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돈 벌어서 소고기 사 묵겠지  :













우리의 식욕은 유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소비자'다.  또한 소비 행위는 어떤 식으로든 " 정치적 ㅡ " 이기에 소비 행위가 곧 정치 행위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좋은 소비란 무엇일까 ?  친환경 상품이나 공정 무역 상품을 이용하는 것 ?! 아마도 착한 소비에 대한 최선의 윤리적 태도는 죄책감일 것이다. 


예를 들면  :  착한 소비는 내가 입은 구스다운 한 벌이 살아 있는 거위 20마리의 깃털을 산 채로 뜯어서 만든 결과라는 사실, 한 번 뽑힌 거위는 깃털이 다시 자랄 때까지 죽음에 가까운 트라우마 속에서 살다가 다시 뽑힌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한 평생을 살다가 깃털 하나 없는 몸으로 죽는다는 사실에 괴로움을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털이 뽑힌 경험이 있는 거위는 다시 뽑혀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다리를 부들부들 떤다고 한다). 성대가 퇴화한 토끼가 유일하게 비명을 지르는 경우가 있는데 바로 털이 뽑힐 때라고 한다. 털이 달린 짐승에게 털이 뽑히는 고통은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고통 그 이상이다. 


개고기를 먹지만 구스다운을 입지 않는 소비자와 개고기를 먹지 않지만 유행 따라 해마다 구스다운을 구매하는 소비자 가운데 누가 더 잔인할까 ? 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후자의 경우에 손을 들 것이다. 그해 유행하는 구스다운 입고 개 식용 반대 피켓을 든 모습은 이율배반적 태도다. 그리고 친환경 정책을 주요 정강 정책으로 삼은 녹색당 당원(혹은 환경주의자)들이 삼겹살 파티를 즐기는 것도 구스다운을 입고 개 식용 반대 푯말을 든 것만큼 이율배반적이다. 온실가스의 주범인 메탄가스는 인간이 맛있는 육식을 얻기 위해 키우는 가축의 날숨(과 방귀)에서 


발생하는데 전 세계 메탄가스의 40%, 그리고 2050년에는 70%를 차지한다고 한다. 돈 벌어서 뭐 하노. 소고기 사 묵겠지 _ 라는 어느 개그맨의 농담이 이제는 기후 변화의 주범이 되었으니 < 웃겨주다 > 가 < 웃겨죽다 > 가 될 판이다. 기후 변화 위기 시대에 있어서 진정한 정크푸드는 스테이크다.  온실가스를 가장 효율적으로 줄일 수 있는 방법은 매우 간단하다.  소 중심의 가축 수를 줄이는 것이다1). 사람들이 채식주의 식단으로 상을 차리면 온실가스는 63%나 줄어들고 온실가스를 줄이기 위해 사용되는 비용을 1조 달러나 절감할 수 있다는 보고가 있다.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 중언부언하자면 기후 변화 위기에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쉽다. 


채식 중심으로 식단을 차리는 것이다. 그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이제 채식은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의 위기를 막을 유일한 대안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과격하게 말하자면 고기를 씹을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는 것. 고기를 보면서 침이 고일 때, 그 식욕이 기후 변화의 주범이었다는 사실을 각인하는 것이야말로 지속 가능한 지구를 위해 소비자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윤리적 소비의 첫걸음이다.  이 글이 당신에게 완전 채식을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육식을 별식이 아닌 주식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점은 분명하다. 지구가 불덩이처럼 들끓는 시대에 있어서 당신의 식욕은 어떤 식으로든 유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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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젖소는 1년에 한 마리당 3.398톤(이산화탄소로 환산한 양)의 메탄가스를 배출하고 있다. 이는 돼지 0.128톤과 닭 0.003톤에 비하면 대규모라고 할 수 있다. 전 세계에서 사육되고 있는 가축 소는 약 13억 마리로 추정되는데, 이를 모두 합치면 전 세계 소가 1년에 메탄가스 1억톤을 배출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전 세계 메탄가스 배출량의 1/4(25%)에 해당한다. 소 외에 양이나 염소 등 모든 가축들이 발생시키는 메탄가스까지 모두 합치면 전 세계 메탄가스 배출량의 1/3(37%)를 웃돈다. 더욱이 문제는 메탄가스가 이산화탄소보다 열을 잡아 가두는 능력이 21배나 높다는 데 있다. 전 세계가 힘을 모아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달성해야 될 입장에서 보자면 메탄가스를 줄이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중요하다. 현재 전 세계 가축 사육 두수는 약 600억 마리 정도인데 이는 2015년보다 그 수가 15.9% 나 증가한 수치이다. 현대인의 식습관이 육식 위주로 급변한 까닭이다. 이와 같은 추세라면 2050년에는 지금보다 2배나 높은 1천200억 마리로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세계 메탄가스의 약 70%이다. 명백하다, 온실가스의 주범은 육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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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소 설 이 냐,  자 소 서 냐  :











