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섬 > 은 입은 있으나 말이 없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김기덕은 이 영화로 페미니즘 진영쪽 영화평론가들에게 살인에 가까운 독설을 들어야 했고 < 나쁜 남자 > 에서 정점'을 찍었다. 김기덕을 향한 비판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조롱과 경멸에 가까웠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폭력과 강간 장면을 여성에 대한 조롱과 경멸로 읽었고, 평론가들은 똑같은 방식으로 감독에게 되돌려 주었다. 김기덕을 비판하던 평론가들은 이 가학성'을 " 김기덕의 정신병적 취향 정도 " 로 이해했고, 가족 가운데 가족력(정신과 치료를 받은)이 있는지 의심해 보아야 한다는 기상천외한 평론을 남발하는 이도 있었지만, 김기덕(영화)보다 더 폭력적인 이는 김기덕을 공격한 페미니즘 진영쪽 영화평론가들이었다.
- 영화 < 섬 > " 아, 말이 없는 것들 ! "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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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한국 영화 두 편이 동시에 도착했다. 미국 유학파 엘리트 출신인 홍상수는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이라는 낯설지만 지적인 영화'로 찾아왔고, 초등학교 졸업이 전부인 김기덕은 << 악어 >> 라는 낯설지만 거친 영화로 관객을 만났다. 두 영화 모두 충무로 영화 문법에서 벗어났다는 공통점 이외에도 조감독 시스템을 거치지 않고, 그 흔한 단편 영화 제작 경험도 없는 신인 감독의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 그리고 또 하나 ! 둘 다 관객으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받았다. ) 어쩌면 1996년은 한국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해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평론가 반응은 사뭇 달랐다. 평단은 홍상수 영화에 매료됐지만 김기덕 영화는 외면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만이 < 악어 > 에 대해 호평했을 뿐이다. 호평이라기보다는 신인 감독에 대한 습관성 응원과 지지 따위였다. 마치 식사하셨어요 ? 라는 영혼 없는 인사처럼......
정성일은 김기덕 영화가 가지고 있는 비릿한 " 날것 " 에 주목했지만, 평론가 대부분은 날것이 주는 폭력성을 불편하게 생각했다. 그들이 신인 감독에게 원했던 것은 이음새 없는, 매끈하게 잘 빠진 영화'였다. 사실 정성일을 제외한 평론가들이 < 악어 > 를 불편하게 생각했다는 말은 모순된 면이 있다. 정확히 말하면 관심조차 없었으니깐 말이다. 내가 김기덕의 < 악어 > 에 주목했던 이유는 날것'을 매끄럽게 포장하려는 기교를, 감독 스스로 일부러 배제했다는 점이다. 그는 관객이 불편하기를 바랐고 그 바람은 성공했다. ( 성공했다는 표현은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만...... ) 당시, 김기덕은 악만 남은 사내였고 관객은 악만 남은 감독이 만든 이상한 영화를 보았다.
