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재적 가해자



                                                           이십대 초입이었으니 오래 전 일'이다. 나는 영화 써클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은, 그렇다고 친목 모임이라고 하기에는  결속력이 단단하지는 않은 모임의 회원이었다.  남성 두 명과 여성 두 명으로 이루어진 구성이었는데  내가 가장 나이가 어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 달에 한 번 모여 영화를 감상하고 토론(을 핑계로 술을 마시는)을 하는 모임이었다. 그리고는 감상한 영화에 대한 리뷰를 취합하고 각자 맡은 꼭지 글'을 모아서 팜플렛(신문도 아니고 잡지도 아닌 회지라 해 두자)을 발행했다. 이 모든 일은 인쇄소 직원으로 일하는 회원이 있기에 가능했다.  또한 모임 장소를 제공한 사람도 그였다.  그는 이 모임의 창립자이자 든든한 스폰서였다.   매달 우편으로 발송되는 팜플렛을 받아보는 재미에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다 같이 모여 영화1)를 보는데 평소 활발하고 씩씩했던 여성 회원 한 명이 괴성을 지르면서 모니터를 내동댕이치는 일이 발생했다.  쓰러진 모니터 옆에서 여자는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그때 그 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영화 속 장면 하나가 그녀가 그토록 지우고 감추려고 했던 악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영화 속 장소가, 공교롭게도 영화 속 악당의 얼굴이, 공교롭게도 영화적 설정이, 공교롭게도. 피해자가 입은 옷이, 공교롭게도......                        우리는 그녀의 악몽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지만 지레짐작으로 알 수는 있었다.  폭력은 공소 시효가 있지만 악몽은 공소 시효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그 일 이후,  그녀는 더 이상 모임에 참석하지 않았고 모임도 흐지부지 끝났다. 팜플렛은 폐간 소식을 알리지도 못한 채 폐간되었다. 이 글을 쓰다 보니 또 하나의 일이 생각난다. 내 옛 애인은 거리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낯선 남자에게 머리를 잡힌 채 따귀를 몇 차례 맞았다.   늦은 밤도 아니었고 으슥한 골목길도 아니었다. 대낮 도서관 앞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세월이 흘러 흘러,  옛 연인들이 그렇듯이 우리는 헤어졌다.  나는 어떻게 해서든 이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마음이 돌아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여자가 냉정한 얼굴로 돌아서자 나는 나도 모르게 여자의 뺨을 때렸다2). 당혹감. 어쩌면 도서관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이유로 여자를 때리는 못난 놈이 나였다는 사실은 괴롭고 힘들었다. 이별을 이유로 여자를 때리는 못난 놈이었으니까. " 여성 대상 폭력에 대해 남자는 모두 잠재적 가해자 " 라는 말은 내 블로그를 자주 왕래했던 사람이라면 이미 익숙한 표현이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폭력에 있어서 남성은 절대 자유로울 수 없다. 

나는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모르겠다. 그날 그때,  나는 왜 그 여자의 뺨을 때렸을까 ?  " 남성은 여성 대상 폭력에 있어서 잠재적 가해자 " 라는 프레임 설정이 남성 입장에서는 불쾌할 수도 있지만,  나는 잠재적 가해자'라는 프레임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먼 훗날 애인의 뺨을 때릴 것이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독일 브란트 전 총리가 바르샤바에서 무릎 꿇고 사죄'를 했던 일이 있다.  전쟁 책임과 유대인 학살에 대한 사죄였다. 하지만 그는 가해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해자가 아니면서도 가해자의 입장에서 책임을 통감한 것이다.

력은 공소 시효가 있지만 악몽은 공소 시효가 없다는 사실이 뼈 아프게 다가온다.  때린 남자는 쉽게 잊지만 맞은 여자는 쉽게 잊지 못한다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744922.html


 

 

 

​                     

1)    신기하게도 그때 보았던 영화가 무엇이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2)      전언에 의하면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 이런 데서 빠니깐 좋냐, 쌍년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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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오는이 2016-05-23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처음에는 반감이 들었는데 이 글 읽으니 이제 이해가 갑니다.
그리고 여자가 담배 핀다고 따귀 때린 놈이 했다는 말을 들으니
어디선가 어느 알라디너가 했다는 말이 생각나네요 난 좋아 쌍년아. 였나?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3 15:23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헤어지자고 말하면 뺨 때리는 남자를 쓰레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그런 짓을 하고 있더군요.

