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 질문에 대답할 것.

 

 

 

 

 

 

 

 

 

 

 

 

 

 

대한민국의 주류는 꼰대'다. 꼰대의 형성이란 곧 쪽수의 승리'를 의미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자면 50대 경상도 남자'가 꼰대의 표준이라 할 만하다. 경상도'라는 지역감정을 건드리려는 의도는 없다. 꼰대의 분포 중 50대 경상도 남자'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렇다. 꼰대'를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 갑 > 이다. 그리고 그 변방은 < 을 > 이다. 우석훈, 박권일의 공저 < 88만원세대 > 는 암울한 을의 디스토피아'를 다룬다. 21세기 을의 인생 그래프'는 정해져 있다. 대한민국은 갑돌이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승자독식의 사회'이다. 이러한 불균형은 문학판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강준만, 권성우 공저의 < 문학권력 > 은 몇몇 최상위 갑돌이들은 시인과 교수와 비평가 그리고 문학계의 심사위원을 겸직하는 사태를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1타 4피'다. 가진 놈이 다 가지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한국 사회의 갑 중의 갑'은 당연히 삼성이다. 삼성은 국가 위에 군림하는 것처럼 보인다.

 

 

 

 


 

 

 

달콤한 인생.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기자의 인터뷰는 경찰서로 연행되는 연쇄살인범에게 던진 < 소감 한 마디 ? > 라는 요청이다. 지금 이 순간에 드는 느낌이 무엇이냐는 질문인데 살인범 입장에서는 “ 정신없다 ! ” 가 정답일 것이다. 앞날은 캄캄하지, 경찰서 앞에 진을 친 카메라의 후레쉬벌브는 대낮처럼 펑펑 쏘아대지, 질문은 속사포처럼 쏟아지지 ! 그렇다고 “ 정신이 하나도 없군요. ” 라고 말하면 그놈 또한 정신없는 놈‘이다. 질문이 거지같으니 답변도 거지같을 수밖에 없다. 우문에는 우답이 정답이다. 물론 이런 우문에 현답이 나오기도 하지만 어지간한 달변의 경지가 아니고서는 그따구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수상 소감도 아니고 수감 소감에 대한 한 마디라니 !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질문이 거지같으면 답변도 거지같이 말하면 되지만, 세상이란 심하게 불평등한 사회가 아니었던가 ? 질문자가 갑‘이고 답변자가 을‘인 경우는 상황이 다르게 전개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우문에 현답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그게 그렇게 논술고사’처럼 술술 나오는 것이 아니다. 주로 이런 어처구니없는 질문들이 쏟아져 나오는 곳은 바로 면접’이다. 면접관은 갑이요, 응시자는 을‘이다.

 

사실은 가장 어처구니없고, 황당하며, 거지같은 인터뷰이지만, 그동안 우리가 너무나 당연시한 인터뷰‘가 바로 < 입사지원동기 > 를 묻는 질문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하나다. 그냥 < 먹고 살기 위해서다. > 특수 분야의 특성화 직업군이라면 모를까, 단순 사무직과 서비스업 그리고 제조업이 전부인 마당에 무슨 거창한 포부가 있을 리 없다. 그냥, 먹고 살기 위해서 우리는 이력서‘를 제출한다. 번듯한 직업이라도 있어야 결혼이라도 할 것이 아닌가 ?


그런데 입사 지원 동기‘를 묻는 면접관은 마치 자기네 회사가 지구를 지키기 위한 < 마징가 제트 복원 프로젝트 주식회사 > 인 줄 착각한다. 꼴랑 만드는 거라고는 오고가는말대답 서비스 제공으로 중계료나 받아먹는 손전화기 제조 공장 공장장이면서 말이다. 손전화기가 지구를 지키던가 ?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진지하게 지원 동기’를 묻는다. 만약에 정직한 지원자가 < 입에 풀칠이나 하려고 > 라고 했다가는 100 % 그 사람은 탈락된다. 어쩌면 당신은 손 전화기 제조 공장 사장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할 지도 모른다.


울화통이 치미지만 갑과 을의 관계이니 어쩔 수 없다. 을은 갑을 위해서 거창한 지원 동기‘를 말해야 한다.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중흥을 위해서 손 전화 톡톡 공장에서 청춘을 바치겠노라고 말한다. 나아가 안으로는 자주 독립을 확립하고 밖으로는 민주 번영을 위해서 연봉 3400에 올인 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솔직하게 말하자. 면접관도 지원자도 이 말이 모두 뻥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지원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일 확률이 100% 다. 우리는 그냥 빌어먹지 않고 벌어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 생활을 하는 것이다. 면접관들은 그 사실을 정녕 모르는 것일까 ?

 

김지운 감독의 < 달콤한 인생 > 은 바로 질문과 답변에 대한 이야기다. 보스와 부하의 관계에서 질문은 오직 보스‘ 만이 할 수 있다. 그래서 종종 느와르 영화 속 보스들은 하나같이 같은 대사를 친다. “ 질문은 내가 한다 ! ” 그리고 묻는 질문에 부하는 답변을 해야 한다. 만약에 보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부하의 목숨은 위태로워진다. 그러니깐 영화 < 달콤한 인생 > 에서 보스와 부하의 관계는 질문하는 스핑크스와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나그네의 관계와 유사하다.