기이한 현상은 세 번째 작품인 < 파란대문 / 98 > 에서부터 시작된다. 국내 평론가들로부터 형편없는 영화로 낙인 찍혔던 김기덕 영화가 베를린 영화제'에 출품되어 호평을 받자, 평단은 일제히 핏대를 세우며 거칠게 조롱했다. 주로 페미니즘 진영쪽 평론가들이 주축이 된 공격이었다. 눈 뜨고 못 봐주게슴미, 구멍 동서 매춘 영화냐, 강간 영화냐 ? 등의 쌍스러운 욕설이 주를 이뤘다. 그들은 김기덕 영화 속 남성 주인공이 여성에게 행사하는 폭력을 "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가학적 장치 " 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김기덕 영화'가 본격적으로 해외에서 러브콜을 받는 것과 함께 페미니즘 진영쪽 영화평론가의 독설도 그와 비례했다는 점이다. 섬, 실제상황, 수취인불명과 나쁜 남자'가 계속 해외 영화제에서 관심을 받으면 받을수록 평론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영화 << 나쁜 남자 >> 를 둘러싼 신경 쇠약 직전의 평론'은 가히 압권이었다. 그들이 보기엔 호환마마'보다 나쁜 영화'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무엇이 그네 심기를 건드렸을까 ? 그들이 평소 여성을 희생양으로 삼는 폭력적인 남성 서사'를 불편하게 생각했다면, 그들은 먼저 임권택 감독의 << 서편제 >> 가 가지고 있는 남성 폭력에 대하여 문제 제기를 했어야 옳다. 서편제'에서 아버지는 예술의 승화'라는 이름으로 딸에게 독약을 먹여 눈을 멀게 만드는데, 이것은 명백히 < 자기 욕망 > 과 < 타자 욕망 > 을 동일시하는 행위'였다. 아버지는 " 타자의 욕망 " 을 착취해서 실패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발판으로 삼았다. 이 " 접점 " 은 거칠게 말하자면 " 기생 " 이며 " 근친상간 " 에 가까웠다.
김기덕 영화 속 남성 폭력에 대해서 거의 광적인 혐오'를 보인 평론가들은 왜 << 서편제 >>가 가지고 있는 패륜과 근친 욕망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일까 ? 아버지가 딸의 몸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과 동일하게 아들은 누나'를 성적 욕망으로 느낀다. 그들이 만나 해후하는 과정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제 3자( 최종원 분 ) 가 그들 만남에 대하여 " 운우지정 " 이라는 노골적인 단어를 사용하면서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그들 남매는 에로스적 긴장 관계인 것처럼 보인다. 아버지가 농락하고 버린 몸을 아들이 다시 농락하겠다는 뜻인가. 임권택의 < 서편제 > 는 뻔뻔한 영화'다. 그런데 페미니즘 진영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 대해서는 위대한 걸작 운운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러한 간극은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까 ?
간단하다. 이런 복잡한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언제나 간단하다. 평론가로서 자질이 없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그토록 김기덕 영화를 씹던 몇몇 평론가들은 이제는 더 이상 김기덕 영화'에 대하여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씹기엔 김기덕은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다. 김기덕이 폭력에 집착하는 이유는 날것을 표현하기에 가장 훌륭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한국 영화 평론 역사상, 집요하게 그리고 아주 악랄하게, 김기덕을 씹었던 이 기현상'의 뒷면에는 학벌에 대한 차별 때문이었다, 라고 말하면 지나친 과장일까 ? 그것은 때론 전여옥이 노무현을 향해 고졸 출신 대통령을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말한, 천박한 말투를 닮았다.
노무현은 제대로 된 엘리트 코스를 밟지 않은 채 대통령이 되었다. 눈꼴사나웠을까 ? 임기 내내 조롱과 경멸이 노무현을 옥죄였다. 공(功)은 과소평가되었고, 과(過)는 과장되었다. 그리고 조롱과 경멸은 그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노무현이 여의도에서 학력 차별을 받았다면 김기덕은 충무로에서 학력 차별을 받았다. 평론가들이 보기에 김기덕은 영화 제도권 밖에서 온 듣보잡'이었다. 그 흔한 영화과 출신도 아니었고, 충무로 조감독 출신도 아니었다. 진입 장벽이 높기로 소문난 영화판에서 김기덕은 혼자 꾀죄죄한 학력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성공했다. 또한 그는 평단이 쏟아내는 비판에 대해 적극 대처하며 싸웠던 감독이었다. 그는 자기 영화를 비난하는 평론에 대한 반박문을 올리기도 했다. 그를 비판했던 평론가 입장에서 보면 김기덕은 눈엣가시'였다.
지금은 많이 누그러졌지만 여전히 김기덕 영화에 대한 평가는 야박한 편이다. 김기덕과 노무현의 공통점은 학벌 차별의 당사자'라는 점이다. 교육 엘리트가 보기에 그들은 둘 다 " 나쁜 남자 "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