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을 지나며
티븨엔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는 가장 좋았던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동안 드라마는 1988년에서 1997년까지를 다뤘으니 좋은 시절은 그때였던 것 같다.
그렇다면 현재는 좋은 시절이 아니라는 계산이 나온다. 왕년에 잘나갔다는 회고담을 말하는 아저씨일수록 현실이 비루하다는 점을 감안해서 내놓은 결론이다. 성공한 사람은 오히려 왕년에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가난했던, 눈물 없이는 들을 수없는 고생담을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고 실패한 사람은 왕년에 밴츠 타구 ~ 룸살롱 가서 양주 먹구 ~ 신나게 놀던 시절을 이야기하는 법이니까. 한국인이 행복하고 넉넉했던 " 왕년에...... " 를 호명한다는 것은 곧 현실은 시궁창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후가 아닐까 싶다. 아, 옛날이여 ! 드라마 속 왕년은 고성장 사회'였다.
상고 나와서 은행에 취직하는 일은 흔한 일이었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하빠리 취급을 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다. 하빠리로 취급했던 공무원은 현재 끝발을 날리고 있는 중이다. 한국 사회는 저성장 사회로 접어들었다. 문득 저성장 사회는 실패한 현상일까 _ 라는 의문이 든다. 우리는 흔히 일본을 두고 " 잃어버린 10년 " 이라고 말하면서 일본의 저성장 사회를 실패 사례라고 지적하는데 일본의 경제 정책이 실패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일본을 비롯된 유럽이 저성장 사회로 진입한 것은 정책 실패 탓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필연적 과정이다.
추동력이 끝내준다는 대포동 미사일도 하늘을 뚫을 기세로 치솟하다 결국에는 바닥으로 떨어지듯이 성장 그래프는 항상 가파르게 상승 곡선을 그으며 치솟지 않는다. 저성장은 속도가 느릴 뿐이지 서서히 상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해야 한다. 그것은 정체도 아니고 하락도 아니다. 오히려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는 고성장 그래프야말로 시스템이 안정적이지 못하다는 증거'다. 우량주는 야금야금 서서히 오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반면에 작전주의 그래프는 거침없이 지붕을 뚫을 기세가 아닌가. 고성장 그래프야말로 불안정하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일본이 10년 후면 망할 것처럼 말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다.
일본의 저성장 현상은 경제가 불안정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안정을 되찾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대한민국도 ?! 문제는 저성장 사회로의 진입 시기이다. 일본은 고성장 사회일 때 어느 정도 복지 시스템이 정착된 후에 저성장 사회로 진입했다. 저성장 사회이기는 하나 굶어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한국은 복지 시스템이 정착되기도 전에 저성장 사회로 진입하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이 한국 사회가 암담한 이유이다. 그동안 민주화 운동이 이룩한 민주주의가 헛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명박과 박근혜가 증명했다. 가난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고, 절망은 더욱 짙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혐오는 절망의 농도에 비례한다.
혐오란 상부를 향하지 않고 하부를 향한 증오'여서 그들은 자신보다 약한 대상에게 화풀이를 한다. 피곤한 사회'다. 어릴 적에는 터널을 좋아해서 일부러 자하문 터널을 지나는 버스를 타고는 했다. 돌이켜보면 끝에 가서야 환해지는 터널의 구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끝이 막힌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이 든다. 캄캄하다. 터널에서 속도를 멈출 수는 없지, 가속 패달을 밟지만 여전히 앞은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