 

답변이 궁하면 목숨을 내놓아야 한다. 그게 바로 장르의 법칙이다. 부하인 이병헌‘은 보스인 이영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거된다. 억울하지만 갑은 을을 뽑지 않을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닌가 ! 사실 권리’라고 말했으나 그것은 권리가 아니라 권력’이다. 질문이란 본질적으로 권력행사인 셈이다. 질문이 아무리 병신 같고, 거지같고, 거지발싸개 같고, 개미 똥구멍 같아도 갑의 질문‘은 당신을 < fire ! / 해고 > 할 수 있다. 잘 빠진 권총은 보스가 가지고 있다. 탕, 탕, 탕

 

하지만 당하고만 있을 이병헌이 아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부하‘는 절치부심, 복수의 칼날을 간다. 그리고는 아버지 / 보스 / 상사 / 면접관’을 찾아간다. 시나리오가 그렇게 진행되었으므로 1 대 100의 싸움에서 승리한 이병헌의 놀라운 생명력‘을 욕하지 마라. 캐릭터의 운명이란 감독에게 달려있으니깐 말이다. 이젠 상황이 역전이 되었다. 단 하나의 권총은 이병헌 몫이다. 갑과 을의 관계’가 역전된 것이다. 갑이란 권총을 가진 자'다.

 

이제 질문은 이병헌이 하고, 답변은 보스가 한다. 이로서 보스만이 질문을 던진다는 룰은 깨졌다. 부하가 질문한다. “ 왜 그랬나요 ? ” 보스는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갑은 부하이고, 을은 보스다. 갑은 응시자고, 을은 면접관이다. 사실 “ 왜 그랬나요 ? ” 는 그전에 보스가 부하에게 던진 질문 “ 왜 그랬어 ? ” 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부하는 똑같은 질문을 보스에게 던지는 것이다. 응시자가 면접관에서 입사 지원 동기‘를 묻는다. 보스가 잠시 망설인다. " 국가와 민족의 역사적 중흥을 먼저 이야기해야 하는가 ? " 아니면 " 안으로는 자주 독립을 그리고 밖으로는 민주 번영’을 ! " 이라는 말을 먼저 해야 하는가. 머뭇거리는 사이 이병헌은 fire 라고 말한다. 탕, 탕, 탕 !

 

보스와 부하 두 사람의 질문은 모두 잘못된 질문이다. 왜냐하면 질문은 무기'가 아니라 대화/소통하기 위한 전 단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총을 들고 상대방에게 윽박지른다. 자신을 죽이려고 한 보스에게 부하가 진지하게 묻는다. " 말해봐요. 정말 날 죽이려고 했나요 ? " 하지만 이 질문 / 수수께끼'에 대한 답을 말한다고 해서 목숨을 구할 방법은 없다. 보스는 예스'라고 답해도 죽고, 노'라고 말해도 죽는다. 그리고 말을 안 해도 죽는다.

 

yes 라고 말하는 순간 보스는 자신을 죽이려한 사람이 되기에 죽어 마땅하고, no라고 말하는 순간 보스는 거짓말쟁이가 되며, 침묵은 해답을 제시하지 않았음으로 살 자격이 없다. 부하는 보스에게 이미 결정이 난 상태에서 질문을 던진 것 뿐이다. 그 역도 마찬가지다. 보스가 부하에게 질문을 던지는 순간 그는 더이상 부하의 답변을 듣고 싶은 것이 아니다. 사형 절차를 진행하기 위한 과정일 뿐이다. 이들의 질문은 이렇듯 일방통행이다.

 

균형 잡힌 사회‘는 질문과 답변이 5 대 5인 사회이다. 이 비율이 7 대 3'이 되는 사회는 불통의 사회이며, 3 대 7 사회'는 분열된 사회이다. 그리고 질문은 갑이 을에게 하달하는 방식보다는 을이 갑에게 질문하는 방식이 민주적인 것이다. 소통이란 < 갑이 을에게 > 가 아니라 < 을이 갑에게 > 할 때 건강해지는 법이깐 말이다. 그러므로 질문을 갑이 독점하는 사회’는 폭력적인 사회이다.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계급이라는 이름의 총을 버려야 한다.

 

권위 있는 대학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 있느냐, 고 물을 때 청중이 답변하지 않는 이유는 멍청해서가 아니라 질문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질문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도 않은 채 질문 있느냐고 말한다. 뻔히 알고 있으면서 말이다. 대한민국 사회는 재치있게 답변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드럽게 질문하는 방법도 가르쳐주지 않은 사회' 다. 이런 사회에서 소통이란 있을 수 없다. 명심할 것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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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orte 2013-06-10 0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통의 사회와 불통의 사회, 분열의 사회를 나누는 정의가 절묘하군요. 진하게 공감하여 공감버튼 꾸욱 누르고 갑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3-06-10 04:53   좋아요 0 | URL
소통과 불통과 분열이라... 오히려 포르테 님 정의가 간결하니 좋습니다. 방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