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끗하고 밝은 곳 쏜살 문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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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뱅이 클럽


젊은 웨이터가 그에게 다가갔다. " 뭘 갖다 드릴까요? " 노인은 웨이터를 쳐다보았다. " 브랜디 한 잔 더. " " 취하실 텐데요. " 웨이터가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그를 쳐다보았다. 웨이터는 물러났다.


- 깨끗하고 밝은 곳,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버지는 주정뱅이였다. 학창시절 전교 부회장을 역임하셔셔셔셨던 형도 주정뱅이였다. 겉으로는 대기업에 다니는 엘리트 직원이었지만 알코올중독자여서 병가를 내고 6개월 간 알코올 치료소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술을 삼키고 있다(라고 추정된다).

난형난제, 나도 주정뱅이에 속했다.  나는 내가 주정뱅이라는 사실을 가족은 물론이고 주변인에게도 철저히 숨겨야 했다.  가족의 비극은 한 명으로 족하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공병을 가방 속에 넣고 출근을 해야 했다. 병이 부딪치는 소리를 소거하기 위해서 병 둘레에 두루마리 휴지를 감는 노하우도 발휘했다. 두루마리를 두른 술병은 용각산처럼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야 걸을 때 가방 속에서 빈병이 부딛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술병을 치울 때는 항상 긴장하게 된다.  시체를 처리하는 살인범의 마음 같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워야 한다.  하지만 완전 범죄란 없는 법.

목격자는 어디에나 있다. 내가 늘상 술병을 버리는 곳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가파른 언덕길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발목을 삐끗하면서 넘어지는 바람에 빈병이 담긴 봉투를 놓치고 말았다.  타타타타타타타. 두루마리 휴지를 두른 술병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신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고요한 아침에 시끄럽게 떠들며 굴러가는 술병 앞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늦가을에 익어가는 홍옥처럼 불콰한 얼굴이 되었다. 아, 아아아아. 이 철딱서니없는 녀석들아. 너희들은 나와는 달리 성격이 꽤나 발랄하구나.                     출근하던 사람들은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모든 정황은 내가 주정뱅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울고 싶어라. 문득, 쟈크 프레베르의 << 꽃집에서 >> 란 시가 떠올랐다. 주정뱅이는 쓰러져 넘어지고, 가방은 바닥에 떨어지고, 술병들은 굴러가고....... 이 모든 일은 매우 슬픈 일1)이다.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 그리 큰 죄를 지었다고, 쥐새끼처럼 쥐구멍에 숨어서 홀짝거린 게 전부인데, 이렇게 죄인처럼 굴어야 하는 것일까.  무전취식을 한 것도 아니요, 심신미약에 따른 폭력을 휘두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처럼 억울한 주정뱅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여, 작은 모임 공지 하나 올린다.

방에 뒹구는 술병을 보면 슬프거나 굴러가는 술병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던 이라면 무사통과'다. 세미나 주제는 주정뱅이다. 11월 18일, 장소는 충무로다. 주정뱅이들의 참여를 독려한다. 물론, 주정뱅이가 아니어도 좋다(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해서 좋다). 참여하실 분은 비밀댓글로 남겨주시길 바란다. 나는 당신의 주정뱅이 삶을 지지한다.  



 









덧대기 ㅣ A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내게 작은 책을 선물했다. 선물 상자는 그 자리에서 풀어보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법.  책을 펼치고 몇몇 문장을 읽으려고 했으나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가게 안은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취기가 오른 나는, 더군다나 눈병을 앓고 있는 나는 읽기에 실패했다. 다음날, 맑은 정신으로 어제 실패했던 책을 읽기 시작했다.




 " 나는 늦게까지 카페에 남고 싶어.” 나이 많은 웨이터가 말했다. “ 잠들고 싶어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밤에 불빛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이야. 난 집에 가서 자고 싶어요.” 우리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군. ”  나이 많은 웨이터가 말했다. 그는 이제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젊음도 자신감도 아주 아름다운 것이긴 하지만 그것들만의 문제는 아니야. 매일 밤 가게를 닫을 때마다 어쩐지 망설이게 돼. 카페가 필요한 누군가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말이지.”

―「깨끗하고 밝은 곳」에서

이 대목에서 나는 A가 이 책을 고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 배려가 고마워서 뭉클한 감정이 들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 깨끗하고 밝은 곳 " 은 이상하게 위로를 준다.  그것은 마치 캄캄한 밤바다에서 좌표를 잃고 난파된 배가 등대로를 발견할 때의 느낌과 같다.  새벽 세 시에 불켜진 집의 창문을 볼 때마다 이 고통을 견디는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는, 그것은 일종의 연대였고 동지 의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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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yche 2017-11-12 0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독까지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 술을 아주 많이 즐겼던지라 가방안에 술병을 넣어가지고 나와서 살짝 버리던 일이 종종 있었지요. 결혼하고 한참 지난후 친정집이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동생이 제가 남기고 온 옷장을 정리하다 서랍장속에서 검은 봉다리에 담겨있던 빈맥주캔들을 발견 하기도... 아 옛날생각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1-12 13:40   좋아요 0 | URL
곧곧에 숨겨진 술병들이 많죠. 저 같은 경우는 책장 뒤에 자주 숨겼습니다.

