겉으로 보기에는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희생의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을 뒤집으면 늙어서 잘난 자식 덕을 보려고 하는 욕망과도 겹친다. 등록금 1000만 원 시대는 이러한 숙주와 기생 정신이 탄생시킨 기형적 풍토이다. 이러한 상부상조를 확대하면 족벌은 재벌로 뭉치고, 고향 선후배는유사 가족으로 뭉치고, 회사 직원과 조직은 우리는 하나의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뭉친다. 깡패는 동향으로 뭉친다. 그리고명박은 상득이와 뭉치지, 절대 완득이와는 뭉치지 않는다.꼴에 닭 벼슬도 벼슬이라고 말이다.

우리가 버지니아 총기 난사 사건에서 보인 자발적 굴신은 조선을 침탈한 중국의 장수에게 고개를 세 번 땅바닥에 조아린 조선 왕의 굴신과 비슷하다.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본토에서 보여준 자발적 사죄는 우리가 얼마나 백인에게 쫄고 있었나를 여실히 보여준 꼴불견이 아니었을까 ?( 이와 같은 일이 푸에르토리코나 과테말라에서 벌어졌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 열광적 사죄일까 ? 아니면 모르쇠일까 ? ) 그 모습은 마치 꼬리를 뒷다리 사이로 감춘 개의 꼴이다. 한마디로 꼴불犬 이다. 한 개인의 잘못을 나라 전체의 백성이 사죄하는 꼴은 전체주의적 시각과 다르지 않다. 자식의 죄는 부모 탓이라고 생각하고 초청장을 보낸 영화 속 주인공이나 미국 국적의 한국인의 범죄에 대해 머리 숙여 사죄하는 대한민국 어버이들이나 모두 똑같다. 젓가락 두 짝은 똑같은 법이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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