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놈들의 위상학
힘이 위치를 선정한다. 선후(先後)나 전후(前後)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그렇지 않은 것보다 선(先)과 전(前)에 위치할 확률이 매우 높다. 부모를 모부라고 하지는 않으며 부녀(父女)를 녀부(女父)라고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가부장 사회에서는 모부와 녀부는 유교적 위상에서 크게 어긋나기 때문이다. 여기서 父(男) 는 母 와 女보다 힘이 센 존재'다. 남녀라는 말도 동일한 의미 부여를 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나란히 배열된 단어는 항상 우선 순위에 남자를 배정한다. 앞대가리 욕심이 과한 수컷 본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물며 " 레이디 앤 잰틀맨 " 을 " 신사 숙녀 여러분 ! " 이라고 번역할 때는 할 말을 잊게 만든다. 그런데 전후 관계에서 딱 한 번, 여자가 남자를 앞지른 경우가 있다. 때려죽일 연놈들 _ 이라고 욕을 할 때에는 위치가 전복된다. 때려죽일 연놈들이라는 표현을 곧이곧대로 실천하자면 먼저 죽는 대상은 놈이 아니라 년이다.
같은 죄를 지었다 해도 먼저 죽어 마땅한 것은 년이다. 아, 이 치밀한 계략. 우연이라고 말하기에는 정교한 계략처럼 보여서 내 눈에는 치졸한 쫄보처럼 느껴진다. 이처럼 언어는 차별의 역사이기도 하다. 이러한 것들이 하나 둘 쌓여서 과도한 테스토스테론 남성'을 만든다. 언어가 이 지경이라면 우리가 당연한다고 믿는 도덕적 관습에 대해서도 의심해 볼 만하다. 니체가 지적했듯이 : 도덕은 인간이라면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이 아니라 사람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행동 규범이라 믿고 실천했을 때 이득을 보는 자'가 정교하게 다듬은 규범이다. 기득권 이익을 위해 봉사하도록 만든 것이 바로 당대의 도덕적 관습이다.
< 충효 > 는 단어 배열에서 先과 前을 차지한 세력이 자기 이익을 공고히 하기 위해 後에 위치한 것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윤리이다. 방송인 김갑수 씨가 모 팟캐스트 방송에 나와서 < 심청전 > 과 < 춘향전 > 을 비판하는 대목은 경청할 만하다. << 심청전 >> 은 14살 여자가 눈먼 아비를 위해 스스로 목숨을 버린다는 내용인데 이 희생 강요는 지나치게 폭력적이다. 아비의 시각적 쾌락을 복원하기 위해 딸이 죽어야 한다는 설정을 < 효 > 라고 선전하는 것을 보면 역겹다는 생각마저 든다. 만약에 심청이가 죽는 것이 두려워서 중국 장사꾼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서 도망친다면 당신은 이것을 불효로 이해할 것인가 ? 살아보겠다고 맨발로 도망치는 열네살 아이를 ?!
수많은 아비가 보기에는 심청이는 기특한 효녀 같지만 내가 보기엔 희생을 강요하는 어르신의 파렴치한 태도로 보일 뿐이다. << 춘향전 >> 도 마찬가지다. 수청을 들 것인가 말 것인가는 춘향에게는 목숨이 달린 일이니 중헌 일이다. 수청을 거부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니 선택은 달리 없다. 변사또가 앞대가리 바짝 세우며 " 어서, 말을 하거랏 !! " 라고 말했을 때 춘향은 목숨 대신 정절을 선택한다. 이 또한 선후와 전후 관계에서 앞자리를 차지한 자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선택'이다. 똑같은 질문을 다시 던지자. 만약에 춘향이가 죽는 것이 두려워서 변사또의 제안을 수락한다면 당신은 춘향이를 서방질한 년이라고 욕할 것인가 ?
우리는 알게 모르게 " 군사부일체의 황홀한 세계 " 에 세뇌당한다. 임금과 스승과 아비 다음에 비로소 아이와 여자가 위치한다. 그 어딜 찾아봐도 약자 우선에 대한 배려는 없다. 우리는 아비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행위가 아비를 섬기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지키는 행위보다 도덕적으로 높은 윤리성이라고 배우고,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남자와 동침을 해야 하는 행위보다는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행위가 더 숭고하다고 배운다.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 남성 우월 사상에 세뇌당한다. 한국 사회가 모성 사회였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 심청전 >> 이나 << 춘향전 >> 의 줄거리는 다른 이야기가 되어 있을 것이다.
남성이 먼저인 세상에서 맞아죽을 때에만 비로소 연놈으로 격상되는 이 모순된 신분 상승을 보면서 못난 남성의 불알 같은 욕망을 읽는다. 아, 오타다. " 못난 남성의 불 같은 욕망을 읽는다 " 로 수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