날 것과 익힌 것













1. 인간은 모두 그런 사람들


내 정체성이 궁금하여 여러 차례 테스트를 한 결과, 아나키스트이며 INTP이고 염세주의자'라는 결과가 나왔다. 염세주의'라기보다는 염인(:인간을 혐오함)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박원순 사태 때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박원순은 절대 " 그런 사람이 아니다 ! " 라고 현실을 부정했을 때 나는 시니컬한 태도로 지켜보곤 했다. " 바보들. 인간은 모두 그런 사람들이야, 멍충이들아 ! "








2. 외롭고 높고 쓸쓸한


안도현 시집 << 외롭고 높고 쓸쓸한 >> 이라는 제목을 보면서, 나는 안도현이 조금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시집 제목은 백석의 < 흰 바람벽이 있어 > 에 나오는 문장으로 "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 에서 " 가난한 " 을 지운 것이다. 그는 왜 하필 '가난하다'는 정치계급적 소외의 문제를 삭제한 것일까 ?  바로 그 점이 안도현의 한계이다. 내가 안도현의 < 외롭고 높고 쓸쓸한 > 이라는 문장에서 느끼는 것은 배부른 자의 낭만적 사치 혹은 서정성의 과소비로 보는 까닭이다. < 외롭고 높고 쓸쓸한 > 과 <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 것의 차이는 간단한 첨삭의 문제가 아니다. 








3. 한 수 위 


김봉곤 사태가 전입가경이다. 젊은작가상 수상집에 수록된 단편 << 그런생활 >> 에서 시작된 논란이 단편집 << 여름, 스피드 >> 로 옮겨붙었다. 소비자들은 고무신 거꾸로 신겠다며 절독을 선언하고,  출판사는 불난 집 불구경 하며 전봇대에 오줌을 누다가 발등에 불이 떨어져 당혹스러운 처지가 되었다. 고추를 털자니 발등이 뜨겁고 발등을 털자니 오줌이 흩뿌려지니, 이게 뭐하는 거니 ?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될 문제라고 선을 그었던, 팝콘각 하던 출판사들은 이제서야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한발 물러나는 모양새'다.  그동안 재현의 윤리성 문제는 많은 이들이 지적했으니 내가 이 자리에서 굳이 부언하지 않겠다. 내가 정말 궁금한 것은 이번 논란은 논외로 하더라도 << 그런 생활 >> 이라는 단편이 과연 문학성을 갖춘 작품이냐는 것이다.  << 그런 생활 >> 의 문장은 문학이 아니라 DM(direct message) 에 불과하다. 내가 보기엔 이 소설은 사소설(오토픽션)을 쓰려다가 자소설(자소서)로 빠진 경우다. 이 작품에 후한 점수를 준 젊은작가상 심사위원의 수준이 궁금하다.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미운 법이라 했던가 ?  문학동네 출판사가 문학동네에서 편집자로 일하는 자사 직원에게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는 뻔뻔함은 작가의 뻔뻔함보다 한 수 위'다. " 문학동네여 !  밥은 먹고...... 다니냐 ? " 









4. 날 것과 익힌 것

요리란 날 것을 익히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는 고르기, 씻기, 다듬기, 숙성하기와 같은 손질이 필요하다. 이 과정을 거치다 보면 부피는 절반으로 줄어든다. 문학은 요리와 같다. 문장에 맞는 적확한 단어를 고르고, 씻기고, 다듬고 숙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좋은 문학이 탄생한다. 김봉곤이 지인의 카카오톡 DM을 토씨 하나 고치지 않고 복붙하는 것은 밭에서 갓 뽑은 파를 접시 위에 올려놓고는 요리라고 우기는 꼴과 같다.  문학의 최소 단위는 문장인데 << 그런 생활 >> 속 실존 인물인 C누나의 카카오톡 메시지를 복붙한 원고지 10매 분량은 문장이 없다는 점에서 문학이 아니다. DM은 " 문자 " 이자 " 문장 " 이 아니지 않은가. 누군가의 촌평을 빌리자면  :  한국 작가들은 도발보다는 안전을 선택하다 보니 한국 문학에는 뉴페이스는 많은데 뉴웨이브는 없다. 그것이 한국 문학의 치명적인, 졸라, 조올라~  치명적인 단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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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곤 목에 방울 달기












