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면 같은 짜장면을 삼키고 :
물만두 같은 군만두을 씹으며 울었네
크리스마스 전날, 아버지는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드시다가 늦겨울에 내리는 폭설처럼 펑펑 우셨다고 한다. 가게에서 배달을 하는 어린 아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와 똑같이 생겨서란다. 꼬질꼬질한 얼굴에 식당 주인 내외의 눈치를 보는 꼴로 보아 손님이 빠져나간 룸에서 잠을 자며 일을 배우는, 부모 없는 아이의 서울 상경기'이리라.
술꾼인 아버지의 뻔한 변명이기는 하나 속상한 마음에 계획에도 없는 고량주와 군만두를 시켰다고. 성탄 전야가 늘 그렇듯이 식당에는 캐롤송이 흘러나왔다고 한다. 울면 안 돼 ~ 울면 안 돼 ~ 산타 할아버지는....... 40대의 아버지는 산타 할아버지에게 선물을 받아야 한다는 신념으로 꾹꾹 슬픔을 참다가 하얀 양파를 검은 춘장에 푹, 찍어 먹는 순간에 눈물이 뚝 ! 영화 < 마더 > 에서 김혜자가 누명 쓴 아이에게 엄마, 없어 ? _ 라고 말했던 뉘앙스로 아버지는 짜장면 국물이 잔뜩 묻은 입으로 " 엄마, 없어 ? " 라고 물었다고 한다. 당시에 아버지는 병원 검진을 앞둔 상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는 당신의 죽음 이후에 남겨질 어린 자식을 생각했던 듯하다(검사 결과는 해피엔딩이었으나 검진을 앞둔 자의 초조함은 다들 아시리라).
짜장면을 시켰는데 울면이 된 상황. 아버지는 고량주에 울면 같은 짜장면과 물만두 같은 젖은 군만두를 탈탈 털어 드신 후에 주인 몰래 식당 종업원'에게 팁을 주고 나오셨다고 한다. " 눈물이 앞을 가리는구나. 옛다, 이거 가지고 맛있는 거나 사 먹어라 ! " 어젯밤, 꿈을 꾸었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중국집에서 탈수기도 아니면서 탈탈 우셨다는 아버지'였다. 나를 닮았다는 그 어린 종업원은 어쩌면 나를 닮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에 대한 불안이 미래의 어느 한 지점에 투사(投射)된 상으로 나타난 것이니, 타자를 향한 측은지심이자 자신을 향한 자기 연민'일 것이다.
< 꿈 > 에 아버지는 엄마 없어 ? _ 라고 물을 만한 꼬질꼬질한 아이를 무려 8명이나 집으로 데려왔다. 꿈이라는 것이 늘 그렇듯이 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는 나에게 " 잘 키우거라. " 라는 말 한 마디를 유언처럼 남긴 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그리하여, 그리하여서........ 나는 홀로 여덟 아이의 가장이 되었다. 시바, 이런 것을 두고 육아 독박이라고 하는 거구나 ! 방에다 똥을 싼 놈도 있고 똥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는 아기도 있었으니 성질머리가 지랄 같은 성정을 가진 나는 머리 끝에서 화가 수목금토일까지 치솟아오를 것 같았으나, 웬열 ?! 내 핏줄도 아닌 녀석들 똥귀저귀를 갈고 씻기는 것은 물론이요, 짜장면을 젓가락에 둘둘 말아 아이들을 먹이고 있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한 손길이 간절한 아이에 대한 보살핌이 다른 아이들에게는 편애로 비춰질 것 같아 일일이 다른 아이들과도 눈맞춤하며 자상한 아빠 미소를 보이는 것이어라. 지금 생각해도 웃긴 것은 이 갓난이를 데리고 독서토론회를 열었다는 점이다. 아직 똥오줌도 못 가리는 녀석들에게 페미니즘 서적을 펼치고는 " 미러링 " 을 강의했으니 잘 돌아가는 집구석이 틀림없다. 물론 꿈 속에서 만들어진, 혈연을 배제한 채 타인으로 이루어진 급조된 대안 가족'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강의 내용은 간단했다. 커서 유세 떨지 말라는 당부였다. 남자라고 여자 앞에서 유세 떨지 말고, 나이 많다고 어린 사람 앞에서 나이 유세 떨지 말라는 것. 한 살 더 많다고 형님 아니며, 한 살 더 어리다고 얼라 아니니라. 그런 소박한 당부.
문득 손창섭의 세태 소설 << 삼부녀 >> 가 생각났다. 순문학 작가의 통속소설 따위로 폄하했던 이 소설은 내가 읽은 한국 문학 가운데 가장 전복적인 작품이다. 다음은 전에 써 두었던 << 삼부녀 >> 에 대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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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창섭의 < 삼부녀 > 는 나쁜 가족극‘이다. 근친 욕망이라는 이름의 총천연색 만화경’처럼 화려하다. 일본 도까이 에이브이 성인 공작소‘라면 이 원작을 입수해서 근사한 포르노를 찍었을 것이 분명하다. 손창섭은 이 소설에서 에둘러 이야기하는 법‘ 이 없다. 읽다 보면 막장도 이런 막장이 없다. 이 작품은 1970년 주간여성에 연재된 장편소설인데 과연 이러한 내용의 소설이 검열 없이 연재되었다는 점이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데 정말 신기한 점은 생생하다는 것이다. 40년이나 지난 작품이 2010년의 당대성을 획득한다는 사실은 거의 기적처럼 보인다. 그러니깐 손창섭은 40년 앞을 내다보고 이 소설을 쓴 것이다. 그는 너무 앞서간 인물이었다.
간단하게 내용을 정리하자면 이렇다. 가족은 해체된다. 아내는 바람나서 도망가고, 딸들도 모두 아버지를 부정하고 집을 나간다. 이제 남은 것은 늙은 수컷‘과 텅 빈 집이다. 소설은 해체된 가족’을 새로운 방식으로 복원한다. 위기를 겪은 가족의 복원이 아닌, 새로운 인물들로 교체하는 것이다. 스폰서를 하는 조건으로 아내의 빈자리‘를 젊은 여자가 채우고, 딸의 빈자리 또한 다른 젊은 여자’가 채우는 방식이다. 계약 가족이다. 문제는 두 여자 모두 아버지의 남근을 빨고 싶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유혹한다. 가짜 아내는 딸의 욕망을 견제하지만 나무라지는 않는다. 가짜 딸은 시도 때도 없이 아버지의 침실을 노린다 !
하지만 유사 가족 관계 안에서 불협화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유사 가족은 평화롭다, 놀랍게도 ! 손창섭이 보기에 혈연 중심적 가족주의’는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는 해체를 주장한다.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대안 가족의 탄생이다. 박정희가 군화발로 동토를 철권통치하는 시대에 손창섭은 성적으로 도발을 한다. 엿 먹어라, 페니스 ! 그는 남근 중심의 숨 막히는, 남녀 서열과 나이 서열로 유세를 떠는 한국 유교 사회‘를 혐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남근과 대한민국을 동일시했고, 그 속에서 광기의 소국’을 발견했다. 그래서 조국을 버리고 야반도주했는지도 모른다. 이 위대한 소설가는 끝끝내 조국을 등진 채 일본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정영일 영화평론가의 말투를 흉내 내자면 : 이 소설 놓치면 후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