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이 없는 밤'을 상상하라
※ 이 리뷰는 출판사 보도 자료에서 제공하는 스포일러 수준 이내'에서 스포일러를 제공하고 있으며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고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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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를 제대로 끼워야 마지막 단추도 제대로 채울 수 있는 법이다. 소설의 첫 문장도 이와 같은 모양이다. 소설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소설을 쓸 때 제일 고심하는 부분이 < 첫 문장 > 이라고 고백한다. 김훈은 << 칼의 노래 >> 에서 첫 문장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 을 쓸 때 < 꽃은 피었다 > 과 < 꽃이 피었다 > 를 놓고 오랫동안 고민했다고 한다. 반대로 영화는 < 끝 장면 > 이 중요하다. 독자가 첫 문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관객은 끝 장면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이 독자와 관객의 차이'이다. 어떤 영화가 전체적으로 짜임새가 훌륭하다고 해도 마지막 장면이 지나치게 엉성해서 용두사미로 끝나면 관객은 아쉬움과 함께 배신감을 느끼고는 한다.
똥 싸다가 만 느낌 ? 와와, 로 시작한 탄성이 우우, 로 끝나는 경우다. 영화는 소설과는 달리 첫 장면(첫 문장)이 허술해도 마지막 장면(마지막 문장)이 뛰어나면 그 전까지의 불만은 쉽게 잊어버리게 된다. 내게는 막스 오필스 감독이 1948년에 만든 << 미지의 여인에게서 온 편지 [ LETTER FROM AN UNKNOWN WOMAN ] >> 가 그런 경우였다. 나는 영화 속 이야기에 동화되었다기보다는 막스 오필스의 " 유령처럼 떠다니는 카메라 " 의 움직임에 감동했을 뿐이었다. 명성대로 카메라는 한때 탱고로 명성이 자자했지만 이제는 늙어버린 댄서의 " 우아한 발놀림 " 처럼 아름다웠다. 중장비에 가까웠던 촬영 장비(과장을 보태자면 1940년대 카메라는 코끼리처럼 무겁고 덩치가 컸다) 를 생각하면 막스 오필스가 끌고 다니는 카메라는 카나리아 새처럼 가벼워 보였다.
하지만 나이 서른을 넘긴 조앤 폰테인'이 열세 살 소녀'를 연기하며 혀 짧은 목소리를 내다 보니, 그 아무리 절세미인이라 해도 영화 속으로 쉽게 몰입할 수는 없었다. 웃을 때마다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열세 살 꼬마'라니 ! 그러나 마지막 장면'은 실망을 환희로 바꾸기에 충분했다. 막스 오필스는 마지막 장면을 원작(슈테판 츠바이크)에는 없는 장면으로 채웠는데, 이 설정이 화룡점정'이었다. 그는 원작이 단순한 순애보가 아니라 복수극이라는 사실을 간파했고, 핵심을 꿰뚫었으며, 결국 멋지게 성공했다. 시즌 내내 저조한 성적으로 비난을 받았던 야구 선수가 한국시리즈 마지막 경기 9회말 2아웃 상황에서 만루 홈런 한 방으로 영웅으로 등극하는 경우라고나 할까 ? 우우, 했던 내 심장은 어느새 와와, 했다.
스티븐 킹 소설집 << 별도 없는 한밤에 >> 를 손에 넣자마자 펼친 페이지'는 순서상 첫 번째 중편 << 1922 >> 의 첫 페이지 11쪽'이 아니라 작가의 말이 수록된 597쪽이었다. 그렇다, 이 소설집은 600페이지에 가까운 두꺼운 책이다.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서 할 수 있는 가장 근사한 일'은 책 마지막에 수록된 3쪽짜리 < 작가의 말 > 부터 읽는 것이었다. 내가 기다리는 버스는 5분 후에 도착 예정이므로 이보다 더 알찬 계획은 없을 듯 싶었다. 예상은 국가대표 양궁 선수가 쏜 화살처럼 적중했다. 3쪽짜리 < 작가의 말 > 을 다 읽자마자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 안에서 곰곰 생각했다. 김치 없이 라면을 먹는 것보다는 킹 없이 밤을 보내는 게 더 힘들지.......