                                                                                            김봉곤의 이름을 기억하기란 쉬웠다. 코미디언 김형곤과 이름이 비슷할 뿐 아니라 외모도 비슷했으니 말이다. 그의 단편소설 << 그런 생활 >> 을 도서관에서 읽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이 소설을 문학동네 출판사 판, 창작과비평 출판사 판, 문학과지성사 출판사 판 가운데 어느 책을 읽었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는 않다. 하여튼...... 읽었다 !  


도서관에서 고른 수많은 책에서 이 단편을 선택한 이유는 읽기 쉬운 문장으로 구성된 소설이었기 때문이었다. 도서관이라는 곳이 시간적 제한이 걸린 곳이기도 하거니와 개인적으로 밑줄을 그으며 책을 읽지 않으면 똥을 싸고 나서 밑을 안 닦고 나온 느낌이 들어서 도서관에서 책을 읽을 때에는 주로 단편 위주로 휘뚜루마뚜루 읽게 된다. 이 작품을 처음 읽고 나서 들었던 생각은 " 날것 " 이었다.  좋게 말하면 재료 본연의 맛이었고 나쁘게 말하자면 사자가 사슴의 목덜미를 뜯어낼 때 나는 맛이었다. 접시 위에 핏물이 줄줄 흐르는 살덩이 앞에서 나는 당황스러웠다. 이것은 재료인가 요리인가 !    


문학이란 " 날것을 익힌 것으로 요리하는 과정 " 이라고 믿는 내게 이 작품은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쓴1), 퇴고 없이 내놓은 초고처럼 보였다. 러프 컷( : 촬영을 막 끝내고 아직 편집하지 않은 필름)을 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  명색이 문학동네 편집자인 김봉곤이 편집 과정 없이 내놓은 러프 컷을 보면서 나는 터프하게 욕지기를 내뱉었다.  러프 컷을 파이널 컷으로 인정하여 그것을 그대로 극장에 거는 감독은 없다는 점을 감안하면 초고를 퇴고 없이 내놓은 용기는 만용'처럼 보였다. 이 작품이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수상하다. 


뭐,   김봉곤이 문학동네 편집자'라는 사실을 콕 짚어서 음모론을 제기하는 것은 아닙니다만...... 주류 문학으로 밥 먹고 사는 사람 중에 문학동네에 뺨따귀 날릴 사람 누가 있을까(더군다나 < 그런 생활 > 은 문학동네,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이라는 메이저 3대 출판사와 밀접한 관련이 된 작품이다)?  호기롭게 뺨따귀 날렸다가는 개뼉따귀로 몽둥이 찜질 당하기 좋으니 아가리 닥치고 있는 중이다. 김봉곤 논란에서 피해자의 손을 들어준 작가는 김초엽이 유일하다(장류진도 합류한 모양이다). 


작년에 소설가 윤이형이 이상문학상의 불공정 관행(수상작 저작권을 3년간 양도하고 작가 개인 단편집에 실을 때도 표제작으로 내세울 수 없다'는 주최 측 문학사상사 요구)에 항의하며 절필 선언을 했을 때 많은 동료 작가들이 뜨거운 동료애를 보인 것과는 사뭇 다르다. 거칠게 말하자면 문인들은 남의 밥그릇(c누나는 결국 퇴사를 결정했다는 후문)에는 관심이 없지만 나의 밥그릇(수상작 저작권 양도 문제)에는 졸라 예민한 것이다. 하긴 권희철과 신형철이라는 쌍철 보유국인 문학동네를 건드리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백 번 양보해서 이 작품이 훌륭하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문제는 달라지지 않는다. 띵언 제조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 " 좋은 음식이란 먹어서 좋은 것에 앞서 생각만 해도 좋은 것이어야 한다. "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은 생각만 해도 좋은 음식이 아닐 뿐더러 먹기 좋은 음식도 아니다. 








​                                   


1)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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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0-07-18 1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곰발 님!

