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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평점 :
나와 같다면
평일 오후 3시 즈음, 전철 < 안 > 은 텅 비어 있다. 거리도 마찬가지'다. 3시는 애매모호한 시간. 점심과 저녁 사이이며, 밤과 아침 사이'이기도 하다. 3시는 타자를 인식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저녁 8시에 불 켜진 집을 궁금해 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새벽 3시에 " 불 켜진 집 " 을 보면 그 집 창문 너머가 궁금해진다. 불면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 불 켜진 집 > 과 < 잠 못드는 나 > 는 같다. 같다는 것은 때론 나에게 위안을 선사한다. 반면, < 같음 > 이 당혹스러운 경우'도 있다. 전철 안, 내 앞에 한 남자가 앉아 있다. 그 남자와 나는 잠시 시선이 마주쳤지만 둘 다 황급히 시선을 외면했다. 당혹스러운 상황이 연출되었다.
우리는 서로 같은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동일한 브랜드, 동일한 디자인, 동일한 색상 ! 라벨을 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옷 상태'로 보아 N 백화점에서 재고 정리할 때 산 59,800원짜리 아우터'인 것이다. 나와 같다면, 그도 똑같은 생각을 했으리라. " 시바, 너도 나처럼 지지리도 못사는 집 자식이구나 ! " 불온한 거울의 힘'이다. 거울 속 상(象)은 성능 좋은 반면교사인 셈이다. 계급에 대한 인식'은 < 거울 > 에서 나온다. 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는 말은 예리한 통찰'이다. 피지배계급은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자긍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들이 동일시하고자 하는 욕망은 지배계급의 욕망'이다.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부정,
그러니까 나와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사람을 보면 동료애보다는 부끄러움이 앞서는 마음이 결국은 회피와 분열을 낳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 유니클로 > 와 < 루이비통 > 의 차이'다. 명품은 명품을 알아 본다. 명품을 걸친 사람이 명품을 걸친 사람과 마주치게 되면 부끄러움보다는 호기심을 갖기 마련이다. 그것이 바로 명품이 가지고 있는 아우라'다. 뒤늦은 고백이지만, 나는 < 거울 > 이 무섭다. < 자기애가 강한 남자 > 로 포장했지만, 사실 " 자기애 " 는 " 자기혐오 " 에 대한 은유에 불과했다. 거울은 그 사실을 낱낱이 폭로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허영을 산산조각낸다. 거울은 깨지기 쉬운, 물성으로 이루어졌으나 약하다는 것이 때로는 강하다는 것보다 더 두렵다. 하여, 내가 불편해 하는 대상은 역설적이게도 나를 닮은 사람이다.
정희진의 << 정희진처럼 읽기 >> 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생각의 DNA가 나와 99.99999999 % 가 동일한 것이다. 외투만 동일한 게 아니라 바지와 신발, 심지어는 가방까지 같은 것이다. 다행히도 이 책은 < 나와 같은 옷을 입은 타인 > 이라기보다는 < 새벽 3시에 불 켜진 창문 > 같다. 반감보다는 공감의 울림이 크다. 정희진은 오 헨리의 << 마지막 잎새 >> 에 대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겨울이 좋은 점이 있다. 여름의 빗소리는 소란스럽지만 겨울에 내리는 눈은 음 소거 기능이 있다(290쪽) " 소리와 소음은 분리할 수 없다. 소리에서 소음을 분리하면 자연적인 소리는 사라진다.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라고 해도 그 음역 속에는 소음이 자리하고 있다. 여름의 빗소리는 소리와 소음이 만든 결과'다.
하지만 소리와 소음이 동시에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그때 창문을 열면 < 눈 > 이 소리 없이 내리고는 했다. 내 마음과 자연의 일기(日氣)가 서로 교감하는 순간이었다. 그때, 내가 깨달은 사실은 " 무음(無音) "의 힘이었다. 빗소리보다 아름다운 소리는 눈이 소리 없이 내리는 풍경이다. 그렇기에 말이 많거나, 목소리가 크거나, 언변이 유려한 사람을 믿지 않는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장점은 < 정직 > 이다. 정희진은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다. 벼린 칼로 단칼에 베어버린다. 군더더기가 없다는 말이다. 정희진이 한 꼭지에서 " 나의 소원은 인류 멸망이다. 내 소원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즉사(卽死)는 모든 사람의 희망일 것이다 " 라고 말했을 때 격하게 공감했다.
라스 폰 트리에 감독이 연출한 << 멜랑콜리아 >> 는 행성 충돌에 의한 지구 멸망으로 끝나는 영화인데, 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 영화를 두고 비극적 결말이라고 말하는 데 질려버렸다. 이 영화는 비극이 아니라 해피엔딩'이다. 충돌과 함께 지구는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70억 인구가 모두 공평하게 동일한 죽음의 방식으로 매우 짧은 시간에 죽는다는 것은 비극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축복받은 죽음이다. 아우슈비츠가 비극인 이유는 누구는 살고 누구는 죽었다는 데 있다. 정희진을 흉내내서 단칼에 말하자면 이 < 책 > 좋다.
-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보수는 부패로 망한 적이 없다. 부패로 망한 보수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보수는 부패 때문에 성공한 부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