에둘러 말하지 말고 서둘러 말하자면 : 이 책에 대한 값어치는 책 마지막 3쪽 분량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내가 버스정류장 벤치'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읽은 < 마지막 3쪽 > 은 막스 오필스가 정성스럽게 찍은 마지막 3분과 같았다. 다시 말해서 작가의 말을 읽었다면 이 책에 수록된 소설들을 읽지 않아도 이미 본전은 뽑은 것이다. 책 부록처럼 마지막 페이지에 삽입된 " 작가의 말 " 은 대부분 수상 소감문처럼 형식적이고 상투적이어서 전자 제품 사용 설명서를 읽는 느낌이 들지만, 이 책에 수록된 작가의 말은 재미있어서 낄낄거리게 된다. 그러니까 전자 제품 사용설명서를 읽으며 낄낄거리며 웃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시라.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한테서 작품에 관한 질문을 받을 때면 나는 습관처럼 농담이나 우스운 일화를 들려주고 넘어가곤 한다( 그런 얘기를 믿으면 안 된다. 소설가가 털어놓는 자기 이야기는 절대 믿으면 안 된다.)
- 작가의 말, 닫는 글 中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가 독자에게 자주 소개했던 일화도 어쩌면 그가 꾸민 농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들려준 일화를 (왕창) 각색해서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
미국 플로리다의 슈퍼마켓'에서 식료품을 고르던 스티븐 킹'을 알아본 할머니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 난 당신을 알아요 ? 스티븐 킹 씨죠 ? 무시무시한 공포 소설을 쓰는 사람 말이에요. 맙소사 ! " 그리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고 한다. " 나는 심장이 약해서 말이우. 당신이 쓴 공포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심장이 벌렁벌렁거려서 항상 잠자리가 뒤숭숭하다오. 그래서 다음에는 < 쇼생크 탈출 > 같은 책으로 마음을 다스린다오. 칠리 소스가 뿌려진 멕시코 요리를 먹고 난 다음에는 달콤한 디저트를 먹어야 하듯이 말이우. " 귀가 솔깃해진 킹이 < 쇼생크 탈출 > 도 자신이 쓴 책이라고 웃으면서 말하자 할머니는 그 사실을 끝끝내 믿지 않았다고 한다. " 이보슈, 작가 양반 ! 이 늙은 노인네를 놀리는 거유 ? 달달한 푸딩 같은 소설을 당신이 썼다는 거요 ? "
스티븐 킹이 자주 거론하는 에피소드'이다. 이 일화를 믿든 안 믿든 " 그런 얘기를 믿으면 안 된다. 소설가가 털어놓는 자기 이야기는 절대 믿으면 안 된다 "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출판사 보도 자료에서도 지적했듯이 스티븐 킹 소설의 정점은 중편 소설이다. << 사계 >> 라는 이름으로 묶인 중편 소설 4편은 하나같이 모두 걸작이다. 놀라운 사실은 스티븐 킹이 보기에 4편의 소설(봄 - 리타헤이워드와 쇼생크 탈출, 여름 - 우등생, 가을 - 스탠 바이 미, 겨울 - 호흡법)은 단편도 아니고 장편도 아니어서 쓰레기통에 버릴까 하다가 편집자의 요구에 의해 한 권으로 묶어서 출간했다고 한다. 맙소사, 이 고백은 한국의 수많은 소설가 마음 속에 " 열불 " 을 지를 만한 고백이 아닌가 ?
마치 비만 클리닉 대기실'에 옹기종기 모인 환자 앞에서 " 저는 아무리 먹어도 살이 안 쪄서 고민이에요 ! "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시바. 배부른 사람 앞에서 배부른 소릴 하고 자빠졌으니 ! 오죽했으면 소설가 장정일이 < 독서일기 > 에서 << 사계 >> 를 언급하면서 " 스티븐 킹이 이 단편을 쉬어가는 의미에서 쓴 작품이라면 한국의 작가는 다 죽어야 한다." 며 넥타이 공장이나 차려야 한다고 말했을까. 또한 단편집 << 스켈리톤 크루 >> 중에서 유일하게 200페이지 분량인 < 미스트 > 도 기똥차게 재미있는 소설이다(미스트와 모비딕). 그가 1000페이지'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분량을 절반으로 확 줄인다면 작품마다 희대의 걸작이 탄생할 것이 분명'하다.