곰곰생각하는발 2020-07-18 18:39   좋아요 0 | URL
오랜 만에 문학판에서 논란이 발생해서 관심을 조금 가졌습니다.. ㅎㅎ

라로 2020-07-19 02:20   좋아요 0 | URL
제게는 따뜻한 관심을 좀 가져주세요~~~.^^;;

곰곰생각하는발 2020-07-19 11:22   좋아요 0 | URL
ㅋㅋㅋ 네. 따뜻한 관심 ~
 

















                              


아그야,  오함마 갖그 와라잉 :












김봉곤의 그렇고 그런 생활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을 " 그렇고 그런 생활 소설 " 정도로 읽어서 내가 이 소설에 대해 내놓을 촌평도 " 그저 그렇고 그런 단편소설 " 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파스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쓴다고 말했는데 젊은작가상 수상 작가이자 한국 문단의 떠오르는 샛별에게 충고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문학은 날것을 요리해서 익힌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믿는 내게 이 작품은 " 솔직하다 " 는 감상보다는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아서 " 번잡하다 " 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내가 기록한 20자평은 아하, 그저 그렇고 그랬던 그 소설 !   


한국의 현대 소설, 정확히 기술하자면 한국의 순문학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유는 " 그들만의 리그 " 라는 반감이 크게 작용한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소설은 < 잰더 트러블 > 은 집요하게 파고드는데 < 계급 트러블 > 은 실종되었다.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는 삽질의 정석은 온데간데없고 잰더와 계급은 서로 따로 놀고 있다. 나는 현대 한국 문학이 깊게 파는 것인지 아니면 넓게 파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분명한 것은 넓게 파기 위해서 깊게 파고들지는 못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논란에서 중요한 것은 C누나와 김봉곤의 잰더 갈등(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특정 계급의 플랫폼 독점에 있다. 김봉곤은 현재 문학동네 출판사 편집자'다. 그러니까 편집자이자 작가인 셈이다. 문제는 김봉곤이 수상한 젊은작가상이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재정한 문학상이라는 데 있다.  문학동네는 문학동네에서 편집 노동자로 일하는 직원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로 선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내 백일장 대회로 전락한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고 가재는 게 편이라지만 이런 경우는 노골적인 이해 충돌 방지 위반'이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닐까 ? 


한국 문단은 뻔뻔하게도 이 점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 민화의 윤리적 강박성과 정치적 투쟁성을 적용하면 독자를 빙다리 핫바지로 보는 태도'다. 한국 민화 협회장 아귀의 명대사를 빌리자면 "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 소설 쓰고 있네. 미친새끼가..... 소설 재미 없으면 손모가지 날아가 붕게. 아그야, 모하냐. 싸게싸게 오함마 갖그 와라잉 ! " 나는 이 문제를 놓고 문학평론가들이 유감을 표명한 적을 본 적이 없고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논란을 다룬 그 어느 기사도 이 점을 부각한 언론사가 없다는 점에 의아하다.  문학동네가 문학동네 직원을 자랑스러운 문학인으로 선정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자랑스런 대한민국 시민상을 재정해서 이낙연을 대한민국 시민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내가 알고 있는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작가만 해도 김서윤, 정세랑, 김민정, 정영수가 있다). 이제는 출판사가 플랫폼의 소유주가 되어서 유저를 키우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한국 문단은 페어플레이 정신이 실종된 집단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좋은 작품이 탄생할 리 없다. 



■ 덧대기

단편의 미학은 " 압축미 " 에 있다.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이 압도적인 이유도 정교한 압축에 있다. 그래서 좋은 단편은 웅크린 스프링과 같아서 다 읽고 나면 긴장에서 오는 좋은 스트레스와 그 긴장이 해소될 때 발생하는 사유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김봉곤의 단편은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그의 단편에는 긴장도 없고 해소도 없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늘어뜨린 느낌이다. 파스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짧게 쓸 시간이 부족해서 길게 쓴다잉 ! "  파스칼의 명제는 이 세상 모든 편집자의 기본 상식이 아닐까 ?  더군다나 명색이 편집자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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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맨 2020-07-18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작가의 창작방법인 오토픽션(저자와 작품 속 인물이 동일한 이름의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저자 자신의 삶을 문학적으로 서사화하는 창작 방법)에 대해서 얼마 전부터 의심을 품어 왔습니다. ˝여름 스피드˝라는 단편집을 읽었던 적이 있는데 다 읽고 나서는 약간의 감탄(실제 성소수자의 삶을 보여주기)이 나오다가도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이런 기법으로 첫 단편집을 엮는 것은 좋다, 그런데 다음에는 어떤 형식으로 글을 쓸 것인가, 향후 소설에도 이 기법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적어도 내용물은 좀 달라야 하지 않나.‘

