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그야, 오함마 갖그 와라잉 :
김봉곤의 그렇고 그런 생활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을 " 그렇고 그런 생활 소설 " 정도로 읽어서 내가 이 소설에 대해 내놓을 촌평도 " 그저 그렇고 그런 단편소설 " 의 범위를 넘지 못한다. 파스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짧게 쓸 시간이 없어서 길게 쓴다고 말했는데 젊은작가상 수상 작가이자 한국 문단의 떠오르는 샛별에게 충고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문학은 날것을 요리해서 익힌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라고 믿는 내게 이 작품은 " 솔직하다 " 는 감상보다는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많아서 " 번잡하다 " 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내가 기록한 20자평은 아하, 그저 그렇고 그랬던 그 소설 !
한국의 현대 소설, 정확히 기술하자면 한국의 순문학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유는 " 그들만의 리그 " 라는 반감이 크게 작용한 탓이다. 언제부터인가 한국 소설은 < 잰더 트러블 > 은 집요하게 파고드는데 < 계급 트러블 > 은 실종되었다. 깊게 파기 위해서는 넓게 파야 한다는 삽질의 정석은 온데간데없고 잰더와 계급은 서로 따로 놀고 있다. 나는 현대 한국 문학이 깊게 파는 것인지 아니면 넓게 파는 것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분명한 것은 넓게 파기 위해서 깊게 파고들지는 못한다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논란에서 중요한 것은 C누나와 김봉곤의 잰더 갈등(문제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는 특정 계급의 플랫폼 독점에 있다. 김봉곤은 현재 문학동네 출판사 편집자'다. 그러니까 편집자이자 작가인 셈이다. 문제는 김봉곤이 수상한 젊은작가상이 출판사 문학동네에서 재정한 문학상이라는 데 있다. 문학동네는 문학동네에서 편집 노동자로 일하는 직원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젊은 작가로 선정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내 백일장 대회로 전락한 것이다. 팔은 안으로 굽고 가재는 게 편이라지만 이런 경우는 노골적인 이해 충돌 방지 위반'이요,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닐까 ?
한국 문단은 뻔뻔하게도 이 점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한국 민화의 윤리적 강박성과 정치적 투쟁성을 적용하면 독자를 빙다리 핫바지로 보는 태도'다. 한국 민화 협회장 아귀의 명대사를 빌리자면 "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 소설 쓰고 있네. 미친새끼가..... 소설 재미 없으면 손모가지 날아가 붕게. 아그야, 모하냐. 싸게싸게 오함마 갖그 와라잉 ! " 나는 이 문제를 놓고 문학평론가들이 유감을 표명한 적을 본 적이 없고 김봉곤의 << 그런 생활 >> 논란을 다룬 그 어느 기사도 이 점을 부각한 언론사가 없다는 점에 의아하다. 문학동네가 문학동네 직원을 자랑스러운 문학인으로 선정한 것은
문재인 정부가 자랑스런 대한민국 시민상을 재정해서 이낙연을 대한민국 시민상 수상자로 선정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내가 알고 있는 출판사 편집자 출신의 작가만 해도 김서윤, 정세랑, 김민정, 정영수가 있다). 이제는 출판사가 플랫폼의 소유주가 되어서 유저를 키우고 있는 중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한국 문단은 페어플레이 정신이 실종된 집단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좋은 작품이 탄생할 리 없다.
■ 덧대기
단편의 미학은 " 압축미 " 에 있다. 레이몬드 카버의 단편이 압도적인 이유도 정교한 압축에 있다. 그래서 좋은 단편은 웅크린 스프링과 같아서 다 읽고 나면 긴장에서 오는 좋은 스트레스와 그 긴장이 해소될 때 발생하는 사유의 확장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김봉곤의 단편은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너무 많다. 그의 단편에는 긴장도 없고 해소도 없다. 쓸데없는 군더더기를 늘어뜨린 느낌이다. 파스칼은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짧게 쓸 시간이 부족해서 길게 쓴다잉 ! " 파스칼의 명제는 이 세상 모든 편집자의 기본 상식이 아닐까 ? 더군다나 명색이 편집자인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