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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ㅣ 문학동네 시인선 57
윤희상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6월
평점 :
손 편지를 써서 보내던 날들이 있었다. 편지를 쓰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편의점 영수증처럼 구겨서 버리고 다시 쓰기를 반복했다. " 가을비가 내리니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구나 " 라는 문장은 " 어젠 가을비가 따스하게 내렸다 " 라고 고쳐 쓰다가, 다시 " 가을비가 내렸으니 이제 곧 겨울이 올 것이다 " 라고 수정했다. 하지만 이내 편지지를 찢고는 다시 " 비가 온다. " 라고 고쳤다. 얼마나 많은 편지를 썼는지 당신은 모른다. 사실, 그해 가을에 당신에게 보낸 편지 한 장은 노트 한 권이었다. 찢어서 버리고, 찢어서 버리고, 찢어서 버리고 남은 노트의 한 페이지'만을 당신에게 보낸 것이다. 저 사진 속 마른 가슴을 볼 때마다 오래전'에 당신에게 보냈던 편지'가 생각났다. 저 사람도 한때는 풍성한 가슴이었을 것이다. 찢고, 찢고, 찢고 남은 한 장의 가슴이리라.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말라비틀어진 가슴이 아니라 마지막 남은 한 장의 편지이다.
- 메모, 2011/11/29 11:30 中
사진 출처, 다이안 아버스
" 새책 " 에 대한 미련이 없어서 같은 조건이라면 저렴한 " 헌책 " 을 사는 편이다. 헌책방 예찬론자는 아니다. 싸니까 사는 것이다. 헌책방이 성소/聖召'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구멍가게와 헌책방은 동급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시집을 헌책으로 사면 시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절판된 시집이 아닌 이상은 반드시 새책을 구입한다. 시집만큼은 그렇다. 시집 한 권에 평균 7000원은 너무 박하다 싶다. 값을 두께에 따라 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천박한 자본주의적 논리다. 얇다고 해서 깊이가 얕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시인은 대부분 브래테니커 백과사전 두께의 공책에 시를 썼다 지운다, 썼다 지운다, 썼다 지운다를 반복하다가 결국에는 얕디얕은 시집을 내놓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읽은 시집은 사실 지우고, 지우고, 지우고, 지우고 남은 < 문장 >이거나 찢고, 찢고, 찢고, 찢고 남은 < 공책 > 이다.
소설은 헌책방 가서 사도 되지만 시집만큼은 새책을 사자. 함민복 시인, 굶지 않고 잘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윤희상 시인의 시집 <<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 은 두께가 얇지만 결고 얕지 않은 시집이다. 두 번째 시집 << 소를 웃긴 꽃 >> 이후, 7년 만에 나온 시집이니 장고 끝에 내놓은 간결한 두께다. 썩지 않고 버티면 곰삭은 음식이 된다. 곰삭은 음식은 보약이 된다고 들었다. 좋은 시는 좋은 눈/目에서 나온다. 오래 보고 짧게 쓴다. " 시 쓰기의 팔 할 " 은 관찰에서 나온다. < 시인 > 이라는 낱말과 같은 뜻은 < 화가 > 다. 화가와 시인은 같은 말 ! 그들은 그리기 전( 혹은 시를 쓰기 전)에 오래 본다. 오래 보다 보면 보이지 않는 것도 보인다. 고흐가 그린 것은 빛이었다.
반면 나쁜 시는 좋은 머리/腦에서 나온다. 흘겨보고 길게 쓴다. 시인에게 있어서 명석한 두뇌는 재앙에 가깝다. 똑똑한 사람은 시인이 되지 말고 회계사가 되어야 한다. 시인 윤희상은 오래 본다. 하지만 관계에 개입하여 재단하지 않는다. 윤희상 시'가 현학에 빠지지 않는 이유'다.
여자아이는 앞으로나란히를 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한 번도 앞으로나란히를 해보지 못했다
많은 아이 가운데, 가장 키가 작았다
언제나 맨 앞에 섰다
졸업식 날 펑펑 울었다
- 희망 전문, 시집 '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것처럼 '
" 여자아이는 앞으로나란히를 해보고 싶 " 단다. 외팔'이 아니라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않은가 ? 나는 대뜸 속으로 " 앞으로나란히 하면 되지, 바보야. ㅋㅋㅋ " 라고 중얼거렸다. 의문은 곧 풀렸다. 키가 작아서 항상 맨 앞에 섰기에 앞으로나란히'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마지막 연'에 가서는 무안해졌다. 여자아이는 " 졸업식 날 펑펑 울었 " 단다. 내 빈정거림 때문에 여자아이가 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타인이 보기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여자아이에게는 아픈 고민이다. 또래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쑥쑥 자랐는데 여자아이는 민들레처럼 땅 냄새만 맡은 모양이다. 다 함께 열중쉬어'는 할 수 있으나 앞으로나란히'는 할 수 없는 키 작은 소녀의 성장통에 마음이 짠하다.