peepingtom 2016-05-23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팜플렛 아이디어 여기서 착안하신 거군요? 우리도 진행합시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3 15:25   좋아요 0 | URL
이게 되려면 인쇄소에서 일하시는분 한 명 포섭해야 합니다.
그때 그 모임에서 나온 팜플렛은 신문하고 똑같이 나와서 묘하게 재미있었는데... 아 그때 생각나네요..
그분 출판사 하나 차리고 싶다고 해서 출판 편집.. 이런 거 배우고 그랬었는데.. 어쩌면
출판사 하나 차렸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순간 드네요..

형님 ! 혹시 보시면 쪽지 주십시오. 폐간된 회지 복간합시다.

자주오는이 2016-05-25 06:57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방가방가. 곰곰발님 블로그에서 진행되는 논란보면 정말 웃기는 짬뽕 같아요. 킬리만자로 하이에나 같아요. 소름 돋아요 근데 궁금한게 있는데 빠니깐 좋냐라고 말한 게 곰님이라는 말인가요 그 도서관 남자라는 말인가요 각주가 잘못 달린 거 같아요. 전에도 그때 일에 대한 글을 쓰신 걸 본 적 있는데 그때 남자가 했던 말이라 기억되는데..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5 09:33   좋아요 0 | URL
??!! 아. 각주2가 엉뚱한 곳에 달렸네요. 저 말이 마치 내가 한 말처럼... 아.. 엉뚱한 곳에 각주를 달았습니다. 그래서 이웃들이 뭐라 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큰 실수를....

자주오는이 2016-05-25 12:4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저도 나중에야 이상한 점을 알았어요. 이상하다 했죠. ^^
해명글이라도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5 13:45   좋아요 0 | URL
시발.. 뭐 업보죠. 쓰레기라고 욕해도 싼 놈입니다. 저는...

yureka01 2016-05-23 15: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던 말이 기억나네요....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3 15:26   좋아요 0 | URL
네에. 그런 것 같습니다. 꽃으로도 때리지는 말아야죠..

stella.K 2016-05-23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용히 좋아요만 누르고 가려고 했는데
2번 각주가 좇같이 웃겨서 그만...ㅋㅋㅋ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3 17:47   좋아요 0 | URL
스텔라 님 격한 댓글.. ㅎㅎ

마립간 2016-05-23 1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36876&ref=nav_mynews

제 경우 `남성 혐오의 비난의 말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아래의 `악순환`을 걱정하는 것인데, 글의 내용들이 ... 그래서 해결책이 뭐가 되죠?

`탱고를 춰 주었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하지만 누가 그에게 손을 내밀까요. 특히 여성과 춤을 추기를 원했다면. 이 사건으로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는 상황이 강화되다면, 사회의 연결 고리가 끊어짐으로 만들어지는 제2, 제 3의 살인자들이 나오겠죠.`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3 17:47   좋아요 0 | URL
태도의 변화( 위에 링크 건 한겨레 기사 읽어보십시오)가 아무런 해결책도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
문제 제기는 반드시 해결책을 전제로 하는 것인가요 ?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마립간 2016-05-23 19:56   좋아요 1 | URL
weekly 님과 이야기했던 것인데,

`메갈리안`이 미러링을 통해 `일베`를 돌아 볼 효과도 생각해 볼 수 있지만, 반대로 `일베`의 행위의 당위성을 주면서 서로 강화할 가능성도 있죠.

이 일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제가 보기에는 살인자가 될 확률이 극히 낮았던 사람들이고, 그 위험 선상에 있던 사람의 경우라면 당위성이나 논리적면을 떠나 `남성 혐오`로 받아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문제 제기를 반드시 해결책을 전제로 해야 한다면 제가 쓴 글의 대부분은 소용이 없는 것이죠.

저는 반대로 악순환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한 것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3 20:07   좋아요 0 | URL
아 그런 얘기였군요. 제가 엉뚱하게 해석했습니다. 용서를 ...
마립간 님 의견에 동의합니다.

마립간 2016-05-23 20:14   좋아요 0 | URL
그 사이에 댓글을 다셨네요. 저는 이번 사건을 `여성 혐오` 사건이라고 봅니다.