엄밀한 의미에서의 오토 픽션 작가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와 비슷한 창작방법을 보여주는 작가가 저는 찰스 부코스키라고 봅니다. 언뜻 부코스키는 자신의 일상사만 지겹게 우려쓰는 작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만 각각의 작품들을 보면 저마다 차별성을 가지고 있지요. 팩토텀(부랑자의 삶), 우체국(정규직 노동자의 삶), 여자들(여성 편력사), 호밀빵 햄 샌드위치(유년소설), 할리우드(영화제작기) 등등 이 사람은 똑같은 소재만 쓰는 것 같으면서도 내부적으로 들여다보면 그 결이 새삼 다릅니다. 물론 그 자신이 진창과 같은 삶을 살아왔기에 저렇게 다양한 내용을 소설로 쓸 수 있었던 것이겠지요.

저간의 사정을 돌이켜보면서 느꼈던 점은 이 작가가 창작 방법의 변화를 도모할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 그렇다고 내용물을 크게 바꾸는 데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소수자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자신의 삶(출판사 편집자의 일상사)을 계속 종이에 옮겨쓰기에만 골몰했다는 인상마저 듭니다. 이런 인식과 태도의 안이함이 결국에는 타인에게 크나큰 피해를 주면서, 자기 소설의 작품성까지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고 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7-18 18:38   좋아요 0 | URL
성소수자 작가의 오토픽션은 위험한 거 아니겠습니까 ?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이 아웃팅 당할 위험도 높고 말이죠. 자신이야 커밍아웃했으니 상관없겠지만 다른 사람은 그게 아닌데......

전 이 단편 읽으면서 자꾸 파스칼의 편지 내용이 생각나더군요.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쓴다. 미안하다, 친구야.. 뭐,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ㅎㅎㅎㅎㅎ
 




​                            


마침표 없는 문장의 끝   :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1)










                                                                                               남자는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잘났다고 믿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못났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성차에 따른 차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거쳐 학습된 결과'다.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세뇌된 결과'에 가깝다. 


남자는 " 부풀리기 - 모방 " 교육을 통해 남성다움을 배우고,  여자는 " 축소하기 - 모방 " 교육을 통해 여성다움을 배운다. < 쩍벌남 > 과 < 다꼬녀 > 도 결국은 부풀리기 모방 교육과 축소하기 모방 교육의 과잉 결과인 셈이다( 남자들이 헬스 운동에 전념하고 여자는 다이어트 운동에 열심인 이유도 사회적 요구에 순응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남성-몸은 팽창해야 미학적 가치를 얻고 여성은 여성-몸을 축소해야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당연히 여성은 남성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남성은 잘못을 저질러도 당당한 편이다. 


더군다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일수록 그 도끼병이 심하다. 그들은 성적 매력을 상실한 나이인데도 여전히 자신이 젊은 여성에게 매력 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안희정이 그런 부류의 남성'이다. 박원순의 자살 사건을 두고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쌍팔련도에서나 사용했을 법한 " 채홍사 " 와 " 관노 " 라는 단어가 타임라인을 장악하고 있다. 한쪽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들어 상대방이 박원순을 가해자라고 단정하는 일에 대해 화랠 내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 중심주의 입장에서 박원순에 대한 애도 행위가 2차 가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어느 쪽에 손을 들어야 할까 ?   내가 보기엔 둘 다 맞고, 동시에 둘 다 틀리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한다는 것은 반헌법적 태도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피해자 경험의 독점적 해석과 무조건적 지지하는 것 또한 중립적 판단 위반이다(예 : 10대 청소년 두 명이 학원 교사를 성폭행으로 고소한 사건이 발생했었는데 재판 과정에서 10대 청소년의 위증이 밝혀졌다)하지만 무죄 추정의 원칙은 쌍방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성립할 뿐이지  명확한 증거(물증 혹은 자백) 앞에서는 다툼이 무의미하다. 박원순의 자살은 박원순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피해를 호소한 고소인의 주장이 맞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증거가 되었다.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는,  일종의 자백 없는 자백처럼 보인다.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주어도 아니도 술어도 아니고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마침표다.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했다 한들 마침표가 없는 문장은 완성된 문장이 아니다. 박원순이 작성한 문장도 마찬가지'다. 그가 쓴 문장에서 빠진 것은 마침표'다. 마침표 없는 문장은 완성된 문장이 될 수 없다. 애도는 끝났고, 이제는 자비 없이 말하련다. 박원순의 문장은 잘못된 문장이다. 











​                             


1) 한동훈,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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