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의 슬픔과
애도 없는 한국 사회

나는 지금껏 롤랑 바르트가 거대한 청소차에 치여 사망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거대한 청소차에 치여 사망한 다른 철학자가 있었던가 ?! 혹시 아시는 분 계시면 댓글창에 남겨 달라. 사실은 세탁물을 실은 작은 트럭이었다고 한다. 내가 세탁물을 실은 작은 트럭을 대형 청소차로 착각한 이유에는 아마도 " 철학자와 청소부 " 라는, 이상하지만 꽤 그럴 듯한 짝패 이미지 때문이리라.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것 가운데 잘못 알고 있는 게 하나 더 있었다. 롤랑 바르트가 교통 사고를 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교통 사고가 사망의 주된 원인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는 교통 사고로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으나 마음 속으로 치료를 거부했다고 한다. 살고자 하는 의지를 접은 것이다. 날고자 하는 의지를 접은 새의 날개처럼.....
그러니까 롤랑 바르트의 죽음은 사고사'보다는 심리적 자살'에 가까웠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 결국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다음날부터 쓰기 시작한 애도 ( 일기 : 1977. 10. 26 ~ 1979. 9. 15 ) 작업'은 실패로 끝났다고 봐야 맞는 소리 같다. 그는 평소에 " 글쓰기는 곧 치유다 " 라고 말했으나 아무래도 애도 일기를 쓰면서 상처받은 자신을 치유하지는 못했던 듯싶다. 애도가 실패로 끝나자 그에게 찾아온 것은 깊은 우울'이었다. 애도와 우울은 모두 대상을 잃고 슬퍼한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전혀 다른 성질'을 발견하게 된다. < 애도 > 는 떠나버린 대상을 잠시 곁에 두고 하소연하다가 결국에는 그 대상을 떠나보내는 과정이다.
죽은 자를 산 자 곁'에 계속 머물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 그러니까, 그러니까 애도는 산 자가 죽은 자에게 슬픔에 대한 정성스럽게 성의를 표현하는 과정이라고 할까 ? 반면 < 우울 > 은 사랑하는 대상을 떠나보내지 못하고 자기 가슴 속에 묻은 경우다. 전자는 상처를 인정하고 이별을 준비하며 결핍을 보상할 대상을 찾는다. 반면 후자는 상처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끙끙댄다. 그는 1977년 11월 24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 내가 놀라면서 발견하는 것 - 그러니까 나의 걱정 근심( 나의 불쾌함 )은 결핍이 아니라 상처때문이라는 사실. 나의 슬픔은 그 무엇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그 무엇이 상처받았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그 상처는 사랑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처라는 것 ( 애도 일기, 75쪽 ) "
영화 << 러브레터 >> 는 죽은 자를 떠나보내지 못해 우울증에 걸린 두 명의 여자 주인공을 다룬다.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245773 러브레터 : 애도와 우울 ) 그들은 모두 애도에 성공하지 못한 채 우울증에 걸렸다. 한 명은 죽은 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또 다른 한 명은 죽은 애인을 잊지 못해 죽은 자 곁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맴돈다. 독감으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놓아주지 않던 주인공은 독감으로 사경을 헤맨다. 어쩌면 그녀는 독감에 걸린 게 아니라 자신이 아버지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인해 기침을 흉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빙의요, 징벌에 가깝다. 그녀는 아버지가 앓던 독감에 걸려서 아버지에게 용서를 받고 싶었던 것이다.
프로이트에 의하면 “ 우울증 환자들의 자기 비난이라는 것이 사실은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비난인데, 그것이 환자 자신의 자아로 돌려졌다는 것 “ 이다. 롤랑 바르트는 애도에 실패한다. " 마망 " 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를 떠나보내지 못한 채 내내 그리워하지만, 사실은 나를 두고 떠난 어머니에 대한 원망이다. 그는 마망( 엄마 ) 이 십 리도 못 가서 발병 나기를 바란다. 아리랑'이라는 노래는 전형적인 우울 증상을 나타낸다. 이 비난이 결국 자신에게 돌려져서 치료를 거부하기에 이르게 된 것이 아닐까 ? 그는 1977년 11월 2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는다. " 이제 나는 안다. 나의 애도가 엉망이 되리라는 걸. ( 애도일기, 41쪽 ) "
롤랑 바르트는 자신이 치뤄야 할 애도가 결국에는 실패로 끝나 비극적 결말에 이르게 되리라는 불길한 사실을 예감하고 있었다. " 마망의 일주기 " 가 되는 1978년 10월 25일 일기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 일주기의 상징성, 그런 건 내게 없다. ( 애도 일기, 218쪽 ) " 애도가 우울과 다른 점은 우울은 슬픔이 언제 끝날 지 알 수 없지만 애도는 기간이 정해져 있다는 점이다. 애도 기간은 있지만 우울 기간은 없으니 말이다. 인간은 애도 기간에 울 수 있기 때문에 일상으로 돌아오면 죄책감 없이 웃을 수도 있는 것이다. 롤랑 바르트에게는 " 유통 기간이 정해진 애도 " 대신 " 끝 모를 유예 " 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세월호 유가족은 애도할 기회를 상실한 채 집단 우울에 빠졌다. 한국이라는 국가와 사회는 유가족이 마음 편하게 자식을 떠나보낼 수 있게 속시원하게 울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유가족은 죽은 자가 그리워서 통곡을 한 게 아니라 너무 억울해서 통곡을 한 것이다. 억울해서 우는 것은 애도가 아니라 대타자를 향한 원망'이다. 이 원망은 고스란히 자기 자신을 향한 날카로운 화살의 촉이 되어 심장을 찌를 뿐이다. 어느 누가 대한민국를 정상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국가 폭력의 전형적 예'이다. 딸을 잃은 김영오 씨가 단식을 한 지 40일이 지났다. 어제 그가 힘없는 손끝으로 간신히 페이스북에 올린 일기를 읽었다.
“심장 뛰는 게 느껴진다. 빠르게 쿵쿵… 숨은 차오르고 가슴이 답답하다. 온몸의 힘은 다빠져서 팔을 올릴 기운조차 없다. 언제까지 참고 버텨야 특별법 제정이 될 것인지…. 오늘밤은 너무 길다.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어 뜬눈으로 밤을 지새다 겨우 일기를 쓴다”
그리고 오늘 아침 김영오 씨가 병원으로 긴급 호송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피골이 상접한 그 얼굴에서 그 옛날 병상에 누워 치료를 거부한 채 죽어간 롤랑 바르트의 슬픔이 겹쳐진다. 수학여행을 떠난 딸이 왜 죽었는지, 그 진실을 알고 싶다는 소박한 분노'가 국가의 정체성을 흔들 만큼 위험한 욕망이었을까 ? 세 끼는커녕 한 끼조차 버티지 못해서 유가족이 보는 앞에서 컵라면이나 먹던 개새끼들이 40일을 굶은 자의 허기 앞에서는 관심도 없다. 지금 한국인은 애도조차 할 수 없는 우울 사회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