여자아이가 바라는 것은 < 독식 > 이 아니라 < 동반 > 이다. " 나란히 " 는 어느 한쪽이 뒤쳐지지 않고 모두 함께 평행한 상태를 말한다. 여기에 시인이 감추어 둔 속내가 있다. 시인은 < 승자독식사회 > 가 아닌 < 동반성장사회 > 에 대한 바람을 드러낸다. 천재 한 명보다는 고만고만한 도토리 사회'가 좋은 사회다. 연설은 명료할수록 빛나지만 시는 의미를 감출수록 빛난다. 내가 정호승의 시'를 싫어하는 이유는 보편적 서정을 지나치게 과장한다는 데 있다. ( 군소리 하나 더 보태면 도종환 시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관념적 허세'와 도덕군자형 현학이 지나치다. 시인은 눈으로 관찰하고 심장으로 시를 써야 하는데, 정호승은 머리로 보고 뇌로 시를 쓴다.
윤희상 시인에게는 그러한 관념적 허세가 없다. 그는 보고 느낀 것만을 쓴다. 담담하지만 울림은 크다. 정호승 시가 중화요리'라면 윤희상 시는 오신채가 없는 사찰 음식'이다. << 남대문 상회 >> 라는 시를 보자.
여름에는
얼음을 팔고
겨울에는
석유를 판다
- 남대문 상회, 전문
다른 식으로 표현하자면 남대문 상회는 : ㈀ 여름에는 얼음을 팔고 겨울에는 석유를 판다. ㈁ 여름에는 물을 팔고 겨울에는 불을 판다. ㈂ 여름에는 물을 팔고 겨울에는 기름을 판다. 얼핏 보면 남대문 상회는 우산을 팔면서 동시에 부채를 파는 이상한 가게처럼 보인다. 비가 오면 부채가 안 팔리고, 볕이 쨍쨍하면 우산이 안 팔리니 좋은 궁합은 아니다. 하지만 시인이 보기에 얼음과 석유는 우산과 부채처럼 서로 상반된 오브제'가 아니다. 여름에 파는 얼음은 지나치게 올라간 열기를 식혀주고 겨울에 파는 석유는 지나치게 내려간 온도를 덥힌다. 그러니까 얼음과 석유는 적정 온도를 유지하기 위한 상품이다. 석유는 낮은 것을 높게 끌어올려주고, 얼음은 지나치게 높은 것을 낮춘다.
내가 < 희망 > 이라는 시와 함께 < 남대문 상회 > 라는 시를 나란히 배치한 이유는 두 시가 가지고 있는 유사성에 있다. 키가 작은 여자아이는 왜 졸업식 날 펑펑 울었을까 ? "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 " 가 말이다. 여자아이가 꿈꾸는 희망은 "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어주는 사회 " 다. 시인은 열외와 독주가 없는 사회를 꿈꾸면서 획일성을 경계하고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스카이라운지에서 음식을 먹는다 멀리, 밤 풍경은
푸르다 많은 사람이 음식을 먹는다 포크로 먹는다
그 가운데, 단지, 한 사람만이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는다 모두 음악을 듣고 있다 갑자기,
사람이 쓰러졌다 그리고, 죽었다 여태까지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었던 사람이다 등에는
포크가 꽂혀 있다
- 포크와 젓가락 전문
시 << 포크와 젓가락 >> 은 파시즘에 대한 우화'다. 포크를 사용하는 무리는 젓가락을 사용하는 사람을 제거한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다. 반면 << 컵을 바라보는 다섯 가지 방법 >> 에서 시인은 다양성에 대한 가치를 말한다.
옆에서 본다
위에서 본다
아래에서 본다
뒤집어서 본다
비스듬히 본다
- 컵을 바라보는 다섯 가지 방법 전문
신중현은 노래한다. "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 " 그렇다. 자주 보면 못난 얼굴도 예쁜 얼굴로 보이는 법이다. << 컵을 바라보는 다섯 가지 방법 >> 은 컵을 사랑하는 다섯 가지 방식'으로 고쳐도 된다. 시선의 차이(다양성)를 존중할 필요가 있다. 한 말 한 번 더 하자 ! 안 한 말은 마굿간에 가서 쉬시라. 시인은 시를 꾸미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점만을 서술할 뿐이다. 때론 시를 통해 내밀한 고백을 하기도 한다.
내가 동네 앞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고 있을 때
동네 밖에서 찾아온 낯선 사람이
아이들에게 물었다
일본 여자가 사는 집이 어디냐고
아이들은 저기 기와집이라고 말했다
일본 여자는 우리 동네에서 사는 무면허 안과 의사였다
그렇다고 돌팔이 의사라고 부르는 사람은 없었다
멀리까지 소문난 일본 여자는 본래 간호사였다
일본 여자는 동네에서 태어나는 아기들을 받았다
돈은 받지 않았다
일본 여자는 조선 남자를 사랑했다
일본 여자가 사는 집은 우리집이고
열본 여자는 나의 엄마였다
- 일본 여자가 사는 집 전문
작년이었나 ? 신문기사에 윤희상 시인에 대한 짧은 소식을 접했다. 시인은 한국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이라고 고백했다는 기사였다. 그 고백이 시로 태어났다. 그는 서정적 관념을 포장하기보다는 사건과 서사를 담담하게 나열한 후, 나머지 몫은 독자에게 맡긴다. 시가 겸손해지는 순간이다. 전우익 선생의 말을 빌려 말하자. 혼자만 잘살믄 무슨 재민겨 ! 요즘 유행하는 " 의리 열풍 " 도 알고 보면 다 같이 먹고 살자는 뜻 아닌가 ?
■ http://blog.aladin.co.kr/749915104/6354561 ㅣ 윤희상 시집, 소를 웃긴 꽃