transient-guest 2017-11-1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을 좋아하지만 이젠 나이도 있고 건강도 챙겨야 하니 일주일이 1-2번이 max입니다. control을 잃기 시작하면 문제가 되는데, 한국의 과거 조직문화랄까, 제 아버님 세대만해도 술을 달고 살았었죠. 많은 건 젊을 때 한 때의 즐김인 것 같아요. 그냥 술 이야기가 나와서 되는대로 떠들어 봤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7-11-12 13:41   좋아요 1 | URL
일주일에 한번에 최적의 마지노선이란 생각이 듭니다.
하긴 옛분들 보면 술을 안 마신 분들이 거의 없었죠.

2017-11-12 1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2 13: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표맥(漂麥) 2017-11-12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친구들은 날 보고 술꾼, 직장 동료들은 술 못먹는 샌님... 아~ 이 이중인격의 개인주의자...

곰곰생각하는발 2017-11-12 13:42   좋아요 0 | URL
꽤 건실한 이중인격이신데요. 직동료들과 마시는 술이 제일 맛이 없죠. 전 정말 지겹더라고요..

cyrus 2017-11-12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주말에 집에 혼자 있으면 반드시 혼술을 해요. 한 달에 주말 한 두번은 혼자 집 보거든요. 그래서 그날 편의점에 가서 술, 안주 잔뜩 사옵니다. 저녁에 TV 보면서 혼술해요. 다 먹고 남은 빈 술병은 방 어딘가에 숨겨요. 출근할 때 쓰레기통에 버립니다. ^^

임모르텔 2017-11-12 20:57   좋아요 0 | URL
저는 굴전이나 두부김치를 보면 막걸리를 꼭 삽니다.ㅎㅎ
이젠 연식이되었는지 막걸리 2병이상 먹으면 ,,, 헤롱되요! ^^
반주로 딱 석 잔이 좋더군요. 건강생각하여 막걸리로 먹게되었어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1-12 21:10   좋아요 0 | URL
술병은 만국공통적으로 어딘가에 숨기는군요.
과테말라 주정뱅이도, 갈라파고스 주정뱅이도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고 어딘가에 버릴 겁니다..

cyrus 2017-11-12 21:31   좋아요 0 | URL
To. 자다깬올빼미님 / 저도 소맥보다 막걸리를 마셔요. 맥주도 좋아하는데, 너무 많이 마셔서 통풍 진단을 받았어요. 또 통증 올까봐 많이 마실 수가 없어요. ㅎㅎㅎ

임모르텔 2017-11-12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대후반 조주사자격증을 땄고, 칵테일강사였었지만 칵테일은 좀 별로라~... 주정뱅이...흠 ㅡ,.ㅡ 만감이 교차합니다.전 술랭이라는 별칭이 예전에 있었어요. 럼,진.보드카.데킬라.브랜디.위스키,각종 리큐르..천차만별 술감별사였죠. 직업이..ㅎㅎ한때 왼쪽안면과 손을 떨기도! ,,, ㅎㅎ.. 지금은 돌아 온 ‘국화옆에서‘ 처럼 막걸리만 마시는 착실한 술랭이가 되었습니다. 술은 원래 약이었죠! ^^;;

곰곰생각하는발 2017-11-12 21:09   좋아요 0 | URL
술랭이.... ㅎㅎㅎㅎㅎㅎ
처음 듣는 단어인데 뭔가 알 것도 같습니다.
칵테일 강사였으니 술의 역사에 대해서는 빠삭하겠네요..

임모르텔 2017-11-12 22:14   좋아요 0 | URL
...3만가지 칵테일에 ,,,제각각 유래가 다 있어서 그것이 시험출제에도 나와요.
설명하며 가르쳐야해서 다 알았는데 까먹은 것도 많아요..ㅋㅋ
술랭이생활 수십년이면 뇌가 숙성발효되고 곰삭아서효,,ㅋ

2017-11-12 20: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2 21: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포스트잇 2017-11-15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한방울의 술도 몸이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떨까 궁금하곤 했습니다.
술자리에서 그들은 그럭저럭(죽을 맛이었겠지만요) 같이 버텨나가긴 합디다만.
술 아닌 다른 게 그 감각을 고스란히 대체할 수 있을지.. 뇌과학 쪽^^에 뭐 답이 있을라나요..

곰곰생각하는발 2017-11-16 09:06   좋아요 0 | URL
아마... 죽을 맛일 겁니다. 술자리는 술 취한 사람들만 좋은 분위기지.
업된 분위기를 술 안드시는 분은... 힘드실 겁니다..ㅎㅎ

2017-11-16 0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1-16 09: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