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을 금 禁 한다.
내 < 글 > 에 종종 등장하는 친구가 있다. 남해 깡촌에서 올라온 친구'였다. 전형적인 흙수저 자식이었다. 공부는 바닥을 기었고, 그렇다고 싸움을 잘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예능에 타고난 감각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이렇다 할 꿈도 없었다. 조용한 친구였다. 그는 수업이 끝나면 신문을 돌렸다. 학교 후문에는 항상 그가 타고 다니던, 무겁게 생긴 짐자전거가 자물쇠에 걸려 있었다. 지금도 그 친구를 떠올릴 때면 그 자전거가 제일 먼저 생각난다. 나는 그 친구를 좋아했다(그 친구는 성경 과목 시간에 교목에서 왜 현대 목사들은 비만 체형이 많냐고, 게으른 삶을 사는 게 아니냐고 질문을 던졌다가 죽이 되도록 맞은 친구였다. 그 수업에서 내가 배운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목사도 성질나면 죽도록 팰 수 있다는 공포심이었다).
이유는 서울 깍쟁이 같지 않다는 데 있었다. 무덤덤한 성품, 그것이 그를 규정하는 아우라'였다. 서울 토박이인가 아닌가는 엄살을 떠는가 아닌가로 구별할 수 있었다. 서울 새끼인 내가 봐도 서울 새끼들은 유독 " 엄살 " 이 심했다. 얼라 새끼들...... < 엄살 > 이 도드라지는 순간은 선생으로부터 매질을 당할 때 여실히 드러났다. 박달나무로 만든 뭉둥이가 엉덩이를 내리칠 때마다 깍쟁이들은 데굴데굴 굴렀다.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 그것은 재롱에 가까웠다, 리액션이 큰 개그맨처럼. 선생은 바닥을 뒹굴며 곡을 하는 학생을 보며 쾌락을 얻고는 했다. 이 리액션을 일종의 복종이었다. 폭력에 대한 복종. " 아이고, 아이고, 아이고.... " 는 폭력에 대한 항복 선언인 셈이었다.
아이들은 곡소리가 클 수록 매질의 횟수가 줄어든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굴비 같은 새끼들. 반에서 리액션이 제일 큰 놈은 놀랍게도 반에서 싸움을 제일 잘하는 일진'이었다. 그 새끼는 한 대만 맞으면 선생이 보는 앞에서 고통의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는 했다. 하지만 남해 깡촌에서 올라온 친구는 엄살을 부리지 않았다. 매를 맞을 때마다 표정이 없었다. 이 무표정 때문에 3대 맞을 것을 6대 맞고는 했다. 그는 폭력 앞에서 비굴하게 어릿광대가 되지 않았다. 갈치가 될지언정 굴비는 되지 않으리라. 나는 그 점이 좋았다. 어느 날,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굴비'와 순둥이인 갈치'가 싸우는 일이 벌어졌다. 모두 다 일진에게 500원을 걸었지만 나는 전재산을 신문 배달 소년에게 걸었다. 슈욱, 슈슈슈슈육, 슉, 슉. 주먹이 오갔다. 코피를 흘린 놈은.........
60초 후에 공개됩니다 !
내 예상과는 달리 신문 배달 소년은 묵사발이 되었다. 내가 끼어들어서 성급히 둘을 말리자 굴비'가 내 뒤통수를 쎄에에에게 쳤다. 친구여, 네 복수는 내가 하마. 드디어...... < 때 > 가 온 것이다. 이 씨이이이발노노오오오오오놈이 !!!!!!!!!!!!!!!! ㅡ 이라고 말할 줄 알았지 ? 나, 그런 놈 아니다. 서울 깍쟁이'다. 나는 엉거주춤 뒷걸음을 치면서 브레이크 댄스를 추며 재롱을 부렸다. 내가 벌렁 드러누워서 배를 보이자 굴비'는 내 사타구니를 긁어주었다. 싸움은 그렇게 끝났다, 세월이 흘렀다, 우리는 학교를 졸업했다, 사회는 학교의 연장이었다. 리액션이 큰 놈이 상사에게 잘보였다. 한마디 툭, 내뱉으면 벌벌 떠는 시늉을 하고는 했다. 권력자는 벌벌 떠는 모습을 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권세의 맛을 음미했다. 티븨를 봐도 리액션은 넘쳐났다. 시시껄렁한 만담 쇼에 출연한 연예인들은 웃기지도 않은 농담에 데굴데굴 굴렀고 슬프지도 않은 일에 박연 폭포 같은 눈물을 흘렸다. 엄마 얘기만 나오면 일단 울고 본다.
대한민국에서 엄마와 아빠와 자식 얘기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저, 연, 예, 인, 참, 인, 간, 적, 이, 다 ! 좆같은 세상이었다. 리액션에 대한 거부 반응일까 ? 내가 영화 연출과 배우 연기를 평가할 때의 기준은 리액션이었다. 리액션이 큰 연기는 좋은 연기가 아니었고, < 배우의 눈물 > 로 < 관객의 눈물 > 을 짜내려고 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가 아니었다. 젖은 풀잎이 마른 나무를 태우기도 하지만 마른 종이가 젖은 나무를 태우기도 한다. 내 기준에 의하면 설경구는 연기를 못하는 배우에 속했다. 그는 감정을 얼굴 표정으로만 연기하려고 했다. 모든 것이 과잉이었다. 얼굴에서 감정을 읽는 것은 좋은 독법이 아니다. 훌륭한 배우는 대부분 수수께끼 같은 얼굴이다. 역설적이지만 감정이 읽히지 않는 표정이야말로 뛰어난 연기'다. 찰리 채플린은 중요한 순간에 얼굴 대신 뒷모습을 보여준다. 관객은 채플린의 얼굴을 볼 수 없지만 그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붉은 얼굴로 눈물을 쏟으며 오열하는 장면보다 초라한 걸음걸이'가 주는 감흥이 더 뛰어난 경우다. << 밀리언달러 베이비 >> 도 마찬가지'다. 내가 송강호라는 배우를 좋아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하루 날 잡아서 그가 출연한 영화를 연결해서 보게 되면 독특한 점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마다 걸음걸이가 다 다르다. 그는 얼굴 표정의 과잉을 줄이는 대신 몸짓으로 상쇄된 것을 보상한다. 영화 << 밀양 >> 에서 선보인 송강호의 연기는 평범해 보이지만 그 연기야말로 뛰어난 연기'다. 영화 << 변호인 >> 에서 가장 뛰어난 장면은 송강호가 재판정에서 충혈된 눈으로 사법 정의를 외치는 장면이 아니라 설핏 설핏 그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 뒷모습에 모든 감정이 담겼다. 균형을 이루지 못한 어깨와 힘없는 발끝은 핏발선 얼굴보다 뛰어나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가 세월호를 언급하면서 흘린 표정 연기는 빵점이었다. " 각하, 리액션이 너무 < 과 > 하셨습니다 ! " 재현 배우보다도 못한 연기력이었다. 슬플 때는 가짜 눈물 대신 진짜 반성을 보여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