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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표 없는 문장의 끝   :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1)










                                                                                               남자는 거울을 들여다보면 자신이 잘났다고 믿는 경향이 있고, 여자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이 못났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전자는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것이고 후자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성차에 따른 차이'라기보다는 오랜 세월을 거쳐 학습된 결과'다. 보다 정확하게 기술하자면 세뇌된 결과'에 가깝다. 


남자는 " 부풀리기 - 모방 " 교육을 통해 남성다움을 배우고,  여자는 " 축소하기 - 모방 " 교육을 통해 여성다움을 배운다. < 쩍벌남 > 과 < 다꼬녀 > 도 결국은 부풀리기 모방 교육과 축소하기 모방 교육의 과잉 결과인 셈이다( 남자들이 헬스 운동에 전념하고 여자는 다이어트 운동에 열심인 이유도 사회적 요구에 순응한 결과라 할 수 있다. 남성-몸은 팽창해야 미학적 가치를 얻고 여성은 여성-몸을 축소해야 높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당연히 여성은 남성보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남성은 잘못을 저질러도 당당한 편이다. 


더군다나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일수록 그 도끼병이 심하다. 그들은 성적 매력을 상실한 나이인데도 여전히 자신이 젊은 여성에게 매력 있는 존재라고 믿는다. 안희정이 그런 부류의 남성'이다. 박원순의 자살 사건을 두고 억측이 난무하고 있다. 쌍팔련도에서나 사용했을 법한 " 채홍사 " 와 " 관노 " 라는 단어가 타임라인을 장악하고 있다. 한쪽은 무죄 추정의 원칙을 들어 상대방이 박원순을 가해자라고 단정하는 일에 대해 화랠 내고 다른 한쪽은 피해자 중심주의 입장에서 박원순에 대한 애도 행위가 2차 가해'라는 입장을 고수한다. 어느 쪽에 손을 들어야 할까 ?   내가 보기엔 둘 다 맞고, 동시에 둘 다 틀리다. 


무죄 추정의 원칙을 무시한다는 것은 반헌법적 태도이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피해자 경험의 독점적 해석과 무조건적 지지하는 것 또한 중립적 판단 위반이다(예 : 10대 청소년 두 명이 학원 교사를 성폭행으로 고소한 사건이 발생했었는데 재판 과정에서 10대 청소년의 위증이 밝혀졌다)하지만 무죄 추정의 원칙은 쌍방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할 때  성립할 뿐이지  명확한 증거(물증 혹은 자백) 앞에서는 다툼이 무의미하다. 박원순의 자살은 박원순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피해를 호소한 고소인의 주장이 맞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증거가 되었다. 


스스로 유죄를 인정하는,  일종의 자백 없는 자백처럼 보인다. 한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주어도 아니도 술어도 아니고 명사도 동사도 아니다. 마침표다. 아무리 아름다운 문장을 구사했다 한들 마침표가 없는 문장은 완성된 문장이 아니다. 박원순이 작성한 문장도 마찬가지'다. 그가 쓴 문장에서 빠진 것은 마침표'다. 마침표 없는 문장은 완성된 문장이 될 수 없다. 애도는 끝났고, 이제는 자비 없이 말하련다. 박원순의 문장은 잘못된 문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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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동훈, 이 소설의 끝을 다시 써보려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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