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정뱅이 클럽
젊은 웨이터가 그에게 다가갔다. " 뭘 갖다 드릴까요? " 노인은 웨이터를 쳐다보았다. " 브랜디 한 잔 더. " " 취하실 텐데요. " 웨이터가 말했다. 그러자 노인은 그를 쳐다보았다. 웨이터는 물러났다.
- 깨끗하고 밝은 곳, 어니스트 헤밍웨이
아버지는 주정뱅이였다. 학창시절 전교 부회장을 역임하셔셔셔셨던 형도 주정뱅이였다. 겉으로는 대기업에 다니는 엘리트 직원이었지만 알코올중독자여서 병가를 내고 6개월 간 알코올 치료소에서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술을 삼키고 있다(라고 추정된다).
난형난제, 나도 주정뱅이에 속했다. 나는 내가 주정뱅이라는 사실을 가족은 물론이고 주변인에게도 철저히 숨겨야 했다. 가족의 비극은 한 명으로 족하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공병을 가방 속에 넣고 출근을 해야 했다. 병이 부딪치는 소리를 소거하기 위해서 병 둘레에 두루마리 휴지를 감는 노하우도 발휘했다. 두루마리를 두른 술병은 용각산처럼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그래야 걸을 때 가방 속에서 빈병이 부딛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까. 술병을 치울 때는 항상 긴장하게 된다. 시체를 처리하는 살인범의 마음 같다. 쥐도 새도 모르게 해치워야 한다. 하지만 완전 범죄란 없는 법.
목격자는 어디에나 있다. 내가 늘상 술병을 버리는 곳은 집에서 조금 떨어진, 가파른 언덕길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발목을 삐끗하면서 넘어지는 바람에 빈병이 담긴 봉투를 놓치고 말았다. 타타타타타타타. 두루마리 휴지를 두른 술병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신나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고요한 아침에 시끄럽게 떠들며 굴러가는 술병 앞에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늦가을에 익어가는 홍옥처럼 불콰한 얼굴이 되었다. 아, 아아아아. 이 철딱서니없는 녀석들아. 너희들은 나와는 달리 성격이 꽤나 발랄하구나. 출근하던 사람들은 소리 나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이내 나를 쳐다보았다.
모든 정황은 내가 주정뱅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울고 싶어라. 문득, 쟈크 프레베르의 << 꽃집에서 >> 란 시가 떠올랐다. 주정뱅이는 쓰러져 넘어지고, 가방은 바닥에 떨어지고, 술병들은 굴러가고....... 이 모든 일은 매우 슬픈 일1)이다. 암, 그렇고말고. 그런데 뭔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뭐 그리 큰 죄를 지었다고, 쥐새끼처럼 쥐구멍에 숨어서 홀짝거린 게 전부인데, 이렇게 죄인처럼 굴어야 하는 것일까. 무전취식을 한 것도 아니요, 심신미약에 따른 폭력을 휘두른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처럼 억울한 주정뱅이들이 많을 것이다. 하여, 작은 모임 공지 하나 올린다.
방에 뒹구는 술병을 보면 슬프거나 굴러가는 술병을 보면서 부끄러움을 느꼈던 이라면 무사통과'다. 세미나 주제는 주정뱅이다. 11월 18일, 장소는 충무로다. 주정뱅이들의 참여를 독려한다. 물론, 주정뱅이가 아니어도 좋다(참관인 자격으로 참석해서 좋다). 참여하실 분은 비밀댓글로 남겨주시길 바란다. 나는 당신의 주정뱅이 삶을 지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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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대기 ㅣ A는 갑자기 생각난 듯 내게 작은 책을 선물했다. 선물 상자는 그 자리에서 풀어보고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는 법. 책을 펼치고 몇몇 문장을 읽으려고 했으나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다. 가게 안은 어두웠을 뿐만 아니라 취기가 오른 나는, 더군다나 눈병을 앓고 있는 나는 읽기에 실패했다. 다음날, 맑은 정신으로 어제 실패했던 책을 읽기 시작했다.
" 나는 늦게까지 카페에 남고 싶어.” 나이 많은 웨이터가 말했다. “ 잠들고 싶어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밤에 불빛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이야. ” “ 난 집에 가서 자고 싶어요.” “ 우리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군. ” 나이 많은 웨이터가 말했다. 그는 이제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젊음도 자신감도 아주 아름다운 것이긴 하지만 그것들만의 문제는 아니야. 매일 밤 가게를 닫을 때마다 어쩐지 망설이게 돼. 카페가 필요한 누군가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말이지.” ―「깨끗하고 밝은 곳」에서
" 나는 늦게까지 카페에 남고 싶어.” 나이 많은 웨이터가 말했다. “ 잠들고 싶어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밤에 불빛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말이야. ” “ 난 집에 가서 자고 싶어요.” “ 우리는 다른 종류의 인간이군. ” 나이 많은 웨이터가 말했다. 그는 이제 옷을 갈아입고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젊음도 자신감도 아주 아름다운 것이긴 하지만 그것들만의 문제는 아니야. 매일 밤 가게를 닫을 때마다 어쩐지 망설이게 돼. 카페가 필요한 누군가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말이지.”
―「깨끗하고 밝은 곳」에서
이 대목에서 나는 A가 이 책을 고른 이유를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그 배려가 고마워서 뭉클한 감정이 들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 깨끗하고 밝은 곳 " 은 이상하게 위로를 준다. 그것은 마치 캄캄한 밤바다에서 좌표를 잃고 난파된 배가 등대로를 발견할 때의 느낌과 같다. 새벽 세 시에 불켜진 집의 창문을 볼 때마다 이 고통을 견디는 이는 나뿐만이 아니라는, 그것은 일종의 연대였고 동지 의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