킹의 기준에 의하면 270페이지 분량인 << 스탠 바이 미 >> 나 3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 우등생 >> 같은 경우는 결코 장편이 될 수 없다. 중편을 장편으로 포장해서 책을 파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다 보니 글에 군더더기가 붙기 시작한다. 스티븐 킹이 잇속에 밝은 장사꾼이었다면 한 권으로 묶인 소설집 << 사계 >> 를 4권의 장편소설로 출간해서 인세를 받아먹었겠지만 그가 보기에 그런 짓은 고객을 호갱으로 보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에게 중편을 장편으로 포장해서 파는 짓은 내용(과자)은 별로 없고 질소만 가득 찬 과자 포장지 같은 짓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출판 문화'를 생각하면 이런 짓은 멍청한 판단이다. 원고지 분량으로 따지자면 100페이지도 안 되는 << 칼의 노래 >> 를 2권짜리 소설로 내놓는 한국의 출판 문화를 생각하면 말이다.
나는 가끔 < 질소 충전 과자의 과대 포장 상술 > 에 대해 출판사 사장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할 때가 있다. 질소 충전 과대 과자 포장지와 중편을 장편이라고 우기거나 분권해서 파는 상술의 차이를 말이다. 됐고 ! 뭐 그렇다고 1000페이지를 넘긴 스티븐 킹 소설들은 걸작이 아니다, 라는 말을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올시다. 단언하건대 소설집 << 별도 없는 한밤에 >> 는 전성기였던 7,80년대를 지나 90년대 이후에 쓴 작품 가운데 최고 걸작'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소설집은 3편의 중편 << 1922 >> , << 빅 드라이브 >> , << 행복한 결혼 생활 >> 과 1편의 단편 << 공정한 거래 >> 로 구성되었다. << 1922 >> 는 < 쇼생크 탈출 > 에서 늙은 사서 브룩스의 " 프리퀼 " 같은 느낌이 든다.
또한 쥐 모티브'는 단편 << 맹글러 >> 에서 빌려온 설정'이다. 이 소설집에서 최고 걸작은 단연 << 1922 >> 다. 이 작품은 그를 두고 " 공포소설의 제왕 " 이라고 규정한 프레임이 얼마나 얼토당토않는가를 여실히 보여준 작품이다. 유령이 등장하지 않고도 킹은 맛깔나게 글을 써내려간다. 그는 뱀파이어나 좀비 없이도 관객 똥구멍을 쥐었다 폈다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 문학판 대장항문외과 의사 " 다. 누누이 하는 말이지만 그는 < 공포소설의 제왕 > 이 아니라 이야기꾼으로서 < 소설의 제왕 > 이라 할 수 있다. 반면 << 빅 드라이브 >> 는 전형적인 스티븐 킹 소설'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여성 추리소설가'이다. 주인공 테스는 미스테리/스릴러 장르가 가지고 있는 법칙을 조롱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법칙 안에서 소설은 작동한다. " 소프트 " 한 코지 미스터리 장르 작가는 현실에서는 " 하드 " 한 방식으로 복수를 감행한다. 반면 단편 << 공정한 거래 >> 는 악마에게 영혼을 판 거래'라는 줄거리에서 " 파우스트 " 를 떠올리게 하지만, 킹은 독자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을 배신한다. 이 소설에 반전은 없지만 반전이 없다는 점에서 진정한 반전'이다. 끝으로 << 행복한 결혼 생활 >> 은 16년에 걸쳐 무려 열 명을 살해한 실존 인물 데니스 레이더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작품인데, 킹이 관심을 보인 부분은 연쇄 살인마 데니스 레이더'가 아니라 그와 34년을 함께 산 폴라 레이더'였다. 행복한 가정 생활을 꾸렸다고 생각하는 평범한 중년 여성이 어느 날
남편이 그 유명한 연쇄살인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행동할까에 촛점을 맞춘 소설이다. 소설은 킹답게 흥미진진하며 빠르게 진행된다. 이 소설을 읽는 도중에 하, 하하하품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배, 배배배신이다. 내가 스티븐 킹 소설을 읽으면서 항상 궁금한 것은 " 글 쓰는 속도 " 다. 그는 인간이 아니라 기계다. " 킹도리코, 쓰는 기계 " 다. 참고로 리처드 바크만이라는 필명으로 쓴 370쪽짜리 장편 << 런닝맨 >> 은 72시간 만에 완성한 소설이란다. 놀라지 마시라. 그 당시, 그는 낮에는 교사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썼다고 한다. 물론 자상한 남편이었던 그는 쓰레기 분리 수거도 하고 아이들 똥 기저귀'도 갈아주었으리라. 오, 주여 !
- 실제로 이 시기'에 스티븐 킹은 약물 중독자'였다. 정신줄 놓은 상태에서 이 소설을 썼으나 정작 본인은 이 작품을 썼는지도 몰랐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