다른 여초 사이트와 달리 (여초 사이트인) 알라딘 서재가 상대적으로 이번 사건에 대해 조용하다고 생각하는 데, 그 이유는 문제의 인식이 없다기보다 해결책 마땅하지 않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3 20:21   좋아요 0 | URL
알라딘은 항상 조용했죠. 사실 알라딘도 여초 사이트 비스무리하지 않습니까 ?
그에 비하면 확실히 이번 사건에 대한 지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긴 합니다

cyrus 2016-05-23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살다보면 제일 무서운 사실은 과거에는 ‘난 저 사람처럼 되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지나고 어느새 내가 ‘저 사람’이 되고 있거나 이미 되었을 때입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3 17:46   좋아요 0 | URL
이 댓글 구구절절 와닿는 말이어서 정곡을 찌르네요..

cyrus 2016-05-23 17:49   좋아요 0 | URL
저도 과거의 제 자신을 배신하는 경험을 많이 겪었습니다.

비로그인 2016-05-23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민감한 주제를 끊임없이 마주하시고 글써주시는거 정말 감사합니다. 게다가 커밍아웃하는 용기까지...
동의하지 않는 주제의 글 마저도 생각을 깨워주는 좋은 자양분이 되네요.

peepingtom 2016-05-23 18:09   좋아요 0 | URL
곰님 네이버블로그에서 이 글 썼다고 남성들이 집중공격하고 있습니다. 경찰서 가서 자수하고 피해 보상해야 한다. 제가 곰님에게 남자가 여성을 옹호하는 글을 쓰면 남성들에게 공격 당할수 있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3 20:05   좋아요 0 | URL
제가 네이버 비로그인 댓글 쓰기 기능을 허용하는 이유는 네이버 블로그가 없는 분들이 계십니다. 네이버가 보수적이어서 다음이나 다른 쪽으로 망명한 이웃이 많거든요. 아시겠지만 피핑톰님과 지나가는이 님은 알라딘에 자주 오시는 분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비로그인으로 글을 쓰신 거겠죠. 하여튼 논란이 뜨거워서 비로그인 쓰기 비허용했으니 무명 님께서 너그럽게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명 2016-05-23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네, 해당 댓글은 지웠습니다. 페루애님에게 악의는 절대 없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3 20:12   좋아요 0 | URL
악의 없음은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이웃끼리 싸우니 난처해서 내린 결정입니다.

수다맨 2016-05-24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폭력은 공소 시효가 있지만 악몽은 공소 시효가 없다는 사실이 뼈 아프게 다가온다.˝ 이 문장이 인상 깊습니다.
저번주 스승의날에 고등학교 은사님을 찾아가 뵈었던 적이 있습니다. 조만간 정년을 눈앞에 두신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나는 오래전, 박정희/전두환 같은 인간들 치하에서 사는 게 끔찍했다. 물론 내가 경찰에 끌려가거나, 고문을 받거나, 가택수색을 당하거나, 도청을 당한 것은 아니다. 그런 모욕을 당했던 이들은 운동하던 내 친한 친구들이었고, 나는 주어진 일이나 하고 살아가는 직장인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피해를 당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피해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것, 바로 그 때문에 이런 권위적이고 억압적인 나라에서 산다는 게 토악질나게 느껴졌다. 몇 번은 조울증 치료를 받으려고 병원에 다닌 적도 있다.˝

곰곰발님 말씀처럼 때린 사람들은 쉽게 잊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그 이`가 누군가를 때린 이유의 의미(묻지마 살인을 한 범인은 조현증 환자였어, 또는 박정희/전두환은 애시당초 인간 백정이야)를 개인적 범주에서 찾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견도 물론 타당합니다만 좀 더 문제를 구조적/사회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어쨌거나 아직도 대한민국은 남근적 질서가 견고한 가부장제 사회, `아버지`가 정점에 위치한 세계에 다름아니라는 것. 여자는 `아버지`가 될 수 없기에 배척을 받으며, 남자는 `아버지` 기준에 미달해서 좌절하는 경우에 그 혐오를 (모순적인 사회 구조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나 다름없는 이들에게 돌린다는 것, 어떻게 보자면 맞아서 악몽을 꾸거나, 맞지 않더라도 악몽을 꾸게끔 만드는 현실이 바로 과거와 오늘의 대한민국 같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16-05-25 13:46   좋아요 0 | URL
구구절절 옳은 말씀이십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남자가 여성 인권을 지지하는 순간 남자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